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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자서전 3 .
시지포스의 언덕
- 문학, 그 궁극적인 짓거리
입 사
그 이듬해도 나는 <<북두성>> , <<은하수>> , <<송화강>> 등지에 육속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와 함께 나의 인생이 궤적이 느닷없이 바뀌게 되었다.
당시 창간초기의 인원결핍으로 고민하던 성급신문인 <<길림신문>>사에서 파격적으로 나에게 요청을 보내왔다. 하여 학교에서 장학처분을 받은 문제아였던 나는 , 어느 사영기업의 양계장에서 달걀이나 깨우던 허드레 부화공이였던 나는, 필재가 양양한 문학청년으로 인정받고 일조일석에 신문사기사로 변신을 했다. 그때 내 나이가 만 스무 살이었다.
중학교문도 채 나오지 못한 스무 살 내기가 일약 신문기자로 된다는 것은 그 당시 편집원들이나 내 곁 사람들의 경악에 쳐들린 눈초리가 보여주다시피 말도 안 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사회접촉면이 넓은 기자 사업에서 단련하면서 나의 눈과 필봉을 벼리여 당시에 이름을 드날리고 있던 중국작가 호연과 같은 대작가가 되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뼈물어 먹었다. 한낱 뜨내기 부화공이 기자로 발탁되는 조건은 가혹했다. 2년의 시간은 고험기로 견습기자, 그 기간 로임이나 장려가 한 푼도 없다는 조건이었다. 대신 원고비는 내준다고 했다. 이를 작가로 향발하는 길에서의 기회와 전환으로 여긴 나는 그 조건을 겁 없이 흔쾌히 받아들였다.
86년 5월, 온 거리에 흩날리는 하얀 비술나무 씨를 축복처럼 맞으며 좀은 어리친 모습으로 나는 신문사 편집실에 발을 디밀었다. 배치되어 맨 처음 맡겨진 임무가 선배들과 함께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장편실화 <<당산대지진>>을 번역하는 것이었다. 선배들은 일찍 번역을 마치고 차물을 마시고 있었지만 나는 점심도 먹지 못한 채 팥죽 땀을 흘려가며 번역에 매어있었다. 번역이 늦어져 부장이 곁에서 재촉하고 주필님까지 찾아와 지켜보는데 난해한 단어들이 많아 안달아난 나머지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날 밤을 꼬박 새워가며 겨우 번역을 마무리했다.
내가 쓴 첫 기사는 86년 전국소수민족운동회에서 그네가 정식경기종목으로 되였다는 예고소식이었댜. 그런데 신문기자습작에 관한 강의나 학습도 없이 착수했던 나는 그 기사를 밥도 죽도 아닌 <<혼돈 국>>으로 만들어 버렸다. 앞머리에 그네에 대해 읊조린 옛 문사들의 시조를 곁들였고 소식에 그네 뛰는 여인들에 대한 찬미의 서정까지 토로했다. 글을 들고 울지도 웃지도 못하던 주필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길림성을 상대로 한 성급신문이라 취재범위가 넓었다. 룡정을 작은 반경으로 다람쥐 채 바퀴 돌리 듯했던 나는 상경한 시골 닭처럼 전전긍긍하며 장춘, 길림, 교하, 류하, 통화, 매하구, 구태, 장백 등지를 사철 내내 돌아다녔다. 촌부락에 내려가서는 하도 어린 나이였기에 가짜기자로 의심받고 초대도 받지 못한 채 어스름이 내렸으나 잠자리도 찾지 못하다 학교접수실의 마음씨 고운 당직 아바이에게 청구하여 한 온돌에서 비비 닥이며 자기도 했다. (그때 나는 어린 모습을 조금이라도 가려보려고 덜 고운 의붓아버지에게 청구하여 호구부를 고쳐 나이를 한살 올렸고 콧수염을 무성히 기르고 다녔다.) 그렇게 어려운 기자 생활중에서 나는 문자라는 부호의 합의된 배열법칙과 음훈을 익혀나갔고 따라서 나의 필봉은 서서히 벼려지게 시작했다.
