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그네는 누굴 위해 흔들리나
- 막언의 단편소설 “백구와 그네 (白狗秋千架)”
김 혁
막언, 이제 더는 소개가 필요없는 작가다. 서방작가들의 전용물이나 다름없던 노벨문학상의 트로피를 당당하게 앗아내 중국인들의 오랜 숙원을 이룩해준 큰 작가다. 평단과 독자들은 그를 세계적인 문호 “윌리엄 버크너, 마르케스와 비견되는 작가”, “중국 현대 문학의 거장”이라고 극찬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막상 그의 작품은 영화때문에 더 알려진 “붉은 수수”정도에 그치고 더 풍요한 그의 작품세계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적다. 적어도 조선족문단과 독자들에게는 말이다. 막언의 작품중 굵직하고 호흡이 긴 장편외에도 단편수작들이 적지 않은데 “백구와 그네”가 바로 그중 한부이다.
소설의 배경은 막언의 여느 소설처럼 또 한적한 농촌 그의 고향마을이다.
고향을 떠난지 꼭 십년이 되여 주인공은 고향으로 돌아온다. 연도에서 그는 고향의 강아지와 그 강아지의 주인인 “난”을 만난다.
젊은 시절 두사람은 향 문예선전대의 골간이였다. 함께 노래부르고 악기를 다루었던 둘은 인민해방군에 가입하려는 꼭 같은 꿈을 가지고 있었다.
어느한번 함께 그네를 타다가 그녀는 눈을 다쳐 애꾸눈이 되고 그 신체적 결손때문에 성정미도 포악한 벙어리 남자에게 숙명적으로 얹히게 된다. 그후 한사람은 시가지로 가서 강사로 되였고 한 사람은 오지에 남아 세쌍둥이 엄마, 데데한 시골아낙으로 전락해버렸다.
주인공은 아름답던 그녀의 비참한 조우를 피부로 부딪히고 호흡 가까이 느끼면서 고향의 실체에 대해 다시 확인하는 시간을 가진다.
전원을 배경으로 한 러브스토리를 기대했던 독자들이고보면 이 소설은 너무나도 큰 형벌이다. 소설은 차겁게, 그리고 잔혹함에 가깝게 생활의 고단함을 원색 그대로 보여준다.
돌다리, 흰 강아지, 수수밭 이러한 흔히 볼수있는 고향의 다정다감한 풍경들과 그 풍경속에서 이어지는 이야기들은 서로 상사한것 같지만 막언의 소설에서는 또 다른 비극을 잉태하는 매개물로 존재하고있다.
“뿌리찾기(寻根)문학 류파”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는 막언의 작품들은 농촌의 우매함과 그 우매함에 갇힌 어둠에 대해 회피하지않는다. 고향은 그에게서 아름답게 동경하는 곳이자 루추한 현실이 숨쉬는 곳이다. 하여 그의 작품들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 혹은 원망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소설에서도 지어 다른 남자에게서 씨종자를 빌리는 락후한 행태마저 크라이막스로 보여주려한다. 그리고 거기서 뚝 끊음으로서 독자들에게 무한한 상상공간을 펼쳐 준다.
잔혹한 현실에 대한 가감없는 폭로속에 시골사람들의 삶의 질에 대한 질박한 추구가 슴배여 있어 이야기는 간단한듯 해보이지만 그 흙감탕의 밑바닥을 사정없이 파헤쳐 나중에 드러나는 하얀 옥석같은 내함은 실로 놀랍다.
이 소설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소설 곳곳에 장치한 상징의 적절한 리용이다.
소설에서 들머리에 등장하고 제목에도 나오는 백구는 하나의 상징이다.
농촌에서 흙길에서 뛰노는 백구는 도회지에서 재미삼아 기르는 애완견과 차이가 있다. 농촌의 토종개들은 집을 지키는 구실을 곧 잘하는 개로서 가족의 하나의 구성원이다. 여기서 강아지는 아직도 하대받는 농촌사람에 대한 상징이다. 또한 늙고 병든 강아지이지만 촌부락을 손금보듯 꿰지르는 강아지로 드팀없이 고향을 지켜나가는 그들의 신조를 보여주기도 한다. 저층에서 의연하고 구순하게 살아가는 시골사람들을 암시하는것이다.
그네 역시 상징의미를 갖는다.
그네는 농촌에서 유일한 오락기구일수 있다. 장바 한컬레와 나무조박으로 무어진 한낱 수수한 그 그네가 주는 그 재미는 도회지에서 돈 퍼주고 타는 공원의 놀이기구에 못지 않다. 그 간단하기 그지없는 툽상스러운 기구에 몸을 맡기고 사람들은 고단한 몸과 마음을 쉬운다. 그런데 소설속에서 그 줄이 끊저져 버렸다. 이는 바로 전통과 현대와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 단절이 녀주인공 난의 신체의 결손을 빚었고 그 몸의 결손보다 더 큰 마음의 상처를 빚는다.
