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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방촌(方寸)에 담긴 력사와 인물 댓글:  조회:2858  추천:13  2014-04-14
​ . 칼럼 .   방촌(方寸)에 담긴 력사와 인물   김 혁     1 자칭 난 우취인(邮趣人)이다. 우표를 모은 시간도 꽤 오래되고 모은 우표도 수권으로 분류할 만큼 량으로도 적지 않다. 생활고와 도난(盜難)의 아픔때문에 한동안 우표수집을 중단한적 있지만 지금도 간헐적이나마 직성에 맞는 기념우표들을 수집해 들이고 있다.    어릴적 우리집에서 주문해보는 “인민화보”에서 강치방(姜治方)이라는 우표수집가에 대한 소개를 본적 있다. 한장에 수만원이나 한다는 룡우표도 소장하고 있고 이사를 할때에는 우표만도 두개의 트럭으로 싣고 다닌다는 천방야담같은 그의 이야기에 환혹해 우표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때 천진에 가서 투병하고있는 어머니의 달마다 부쳐오는 편지에 붙어 있는 색다른 우표가 나의 여리나 투명한 감수를 끄당겼다. 게다가 마침 한 반급의 그림 잘 그리는 주씨성을 가진애 (그는 지금 한 방송매체에서 촬영기자로 활약하고있다.)도 우표에 흥취를 가져 둘이는 승벽내기로 우표를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연변에 주둔하고있는 한 주둔군 부대의 퇀장님이라하는 분이 나의 우표수집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어린 나에게 찾아올지경이였다. 그때 그분이 나의 우표수집책중에서 참대곰 우표 몇장을 당시 돈으로는 엄청난 고가로 사들이려 했으나 내가 견결히 거절했고 어머니가 상당히 아쉬워 했던 기억이 있다. 그분이 내 든 가격으로는 어머니가 감질나게 사고퍼 하는 압력밥솥(高压锅) 그리고 몇달 생활비로 충당할고도 남음이 있을것이였다. 그러다 1992년경 청빈하기로 책외에 책밖에 없는 나의 세방집이 도적의 환을 당했다. 그때 첫 중편소설 “미망의 도시”로 받은 고료- 300여원의 현찰과 함께 우표책 두권을 더불어 잃었다. 하남가 파출소에서도 도난소식을 받고 출두했으나 무가내였다. 그중 하필이면 문화대혁명에 관한 귀중한 우표만 정선해 꽂은 우표책을 도난당하고 말았다. 그후로 우표에 대한 나의 흥미는 벼락맞은 묘목처럼 동강이 나 버렸다. 또한 우표수집에는 만만치않는 자금투입이 들어가는것이 가난에 쭉줄렸던 당시 그 취미를 아프게 접은 요인이기도 했다. 옛날 문인들에게는 “4대 애장품”이나 “4대 취미”가 있다고 했다. 책 읽기, 영화CD모으기, 애완견 키우기 그리고 우표 모으기가 나의 애장품이요 취미요 그리고 일상이라 할수 있다. 지금도 가끔 서재에 꽂혀있는, 구도(狗盜)의 마수에서 용케 살아남은 몇권의 우표책을 꺼내 음미하노라면 감흥이 한 가슴 그득 넘쳐 오르며 고단한 삶에 힐링(Healing)이 되여주는듯 하다.   2 요즘 들어 우표를 흔상하는 나의 시선과 모으는 손탁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옛날에는 동물우표나 항천(航天)우표에 커다란 흥미를 가졌었다. 그중에 내가 모은 진귀한 우표를 자랑해 볼작시면, 멸종위기에 이른 새 주환(朱鹮)에 대한 80년대의 기념우표나 로씨야 우주항행의 대부 가가린에 대한 60년대에 발행한 우표들은 우취인들 사이에도 보배롭게 생각하는 귀중한 우표들이다. 그리고 민국시대에 발행한 손문(손중산)에 대한 우표는 그 발행사가 백년도 넘으니 그 진가는 우취인들만 알 바이다.   요즘에는 력사에 획을 그은 사건이나 그 행간에 우뚝 선 인물을 담은 기념우표에 갑절 눈길이 간다. 그중 우리 민족의 력사와 직결되는 인물을 담은 우표 몇장을 뽑아 읽어 본다. 우선 2007년 한국정보통신부 우정사업본부가 발행한 ”헤이그 특사 100주년 기념”우표 가 있다. 우표 디자인을 보면 헤이그특사 3인의 모습이 고종황제의 위임장을 배경으로 오버랩(한 장면에 다른 장면이 겹치게 하는 촬영 기법)되여  있다.     1907년 고종황제는 일제 강압의 의한 을사륵약의 무효와 대한제국의 국권회복을 세상에 호소하기 위해 그해 6월 화란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리상설, 리준, 리위종 특사를 비밀리에 파견했다. 하지만 일제의 횡포와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리준은 헤이그에서 분사하고 리상설과 리위종은 유럽을 순회하며 국권회복을 위한 투쟁을 계속 전개했다.  “헤이그특사 사건”은 민족항일독립운동의 려명을 연 대사건이라는 점과 렬강 45개국이 모인 외교 무대에서 동양의 은둔국 한국을 알린 최초의 특사외교라는 점에서 력사적 의의가 크다. 내가 이 우표를 아끼는 점은 리상설이 헤이그로 떠나기 앞서 개숙(開塾)한 서전서숙이 바로 내 고향 룡정에 있기때문이다. 지금의 룡정 실험소학교자리에 위치했던 서전서숙은 중국조선족 근대교육의 서장을 연 중요한 유적지이다.   다음 중국에서 발행한 김염에 대한 우표가 있다. 중국영화탄생 백주년을 맞으며 지난 2005년 발행된 우표이다. 조선인으로서는 중국 유일의 “영화황제”로 평선되여 당년에 상해를 주름잡았던 김염은 중국 영화의 성장시대를 이끈 배우로서 아시아 영화계의 거장일뿐더러 우리 민족의 굴지의 자랑이다.     지난해 나의 장편소설 “상해 수은등”이 “중국소수민족작가 중점지지 작품”에 선정되였는데 그 추천작품이 바로 김염의 일대기를 소설화하는 작품이였다. 그 입선 소식을 듣던 날 나는 우표책에서 김염 우표를 꺼내 감회를 머금고 들여다보았었다.   영화인으로는 또 연변 명동학교출신의 한국영화계의 거장 라운규에 관한 우표도 있다. 한국우정사업본부가 “한국의 영화 시리즈” 첫번째 묶음으로 2007년에 발행한 우표 4종 가운데의 하나로 라운규의 대표작 “아리랑”을 비롯해 “사랑을 찾아서”, “임자없는 나루배”, “춘향전” 등 초창기 한국 영화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을 소재로 한 우표 4종을 각 56만 장씩 발행했다.      이 가운데 “’아리랑’은 “조국을 잃은 백성의 울분과 설움을 표현하며 초창기 한국영화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춘사 라운규를 당대의 스타로 만드는데 디딤돌 역할을 했던 작품”이라고 한국우정사업본부는 설명했다.     역시 명동출신으로 윤동주의 절친 문익환목사에 대한 우표도 발행되였다. 윤동주와 일년을 사이두고 태여나 숭실학교에도 함께 진학했던 문익환, 그후 “남북 통일의 아버지”로 추앙되는 문익환에 대한 우표는 2000년 조선에서 발행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나무 토끼 한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윤극영의 동요 “반달” 우표도 1986년도에 언녕 나왔다. 한국 체신부에서는 민족 음악을 보다 널리 보급시키기 위하여 우리 생활속에 즐겨 불리우는 민요,동요 및 가곡을 모아 그 노래에 담긴 내용을 소재로 디자인 하고 악보를 삽입한 우표를 수년간 발행하고있는데 그 일환의 하나로 “반달”이 발행되였다.        윤극영 작사. 작곡으로1924년에 만들어진 “반달”은 단순한 동요곡이라기 보다는 우리 민족의 력사적 시련기였던 일제시대에 나라 잃은 민족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었던 겨레의 노래라 할수 있는 작품이다. 어린이부터 로인에, 지역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즐겨 부르는 이 노래는 “고향의 봄”과 더불어 한민족의 얼이 깊이 새겨져 있는 명동요로 꼽힌다. 그 작사, 작곡가 윤극영이 오래동안 룡정에서 교편을 잡고 활동해 온 력사에 대해서는 그 당시 력사에 대해 천척하고 있는 이들이 착잡하게 반추해보고있는 후일담이다.   중국 군가의 작곡자 정률성에 대한 우편엽서도 제1회광주정률성국제음악출제를 맞으며 출시되였다. 한국 광주 출신으로 1933년 항일운동에 가담한 형을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남경, 상해 등지를 전전했고1937년 연안의 로신예술학교를 졸업하고 “연안송” 등을 작곡, 그 가운데 “팔로군행진곡”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과 함께 “인민해방군군가”로 선정되였다.       중국인 80% 이상이 그의 곡을 노래할수 있다는 사실과 그가 바로 우리민족의 출신임은 우리 모두가 자호할만한 일이다. 조선인으로서 13억 대륙을 흔든 세계적인 음악가 정률성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한국과 중국에서 성세하게 기념하는 시점에서 그 우편엽서의 의미가 각별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3 4월9일,  한국 서울지방우정청이 연변 명동출신의 민족시인 윤동주에 관한 우표를 발행했다. “영원우표” 추억의 인물 시리즈 두번째 묶음으로 발행된 우표에는 민족시인 한용운, 이육사, 윤동주”를 액면에 담았다.     우표에는 액면가격 대신 “영원우표 국내규격 25g”이라는 문구가 표기돼 있다. 여기서 “영원우표”라 함은 우편료금이 인상되더라도 사용일 당시의 국내 기본 통상우편요금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계속 사용이 가능한 우표를 말한다. 무려 130여만장을 발행한 우표는 시를 통해 민족의 한을 달래주었던 민족시인 3인의 모습과 그들을 대표하는 시 구절을 담았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내 고장 7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등 이들을 각각 대표하는 시 구절이 새겨져 있다.   한국에서는 2001년에도 윤동주의 연희전문시절의 모습을 배경으로 그의 대표작 “서시” 전문을 배경으로 담은 우표를 발행한적 있다. 우표에 오른 윤동주를 지켜보노라니 그의 동시 “편지”가 떠오른다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글씨도 쓰지말고 우표도 부치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우표는 서로의 통신수단으로 편지를 주고받는데 보조의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것이 아니다. 우표는 가히 “력사 교과서”라고 할수 있다. 세계각지에서 발행되는 기념우표를 보면 알수 있듯이 우표는 당시의 력사적 사건, 문화등을 면밀하게 담고 있다. 방촌(方寸)의 작은 우표딱지를 통해 우리는 그 당시 생활상 및 시대적 상황에 대해 배울수 있는것이다. 그만큼 우표는 문화이고 력사적 산물이며 지금도 시대를 반영하고 있는 하나의 쪽거울이다.   서신교환을 위한 제도적인 인프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왔던 우표가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이메일의 보급으로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가고있어 우취인으로서는 가슴 아픈 현실이다. 하지만 우표라는 프리즘으로 우리의 민족의 력사나 그 풍운인물에 대해서도 읽을수 있으니 이러한 감흥은 단 우취인만을 떠난 모든 이들의 아취(雅趣)적이면서도 중후한 흔상의 시선이기도 할것이다.   2014년 4월 10일 “청우재/听雨斋”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10    봄 우뢰 댓글:  조회:1814  추천:11  2014-03-13