하지만 로임을 주는 날이 내게는 가장 어려운 감내를 겪어야 하는 날이었다. 매양 19일날, 모두가 희희락락 로임봉투를 타들고 음식점을 찾아 갈 때면 나는 조용히 자리를 피하군 했다. 신문사를 멀리한 상점으로 가서 가련한 원고 비를 잘라 홀로 맥주잔을 기울이곤 했다. 그렇게 8년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신문기사를 곧잘 다루는 합격된 기자행렬에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 신문의 <<반딧불>> , <<일분 간 에세이>> 와 같은 칼럼란에서 나의 이름과 필명을 하루 멀게 볼 수 있었다. 북향, 초군, 설봉, 각설이 그때 나의 필명만 해도 13가지나 되었다. 그때 문단의 원로 김학철선생의 신랄한 잡문에 홀딱 반해 나는 잡문쓰기에 커다란 열성을 보였다. 지어 선생의 풍격인 글 사이에 풀이표를 쳐주는 것도 꼭 같이 모방하여 잡문을 저그만치10여편 발표했다. 한편 기자생활에서 받은 감수로 20여 편의 소설과 100여수의 시를 발표할 수 있었다.
그 8년간 대학졸업장이 없다는 단 한 가지 리유로 학교 문을 갓 나서고 취업한 애송이들보다도 적은 가련할 정도로의 로임을 받았고 직함이나 대우, 집 분배 등 기본 적인 면에서 아무런 보장도 없었다. (신문기자행업에 투신한 17년이란 기간 그런 대우는 내게서 여전히 거리가 멀었다. 어찌 보면 나는 졸업장 한 장으로 한 사람의 우렬을 제쳐놓고 락인부터 찍어놓는 그런 미완숙한 사회규제의 가장 큰 희생자였는지도 모른다.)
오른손잡이를 위해 고안된 세상에서 왼손잡이의 불편함을 망각한 그 속에서도 나는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오로지 오기와 치기로 한곳 향해 매진하는 외뿔 소마냥 문학의 뿔을 혼자서 갈고 닦으며 버텨내었다.
기자라는 것은 나에게서 직업이었고 문학은 본능이었다. 이를 나는 개인적 수행의 방법으로 간주했다. 그 방법을 통해 나는 어섯눈을 개안할 수 있었고 부족한 나의 천성을 다독이며 달랠 수 있었다. 넋 건지기에서 닭을 희생시키듯 하나의 제물로 나는 문학의 제단에 던져져 있었다. 그런 제물이 되여도 나는 유감이 없다.
8년간의 고험을 거쳐 글 다루기에서 제법 웃자라난 나를 두고 광복과 함께 창간된 조선족 최대의 일간지 <<연변일보>> 에서 백락처럼 손짓했다. 94년, 나는 <<연변일보>> 해란강문예부간 편집기자로 전근하게 되었다. 스무 살에 시작하여 1여년의 기자생활에서 제법 이름 있는 로기자라는 딱지가 앉게 되였고 그 기간 나는 1000건에 달하는 기사를 발표, 문학상과 전국소수민족신문상을 비롯한 각종 신문보도상 20여차를 수상하게 되였다.
동호 (同好)
여려서 사회에 내쳐졌고 기자와 작가라는 이중신분으로 여러 계층에서 자맥질해왔던 만큼 나에게는 각종 부류의 친구들이 많다. 그중에서 물론 가장 도타운 친구들은 문학동호인들이다. 나는 문학인들과 적극 사귀였고 각종 문학협회를 꾸리는 남다른 열성을 보여 왔다.
처녀작을 발표하던 85년, 룡정에서 젊은 문학도들과 함께 <<희망봉>> 문학협회를 꾸렸다. 비서장을 맡고 각 현시 문학도들을 조직했고 한편 등사본잡지에 상당한 분량의 무협소설 <<피로 물든 야명주>>를 련재하기도 했다. 그 후에는 룡정의 유명작가들이 꾸린 <<보름달>> 협회에 가입, 보름에 한번 씩 열리는 작품합평회에 참가하러 퇴근 후면 늦은 밤 버스를 잡아타고 룡정으로 빠짐없이 다녔고 회의마다에 작품을 내놓았다.