작중인물의 이름도 나름의 뜻을 갖고있다. 녀주인공의 이름은 따스할 “난(暖)”이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겪은 인생사는 차갑기만 하다. 이쁜녀로 부터 억척녀로 변한, 변해야만 했던 주인공, 차거운 세상의 밑바닥에 내쳐진 그녀는 그누구보다도 따스함에 대한 갈망으로 차있다. 소설의 말미에서 남의 집 아이를 잉태하려드는 해괴한 거동은 바로 따스함과 희망에 대한 동경의 발로를 적라라하게 보여준다.
또 그녀의 애꾸눈은 아름다움이 상실된 편벽한 시안을 상징하며 작가의 눈에 이률배반으로 비친 고향의 모습을 말해 준다.
난의 벙어리 남편 역시 하나의 상징으로 볼수있다. 남편뿐만 아니라 그 벙어리와 낳은 세쌍둥이마저 벙어리이다. 실어는 대화와 소통의 단절을 의미한다. 세 쌍둥이는 바로 그러한 우매가 련속되여 감을 보여주며 고난의 련속성을 암시한다. 한 시골농가의 볼썽사나운 결손가족으로부터 도농간의 경제적 격차, 빈곤의 영속화, 황폐한 농촌마을의 풍경과 그들에게 내려진 운명의 잔혹한 세례를 보여주는것이다.
소설의 초반부터 주인공의 고향순방은 커다란 상징으로 시작된다. 리향과 귀향, 이는 바로 우리의 허다한 문학경전들이 즐겨쓰는 수법으로서 정신의 보금자리에로의 깃듦을 보여주는것이다.
고향은 시골마당에 두고 온 그네처럼 주인공의 마음속에서 그냥 흔들리고 있었다. 그렇게 어제날에 대한 회구의 마음으로 찾아 나선 고향, 고향은 아직도 무가내하게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다.
막언은 토종개를 앞세워 우리의 독자들을 안내해서는 애꾸눈 녀주인공과 함께 하나지만 다른 눈동자에 비해 더 극명한 시선을 제공하면서 멀미 나는 그네대에 올려 놓고 흔들어 잠자던 우리의 감성을 일깨워준다. 멀미나는 경험 그것은 바로 령혼의 흔들림이요, 진통이다.
초기소설이고 단편이지만 이 소설은 막언의 창작에서 전환점인 작용을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부터 그의 작품들에는 고밀향이라는 환상의 고장이 처처에 나오기 때문이다.
막언은 어느 한번의 창작담에서 “고향의 산천과 시내가, 풍토와 인정, 가족들의 별난 경력, 고향에서의 그 혹독하고 어려웠던 생활, 고향 친지들의 입을 통해 들었던 전설과 지나간 이야기 등이 하나하나 또렷하게 머리속에 떠올랐습니다. 제 앞에 수많은 인물들이 서로 앞다투어 나타나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며 소설로 써달라고 아우성쳤습니다. 그 당시 저는 가난한 소시민이 갑작스레 엄청난 재화를 얻은것처럼 소설을 휘갈겨 쓰기 시작했습니다. 쓸 만한 이야기 감이 없던 시절이 지나가고 미처 다 쓰지도 못할 만큼의 이야기가 넘쳐나는 시절을 맞이했습니다.”고 밝혔다.
바로 이 소설을 쓰면서 부터 막언은 중국과 해외의 우수한 작가들로부터 받은 깨우침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문학 공화국”인 “고밀 동북향”을 세웠던것이다. 이곳은 단순히 고향이란 의미를 넘어 막언의 창작의 밑그림과 같은 문학적 공간으로 설정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 막언에게 가장 큰 고통은 쓸 만한 소재가 없다는것이였다. 종종 소재를 찾기 위해 잡지나 신문을 정신없이 뒤적이고 지방의 작은 마을을 찾아다니거나 공장을 방문해 취재를 하곤 했지만 돌아온 후에는 머리속이 텅텅 비여 있는것 같았고 원고지앞에 앉아서는 단 한 글자도 쓰기 어려워 했다.
하지만 이 소설을 쓰면서 “마치 알리바바가 ‘열려라 참깨’라는 주문을 알게 된 것처럼 눈앞이 갑자기 밝아졌습니다.”고 막언은 창작담에서 말했다.
막언의 작품으로 보면 짧고 단순한 내용,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극명하게 운명의 원색을 가감없이 드러내 보인다. 막언의 소설에서는 이러한 숙명감이 자주 보이는데 꼭 마치 희랍의 비극물처럼 처량미와 비장미를 보여준다. 그리하여 기쁨 혹은 슬픔, 격앙 혹은 저조의 행간을 오가며 기복이 높낮은 운명의 다단함을 보여주는 그의 작품은 여타의 다른 작가와 같은 골격,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소설은 현대인들의 메마른 심성을 흔들리는 그네의 세례를 받게 하여 농촌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심각한 사고를 보여주면서 우리들의 근본적인 가원(家园)인 향촌의 정신적요의(要义)에 대해 재해석하고 있다.
“도라지” 201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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