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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가의 복원 그리고 명동학교
2013년 06월 21일 08시 40분  조회:2871  추천:11  작성자: 김혁
 
교가의 복원 그리고 명동학교
 
김 혁
 
 
윤동주, 문익환등이 불렀던 명동학교 교가가 복원됐다.
한국 규암김약연기념사업회와 한국력사박물관이 공동으로 곧 펼치게 된 “국외 민족운동의 요람 명동학교”를 주제의 학술회의에서 민경찬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교수가 명동학교 교가의 곡조로 사용된 원곡의 류입과정과 음악적 특징을 살펴보고 악보도 복원해 처음으로 공개한다.
 
교가 복원작업은 명동촌에서 살았던 문익환 목사의 모친 김신묵씨가 생전에 남긴 증언과 메모를 바탕으로 이루어 졌다. 당시 찬송가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 오자”의 곡조에 애족의 정신과 애교심을 고취시키는 내용의 가사를 붙여 교가를 불렀다”고 김신묵 할머니는 증언했다.
“피난쳐 있으니”는 당시 “코리아”(KOREA), “조선혼” 등과 같이 애국·애족·애민의 정신을 고취시키던 노래들의 곡조에도 쓰였다.
가사의 작시자는 한글학자 박태환과 장지영 혹은 명동학교 교장인 김약연이라는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명동학교는 중국조선족교육사에서 중요한 력사적지위를 갖는다. 중국조선족 학자들은 명동학교는 “중국조선족민족교육의 정초지, 반일교육의 책원지”라고 정평하고있다.
 

명동학교 교가에 대해 증언한 김신묵 할머니
 
 
룡정에서 륙도하기슭을 따라 약 20리를 올라가면 길가에 우뚝솟은 선바위를 지나 지신으로 가는 도중에 륙도하북쪽에는 성고촌, 중명촌, 명동촌, 장재촌이 있고 륙도하남쪽에는 소룡동, 대룡동, 풍락동 등 마을이 자리를 잡고있었는데 력사적으로 이곳을 통털어 명동지구라고 불렀다.
백여년전만 하여도 이 고장은 수림이 울창하고 잡초가 우거진 무인지대였다. 19세기말엽에 가난에 쪼들렸던 조선의 리재민들이 이 고장에 이주하여 차츰 마을이 이루어졌다.
1899년2월18일, 김약연을 위시로 종성에서 유학자로 소문 높던 김하규, 문치정, 김정규, 남위언 등 4대가족 142명이 현재의 룡정시 지신향 장재촌으로 집단이민을 해왔다. 동한이라고 하는 중국인 지주의 집 땅을 사서 정착했다.
 “명동지방의 민족공동체와 반일기지의 형성에 있어서 지도적이고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것은 김약연을 위주로 한 5대가족인데 이들은 새로운 민족공동체를 건립하고 반일인재를 양성할 목적으로 조선에서부터 계획적으로 이곳에 이주하여왔다. 그들이 집단 이주한 목적은 비옥하고도 값눅은 연변의 땅을 많이 사 개간하여 잘 살아보자는것이였다.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서 민족을 위한 후대양성을 하자는것이였다.”
이들의 이주목적에 대해 연변대학 고 박창욱교수는 이렇게 말했었다.
1901년 김약연은 장재촌에 있는 80평방 되는 중국인의 집을 사서는 자기의 호 규암을 따서 “규암재”라는 서당을 차리고 20여명의 학생을 받아들인뒤 한학을 가르쳤다. 이것이 연변땅에 처음으로 세워진 조선인 학교였다. 뒤를 이어 김하규가 소암재, 남위원이 함한서재 등을 세웠다. 그들은 모두 스승과 제자가 힘을 모아 자체로 학전(學田)을 개간하였으며 학전에서 나는 소출로 서재를 꾸려나갔다.
 