<<길림신문>>에 입사한 86년 나는 또 <<백조>> 문학협회를 만들었다. (협회 이름은 당시 의기투합됐던 지금의 <<료녕신문>>사 최호사장과 함께 백조사진관에 가서 협회창립기념을 남기며 내가 사진관 이름을 본 따 단 것이었다.) 연길시 당안관 자리를 빌어 협회명의로 60여명의 작가와 문학 지망생들이 참가한 대형 련환회를 조직하기도 했다. <<백조>> 등사본잡지를 몇 기 발행, 창간호에 나는 설봉이라는 필명으로 <<발전의 견지에서 본 조선족과학환상소설>> 이라는 평론을 실었다. 그러한 우리 문학도들을 대견히 여겨 등사본잡지의 앞머리에 김학철선생과 리상각시인께서 왕붓을 허비해 제사까지 써주셨다. (그 동아리들 중에서 대부분이 사회 각 기관의 어마어마한 령도인물로 성장. 오직 나만이 외줄타기로 지금도 경황없이 글밭을 경작하고 있다.) 그후에도 여러 문학협회에 적극 참여, 청년시인협회인 <<오월시회>>의 부회장직을 맡고 수천원의 자금도 협찬 받아오고 내가 경영하고 있던 식당을 협회전용처럼 내밀고 각 잡지에 동호특간도 조직해내고 하면서 동호회를 만드는데 혼신을 기울이기도 했다.
어떤 동아리를 만들기에 열중하는 나이가 지났음에도 그러한 지인들지간의 이해와 교류의 분위기의 멋을 잊지 못해 몇 해 전에도 전국 각지의 기성문인들을 동원하여 <<사이섬 글 동네>> 라는 인터넷동호회를 설립, 한국의 유명홈에 개설한 우리 동호회가 그중 가장 활약적인 양상을 보여 왔다.
문학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만큼 나는 나의 동인들을 사랑한다. 그리고 동인들을 위해서라면 내가 즐겨 읽는 무협지중의 녹림인물들처럼 자신을 내던지곤 했다. 당년에 책을 쌓아 놓고 나면 엉덩이도 간신히 들이밀 나의 8평방짜리 셋방 집에 들리지 않은 동년배 동인이라곤 없다. 싸구려 생맥주에 북어끄트러기라도 맛나게 찢으며 문학을 안주삼아 밤을 지새곤 했다.문예부에서 편집을 하면서 나의 손으로 편집하고 그 작품이 상을 받은 내 또래 동인이 10여명이 된다.. 문학 외에 아는 것이란 또 문학밖에 없는지라 합격 못된 세대주로 첫혼인이 파렬된 후에 거칠 것 없는 나의 셋방 집은 아예 문학 살롱이 되다시피 했다.
우리집에 묵으며 꼬박 2년간 나와 함께 지낸 문학도들이 몇몇 있다. 석탄도 사지 못해 한겨울에 불 때지 못한 찬구들에 이불 몇 채씩 깔고 앉아 매운 소주에 청국장 하나만 달랑 놓고도 우리는 문학의 진미를 담론했다. 그사이 우리 집 식객이었던 그 문학도들의 내가 편집한 작품이 어느 해에는 연변일보 <<해란강문학상>>, <<제일제당상>>, <<생활수기상>>을 몽땅 도거리해서 보람으로 기쁨에 눈굽을 적신적도 있었다. 회사에서는 불경기로 로임까지 체불 받으면서 직장도 없는 그애들을 부둥켜안고 책을 팔아 쌀을 사야 하는 극난한 생활고에 시달렸던 그 나날에 나는 일곱 편의 중단편소설과 수십 수의 시를 발표, 4차의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조선족 최대의 사회열점을 건드린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 >>를 집필, 연재, 출판해 내었고 첫 작품집 <<천재 죽이기>>를 내놓았다. 그네들과 함께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무원조하고 지지리도 어려운 그 나날을 버텨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문학의 위상이 땅에 떨어진 요즘 세월에도 문학의 외길을 고집하며 함께 하는 그네들을 나는 좋아한다. 친지가 적은 내게서 그들은 살밭은 형제와도 같다. 바른 심성을 갖춘 그들이 문학에 불어넣는 생의 기미에 대한 전언을 읽어내고 서로 긍휼을 나누는 지음이 될수 있기를 나는 진심 바랬다.