. 력사 칼럼 .   봄 우뢰   김 혁        우뢰, 여름철 소나기 올때 하늘에 크게 울리는 소리를 말한다. 대기 중의 방전(放电)현상으로 생기는 큰 소리이다. “울다”의 어간 “울”에 어미 “에”가 붙어서 이루어진 순 우리말이다.   또 천둥이라고도 하는데 천동(天动)이 변한 말이다. 옛사람들은 하늘에서 북을 치는 소리가 나는것 같다고 해서 천고(天鼓)라는 표현도 썼었다.   우뢰는 장마철이나 여름철에 많고 봄에는 드물다. 그래서 봄우뢰를 신뢰(新雷)라고도 했다.        연변지역은 비교적 한랭한 기후이니 봄 우뢰가 우는 경우가 드물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95년전 지금의 연변지역 즉 당시의 북간도에서는 세상을 놀래는 “봄 우뢰”가 울었다.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은 3.13 반일시위 모습      1919년, 3월1일, 민족자결주의  (民族自決主义)에 자극받아 독립지사들은 경성의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조선 전역을 무대로  성세호대한 반일시위운동을 일으켰다.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온 겨레가 떨쳐 일어 선 이 장거에 연변의 반일지사들은 적극 호응하여 “간도의 서울”인 룡정에서 반일시위를 거행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3월 13일, 이른 새벽부터 연변각지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룡정으로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동성용, 조양천, 차조구, 동불사, 로투구, 명월구, 장인강, 두도구, 의란구, 월청구, 위자구, 화전자, 석현, 연길 등지의 3만여명의 민중들이 분분히 대렬을 지어 룡정에 도착하였는데 그 광경은 실로 미증유의 장관이였다.   대회에서는 "간도거류조선민족일동" 명의로 된 "독립선언서포고문"을 랑독한 뒤일본간도총령사관을 향해 나아가며 거리시위를 단행했다.    "조선독립만세!", "일제의 침략을 반대한다!", "친일주구를 타도하자!"라는 구호가 룡정의 거리와 골목에 우뢰처럼 메아리쳤다.   시위는 일제의 잔인한 탄압을 받았다. 군경들은 적수공권인 군중들을 향해 무자비하게 발포했다.   이날 일제와 지방군경들의 탄압으로 19명이 피못에 쓰러졌고 48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94명이 체포되였다.    그후 룡정의 각계인사들은 눈물을 머금고 14명 수난자들을 룡정 동남쪽에 있는 합성리 공동묘지에 고히 안장했다.   룡정의“3.13”반일운동은 20세기 10년대 연변지구에서 거행된 가장 대규모적인 반일시위이다. 학계에서 “해란강의 봄 우뢰”라고 지칭되는3.13반일운동의 천둥은 연변각지는 물론 북만과 남만일대까지 울려퍼지여 앙양된 반일투쟁을 불러일으켰다. 좌로부터 김약연, 림민호, 한락연     3.13반일운동과 직결된 인물들은 많고 그중에는 조선민족을 빛낸 여뢰관이 (如雷贯耳 우뢰소리가 귀를 뚫고 지나는것 같이 명성이 자자하다) 의 인걸들이 적지않다. 그 몇분을 뽑아보면-   김약연.   당시 간도지역의 “대부”로 연변 초기의 이주민 마을인 명동촌의 지탑을 잡고있던 그는 조선에서 “3.1”운동이 일자 연해주로 파견되여 갔다. 연해주에서 김약연은 각지에서 파견 되여온 독립지사들과 회합하여 독립선언서의 작성과 그 선포에 관한 합의를 하고 룡정반일시위를 기획하였다. “3.13”반일시위가 일제에 탄압을 받은후 조직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는 이를 빌미로 2년간의 옥살이를 하였다.   연변의 초기의 근대 교육학교인 명동학교를 세운 그이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외삼촌이기도 하다.    림민호.    반일시위가 일던 날 대회장 가녁의 교회당 첨탑우에 올라가 구경하고있던 한 소년이 교회당의 종소리를 울렸고 그 종소리와 함께 대회가 시작되였다. 종소리를 울려 성세호대한 반일시위를 촉발시킨 그 홍안의 소년이 바로 후일 연변대학의 교장으로, 조선족교육의 정초에 크게 기여를 한 림민호교장이였다.    한락연.   당대 중국미술발전사와 중국현대혁명사에서 선구자적 위치를 자리매김하여 “중국의 피카소”라 지칭되고 있는 그는 당시의 반일시위에 적극 동참하여 대회에 사용 될 기발을 만들고 프랑카드를 써서 대회장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시위자들과 함께 반일과 민족독립을 위해 한목청을 높였었다. 룡정의 외곽 합성리에 조선된 "3.13" 반일 의사릉     조선후기의 대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탁월한 승려인 혜장을 높이 치하하여 지은 시가 있다.      그 명성이 우뢰처럼 크게 떨쳐   사방의 호걸들이 얼굴보기를 원했지     오늘이 바로 해란강반에서 반일의 봄우뢰가 터진 3.13반일시위 95돌이 되는 날이다.    이를 계기로 또 한번 민족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 한 몸 바친 인걸들의 “여뢰관이”한 이름을 크게 새기며 망각과 무심으로 안일했던 마음들을 들깨우기를 바란다.   2014년 3월 13일   "청우재"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9    속죄 (贖罪) 반세기 댓글:  조회:2133  추천:12  2014-02-24
칼 럼   속죄 (贖罪) 반세기   김 혁    1, 나의 아버지는 문화대혁명 시기 “57간부학교”에서 모진 질곡의 나날을 보냈다. 이른바 “5.7간부학교”란 주자파, 반혁명분자, 수정주의 분자들이 로동교육을 받는 기관으로서 사실은 변상적인 감옥이나 다름없는 곳이였다. 그때의 고생이 빌미로 되여 줄곧 병상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는 문혁이 끝나자 몇해 못되여 40대의 젊은 나이에 한많은 눈을 감았다. 아버지는 어린 나에게 당신을 혹독하게 고문하던 가해자의 이름이며  설명절에도 범인들에게는 깡마른 옥수수밥을 먹이면서도 집지기 개에게는 고기소 만두를 먹이던 일이며, 간수의 눈을 피해 냄새나는 널변소에 가만히 숨어들어 누룽지를 목메게 씹어 먹던 일이며를 얘기해 주었다. 소학생인 나에게 조차 그 끔찍했던 기억을 토파할 정도로 아픔과 한은 깊었던 모양이다. 나의 초동머리적 인상에 피골이 상접한 아버지는 내내 병원에서 나날을 보냈다. 그때의 아픈 인상이 내 여린 심성에 골수 깊숙히 각인되여 내 생애의 첫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는 다름 아닌 문혁제재의 작품이였다.     나의 문혁제재의 장편소설 "마마꽃, 응달에 피다"     문학에 심취되여 룡정에서 연길로 상경해 문단활동에 열성을 보이던중 나는 뜻밖에도 아버지를 혹독하게 대했던 그 당사자를 문단에서 만나게 되였다. 어느 술자리에서 나는 그에게 아버지의 함자를 대였다. 한창 흥감스럽게 떠벌리던 그는 금세 함구를 했다. 그저 얼빠진 표정으로 나를 한동안 쳐다보았다. 그후로 그분은 공석에서 나만 보면 몸둘바를 몰라했고 바삐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같은 문학권이라 싫어도 자주 마주쳐야 했고 어느 한번은 시상대에 올라 함께 상을 수상하기까지도 했다.  어느 날, 어린 후배앞에서 외려 쭈뼛거리며 그분은 자신의 신간작품집을 굳이 내게 선물했다. 어린 나를 선생님이라 과분하게 호칭한 싸인을 담은 책을 넘겨주면서 그분은 “그저 성의와 미안함을 담아 드리는것이나 책을 던져버려도 할말이 없소”하고 말했었다. 그리고 몇해 못되여 그분 역시 병으로 타계했다. 그때 그분은 그런 방식으로나마 내게 사과(반성 혹은 속죄?)를 한것일가? 지금도 나의 서가에는 그분의 작품집이 여전히 꽂혀 있다.     2 전대미문의 동란 문화대혁명시기 홍위병의 선두주자였던 녀맹장이 일전 뒤늦게 반성과 사과의 눈물을 쏟았다. 미국에서 살다가 2003년 귀국한 송빈빈은 문혁 당시 모교의 학교의 변중운(卞仲耘) 부교장이 구타로 사망하는 사건을 막지 못하고 교사들을 비판한것을 참회했다. 송빈빈은 1500자 분량의 "나의 사죄와 감사"라는 제목의 글에서 “범죄집단과 투쟁하기를 반대한다”는 말을 들을까봐 두려워 자신들의 교장을 구타하는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했다고 참회하면서 “지금 사과하지 않으면 앞으로 기회가 없을것 같았다”고 토로했다. 문화대혁명시기 북경사범대 부속녀중학교에서 홍위병을 이끌었던 송빈빈이다. 송은 문화대혁명 초기인 1966년 8월 18일 천안문 성루에 올라 모택동주석의 팔에 직접 홍위병을 상징하는 붉은 완장을 채워준 인물로 유명하다. 당시 모주석은 송의 이름에 문질빈빈(文質彬彬)이라는 뜻의 ‘빈(彬)’자가 들어간것을 보고 “무(武)자가 필요(要)하군”하고 말했다. 그뒤 송은 부모가 지어준 이름대신  ‘요무(要武)’라고 불리웠고 그 이름으로 서명한 ‘나는 모주석에게 붉은 완장을 채워 드렸다’라는 글이 전국의 온갖 잡지들에 게재되였다.   사과하고있는 송빈빈   지난세기 60년대 전 중국 전역을 토네이도처럼 휩쓴 문화대혁명은 극좌정치로선이 빚어낸 인간비극이였다. 문화대혁명은 시작된 1966년 부터 10년간 집단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에 의해 적어도 수십만 명은 넘는것으로 추정되는 인명 피해와 도덕적 붕괴 등 극심한 혼란을 낳았다.   조선족들이 운집한 연변에만 해도 집계된 피해자가 무려 3만 1,532명에 달한다. 문화혁명시기에 태여난 필자와 같은 4,50대들의 김혁, 문혁, 안혁, 위동, 위병등 이름자에서도 알수 있듯이 우리의 세대의 생활과 창작의 모태로 되는 기억의 가장 깊은 골짜기에 문혁(文革)의 10년이 있다. 문혁시기 홍위병 맹장으로 하늘이 높은줄 모르고 길길이 뛰였던 송빈빈외과 같은 이들에게도 심적 부책감의 골짜기는 깊었나 보다. 반세기를 숨죽여 살아온 송은 “문혁의 피해자와 력사에 대해 반성해 왔다”고 말했다. “자신 역시 피해자”라고 호소한 그녀의 글 곳곳에는 깊은 회한과 절절한 참회가 담겼다. 그처럼 적지않은 가해자들이 근년래 서면을 보내고 잡지에 인터뷰를 게재하고 개인 블로그등을 통해 사과의 뜻을 보이고있다. 당시 뚜렷한 적용의 기준도 없이 무자비하게 시대가 휘둘러 대는 폭력 앞에서 선택은 단 두가지이였다. 동참이냐 아니면 타도(打倒)를 당하느냐이다. 제3의 선택으로서, 의심이란 있어 볼 수도 없었고 있어서도 안되였다. 의심을 가진다는 자체가 허락되지는 않는 반항으로서 곧 타도를 맞는 쪽으로 선택함과 다름 없었고 한번쯤 의심을 가지기에는 시대의 풍조에 골몰되여 지나치게 뜨거웠던 머리속에서 상황에 대한 시비를 올바르게 가릴수 있는 제대로 된 “지적사유”를 하기가 힘들었던것이다. 그러한 시대적 환경에서 가해자이자 역시 시대의 피해자 역할로도 충당된 사과자들은 “문혁에 대해 어떻게 보는가하는것은 개개인이 자유지만 헌법을 위반하고 인권을 침해한 비인도적 행위는 다시 재발되여서는 안된다”며 당시의 상황이나 환경을 핑계로 삼아 개인적 잘못을 덮지 않겠다는 자세를 뒤늦게나마 보이고있다.     