지난세기초 세워졌던 명동학교와 사생들의 모습
 
 
1908년 근대지향의 신형의 학교를 꾸리고저 규암재, 소암재, 함한서재를 합쳐 명동서숙을 세웠다. 이어 김약연을 교장으로 정재면을 교감으로 문치정을 재무원으로 하는 학교의 지도부를 내왔다. 세개의 서숙이 합쳐서 꾸려졌기에 부근의 10여개 마을이 련합하여 더욱 큰 명동공동체를 이룰수 있는 계기를 마련, 금후 투철한 민족리념, 민족정신, 민족의지로 근대화한 반일민족교육을 할수 잇는 토대를 닦아놓았다. 또한 낡은 유가사상을 버리고 근대적인 민주, 민권, 자유, 평등 사상을 수용하게 되였다.
김약연교장은 조선으로부터 사학자 황의돈, 언어학자 장지영 등 지식인들을 교원으로 초빙하였으며 교학의 착안점은 반일민족독립의식을 가진 인재양성에 두었다.
1910년 3월에는 연변에서의 첫 민족중학교를 병설하였으며 황의돈, 장지영, 박태환, 김철, 김성환, 김승근, 박경철, 김순문, 김치관 등 학식이 연박한 반일지사들을 교원으로 초빙하여 교육의 질을 높였다.
1911년에는 또 조선에서의 첫 녀기자인 우봉운 등을 초빙하여 연변에서의 첫 녀자민족학교를 병성했다. 그리고 명동부근의 마을들에는 명동학교의 분교격인 야학을 설치하여 문맹퇴치와 계몽교육의 장을 마련하였다.
명동학교에서는 조선어문과 조선력사 교수를 학생들이 민족의식을 제고하는데 있어서의 가장 중요한 과목으로 지정했다.
력사교육에서는 1915년 조선에서 편찬한 금서로 된 “유년필독”, “오수불망”, 등 과 연변에서 계봉우가 편찬한 “최신동국사”, “월남망국사”등을 교재로 하여 학생들에게 애국애민의 가치관, 참략자에 대한 반항정신을 불어넣었다. 력사학교수 황의돈, 리기창이 학생들의 작문이 아무리 좋아도 “반일”과 “민족독립”이라는 단어가 없으면 점수를 주지 않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당시 명동중학교에는 학생 독립운동단체인 “학우회”가 조직됐으며 “충렬대”라는 학교연합조직을 결성하기도 했다. 특히 명동학교 출신들은 룡정의 3•13만세시위운동, 15만원 탈취사건, 봉오동•청산리 전투, 간도 5•30폭동사건 등을 이끌며 연변 항일운동의 주역으로 나섰다.
명동학교가 반일민족교육인재양성의 요람으로 명성을 날리자 북만과 로령의 연해주와 씨비리야, 조선에서까지 많은 젊은이들이 류학을 왔다.
1920년 10월 훈춘사건을 조작하여 만주에 파병된 일본군은 무고한 조선인들과 독립운동가를 학살했다. 민족운동의 근거지로 알려진 명동학교는 자연히 그 마수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일제는 명동학교에 불을 질렀으며 따라서 교장 김약연도 체포되였다.  김약연이 출옥한뒤1923년 불타버린 폐허에 또다시 학교를 세웠다.
그러나 그 이듬해 특대흉년으로 명동학교는 경영난에 봉착했다. 중학부가 문을 닫게 되였고 여러 선생들도 떠나갔고 적지 않은 학생들도 룡정의 각 중학교로 전학을 해갔다. 소학교는 명동교회가 운영하며 1930년대 초까지 명맥을 유지하였다.   
1910년에 세워져서부터 폐교될때까지 10여년간 명동학교는 신문화 보급과 민족의식의 고취에 크게 기여하면서1,2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이들중에는 항일운동가와 교육자로 민족사에 방명(芳名)을 암긴 이들이 적지않다.
국민회와 간도청년회의 지도자들인 마진, 남세극, 최기학, 마룡하, 박창익, 윤영식, 김석관, 김정규, 룡정 3.13반일시위운동에서 목숨을 바친 윤준희, 림국정, 한상호,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에서 희생된 결사대원들, 경신년대토벌에 학살당한 김순문 등 의사들 그리고 유명한 공산주의자 김광진, 연화혁명위원회 군사부장 마천룡, 8.1길동폭동의 지도자 마천목 등은 다 이 학교의 졸업생들이다. 또 조선영화의 창시자 라운규, 시인 윤동주, 송몽규, 작가 김창걸 등도 이 학교 동문이다.
  
룡정시문화유물조사자료에 따르면 명동학교는 원래
4채의 단층건물로 되었었다. 학교본부가 차지한 집은 길이 33메터, 너비 6.5메터였는데 서남향으로 앉은 단층벽돌집이였다. 이건물 서북쪽 50여메터되는 것에 동남향에 길이 24메터, 너비 6메터되는 단층집이 있었는데 남자중학부였고 본부 동쪽 150메터되는 곳에 서남향으로 길이 26메터, 너비6메터되는 단층건물이 있었는데 녀중학부였다 한다. 학교의 운동장은 본부의 동북쪽에 있었다. 중국조선족 교육의 효시가 되였던 명동학교의 위상을 되살리고 중국조선족의 우수한 문화교육유산을 계승발전시키고 룡정시를 중국조선족민속문화도시를 건설하려는 취지에 룡정시 지신진에서는 2010년 자금 130만원을 투자하여 명동학교 옛터를 지난 세기 20년대초 명동학교의 모습대로 복원하였다.
지금 복원된 명동학교는 민족전통교육의 교양기지로, 룡정시의 또 하나의 관광명소로 떠올라있다.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3610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찬송가 70 장 - 피난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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