무 드(mood)
신문기자로 발탁된 이듬해 연길로 이사 오면서 나는 28개의 사과배광주리에 나의 전부의 가산인 소장한 책들을 담아 싣고 왔다.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나는 내내 붙박이로 책 더미에 내 옹근 몸뚱아리를 부장품처럼 묻어버렸다,
나의 일상에서 독서가 없는 나날이란 상상할 수도 없다. 나는 편집광적인 독서광이다. 언감 이 세상에 나오는 모든 좋은 책들을 모조리 읽고자 망상하고 있다. 시시때때 그 시대의 의식형태에 맞추어 나오는 각종 종류의 책들을 모조리 읽으려 들었다.
종소리에 반응하는 파블로브의 실험용 동물처럼 좋은 책만 나오면 예민한 후각으로 알아내고 선참 사들여 허겁지겁 읽었다. (멋모르고 읽다나니 독일철학가 쇼펜하우어의 이름을 한어로 읽고 중국인으로 여긴 웃음거리를 자아내기도 했다.)
삶에서 우리가 취하는 어떤 행위에 대한 보상은 두 가지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중 적극적인 보상으로서는 어떤 가치의 획득이고 소극적인 보상으로서는 자기유지이다. 적극적인 보상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자기유지를 해야 한다. 체계적인 교육을 재대로 받지 못한 콤플렉스가 심각하기에 남보다 몇배로 되는 책을 읽고 있다. 그 것이 이제는 내 생리적인 행위에 가깝게 체질화되었는가 보다.
나의 독서범위는 오지랖이 넓어도 무지 넓은 편 , 단 문학 류뿐 아니라 종교, 천문학, 회화, 동식물학, 민속 등등 여러 부류의 책들도 대량 사들여 읽는다..신간베스트셀러면 죄다 사들이는 외에도 꼬박 10 여년 주문하거나 사서 읽는 잡지만도 다섯 10여 종류가 된다.
<<소설월보>>, <<이야기회>>, <<독자>>,<<오묘한 비밀>>,<<우표수집>>,,<<월드스크린>>,<<련환화보>>, <<시각>>, <<유머대사>>, <<고금전기>>...
보잘것없는 박봉마저 그 3분의 2는 잘라 거의 사흘에 한 번꼴로 책과 잡지를 한 아름 사드는 나를 두고 안해는 우리 집이 내내 쪼들리고 있는 까닭은 책을 너무 사들이기 때문이라고 찬사절반 푸념절반을 섞곤 한다. 일찍부터 나는 책을 사면 책의 맨 앞장에 나의 이름 병음자모와 책을 산 곳과 일시를 적곤 했다. 그 날자가 적힌 5천여 권의 책과 매달기수가 빠짐없는 수천 권의 잡지들을 배열해놓으면 나의 지금까지의 문학적 행보가 년보처럼 역력히 엿보인다. (89년도에 생활고를 덜어보고자 나는 주 공안국부근에 책방 하나를 차린 적 있다. <<쉐익스피어>>라는 대문호의 이름을 딴 서점, 그 서점을 꾸릴 적에 내가 소장한 책 수천 권이 있었기에 맨손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바람벽을 꽉 메운 책장과 침실, 주방 지어 화장실까지 쌓여있는 책속에 파묻혀 나는 예이제 없이 신들린 듯 독서에 혼 줄을 앗긴다. 나를 잃는다.
전국유명체인서점인 석수(席殊)서점은 책 안 읽는 풍토의 연길에서 고작 한해가 못 되여 문을 닫았다. 나는 그곳의 가장 충실한 고객 이였고 회원 이였다. 보통회원으로부터 준회원 고급회원으로 되려면 천 원어치씩 사야 한 급씩 오른다. 남들이 4,5년 지나야 될 수 있는 고급회원증을 나는 불과 일 년도 안 되는 사이에 땄다. 일년 사이에 3천 원 어치, 매달 평균 3백원 어치의 책을 사다 읽었다는 얘기가 된다. 사들여서는 허기 끝의 탐식처럼 읽는다. 송충이가 솔잎을 떠나 살수 없듯 어려서부터 길러 온 미친듯한 독서 관습은 골수깊이 체질화되어 있다.