모택동주석에게 완장을 채워드리는 송빈빈   3 문혁이 지난지도 4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 경험자들은 신심의 “트라우마”를 안고 시종 력사의 망각 그리고 침묵과 줄다리기를 벌리고 있다. 문혁 연구가들은 “이는 정치 과잉의 그 시대 사람들이 모두다 갖고있는 통병이자 상처”라고 말한다. 문혁을 겪은 사람들에게는 “선택성 기억이 존재하는데 만약 한 시기의 기억이 고통과 수치로 점철되였다면 흔히 심리성 망각증세를 보인다”고 진맥했다. 문혁의 광란이 인성에 대한 말살과 그로서 생긴 후유증에 대한 우려는 지성인들의 공동의 관심사이다. 문제는 상처가 아물자 아픔을 잊은것 처럼 문혁의 “트라우마”가 너무 쉽게 해소되여 버리고 있다는것이다. 이 트라우마가 너무 쉽게 “해소”되여버린 것은 상처투성이의 과거와 자본주의적 세계화라는 새 시대의 도래사이, 간극이 너무 짧았던것과 련관시켜 볼수있다. 물신화가 급격히 추진되면서 경제 과잉, 물질적 풍요속에서도 정신적 빈곤에 허덕이는 우리 사회가 안고있는 문제이다. 여기서 그 “트라우마”를 다시 이야기하는건 또 다시 아픈 기억을 들추어 내는 흥감질이 아니다.   력사는 이미 참극으로 랑자한 피자국을 닦고 그 페지를 번져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흘러가는 시간속에 력사의 잘못을 묻어두어서는 안된다. 많은 이들 더우기 피해자들에게 그 기억은 아직도 생생히 살아  시시때때 육신을 괴롭히는 흉터로 남아 있었다. 그 아름다운것에 대한 파괴와 인성의 왜곡과 전민중에 대한 집단적 최면은 지울수 없는 악몽으로 남아 있다. 때문에 그런 아픈 기억들을 반추해 력사의 거울로 삼자는 이사위감(以史爲鑑) 정신의 실천은 아직도 필요하며 앞으로도 내내 필요하다고 본다. 그동안 당사자들의 반성과 성찰을 감안한 진정한 반성을 모두는 바라왔었다. 가해자들의 광분했던 행위를 “문혁”이라는 당시의 큰 환경에 원인을 돌릴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든 당시의 동란은 정당화될수 없으며 개인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력사의 기억은 지워질수는 없다. 이는 가해자들의 책임을 묻기에 앞서 력사에 대한 전 사회적인 명의의 승낙이라고 볼수 있다. 때문에 후회라는 진실과 마주하지않으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기억은 더 또렷해지고 그 부책감도 더 무거워 질것이다. 문혁에 대한 력사적 평가에 대해서는 지금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갑론을박의 그 귀결점은 모두다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인권유린의 참극이였다는데 입을 모으고 있다. 끔찍한 자연재해와는 달리 문혁은 인재(人災)였다. 이는 인류가 두고 두고 반성해야 할 력사다. 문혁은 우리의 력사에 우리들의 신상에 흉물스러운 종양처럼 틀고 앉았다. 그 독소를 없애는것은 문혁이라는 악몽을 피부로 경험했던 일대뿐이 아니라 새로운 일대에게도 경종을 울려주는 중요한 작용을 한다. 그 경력자들뿐이 아니라 후세들도 명심할 대목이다. 일찍 문화대혁명박물관을 세우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파금선생은 “가면을 벗고 량심을 끄집어내고 똑똑히 기억해두어야 력사가 다시 점철을 밟는것을 막을수 있다고 말했다. 상처를 받아 안은 피해자들에게는 사죄와 반성의 수준이 기대에 미치지 않고, 또 그 반성이 화해로 이어가지 못하더라고 가해자들이 오랜 세월뒤에라도 이미 그런 자세를 갖추었다는 점에서 반성과 속죄는 그 의의가 있다. 가해자들은 속죄의 말미에 “다시는 이 같은 동란과 비극이 생기지 않기를 희망한다”고 호소했지만 과거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성찰이 없이는 문혁의 유령은 언제든 다시 출현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우리는 량심의 소리를 따라야 한다. 령혼의 정화, 사회의 진보,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는 이러한 과거를 털어내는 심각한 반성의 소리는 필요하다. 이는 국가와 민중들이 함께 짐져 나가야할 책임인것이다. 지난날을 되돌아보며 반성해야 장차 나아갈 길이 분명히 흔들리지 않을것이며 더 큰 꿈을 위해 더 크게 더 빨리 도약할수 있는 자세가 생길것이다. 새로운 력사의 문은 과거의 잘못을 인정할 때 열린다.     2014년 2월 20일  청우재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8    양철북을 두드리다 댓글:  조회:2691  추천:11  2014-02-08
칼 럼   양철북을 두드리다 김 혁   1 햐쿠타 나오키(百田尙樹)라고 하는 일본작가가 있다. 자살특공대를 소재로 한 소설 “영원(永遠)의 제로”를 출간, 3백만부가 팔리면서 유명해 졌고 최근 그 소설이 영화로 제작돼 인기리에 상영중이다. 하지만 그보다도 세계의 이목을 끈 것은 그의 작품이 아니라 그가 람발한 련이은 망언이다.   ▲ 망언 제조기 햐쿠타 씨   도꾜 신주쿠(新宿) 와 아키하바라(秋葉原)에서 내 뱉은 그 망언들을 볼작시면: - "세계 각국은 남경대학살을 무시했다", "왜냐하면 그런 일은 없었기 때문" -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에 의한 도꾜 대공습과 원폭 투하는 비참한 대학살이다”, “일본인 전범을 단죄한 도꾜재판은 이(대학살)를 지우기 위한 재판이었였다" - “일본이 1941년 진주만을 선전포고 없이 기습했는데", "20세기 전쟁에서 선전포고가 이뤄진 전쟁은 거의 없다" - "아마 일부 (일본) 군인들에 의한 잔학 행위가 있었지만 그것은 일본인뿐 아니라 미군도 하고 중국군도 하고 쏘련군도 했다", "이런것을 의무 교육을 받는 아이들에게 가르칠 리유는 어디에도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에게 자학 사관을 심을 필요는 어디에도 없다" 햐쿠타는 평화헌법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본 문화계의 대표적 우익 인사로서 아베 신조총리와 친분이 깊다. 아베는 신사참배를 앞두고 햐쿠타의 영화를 관람했다고 한다.   2 햐쿠타씨의 망언과 행각을 지켜보노라니 또 다른 한 작가가 머리에 떠 올랐다. 귄터 그라스, 소설 “양철북”으로 199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독일작가이다. 나치 점령에서 2차대전까지 독일의 력사와 사회상을 촘촘히 그린 소설은 영화로 각색되여 1980년 제52회 오스카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내가 소장한 소설 “양철북”의 중국판 표지    필자는 지난 1994년경에 소설 “양철북”을 접했으나 부피가 만만치 않고 문체도 까다로워 채 읽지 못하고 영화로 먼저 보았었다. 성장을 멈춘 소년 오스카가 생일 선물로 받은 양철북을 두드리는 장면, 괴성을 질러대면 거리 유리창들이 부서지는 초현실주의 장면들이 지금도 눈앞에 선연하다. 후에 다시 중문판 소설을 소장해 까근히 읽었다. 요란한 양철북 소리와 날카로운 괴성은 세상의 부조리에 맞서는 소년 오스카의 저항방식을 황당한 필치로 은유해 보인것이였다. 작품은 나치의 광기와 그에 무비판적으로 휩쓸린 민중에 대한 통렬한 은유로 평가 받는 고전으로 귄터 그라스를 세계 대문호의 반렬에 올려 세웠다.   ▲ 영화 “양철북”의 한 장면.  이 소설에 대해 평단은 칭찬일색으로 자자했다. 노벨상도 진작 받았어야 했는데 너무 늦었다는게 문단의 중론이였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몇년후 귄터 그라스는  “양파 껍질을 벗기며”라는 자서전을 발표했다. 그 자서전을 읽은 애독자들 그리고  여론은 들끓었다. 자서전을 통해 귄터 그라스는 자신이 나치 친위대에 복무했음을 뒤늦게 고백했던것이다. 그는 나치 친위대 대원이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7세에 자원입대해 수류탄 파편에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된 1945년 2월까지 그는 “SS”가 새겨진 군복을 입고 히틀러의 병사로 지냈다. 그는 평생 이 사실을 비밀로 하고 싶어했지만 량심의 혁편질에 못이겨 결국은 고백하고 말았다. 그는 "나는 평생 이 문제를 떠나지 않았고 이 문제와 함께 있었다"며 심적 고통을 토로했다.   ▲ 저자 권터 그라스   전체 독일민중은 찬 얼음물이라도 뒤집어 쓴듯 그만 어안이 벙벙해 졌다. 자부하며 애대했던 작가가 나치라니?! 한때 찬양했던 작가에 대한 비판이 장대비처럼 쏟아졌고 그의 노벨문학상을 박탈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귄터 그라스는 그 비평을 고스란히 한몸으로 받아안았다. 과거에 대한 고백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학식, 덕망을 한 순간에 허물어 버리는 결과가 될것이라는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라스는 늦게나마 어두운 과거를 스스로 들춰냈고 여태 짐져왔던 량심의 책무를 갚으려 했다.  용기있는 행동이였고 숙고된 자아성찰의 결과였다. 소설 “양철북”을 세세히 읽어보면 그 거대한 은유속에 자신을 포함한 20세기를 살았던 독일인들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그는 마음속 짐을 필생의 역작을 통해 속죄했던것이다.   소설 "양철북" 주인공의 캐릭터   3 똑같은 제2차 세계대전 전범국(戰犯國)인데도 일본과 독일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독일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스딸린그라드 전투 희생자를 기리는 승전국 행사에 고위 정치인이 거의 매년 참가해 거듭 사죄와 반성을 보여준다. 그에 반해 일본의 우경화 행보는 이제 자기 제어능력을 잃고있다. 그 행보의 근저에는 반성 없는 과거사 인식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한 극우의 준동(蠢動)은 국제사회에서 더 고립되고 더 몰락하는 악순환을 초래할수도 있다. 력사는 감추고 싶다고 감춰지는게 아니다. 아무리 력사를 인위적으로 부인하려 하면 할수록 진실된 력사에 대한 “죄책감”에 계속 시달리게 될것이다.   력사에 대한 인식에서 작가들마저도 일본과 독일은 서로의 차이를 보여준다. 작가가 력사의식을 가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시공간속의 진실이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고 있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모르는 청맹과니같은 의식으로 작가가 되여 세상을 향해 떠들게 되면 어떻게 될까 ? 그 작품은 시간의 고험을 이겨내지 못하는 아류작으로 남을것이며 그 작가 역시 극소수 특정 독자층의 구미나 맞추는 알량한 3류작가로 남을것이다.   그야말로 우리에게 울림이 큰 커다란 양철북과 북채가 주어져 극우작가들의 졸렬한 심안(心眼)을 깨우는 각성의 양철북을 세차게 두드리고 싶다. 요즘 중국에서도 잘 팔리고 있는 역시 일본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没有色彩的多崎作与他的巡礼日子)”에 나오는 한 구절을 청맹과니같은 일본 극우작가에게 드린다. "기억을 어딘가에 감췄다 해도 또 깊은 곳에 잘 가라앉혔다 해도 거기서 비롯된 력사를 지울수는 없다” 2014년 2월 5일  청우재[聽雨齋]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7    악마의 포식 댓글:  조회:3576  추천:12  2014-01-26
. 칼럼 .   악마의 포식   김 혁     1 지난 1980년대 흑룡강조선족출판사에서 출간한 “악마의 락원”이라는 책자가 있다.  일본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찌의 신작, 책은 조선족독자들중에서 커다란 센세이숀을 일으켰다. 당시 추리물이 상당히 류행되였는데 모든 조선족간행물에서는 다투어 모리무라 세이이찌의 추리소설을 싣곤했다. 그의 대표작 “인성의 증명”을 각색한 영화도 전국각지 영화관에서 상영되였고 영화의 삽곡 “초모자의 노래”가 네 거리의 스피카를 타고 울려퍼졌다. 어찌보면 모리무라 세이이찌의 작품이 잡지발행의 보증수표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그렇게 한동안 독자들중에서는 “모리무라 붐”이 일었었다. 또 한편의 정채로운 추리소설을 기대하고 “악마의 락원”을 펼쳤지만 이번의 작품은 추리물이 아니라 다큐물이였다. 처음에는 좀 실망한듯 했지만 독자들은 인차 책에 빠져들었다. 커다란 공포와 경악속에 그 책을 접했다. 작품은 하바로프스크 전범 재판에서 드러난 일본군731 부대가 자행한 생체실험이라는 경악한 실상을 다루고있었다.  작품은 일본에서1982년에 련재되여 단행본으로 출간되였다가 중문으로 번역, 1985년경에 조선족독자들에게도 알려 졌으니 당시 락후한 우리 말 출판풍토에서 보면 그야말로 신속히 나온 책이였다. 일본판본의 원제는 “악마의 포식”, 중문으로 번역하면서 “악마의 락원”으로 개칭되여 나왔다. 사실 그전까지만 해도 일본 731 부대나 일본군의 생체실험에 대해서는 일제에 의해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아세아 여러나라에서 일반에 까지 알려지지 않은 극비(極秘)의 실상이였다. 대표적인 세균전 부대인 731부대의 정식 명칭은 “관동군 방역급수부”로,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 흑룡강성 할빈지역에 주둔하며 생체 해부실험과 랭동실험등을 자행했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731의 만행은 명명백백히 일어난 사실이였다는것이 밝혀졌다. 이 책이 나온 뒤에야731 부대가 저지른 반인륜적인 만행이 세상에 공개되였고 세상은 경악으로 입을 하느라지가 다 보이게 딱 벌리고 말았다.     저자 모리무라 세이이찌 2 여기서 “마루타”는 인체실험 대상자를 일컫는 말로 일본말로 통나무라는 뜻이다. 악마와 같은 일본군은 산 사람을 생명없는 마루타처럼 취급했다. 중국땅에서 일제가 저지른 만행은 근자에도 끊임없이 발굴되고 있다. 불과 한달전에도 길림성 기록보관소는 지난 1950년대 장춘시의 공사 현장에서 발굴된 일본 관동군 문서 10만여건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최근 731부대와 관련된 문서들을 다수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들 731부대 관련 일본군 기록물은 1936년부터 1945년 5월 사이에 작성된 것들로, 81권의 책자와 400여건의 문서, 70여건의 시청각 자료다. 길림성 기록보관소는 일제 관동군이 패주하면서 미처 소각하지 못하고 땅속에 묻은 이들 문서를 분석한 결과 최소한 372명의 중국인, 조선인, 쏘련인 등이 731부대로 “특별이송” 돼 생체실험 등 세균 무기 개발의 도구로 씌였다고 발표했다. 731부대가 현재의 길림성 장춘시와 농안(農安)현 일대에서 세균전 준비 활동을 벌였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 관동군헌병대가 731부대에 수시로 “범죄자”들을 특별이송했다는것이다. 관동군헌병대가 1938년 1월 제정한 “특별이송에 관한 통첩”은 이송 대상자인 범죄자를 크게 간첩(파괴분자)과 사상범(민족해방운동가 및 공산주의운동가) 두 종류로 구분하고 있어 일제가 독립투사 등을 마루타로 몰아 생체 실험도구로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731부대의 생체실험도   마루타중에는 조선인도 적지않은것으로 드러났다. 이 중 조선인 4명을 포함한 318명에 관해서는 이름과 별명 공작명 원적 출생지 나이 직업 주소 활동범위 수집정보 학력 체포장소 및 시간, 731부대 이송시기 등이 상세히 밝혀졌다. 조선인 6명중 신원이 나타난 4명은- 리기수(李基洙)ㆍ28ㆍ함북 신흥군 동흥면ㆍ1941년 7월20일 체포) 한성진(韓成鎭. 30ㆍ함북 경성군ㆍ1943년 6월25일 체포) 김성서(金聖瑞. 함북 길주군ㆍ1943년 7월31일 체포) 고창률(高昌律ㆍ42 강원 회양군 난곡면ㆍ1941년 7월25일 체포) 등이다. 이들은 모두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琿春)에서 체포된것으로 기록됐다. 이 문건은 731문제 전문가 한효(韓曉)와 김성민(金成民) 731연구소장이 20여년에 걸쳐 중앙과 흑룡강성, 길림성 등의 문서 보관소에서 찾아냈다. 이 문서는 일본 관동군 헌병사령부 사령관이 서명해 발송한것으로 표지에는 “특별이송”과 “절밀(絶密)”이라고 적혀 있다. 3 요즘 섬나라 지도자들의 행각이 심상치 않다. 신세대 정치 주역이라는 아베는 앞장서서 자신들의 침략 력사를 부인하고 각가지 기행과 망언으로 아시아의 상처를 들쑤신다.  위안부는 필요한것이라고 버젓이 말하고 웃으면서 731 이라는 수자가 적힌 자위대 훈련기에 올라타고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해 중국, 한국등 동북아시안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키고있다.    731이라는 수자가 적혀진 훈련기를 타고 웃고있는 아베는 그 수자에 얼마나 많은 아시아인들의 피와 눈물이 배여있는지 모를가?   아베는 정계에 금방 나온 황구지작(黃口之雀). 입술이 노란 새끼 참새, 풋내기를 이르는 말)이 아니다. 그는 731부대가 중국 및 아시아 여러개 국에 대해 저지른 악행에 대해 분명 알고 있다. 하지만 진상을 덮어 감추려 하면서 인류양심과 국제적 도리와 위배된 정반대인 잘못된 력사관을 완고하게 견지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 외교부에서 일침을 가하고 있다싶이 “진상을 감추려고 하다가 도리여 드러난다, 닦으면 닦을수록 검어질뿐이다'(欲盖彌彰 越抹越黑)”   아베는 지금 위험한 나락을 향해 활보하고있다. 일부 극우 열기에 눈이 가려 자신과 일본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보지 못하고 있다.   국제사회와의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협력이 아니라 폐쇄적이고 리기적인 우경화의 행보, 남에게 손해를 끼치고 자기 리익만을 차리려는 소아적 외교정책은 주변국과의 마찰과 불협화음을 피할수 없다.  아베의 행각은 그야말로 인류의 리성과 량심에 대한 새로운 “생체실험”이다.  마루타의 원혼(寃魂)이 아직도 거치른 만주의 옛 벌판에서 떠돌고 있는데… 2014년 1월 23일   청우재[聽雨齋]에서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bbs_contents p{margin:0px;} The Last Of The Mohicans O.S.T. - Main Title          
6    꼭두각시들의 궁전 댓글:  조회:2800  추천:13  2013-11-12
. 력사기행.   꼭두각시들의 궁전 - 장춘 위만황궁을 찾아서 김혁     황금의 시월, 내가 창작, 련재중인 장편력사소설 “완용 황후”와 인물전기 “마지막 황후”의 집필을 위해 장춘 위만황궁(伪滿皇宮)을 찾았다. 몇해전 문학상시상식 참가차 다녀온후로 오랜만에 찾아보는 장춘이였다. 오늘날의 장춘은 길림성의 성도로서 정치, 경제, 문화와 교통의 중심지로 성장, “자동차, 삼림, 영화”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지만 지금부터 80년 전 장춘은 일제의 사주와 협박으로 세워진 만주국의 수도였다. 1912년 신해혁명이 일자 이미 고리삭은 청나라는 물먹은 토담처럼 주저앉았고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는 황제의 존호와 궁전 및 사유재산만 인정받은채 퇴위하게 된다. 이어1924년 풍옥상 (冯鈺祥)의 부대에 의해 부의는 력대의 왕후장상들이 기거하고있던 황궁에서 가차없이 쫓겨났다.  1932년 공공연히 “9.18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천진에 기거하고있던 부의를 장춘으로 데려와 회유와 공갈로 이른바 만주국을 세운다. 이는 꼭두각시 정권인 만주국을 통해 중국의 동북땅을 침노하기 위한 치밀한 음모였다. 그때부터 동북 지역은 일본의 대륙 침략을 위한 전진기지로 전락되였다.   위만황제 부의의 표준상 위만황궁을 찾는 길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장춘 기차역에서 동북쪽으로 두 정거장 거리, 1.5km가량 떨어진 광복로(光复路)5호에 위치해 있었다. 위만황궁은1962년 위만황궁박물관으로 개조되였다.  부의가 위만주국의 괴뢰황제로 있을때 거주하던 궁전옛터우에 건립한 궁전옛터형박물관이였다. 황궁으로 들어가는 정문우에 “국가AAAAA급관광명승구”라는 패쪽이 유표하게 걸려 있었다. 80원씩하는 입장권을 끊고 들어섰는데 명색이 황궁이지 그 규모가 작았다. 그 규모가 13만7,000㎡에 달한다고 했다. 비록 황색 기와를 사용해 황궁임을 나타내려고 했지만 이미 존위를 상실한 꼭두각시 황제를 위한 공간이라 그런지 황궁이라는 느낌보다는 대저택이란 느낌을 줄뿐이였다. 일제는 소금창고로 쓰이던 건물을 얼렁뚱땅 황궁으로 개조하고 부의를 들였다. 당시에는 소금이 매우 귀한 물건이었기에 소금 보관창고가 그 일대에서 가장 튼튼한 건물이었다. 그러다 보니 소금창고가 황궁으로 변신하는 이변을 겪게 된것이다. 이곳에서 부의는 일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할수 밖에 없었다. 수인(囚人)이나 다름없는 신세로 궁핍하게 지내며 1932부터 1945년까지 13년 4개월 동안 “조롱속의 새”로 머물렀다.   부의의 집무실 앞에서의 필자 위만황궁은 크게 부의가 공무를 보던 외정(外廷)과 일상생활을 하던 내정(内廷)으로 나뉘여 있었다. 외정은 부의가 정무를 처리하던 장소로 부의의 사무실이 있는 근민루(勤民楼)와 회원루(怀远楼), 가락전(嘉乐殿)이 외정에 속하며, 이 외에도 화원, 가산(假山), 양어지(养魚池), 수영장, 테니스코트, 골프장, 승마장, 창고 등 기타 부속장소가 속한다. 내정(内廷)은 부의와 그의 가족들이 생활하던 구역으로 그 중 집희루(辑熙楼)는 부의와 그의 황후 완용(婉容)의 처소였으며, 동덕전(同德殿)은 부의의 첩이였던 복귀인(福贵人)의 처소였다. 위만황궁내의 크고작은 10여채의 건물은 벽돌과 나무 구조로 된 중국의 전통적인4합원 건축과 유럽식의 층집, 동양식전각 풍격을 두루 보여주고있었는데 그 혼잡함이 엇갈린 모양은 위만주국의 식민지색채와 위만황제의 괴뢰성을 띠고있는듯 했다. 전시관에는 위만주국의 유물과 문서등 당시의 시대상을 알수 있는 다양한 소장품이 전시되여 있있다. 