내가 열광적인 영화디스크 수집애호가라는 것을 문인들은 다 알고 있다. 이 시가지에 있는 음향테이프 점들에서 나를 모르는 경영자들이 없을 정도로 나는 영화광이다. 어릴 적부터 영화에 심취되어왔다. 명작개편영화와 할리우드의 대작영화 중국 신세대 감독들의 영화를 비디오테프와 VCD디스크로 대량 사들였다. 세계명작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부터 상업흥행작 <<타이타닉 호>>에 이르기까지, 4,50년대의 명감독 히치콕의 <<나비 꿈>> 으로부터 당대 명감독 스필버그의 <<쉰들러 리스트>> 이르기까지 중국명감독 진개가의 <<패왕별희>>로부터 중국신세대감독의 신작<<플랫폼>>에 이르기까지 3천여부의 영화작품을 소장, 우리 집은 짜장 하나의 영화고(庫)와도 같다. 개봉영화, 세계영화사에 길이 남을 경전영화. 그리고 신예감독들의 끼 넘치는 실험영화 지어 애들이 보는 애니메이션까지 모조리 사들여 본다. 열심히 영화전문지를 사들여 새 영화의 개봉일시를 알아내고 연인을 열렬히 기다리는 사람 같은 얼굴을 하고 새로운 개봉작을 기다린다. 매장의 구석에서 남들이 내쳐 둔 먼지 묻은 흑백의 경전 한 장을 찾아내도 나는 그 테 이프 한 장에서 세상을 얻은 듯 기뻐한다.
소학교 때부터 우표수집에 흥취를 가져왔다. 그때는 학교에서 집단적으로 조직하는 괴외취미활동같은 것이 없었지만 집에서 주문해보는 <<인민화보>> 에서 강치방(姜治邦)이라는 우표수집대가를 소개하는 문장을 읽고 우표를 모으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수백장의 중외우표를 수집하고 있다.
독서에서 잡식적인 취미를 가졌던 만큼 홀로 조용할 때면 무게 있는 명작이나 철학서들을 새겨 읽고 술 마신 뒤면 자유분방한 시집을 펼쳐들고 명절이 맞 띄면 권수가 좀 많은 판타지나 연정소설 같은 기분 좋은 쪽으로 찾아 쥐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종합지 같은 것을 읽는다. 그리고 휴식일이면 할리우드 영화 한편, 중국영화 한 편씩, 정극 한편, 오락물 한편씩 곁들이면서 온 하루 영화 파티를 벌린다.
지금은 소설 창작에 전념하고 있지만 창작에서도 문학의 거의 모든 장르를 필촉으로 건드려왔다. 직업적인 신문보도상외에도 내가 지금까지 수상한 20여차의 문학상을 보면 소설,시,수필,아동문학,실화문학, 지어 가사 상까지도 있다. 애초에는 추리소설과 과학환상소설, 역사소설도 발표했고 근자에는 시나리오, 다큐멘터리와 소품도 내놓았다.(<<중학생신문>>의 력사소설 <<혼불>> 을 일면 창작면서 연재한 뒤를 이어 또 <<스포츠신문>>에 추리소설 <<스포츠살인>>을 연재하기도 했고 신문사 취재를 하는 여가에 연극단의 청탁으로 소품을 썼고 TV방송국의 청탁으로 대형다큐멘터리 대본창작을 하기도 했다.) 그런 나를 두고 도대체 타이틀이 뭐냐고 따져 물으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천재시인 이상의 본을 내여 <<모든 예술을 사랑하는 인간이외다!>>고 넉살좋게 말하곤 한다.
내 서재에 스스로 붙인 이름은 <<허강재(虛崗齋)>>이다. 빈 언덕, 몸과 마음을 비운 곳이라는 뜻. 그 <<허강재>>가 나의 소우주(小宇宙)다.