부의가 타던 자동차로부터 모자, 개화장, 골프채에 이르기까지 당시에 쓰던 물건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여 있었다. 부의의 자서전, 부의에 대한 연구서적들 그리고 부의가 탔던 자동차 모형도 파는 등 기념물도 다양했다. 완용이 아편을 피우는 모습을 재현한 밀랍인형 집희루를 자세히 돌아보았다. 이곳은 청나라의 마지막 황후 완용의 운명의 회한이 서린 곳이다. 집희루는 1900년대 지어진 건물로 원래는 길림-흑룡강 대외 교통국 건물로 사용됐다고 한다. 집희루의 랑하에 완용의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완용이 아편을 피우는 모습을 밀랍 인형으로 재현해 놓았다. 랑하에 걸린 사진속에서 보이는 완용은 무가내의 초췌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고있었다. 완용의 일생은 가히 비극적이였다. 황후로 책봉된 그 날로부터 그녀의 비극적인 운명은 시작되였다. 이 위만주국 황궁에서 완용은 “꼭두각시 황후”, “괴뢰황후”로 력사의 정곡에 위배된 왜곡된 삶을 살았다. 괴뢰황제의 황후로서 완용은 부귀영화를 누릴수는 있었지만 그녀의 지위는 너무나 미약하고 난처한것이여서 생활에서의 불여의와 정신적 고통을 피할수 없었다. 결국 아편과 눈물로 고독을 달래다 곁에 친지 한 사람없이 변강의 오지인 연길의 감옥에서 홀로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거두어 줄 사람조차 없은 그의 시신은 연길 모아산의 어느 산자락에 무주고혼으로 묻혔다.   관동군 대장과 만나는 부의 (밀랍인형) 일본 관동군 대장과 만나는 부의의 밀랍인형도 있었다. 당시 황제는 북경 자금성에서와 같은 위용을 이미 잃고있었다. 수족을 동아줄에 얽동이고 그 동아줄에 의해 움직여야하는 꼭두각시처럼 이곳에서 부의는 일본인들에 의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했다. 매달 관동군 사령관을 찾아 자신의 행적에 대해 자세히 보고를 해야 했다. 그저 꼭두각시 역할밖에 할수없었던 부의의 궁상이 경직된 인형에 그대로 내비쳐 있었다. 황금련휴기간이라 황궁을 찾아 력사의 유적을 밟고 그 정체를 확인하려는 유람객들로 황궁의 랑하와 층계는 발디딜 틈 없이 붐비였다. 대만에서 까지 찾아온 유람대오도 있었다. 위만황궁을 나오니 바로 곁에 “9.18 만주사변 전람관”건물이 일떠서 있다. 이곳은 일본의 만주 침략사를 한눈에 볼수있는 곳이다. 위만황궁은 지금 북경의 자금성, 심양의 고궁과 함께 중국 3대 궁정 유적지로 지정, 일본의 중국 침략 실상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애국주의 교육 기지로 변보되여 있다. 그리고 1981년에 길림성인민정부는 위만황궁을 길림성문물보호단위로 선포하였다. 이로서 위만황궁박물관은 이미 홍색관광, 문화레저, 관광비즈니스 봉사를 두루 갖춘 찾아볼만한 인문풍경구로 부상하였다. 일제의 중국 침략 야욕이 그대로 드러난 곳인 위만주황궁은 오늘날 여러 가지 내함과 독특한 가치로 하여 중국 근대식민지문화의 전형적인 기념지와 경고성적인 교육기지로 많은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영화 "마지막 황제"의 주제곡
5    교가의 복원 그리고 명동학교 댓글:  조회:2870  추천:11  2013-06-21
  교가의 복원 그리고 명동학교   김 혁     윤동주, 문익환등이 불렀던 명동학교 교가가 복원됐다. 한국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와 한국력사박물관이 공동으로 곧 펼치게 된 “국외 민족운동의 요람 명동학교”를 주제의 학술회의에서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가 명동학교 교가의 곡조로 사용된 원곡의 류입과정과 음악적 특징을 살펴보고 악보도 복원해 처음으로 공개한다.   교가 복원작업은 명동촌에서 살았던 문익환 목사의 모친 김신묵씨가 생전에 남긴 증언과 메모를 바탕으로 이루어 졌다. 당시 찬송가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 오자”의 곡조에 애족의 정신과 애교심을 고취시키는 내용의 가사를 붙여 교가를 불렀다”고 김신묵 할머니는 증언했다. “피난쳐 있으니”는 당시 “코리아”(KOREA), “조선혼” 등과 같이 애국·애족·애민의 정신을 고취시키던 노래들의 곡조에도 쓰였다. 가사의 작시자는 한글학자 박태환과 장지영 혹은 명동학교 교장인 김약연이라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명동학교는 중국조선족교육사에서 중요한 력사적지위를 갖는다. 중국조선족 학자들은 명동학교는 “중국조선족민족교육의 정초지, 반일교육의 책원지”라고 정평하고있다.   명동학교 교가에 대해 증언한 김신묵 할머니     룡정에서 륙도하기슭을 따라 약 20리를 올라가면 길가에 우뚝솟은 선바위를 지나 지신으로 가는 도중에 륙도하북쪽에는 성고촌, 중명촌, 명동촌, 장재촌이 있고 륙도하남쪽에는 소룡동, 대룡동, 풍락동 등 마을이 자리를 잡고있었는데 력사적으로 이곳을 통털어 명동지구라고 불렀다. 백여년전만 하여도 이 고장은 수림이 울창하고 잡초가 우거진 무인지대였다. 19세기말엽에 가난에 쪼들렸던 조선의 리재민들이 이 고장에 이주하여 차츰 마을이 이루어졌다. 1899년2월18일, 김약연을 위시로 종성에서 유학자로 소문 높던 김하규, 문치정, 김정규, 남위언 등 4대가족 142명이 현재의 룡정시 지신향 장재촌으로 집단이민을 해왔다. 동한이라고 하는 중국인 지주의 집 땅을 사서 정착했다.  “명동지방의 민족공동체와 반일기지의 형성에 있어서 지도적이고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것은 김약연을 위주로 한 5대가족인데 이들은 새로운 민족공동체를 건립하고 반일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조선에서부터 계획적으로 이곳에 이주하여왔다. 그들이 집단 이주한 목적은 비옥하고도 값눅은 연변의 땅을 많이 사 개간하여 잘 살아보자는것이였다.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민족을 위한 후대양성을 하자는것이였다.” 이들의 이주목적에 대해 연변대학 고 박창욱교수는 이렇게 말했었다. 1901년 김약연은 장재촌에 있는 80평방 되는 중국인의 집을 사서는 자기의 호 규암을 따서 “규암재”라는 서당을 차리고 20여명의 학생을 받아들인뒤 한학을 가르쳤다. 이것이 연변땅에 처음으로 세워진 조선인 학교였다. 뒤를 이어 김하규가 소암재, 남위원이 함한서재 등을 세웠다. 그들은 모두 스승과 제자가 힘을 모아 자체로 학전(學田)을 개간하였으며 학전에서 나는 소출로 서재를 꾸려나갔다.   지난세기초 세워졌던 명동학교와 사생들의 모습     1908년 근대지향의 신형의 학교를 꾸리고저 규암재, 소암재, 함한서재를 합쳐 명동서숙을 세웠다. 이어 김약연을 교장으로 정재면을 교감으로 문치정을 재무원으로 하는 학교의 지도부를 내왔다. 세개의 서숙이 합쳐서 꾸려졌기에 부근의 10여개 마을이 련합하여 더욱 큰 명동공동체를 이룰수 있는 계기를 마련, 금후 투철한 민족리념, 민족정신, 민족의지로 근대화한 반일민족교육을 할수 잇는 토대를 닦아놓았다. 또한 낡은 유가사상을 버리고 근대적인 민주, 민권, 자유, 평등 사상을 수용하게 되였다. 김약연교장은 조선으로부터 사학자 황의돈, 언어학자 장지영 등 지식인들을 교원으로 초빙하였으며 교학의 착안점은 반일민족독립의식을 가진 인재양성에 두었다. 1910년 3월에는 연변에서의 첫 민족중학교를 병설하였으며 황의돈, 장지영, 박태환, 김철, 김성환, 김승근, 박경철, 김순문, 김치관 등 학식이 연박한 반일지사들을 교원으로 초빙하여 교육의 질을 높였다. 1911년에는 또 조선에서의 첫 녀기자인 우봉운 등을 초빙하여 연변에서의 첫 녀자민족학교를 병성했다. 그리고 명동부근의 마을들에는 명동학교의 분교격인 야학을 설치하여 문맹퇴치와 계몽교육의 장을 마련하였다. 명동학교에서는 조선어문과 조선력사 교수를 학생들이 민족의식을 제고하는데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지정했다. 력사교육에서는 1915년 조선에서 편찬한 금서로 된 “유년필독”, “오수불망”, 등 과 연변에서 계봉우가 편찬한 “최신동국사”, “월남망국사”등을 교재로 하여 학생들에게 애국애민의 가치관, 참략자에 대한 반항정신을 불어넣었다. 력사학교수 황의돈, 리기창이 학생들의 작문이 아무리 좋아도 “반일”과 “민족독립”이라는 단어가 없으면 점수를 주지 않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명동중학교에는 학생 독립운동단체인 “학우회”가 조직됐으며 “충렬대”라는 학교연합조직을 결성하기도 했다. 특히 명동학교 출신들은 룡정의 3•13만세시위운동, 15만원 탈취사건, 봉오동•청산리 전투, 간도 5•30폭동사건 등을 이끌며 연변 항일운동의 주역으로 나섰다. 명동학교가 반일민족교육인재양성의 요람으로 명성을 날리자 북만과 로령의 연해주와 씨비리야, 조선에서까지 많은 젊은이들이 류학을 왔다. 1920년 10월 훈춘사건을 조작하여 만주에 파병된 일본군은 무고한 조선인들과 독립운동가를 학살했다. 민족운동의 근거지로 알려진 명동학교는 자연히 그 마수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일제는 명동학교에 불을 질렀으며 따라서 교장 김약연도 체포되였다.  김약연이 출옥한뒤1923년 불타버린 폐허에 또다시 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그 이듬해 특대흉년으로 명동학교는 경영난에 봉착했다. 중학부가 문을 닫게 되였고 여러 선생들도 떠나갔고 적지 않은 학생들도 룡정의 각 중학교로 전학을 해갔다. 소학교는 명동교회가 운영하며 1930년대 초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다.    1910년에 세워져서부터 폐교될때까지 10여년간 명동학교는 신문화 보급과 민족의식의 고취에 크게 기여하면서1,2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이들중에는 항일운동가와 교육자로 민족사에 방명(芳名)을 암긴 이들이 적지않다. 국민회와 간도청년회의 지도자들인 마진, 남세극, 최기학, 마룡하, 박창익, 윤영식, 김석관, 김정규, 룡정 3.13반일시위운동에서 목숨을 바친 윤준희, 림국정, 한상호,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희생된 결사대원들, 경신년대토벌에 학살당한 김순문 등 의사들 그리고 유명한 공산주의자 김광진, 연화혁명위원회 군사부장 마천룡, 8.1길동폭동의 지도자 마천목 등은 다 이 학교의 졸업생들이다. 또 조선영화의 창시자 라운규, 시인 윤동주, 송몽규, 작가 김창걸 등도 이 학교 동문이다.    룡정시문화유물조사자료에 따르면 명동학교는 원래 4채의 단층건물로 되었었다. 학교본부가 차지한 집은 길이 33메터, 너비 6.5메터였는데 서남향으로 앉은 단층벽돌집이였다. 이건물 서북쪽 50여메터되는 것에 동남향에 길이 24메터, 너비 6메터되는 단층집이 있었는데 남자중학부였고 본부 동쪽 150메터되는 곳에 서남향으로 길이 26메터, 너비6메터되는 단층건물이 있었는데 녀중학부였다 한다. 학교의 운동장은 본부의 동북쪽에 있었다. 중국조선족 교육의 효시가 되였던 명동학교의 위상을 되살리고 중국조선족의 우수한 문화교육유산을 계승발전시키고 룡정시를 중국조선족민속문화도시를 건설하려는 취지에 룡정시 지신진에서는 2010년 자금 130만원을 투자하여 명동학교 옛터를 지난 세기 20년대초 명동학교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지금 복원된 명동학교는 민족전통교육의 교양기지로, 룡정시의 또 하나의 관광명소로 떠올라있다.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3년 6월 10일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찬송가 70 장 - 피난처 있으니
4    이주민들의 짜디 짠 눈물 댓글:  조회:4998  추천:13  2012-12-01
   . 력사문화 시리즈 .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 (2)   이주민들의 짜디 짠 눈물 - 영화 “소금”      영화 “소금”의 포스터 제작: 조선 개봉: 1985년 감독: 신상옥 출연: 최은희, 정의겸, 오영환   일제강점기의 간도지역, 주인공 봉염 어머니는 일제의 핍박과 지주의 착취 속에서도 자신의 운명을 탓하며 묵묵히 살아간다.   큰 아들 봉식은 장거리에 일제에 항거하는 내용의 삐라를 뿌리다가 일본령사관에 잡힌다. 어머니의 노력으로 풀려나지만 봉식은 또 한번 가출을 한다.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찾기 위해 막내 딸 봉염이와 함께 여러 곳을 전전 긍긍하게 된다. 그 와중에 중국인 지주의 집에 식모로 들어가게 되나 지주에게 도리여 겁탈을 당하게 된다. 어머니가 겁탈을 당하는것을 목격한 봉염이가 저지하려다가 실수로 지주를 죽이게 되고 그로 인해 모녀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불운하게도 겁탈을 당한 어머니는 지주의 아이를 임신하게 되고 결국은 만삭이 되여 석방이 된다. 태여난 아이를 목 졸라 죽이려고도 했으나 결국은 그러지도 못하고 모진 삶을 이어나간다. 오직 아들 봉식을 만날 꿈으로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어머니앞에 계속 시련이 닥친다. 봉염이와 갓난아이가 전염병으로 죽게 된것이다.   가난과 질병, 지주의 착취에 부대끼던 어머니가 생존을 위해서 선택한 최후의 길은 다름아닌 소금밀수이다. 남자들도 감당키 어려운 려정으로 어머니는 고통을 참아가며 오른다. 소금밀매를 하던 중도에 밀수군들은 일본군의 추적을 받게되는데 이때 항일유격대가 나타나 어머니 일행을 구해 준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들에게서 아들이 유격대원으로 싸우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 사건들을 통해서 어머니는 그동안 생각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는다. 어머니는 그때서야 비로서 과거를 벗고 진정한 소금맛을 하는 삶을 각오한다.  밀수꾼들의 뒤를 따르지 않고 항일무장대를 향해 결연히 일어선다.   영화는 비교적 사실적인 구성과 묘사로한 가난과 모진 운명을 견디여 내는 한 녀성의 비극적인 운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신상옥 최은희 부부     영화에서 신념의 변화를 보여주는 “봉염 어머니” 역을 맡은 이가 바로 남과 북에 존재했던 두 개의 “신필름”을 대표하는 스타 최은희이며 영화의 감독은 바로 그의 남편 신상옥이다. 신상옥은 조선에 머물러 있는동안 조선의 예술기조인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따르면서”소금”을 비롯한 7편의 영화를 제작, 보다 보편적인 인간 드라마로 완성해 내였다.   영화에서 함경도 사투리로 담담히 연기해 나간 최은희의 연기력은 지금도 영화계의 호평을 잇고있다. 최은희는 한국의 영화배우로서 1928년 한국 경기도 광주에서 태여났다. 본명은 최경순. 경성기예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극단에 입단하여 무대연기를 배우고 연극을 수업했다. 1947년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세”에 출연하여 영화계에 데뷔한후 한국의 대표적인 주연 녀배우로 활약했다. 그녀는 신상옥 감독의 거의 전작품에 출연할 정도로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다 결혼, 감독과 연기자로서 완미한 결합을 보았다. “무영탑”,”자유결혼”••”성춘향”, ”•”벙어리 삼룡”,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에 출연했으며 안양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하여 연기자 양성에 힘쓰기도 했다. 1978년 부터 신상옥과 함께 조선에서 영화활동을 했다. 신상옥이 감독한 작품 “돌아오지 않는 밀사”•”탈출기”•”소금” 등에 출연했다.   최은희는 영화 “소금”으로 1985년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녀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는 조선 최초 해외영화제 수상으로 기록돼있다. 1987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씨받이”로 녀우주연상을 차지한 한국의 강수연보다 2년 더 빠른 상이다.   홀리우드 최고의 배우 마릴린 먼로와 함께 한 최은희   남북영화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신상옥(2006년 타계)과 최은희의 전기적인 영화인생을 두고 최근 할리우드에서 그들의 일대기를 영화화하기로 했다. 영화 제작은 중국의 말대황제 부의의 전반생을 영화화해 오스카 작품상을 수상, 중국관객에도 익숙한 베르톨루치 감독이 메가폰을 잡는다. “이념보다 휴머니즘에 입각해 영화를 제작하겠다”는 제작사는 이미 최은희 자서전 “최은희의 고백”과 판권 계약을 맺고 영화화에 대한 협의를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녀자 주인공 최은희 역에는 중국의 톱스타 공리가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또한 신상옥 감독 역은 할리우드에서 활동 중인 한국계 배우가 물망에 올라 있다.   영화 ”소금”은 2001년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소개되여 처음 한국관객들과 만났다. 그리고 2010년 한국 영상자료원이 마련한 신상옥 감독 특별전을 통해 신 감독의 또 다른 조선영화 “탈출기”와 함께 관객들과 만났다. 한국관객들은 이 영화를 볼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개무량했다.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이 영화를 보러 갔다 강제로 쫓겨나야 했던 씁쓸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91년, 한국의 모 대학 캠퍼스에 영화 “소금”의 상영회를 연다는 공고가 붙었다. 당시 한국인들이 조선영화를 볼수 있는 매우 드문 기회였다. 조선영화는 지금도 제한적으로 상영되지만 당시엔 아예 금지사항으로 묶여 있었다. 그래도 학생들이 상영회를 강행하려 하자 전경 부대가 최루탄과 쇠파이프를 앞세우고 교내로 들어왔다. 첫 장면이 나오는것과 동시에 모두 대피하라는 안내가 나왔다. 전경들이 최루탄을 쏘아대여 상영회는 결국 무산되엿다. 원작소설 “소금”의 저자 강경애     이렇게 사연많은 영화 “소금”은 30년대의 녀류소설가 강경애의 동명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황해도 장연에서 태여난 강경애는 31년도 남편과 함께 룡정으로 이주하여 작가생애의 대부분을 간도에서 보냈다. 당시 간도의 체류체험을 그대로 담아낸 그의 작품은 시대적 상황을 민감하게 반영해 가난과 궁핍 속에 살아가는 민중을 그려 내고 있으며 인간의 고통을 극도에까지 몰고 간 현실에 대한 아픔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그의 특수한 체험과 창작활동을 기리여 1999년 8월 8일, 룡정의 비암산 중턱에 “녀성작가 강경애 문학비”가 세워졌다. 비석의 뒤면에는 략력 과 더불어 "강경애는 다년간 룡정에서 살면서 최하층 인민들의 생활을 동정하고 올곧은 문학정신으로 간악한 일제와 그 치하의 비정과 비리에 저항하면서 녀성 특유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아름다운 문학 형상들을 창조한 우리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녀성 작가이다. "라는 비문이 새겨졌다. 강경애의 “소금”은 “신가정” 1934년 10월호에 련재되였다. “강경애의 소금”은 불행한 주인공의 행적을 통해 당시 간도 조선족이주민의 실체를 생생히 문제삼고 있다…(중략) 한 이주농민가정의 몰락과정을 다룬 이 작품에서 작가는 봉염어머니를 통해 간도 류민의 삼중적 고통- 원주민, 일제, 마적등으로부터 피해를 받고 극도의 생활고에 시달리는 현실을 들러내려 했다. 그리고 한 녀자의 삶의 양태를 통하여 이주민들의 현실극복의식을 형상화 하려 했다.” (오양호 “일제강점기만주조선인문학연구 문예출판사 1996년) 영화는 원작의 이러한 의도를 비교적 충실하게 스크린에 옮겨 내였다. 1881년 청정부는 동북지방의 최후의 금단지역인 길림성 동남부를 개방하고 훈춘에 초간(招墾)총국을 설치하여 이민실변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민실변정책이란 청정부가 변강지구의 국방을 강화할 목적으로 이민을 끌어들여 변방을 건설하기 위하여 제정한 정책이다. 이 기회에 지방관청의 관리들과 지주, 토호렬신들은 벌때처럼 달려들어 많은 토지를 차지하였다. 집, 식량, 씨앗, 부림소 및 일부 농자금을 선대해준다는 조건을 내걸고 조선농민들을 모집하여 황무지를 개간하게 하거나 소작농으로 고용하였다.   이들을 “산을 점하고있는 사람들이라”하여 “점산호(占山號)”라 불렀다. 점산호들은 강과 산을 대충 경계를 삼아 온종일 말을 타고 한 바퀴 달린 후, 그 안을 자기 땅이라고 배포유하게 선포했고 조선인들은 그들이 금 그어 놓은 땅에서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춘궁기이자 영농자금이 필요한 봄에 빌려준 돈은 가을에 7할~8할의 높은 리자를 붙여 강제 상환시켰다.   이주민들은 이른 새벽에 밭에 나가 땅거미가 진 후에야 집으로 돌아오며 일했다. 그렇게 허리가 휘게 일하고도 점산호들이 원하는대로 소작료를 내야했고 복종하지 않는 이들은 소작권을 몰수당하고 쫓겨나야 했다. 영화에서 나오다시피 당시 간도땅에는 소금이 귀했다. 소금은 장작림 군벌의 전매상품으로 거기서 얻어지는 조세 수입이 대단하였고 가격 또한 비싸게 공급하였다. 당시의 이주민들은 소금 값이 너무 비싸서 쌀보다 소금을 더 절약 하였다고 한다. 장작림 군벌은 소금 수입 증대를 위하여 소금 매상 증명제도를 만들어 소금 판매점에서 소금 매입시 증명을 받도록하고 호구별 매상을 조사해서 소비량이 작으면 밀수를 하였다고 무고한 죄를 씌워 벌금을 징수하였다. 그때의 소금은 주로 중국내지에서 오는 “암염(岩盐)”이였는데 교통이 불편하여 공급이 따라가지 못했고 값도 곱절 비쌌다. 조선에서 소금 한 소두(7.5키로)에 50전이 못되였으나 “암염”은 1원도 더 갔다. 이에 소금밀수가 성행하기 시작했다. 