그 속에 쌓여있는 5천여 권의 책과 2천여 부의 영화 테이프가 나의 전부다. 좋은 작품 한 권에, 좋은 영화 한 부에서 나는 법열(法悅)을 느끼듯 몸을 부르르 전율한다. 그 속에 진리의 말씀이 있고 슬기의 샘터가 있고 고난을 이겨 나가는 주문이 있고 뮤즈의 노래가 있다. 그속에 들어앉아 무더기로 사들인 신간 잡지와 서적들을 미친 듯이 읽고 새로 개봉되는 영화 테이프들을 대량 소장하고는 보고 읽고, 읽고 본다. 그리고 쓴다. 그 피스톤의 작동 같은 따분한 동작이 여태껏 내가 해 온, 그하고 있는 그리고 할줄밖에 모르는 짓거리다. 순수한 심안(心眼)으로 보고 읽는 그것이 내 인생에 보탬이 될 황금의 열쇠인줄을 나는 안다. 그것은 내 불운을 <<액막이>>해 줄 팥 한 주머니이다.
아름다움은 사람들을 숨 막히게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살아가게 한다. 그런 아름다움에 집요하게 천착(穿鑿)하며 나는 불운한 내 신세를 잊는다. 어쩌면 나는 문학과 예술을 위해 태여 나고 내내 그에 목말라 하며 홀로 서성이는 우주적인 짐승 한 마리 일가!
그래서 치명적인 아픔을 껴안고도 남들의 눈에 비친 나는 언 제보나 여유 있는 터무니없이 낙관적인 모습이다.. 마냥 정장을 거부하는 편한 캐주얼(休閑)차림으로 어깨를 솟구고 다니며 입만 열면 유머가 폭포로 쏟아져 나오고 맥주 집 가서는 맥주 반 박스쯤은 거뜬히 재끼며 남보다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로 온갖 화제를 터뜨리고 둥글게 만드는...
주체하지 못할 감성으로 팽배해 있고 터무니없이 행복해 하는 남자. 이렇게 나는 매일 매일을 스스로 빚어 만든 문학적인 무드에 젖어 살고 있다.
산다는 것은 참으로 운문(韻文)적인가보다. 나 같은 인간이 살아가는 율법(律法)은 따로 있는 것 같다. (불이 잘 들지 않아 매연연기가 자옥한 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앉아 서도 책을 쳐들고 있는 나를 우연히 찾아왔던 어느 한 소설가가 못 말려!하고 채머리를 떤 적이 있었다.) 끝임 없는 보기와 듣기 그리고 쓰기가 내 일상의 전부다. 문학이라는 그 비실제적 효응에 대한 매력을 기르면서 그 성취에 대한 동경과 확신 하나만으로 여태껏 살아왔다. 그와 같이 나의 삶의 비망록에 적힌 하 많은 사연들은 모두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 운다.
아 집
이 나이에 벌써 지지부진한 인생을 운운하는 것은 객기라 하겠다. 허나 어찌 보면 산다는 건 객기이다. 삶은 그저 도취이며 마술 같은 것이다. 진정한 성숙을 꿈꾸는 자는 늘 미숙한 채로 남아 있게 된다. 그리고 항상 자기의 처지를 최악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여유와 달관이 보인다. 바꾸어 말하면 그것은 또한 용기이며 도전이다.
오늘로 오기까지 나는 정말로 수없이 넘어지고 또 넘어져 왔다. 어떻게 되다보니 내가 걸어 온 길은 다른 사람들이 여유 작작 노량으로 걷고 있는 탄탄대로가 아닌 뒤안길, 아니면 국도를 벗어난 진창길이 아닌가 싶다. 삶의 길이 너무나 울퉁불퉁했다. 삶의 굽이굽이에서 해일처럼 밀려와 연줄로 들이닥친 불상사가 호된 일격으로 육신을 강타했다. 무릎이 탁탁 접히는 것 같은 고통이 정신을 촛농처럼 만들어버리곤 했고 그 고통은 나를 함몰시키게 족했다.