조선 삼봉에서 소금을 가져와서는 한 소두에 중국소금보다 조금 값을 낮추어 팔아도 사는 사람들이 많았다. 소금밀수를 통제하기 위해 두만강지역에 “사염집사대(私盐辑士队)”라는 것까지 나왔다. 검은 정장을 하고 붉은 세모방망이를 휘두르며 집사대는 여간만 감때사납게 굴지 않았다. 발각되면 소금을 몰수당하고 벌금 수십원을 해야 했다. 엄중한자는 영창에 집어 넣고 지어 사형에 처하기까지 했다. 허나 생활고를 못이겨 소금처럼 짠 눈물을 흘리며 소금밀수군으로 전락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밀수군들은 끊임없이 집사대의 눈을 피해 소금마대를 지고 산발을 타고 강을 건넜다. 1925년 한국 최초의 서사시로 일컬어지는 김동환의 시 “국경의 밤”에도 처음부터 소금밀수장면이 나온다.   "아하, 무사히 건넜을까, 이 한밤에 남편은 두만강을 탈없이 건넜을까? 저리 국경 강안(江岸)을 경비하는 외투 쓴 검은 순사가 왔다 - 갔다 - 오르며 내리며 분주히 하는데 발각도 안 되고 무사히 건넜을까?" 소금실이 밀수출 마차를 띄워놓고 밤새가며 속태우는 젊은 아낙네 물레 젓는 손도 맥이 풀어져 파! 하고 붙는 어유(魚油) 등잔만 바라본다. 북국의 겨울 밤은 차차 깊어가는데.   두만강 류역을 배경으로 한 이 장편서사시는 만주나 간도로 이주하여 머슴이 로 되거나 소금밀수꾼으로 전락해버린 이주민들의 불안과 참담한 현실을 향토색 짙은 민요적 표현을 빌어 노래하고 있다. 이렇듯 소금 한톨에도 우리의 한많은 이주사가 깃들어 있다. 영화 “소금”은 인간의 생존과 직결되는 소금을 매개로 어느 녀인의 기구한 삶을 통해 일제 강점기 이주민들의 궁핍한 삶과 현실을 자각해 가는 과정을 소금밀수라는 비화를 통해 생생하게 보여주고있다.   (다음호에 계속) "예술세계" 2012년 5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3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 댓글:  조회:4147  추천:17  2012-11-22
력사문화시리즈 력사의 굴곡 담는 스크린의 힘 -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련재를 시작하며     난 영화광이다. “중국조선족공민들중에서 나보다 영화를 더 본 사람 있으면 한번 나와보시지!” 이렇게 언감 광언(狂言)할 정도로 극성스런 영화광이다. 비디오가 가정에 보급되기시작하던 1990년대로부터 시작해 영화테이프들을 사들이고 모아들이기 시작했다. 우선 세계영화사에 길이 남을 경전영화들을, 그 다음에는 영화천국인 할리우드의 대작들을, 그 다음에는 중국신예감독들의 전위적인 영화를, 그 다음에는 요즘 폭발 적인 흥행세를 보이고있는 “한류”의 한줄기인 한국영화들을 사들였다. 좋아하는 감독 별로 우디 앨런의 작품이며 알 모도바르의 작품이며 왕가위의 작품이며 김기덕의 작품이며를, 좋아하는 배우 별로 오드리 헵번의 영화며 메릴 스트립의 영화며 멜 깁슨의 영화며를, 지어 애들의 영화라 치부할 애니메이션도 샅샅이 사들였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은 전부다 소장했다. 지어 영화평론가들이 “쓰레기”라고 지칭하는 향항무협영화나 깽 영화도 선택해 보면서 그 폭력미학이 주는 류다른 감수를 즐기기도 한다. 영화를 즐기다나니 영화간행물도 많이 사본다. “월드 스크린”, “영화보기”, “영화세계”와도 같은 잡지도 달마다 빠짐없이 사들여서는 새로운 개봉작을 주시해보고 톱스타들의 최근 동향을 알고 경전영화에 대한 해설을 까근하게 읽어보기도 한다. 그렇게 박봉을 깨서는 “새앙 쥐 콩알 물어들이듯” 사들여 소장한 영화가 테잎으로, DVD디스크로 저그만치 5천 여부, 나의 서재는 짜장 하나의 영화고(庫)와도 같다. 어려서부터 영화에 심취된 가족 분위기때문에 딸애도 한국으로 류학가서 영화감독 공부를 하고 있다. 조선족 녀류영화감독으로 되는것이 그의 꿈이다. 이렇게 내 삶을 충족히 해주는 또 하나의 친구- 영화를 나는 좋아한다. 그만큼 이제는 편집광(偏執狂) 적인 영화애호가로 돼버린 내게서 영화가 없는 일상이란 상상하기 어렵다.   비단 나뿐만 아니라 영화는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매체이다. 굳이 “난 영화가 싫어!” 할 사람을 우리곁에서 찾아보기 힘들것이다. 20세기는 문자에 못지 않게 이미지가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친 시기였다. 영화가 만들어진지 100년이 훌쩍 넘은 요즈음, 영상의 힘은 TV의 브라운관을 통해 가족 안방에 까지 속속들이 침투할 정도로 점점 더 증대되고있다. 그 방대한 이미지 제국은 문자와는 다른 독특한 방식과 우세로 력사를 해석하고 시대를 증언하고있다. “영화는 현실을 반영하는 창(窓)"이다.”고 프랑스 영화계의 거장 장 뤼크 고다르는 말했다. 프랑스의 저명한 력사 학자 마르크 페로도 “영화는 인간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증언하는 제3의 력사 기록 매체”라고 강조했다. 또 “영화는 전세계 각국에서 벌어진 혁명을 충실하게 담아온 그릇 역할을 해왔다”고 지적한다. 력사의 물줄기를 바꾼 혁명은 더 없이 좋은 영화의 소재가 됐다는것이다. 전문가들이 강변하다싶이 영화가 력사를 외면한 적은 거의 없으며 력사에 대한 영화적 독해는 완전 가능하다.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영화속 인물의  삶을 통해 그 시대를, 영화속 력사적 사실들을 통해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을 삶을 읽어낼수 있다. 이로볼때 영화가 시대와 력사를 반영하기에 사료로서 의미를 지니고있는 것은 분명하다. 한 사람의 광열적인 영화팬으로서 또 우리의 력사를 즐겨 창작소재로 삼아온 소명을 가진 작가로서 많은 영화를 즐기던 와중에 독자들로 하여금 영화로 우리의 력사를 읽게 할수 없을가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였다. 조선족력사를 설명하는데에 영화를 차용하자는 발상, 즉 영화라는 픽션을 통해 현실에 대한 성찰을 환기시키면서 논픽션의 엄연한 력사를 말하고자 하는것이다. 더욱이 자치주성립 60돌을 맞는 시점에서  영화를 통한 우리 력사보기는 의미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라는 창을 가지고 중국조선족의 생성사를 들여다보려 한다. 보다 많은 이들에게 영화보기를 통해 어떤 통사나 력사책보다는 부담감없이 중국조선족을 리해할수있는 그런 글이 될것을 바라며 첫 페이지를 펼친다.     "예술세계" 2012년 4월호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2    친일인명사전 그리고 윤동주 댓글:  조회:3642  추천:18  2012-10-18
. 칼럼 .   친일인명사전 그리고 윤동주 김 혁   1 “친일인명사전”이 한국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 의해 발간됐다. 3권이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되여있고 수록된 친일파 명단만해도4389명이 된다고한다. 사전편찬위원회에서는 친일파의 정의를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에 이르기까지 일본제국주의의 국권침탈•식민통치•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함으로써 우리 민족 또는 타민족에게 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 직•간접적 피해를 끼친 자”로 규정했다. 편찬자들은 친일파선정 원칙에서 “지식인과 문화예술인은 그 사회적 도덕적 책무와 영향력을 감안해 보다 엄중하게 책임을 물었다”고 밝혔다. 이어 “생계형 부일협력자는 뚜렷한 친일행적이 없으면 제외하되 권력과 부, 명예를 쫓는 출세형 협력자는 엄중하게 취급했다”고 밝혔다. 높은 위치의 정계인사들뿐아니라 문화예술계의 이름이 쟁쟁한 인사들도 대량 포함되여 세간을 경악케 하고있다. 한국 각계의 논란이 가열화되는 등 역풍이 거세지만 력사적 진실 규명을 위한 작업은 계속 되고있다.  2 지난세기 30,40년대는 일제의 악랄한 식민지 정책에 우리 민족의 정기가 말살되고 민족문학사가 실종된 칠흑처럼 어두운 시대였다. 일제는 국가총동원법을 만들어 물자를 수탈하고, 징용령을 만들어 조선인을 군인, 보국대, 로무자, 위안부로 징발했다. 1938년에는 조선어교육을 폐지하고 아침마다 일장기를 향해 황국신민 서사를 암송하게 했다. 1940년에는 창씨개명을 단행해 조상이 준 이름을 일본식대로 뜯어고치게 했다. 그 마수는 문화예술계에도 미쳤다. 조선말로 된 유명 일간지며 문학지들을 폐간시켰고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 등 어용 문학단체를 만들어 침략전쟁과 징병제를 선전하게 했다. 그러나 더욱 슬픈것은 민족의 수난기에 안일과 부귀를 위해 일제에 무릎 꿇은 문인들의 친일행위였다. 그동안 민족주의 작가로 주목받던 문단의 대표적 인사들이 대거 친일문학의 대렬에 끼여든것이다. 지울수없는 오명을 진 문학인들로는 신체시 “바다에게서 소년에게”로 민족시의 전환점을 지었던 시인 최남선, “화사집”, “귀촉도”등  탐미적인 시편들로 민족어의 가능성을 한껏 키운것으로 평가되였던 시인 서정주, 본격적인 근대문학의 확립에 크게 이바지했던 “감자”, “운현궁의 봄”의 저자 소설가 김동인… 등등이다. 그 전형으로 개화계몽기부터 1920년대까지 언제나 민족주의적인 립장에서 앞장 섰던 “무정”, “흙”의 작가 리광수를 들수있다. 리광수는 온갖 친일 단체에 참여하여 그 뛰여난 문필가의 기량을 황국 신민화, 징병․징용․학병․정신대 권고문 따위의 글을 써내는데 허비했다. 남보다 앞서 꼭두새벽부터 줄을 서가며 창씨개명을 했고 “조선인으로서의 본질과 껍데기까지 모조리 던져버리고 일본인으로 변종할”것을 공공연히 웨쳤다. 일본에까지 건너가 류학생들을 선하며 일본군에 입대하여 천황폐하를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지자고 선동했다. 근시안적이고 삐뚤어진 그들의 행태는 우리의 민족문학사에 치명적인 얼룩을 남기고 말았다. 3 문단을 대표하고 민족의 지성을 상징한다는 이들이 하나같이 “텐노헤이카(天皇陛下)”를 칭송하고 “황군(皇军)”을 위해 비루한 붓을 들고있을때, 숭앙했던 문인들과 자기 학교의 교장마저 친일에 앞장설때 중국 동북변강의 오지인 룡정에서도 수십리 떨어진 작은 촌부락에서 태여난 한 문학청년이 괴로움에 찬 시편“참회록” (忏悔录)을 내놓았다. 윤동주, 식민지시기 스물네살의 문학청년이 령혼의 잉크를 재워 각혈처럼 지었던 그 시작(诗作)은 오늘도 우리들의 마음을 전률하게 만든다. “참회록”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가 1942년 일본류학을 준비할 무렵에 쓴 시이다. 시인은 부끄러움을 담은 자기고백을 또박또박 원고지에 각인해 내려갔다. 지금까지 보존되여있는 원고의 하단 여백에는 도일(渡日), 시란? 문학, 생존, 생과 같은 시인의 고뇌를 짐작케 하는 절절한 락서들이 남아있다. “… 래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굴욕, 치욕, 릉멸, 방황, 그 어떤 말을 가져다 붙인다 해도 그때 그 시가 담고 있는 고뇌와 슬픔과 반성을 감당하기에는 모자란다. 그리고 2년후 일본 도지샤대에 수학하던 윤동주는 “불령선인”으로 체포되여 후쿠오카의 감옥에서 이슬로 사라진다. 그의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것은 일제가 전시에 수요되는 혈장을 얻기위해 생리식염수를 투여하는 생체실험을 한데서 기인된것이라고 한다.   윤동주는 식민지체재에 동화될수도 저항할수도 없던 여리고 섬세한20대의 문학 청년이었다. 당시 그에게서 생의 출구는 막혀있고 현실은 랭혹하고 폭력적이며 미래는 어둡고 삶의 리정표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내면은 분열을 거듭했다. 윤동주는 “나약”했고 “감성적”이였지만 감정적이지는 않다. 그는 주변부 식민지의 생활과 속악한 삶의 행태에 수치심을 느꼈다. 의지할수 있는 곳을 찾지 못해 떠돌던 그의 마음은 종국에는 때묻지않은 령혼의 시줄에 깃들었다. 윤동주의 시를 떠받치고있는 정신적 바탕은 시대적 현실에 대해 방관자적 립장에 처해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한 자기반성과 고뇌라 할수 있다. 그의 시의 중심적인 심상을 이루고있는 “부끄러움”은 이 같은 자기 반성과 고뇌의 필연적인 결과인것이다. 물론 당시는 극한의 식민지 현실에서 그 누구도 정상적인 문학을 할수없는 상황이였다. 그러나 민족의 위기에 가장 먼저 민족문학의 전통과 자존을 지켜야할 문인들이 저항은 커녕 오히려 굴종과 어용과 변절로 민족문학사를 훼손한 친일행위에 민족사의 심각한 비극이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한국의 지성인들이 사회의 압력과 역풍에도 친일인명사전을 굳이 간행한것도 바로 이러한 력사의 진상을 제대로 규명하여 민족 정통성의 확립과 정의로운 사회의 구현을 위한 취지여서였다. 력사의 갈피에 지울수없는 오점으로 남은 이러한 문인들의 행태처럼 오늘날에도 여전히 보잘것없는 눈높음과 영욕에 매달려 권력과 리념과 공리의 뒤꽁무니를  따라서 철새처럼 이동하는 문인들을 찾아볼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윤동주를 다시금 떠올려 보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윤동주, 그의 시를 읽을때마다 우리는 먹먹한 시대를 돌아보게 되고 그의 이름을 불러보는것만으로도 우리는 부끄러워진다. 민족과 언어를 빼앗겼던 정말 암울하고 힘들었던 식민지 시대에 자아와 민족이 부재한 력사적 현실을 직시하고 이를 초극하고자 윤동주는 참회와 헌신의 신앙적 결의로 마침내 도래할 미래의 시간과 공간을 확신하면서 “주어진 길을 걸어갔”다. 영글어가는 겨울하늘의 별이 또렸하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는 고향의 시인이 읊었던 별의 밝음을 낱낱이 헤고 있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서시 ( 윤동주, 이용주, 이명주 )  
1    이발과 혀 댓글:  조회:3533  추천:12  2012-08-24
. 칼럼 . 이발과 혀   김 혁     1    상용은 은(殷)나라 때의 저명한 학자였다. 상용이 운명할 때 그가 가장 아끼는 제자였던 로자(老子/ 중국 고대의 철학자․도가(道家)의 창시자)가 곁에서 스승님의 마지막 길을 바랬다.     로자가 눈물을 삼키며 침대머리에서 스승에게 물었다.     -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제자에게 어떤 남길 말이 있으십니까?     상용이 말했다.     - 너 나의 입안을 찬이 들여다보아라. 아직 혀가 그대로 있느냐?     - 네 있습니다.     - 그러면 이발은?     - 이발이 모두 물러나고 없네요.     상용이 로자를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 이에 깃든 리치를 알겠느냐?     로자가 사색에 잠겼다가 말했다.     - 제자의 소견으로 보면 너무 강한 것은 빨리 쇠퇴하고 부드러운것만이 오래동안 지속된다는 그런 리치인 것 같군요. 상용은 가까스로 웃음 지으며 자신의 걸출한 제자를 바라보았다.    - 그래. 맞어. 천하의 모든 섭리도 바로 이와 같은 거여.      그후로 로자는 스승의 뜻을 이어 유약(柔弱)이 강강(刚强)을 이기는 리치로서 천하를 허정(虛静)으로 돌리고자 했다.     저서에서 수차 이유극강 (以柔克刚)의 리치에 대해 언급했다.    以 : 써 이 / 柔 : 부드러울 유 / 克 : 이길 극 / 剛 : 강할 강    부드러운 것으로 강한 것을 이긴다는 뜻.     로자는 에서 이를 단단한 나무가지에 비유를 했다.    태풍이 불면 단단한 나무가지는 꺾여버리지만 부드러운 풀은 바람의 흐름대로 굽혀지기만 하지 손상이 없다.    겨울철이면 수림속 나무들이 많이 꺾인다. 어떤 흉맹한 동물이나 세찬 바람에 꺾이는것이 아니다. 사뿐사뿐 내려 쌓이는 하얀 눈에 나중에는 꺾이고 마는것이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하는 자연의 법칙의 모습이다.   로자는 또한 유약의 대표적인 것을 물이라 하였다.      로자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말을 이렇게 역설적으로 표현했다. 더구나 겉과 속으로 이를 모두 갖춘 이라면 이야말로 진정한 강함이라고 강조했다. 이처럼 약자가 강자를 이기고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기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막상 이것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을 로자는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이처럼 물은 자신을 낮추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도 흐른다. 그 겸손함 때문에 물은 큰 강을 만들고 거대한 바다를 만나 천하를 감싸는 최후의 승자가 된다. 내가 흘러야 할 때인지 아니면 잠시 쉬면서 력량을 길러야 할 때인지 물은 정확히 안다. 흐르다 웅덩이에 갇히면 력량도 안되면서 무리하게 그 웅덩이를 넘으려고 경거망동하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차서 그 웅덩이를 넘을 만한 힘이 생겼을때 비로소 물은 또다시 흐른다. 정말 순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물이다.   진퇴를 정확히 알고 처신하는 것은 물에게서 배워야 할 소중한 지혜다. 상대방이 강하면 피할 줄 알아야 한다. 병법에서 말하는 생존의 전략이다. 순응과 유연함은 결코 소극적인 모습이 아니다. 다가오는 상황에 나를 맞추는 어쩌면 더 힘든 적극적인 삶의 방법일지 모른다. 세상과 한 호흡으로 순응하며 살라는 인생철학을 물에서 본다.   사람의 정신도 그렇다. 굳세기도 하지만 또 부드럽지 않으면 아니된다. 산전, 수전을 겪어 본 사람이라면 때를 알고 기다릴줄 아는 물 같은 여유가 있다. 한가지 일에 일희일비(一喜一悲)하지 않는 진득한 모습을 가지고있다. 만만한 여유 속에서 느껴지는 그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중국의 유명한 권법(拳法)인 태극권에는 의 리치가 잘 체현되어 있다.     태극권이 강함우에 유를 두는 리유는 대체로 로자의 에서 묘사된 는 원리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 사족(蛇足)이지만 은 유도에서도 강조하는 말이기도 하다. 또 다른 리유는 실행자로 하여금 상대방과의 정면충돌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막강한 실전에서 항상 강함만이 승리할수 있다는 신념은 오류.   여기서 부드러울 유(柔)자를 찬히 뜯어보면 矛(창 모)와 木(나무 목)으로 구성되여있다. 창의 나무자루라는 뜻이다. 훌륭한 창은 모나게 벼린 쇠도 강해야겠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나무자루의 유연한 탄력이라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글자다. 부드러움과 강함을 겸비한 창이기에 18반 병기에서 애용 받음은 물론이다.   2    이라는 옛 이야기가 있다. 닭을 빌려 말대신 타고 간다는 이 이야기에서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 선비의 지혜가 배꼽을 잡는다.   김씨라는 우수개소리를 곧잘 하는 선비가 있었다. 하루는 말을 달려 오랜만에 친구 집을 찾았는데 옹색한 친구가 술상을 내온걸 보니 안주를 차린것이 다만 푸르죽죽 소채(蔬菜)뿐이였다.   그럼에도 주인이 입막음으로 먼저 말하기를 . 그때 마침 마당에서는 살찐 닭 여러 마리가 모이를 쫓고있었다. 이를 보고 김선비가 한마디 했다. 이에 주인이 정색하며 되물었다. 고. 그러자 선비가 벌씬 웃었다. 이렇게 까박을 주자 주연상이 웃음으로 둥글어졌고  주인도 크게 자책을 머금으며 닭을 잡아서 친구를 대접했다고 한다.   촌철살인(寸铁杀人)의 재치가 사람들의 관계를 이렇게 부드럽게 만든다. 대결을 피하고 화해를 이끌어내는 웃음의 힘이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3    이유극강 (以柔克刚)은 동방의 전매품만은 아닌것 같다. 동방이나 서구를 막론하고 현명한 선인들은 이미 이한 리치에 대해 잘 깨쳐 알고 있나보다.      미국 력사상 가장 훌륭한 대통령으로 존경받고 있는 링컨이 대통령 선거에 나섰을 때의 일화다. 일리노이주 련방상원 의원 선거에서 링컨은 부와 지위의 상징인 민주당의 더글러스와 무려 7회에 걸쳐 라이벌로 맞붙게 되였다.     고 더글러스는 호언장담하였고 강력한 태세를 보이며 링컨을 향해 극언을 퍼부었다. 그런 더글러스에 맞서 링컨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막강한 더글러스와 미풍약세의 링컨의 겨룸, 허나 결과 두 사람 중에 누가 승자로 되었나 하는것은 더 말치 않아도 다 아는 일이다. 론리는 강한것이였지만 웃음은 가벼운것이였다. 만약 링컨이 정적들의 공격에 분로로써 맞대응을 했다면 결과는 어떠했을까? 오히려 웃음이라는 가벼운 전략, 부드러운 전략을 선택한 결과 링컨은 미국의 정치사에 가장 존앙받는 우뚝한 존재로 남게 된 것은 아닐까.    어떤 개인의 처세준칙에도 좋지만 더 나아가서 민족과 사회 더 넓은 령역에까지도 이 리치는 적용된다.     섬세하고 감성적인 부드러움이 거대하고 강한 것을 이기고 있다.  강력한 철을 통한 산업보다는 부드러운 소프트웨어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요즘, 일상에서 강한것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을 부드러움이 해내고 있다.    고로 진정으로 강한 자는 자신의 딱딱한 껍질을 스스로 깨는 고통을 의연히 마주할수 있는 자이다. 어릴 적 읽었던 우화 이 곁들어 떠오른다.     바람과 태양이 내기를 하였다. 길가는 나그네의 옷을 벗기는 게임. 결과 나그네는 강한 바람에는 옷을 벗지 않았으나, 부드럽고 따스한 태양의 열기에 더는 참지 못하고 옷을 몽땅 벗었다.    이발과 혀의 생존리치! 다혈질이고 성미가 우직한 내게 있어서 전에 읽은 수권의 책보다 강하게 나의 뇌리를 때린, 작으나 큰 경구 한마디였다.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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