말하거나 나의 삶은 조악하였다. 강보의 몸에 버려졌고, 양모와 의붓아버지의 끝없는 소시민적 갈등 속에서 암울한 사춘기를 지내왔고, 대학문전도 못간 몸으로 엘리트 속에 묻혀 필봉 하나만 믿고 신심을 혹사해왔으며, 청빈한 문인신세 때문에 혼인이 파열되었다. 30대중반이 넘도록 안식할 보금자리 하나 마련 못해 수천책의 책 꾸러미를 지고 메고 열다섯번씩 이사를 해야 했다. 그리고 오로지 사랑하는 딸애와 타향 멀리 떨어져 함께 지낼수 없는 살을 도려내는 마음의 진통 속에 거액의 빚짐에 눌리워 수년간 내내 리자돈을 꾸어대야 하는 나날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게다가 세대주로 인생을 감당해야할 나이에 어수룩한 일에 휘말려 직장을 말고 한지에 쫓겨나야하는 이변까지 일었다. 내 인생의 초반부터 덧쌓인 그 수많은 절망의 소품들... 초현실주의수법으로 예술화한 그 아픔이 나의 중편소설집 <<천재 죽이기>>의 구구절절에 배어있다.
세상살이의 올곧지 못함에 부대껴온 나날 이였기에 화려하고 거창한 것 과 내 인생은 거리가 멀었다. 그저 구질구질하고 고달픈 것의 연속이었다. 장애물경주에 나선 사람처럼 그런 것들을 나는 회피할 수 없었다. 때로 운이 좋아 작은 휴식과 성취를 맛볼 수 있지만 그것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물굽이 우에 떠올랐다 꺼지고 마는 거품과도 같은 것 이였다. 그리고 세상은 한 번도 나에게 출구를 내여 주지 않았다. 설사 비집고 들어갈 틈새가 조금 보였다하더라도 언제나 개구멍을 지나는 것 같은 주눅들림과 비굴함으로 그것을 통과하게 했을 뿐.
허나 나는 중력에 굴복하는 무거운 사람이 아니었다. 세상의 불쾌한 먼지와 소음의 기류를 덮어쓰고 나는 절망감의 정체와 아득바득 싸웠다.
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을 어둠에 적응하게 하는 방법은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다. 끝이 없을 것 같은 농밀한 어둠을 더듬는 와중에 문학이라는 빛이 있어 내게는 다행이라 하겠다.
나를 고통의 류황불에서 빠져 나오게 한 구원의 빛이 바로 문학 이였다. 절망의 정체를 저울질하게 하는 도구, 말 못 할 사정과 가슴 터질 슬픔을 상쇠 해 주는 엔돌핀이 바로 문학 이였다. 문학, 그 비실제적인 효능에 대한 매혹을 기르며 어떤 가치보다 우위에 놓고 탐미해 들었다. 작품의 문학성보다는 환금성이 중요시되는 세월에 하필이면 이 세상 가장 열렬한 문학 광으로 등장했다.
현학적인 표현이 넘치는 왕성한 실험으로 현실과 환상사이를 넘나들며 독자적인 자신의 영역을 만들었다. 내 작품의 제재는 모두가 욕망이 끝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사회의 구도 속에서의 한 개인의 처절한 몸부림과 그 개체가 어떻게 부서져 가는지를 갈파한 작품들이다. 작품 속의 인물들은 모두가 상식, 윤리, 가정, 법의 규정된 테두리 속에서 숨 막혀 죽어 가는 인물들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나 자신이기도 했다.
문학은 물리적 해결을 도모하는 방편이나 수단이 아니었다. 그러면 왜 문학을 해야만 하는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왜 문학을 해야 하는가?하는 화두를 내놓고 자문을 구한 적이 많다. 그 답을 나는 오랫동안의 대가를 치른 뒤에야 몸으로 찾았다.
이처럼 문학은 내가 컴컴한 생의 동굴 속에서 변신을 이루게 하는 쑥과 마늘이었고 내 삶의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바란 자기투척이었고 내 무채색의 삶을 채색으로 만들어주는 조색판이었다. 아픈 나날에 내 흩어지는 마음과 행동을 붙들어주고 위로해준 것이 바로 그 문학이었고 초라니 같던 나를 어엿이 증명해준 것이 바로 그 문학이었고 끊임없는 생활의욕의 에너지를 준 것이 바로 그 문학이었고 상처투성이 내 삶을 표구할 수 있게 해준 것이 바로 그 문학이였다. 나에게 삶을 주시고 그것을 볼 수 있는 시선을 주신 문학에 나는 감사한다. (문학보다는 그 황금성이 중요시된다는 요즘 세월에 하필이면 나같이 문학에 환혹해 있는 얼간이를 사랑하는 한 처녀와 다시 결합하면서 결혼식 날 내가 하객들에 대한 답사의 첫마디가 바로 다른 사람도 아닌 문학에 대한 감사였다.)
남과 달리 단 한곳에 아집을 거는 것은 기실 괴로운 일이다. 어쩌면 줄곧 예술적인 요구와 현실사이의 간극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나는 나 자신의 률법대로 살아가는 실성한 인간일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유폐(幽閉)된 자아를 지니고 세상으로부터 중절된 인간일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생의 어느 시기 블랙홀에 잘못 빠져 들어가 중력을 상실해 버린 사람일수도 있다.
하지만 주어 진 운명을 속여 비켜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미 나는 혼자서 쉼없이 달리는데 익숙해 있다. 스스로의 무드를 만들고 그로서 생성되는 엔돌핀에 도취되는 나는 문학과 예술이라는 거대한 씻김굿의 휘모리에 신들려 있다.
속박 없는 본연의 삶에 대한 동경은 자기구제의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 그 내가 달려가려는 궁극은 문학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카뮈의 철학에세이<<시지포스 신화>>를 열심히 읽은 적 있다.
카뮈가 인용한 희랍신화에서 신들은 시지포스에게 끝없이 바위덩이를 산꼭대기까지 짐 져 올리는 형벌을 내렸다. 허나 그 자체의 무게에 의해 바위덩이는 곧 다시 굴러 떨어지고 시지포스는 영겁으로 그 바위를 짐 져 날라야 했다. 나는 문학이 곧바로 숙명의 돌 굴리기라고 생각한다 .올리고 굴리고 다시 올리고 굴리고·그 고행 속에서 끊임없이 절망하고 끊임없이 연소하는 숙명적인 짓거리..
나의 행보는 아직도 먼먼 도정위에 있다. 아직도 정상이 까마득히 보이는 산기슭에 있다. 아직도 문학이라는 숙명의 돌을 끊임없이 올리고 굴려야하는 것이다. 문학적 텍스트에 관한 긴장감을 잊지 않고자 나는 부과된 숙제처럼 매일 매일을 열심하고 있다. 글쓰기의 괴로운 행복 속에 묻혀있다.
너나가 문학의 현기증 나는 가치하락을 경험하고 있는 요즘 같은 세월에 문학만을 고집하고 부르짖는 내가 사람들에게 우습게 광대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허나 치기를 가진 사람이 가장 순수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임을 나는 안다. 그 유아독존의 신념이 나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리라 나는 믿는다. 애초에 개설한 내 홈페이지의 이름은 <<고독한 파수군-작가 김혁의 방>> 이다. 나는 숙명으로 문학이라는 이 황금의 밭뙈기를 지키는 파수꾼으로 거듭날 것이다.
카뮈의 <<시지포스신화>>의 몇 구절을 빌어 한 문학광의 껄끄러운 경력과 집요한 아집을 해석해본다
..시지포스의 말없는 기쁨이 모두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곧 그의 것이다. 그의 돌은 그의 것이다
..시지포스는 자신에 의해 창조되고 죽음에 의해 봉인될 그의 운명이 되는 행동의 연속을 바라다본다.
..우리는 항상 그의 돌을 발견 한다
그러나 시지포스는 신들을 부인하고 바윗돌을 들어 올리는 성실을 가르친다. 이 바위의 부스러기 하나, 어둠에 가득 찬 산의 광물 빛 하나가 오직 그에게는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산꼭대기를 향한 고투, 그 자체가 그의 마음을 채우기에 충분하다.
..행복한 시지포스를 마음속에 그려볼 필요가 있다...
"도라지" 2000년 1월호 김혁특집,
"연변문학" 2005년 5월호 김혁특집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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