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종이 바뀌여져서 잠들줄 모르는 사람들이 어우러져 창출해내는 소리와 큰 거리, 작은 골목들에 즐비한 식당들에서 풍겨나오는 느끼한 냄새, 길가의 집집들의 텔레비에서 울려나오는 련속극소리와 류행가소리…
어느 잡스러운 놈이 몰래 덮개를 들어가서 로출된 하수구에서 솟구쳐나오는 썩은 냄새와 무어라 꼭 짚어서 말할수 없는, 사람들이 발산하는 이런저런 이상야릇한 열기로 변경도시의 야경은 요기를 띠고 잔뜩 신들려있다. 낮은 땀흘리는 사람들것이고 밤은 향락할 여유가 있는 유한계층들의것이라 해도 과히 틀린 말은 아니리라.
이튿날 필주가 정신을 차리고보니 병원이였다. 침대곁에 낯모를 미모의 아가씨가 그린듯서서 자기에게 조용히 미소를 쏟고있었다. 알맞춤한 키에 몸매는 물찬제비같았고 해당화처럼 탐스럽고 화사한 얼굴에 말아삼킬듯 서글서글한 그녀의 정깊은 눈속에서 사람의 마음을 녹여주는 따스함과 부드러움이 흐르고있었다. 그속에 미묘한 전파가 흐르고있었다.
(아!? 당신이였군요? 언제 왔어요? 어쩌면?…)
필주의 눈이 그 눈전화를 받고있다. (당신이 유나이지? 아름다운 내추억속의 소녀야! 너였구나,) 필주는 잠시 눈을 살며시 감았다. 부끄럼을 잘 타서 늘 얼굴이 익을사해있던 어여쁜 소녀애의 모습이 세월을 거슬러 동년의 언덕에서 웃고있는듯 싶었다
“아이참 죄송해요. 나때문에 그만…”
“아가씨는 …? ”
“당신은 저의 생명의 은인이예요. 어제밤 제가 쓰러진것을 업어내온 사람이 당신이라고 하더군요. 난 먼저 깨여났지요. 고마워요.”
“고맙긴, 그런 경우엔 겁쟁이도 한시간쯤은 영웅인체 할수 있답니다. 한시간은 너무 길고 적어도 3분쯤은 그렇게 할수 있을것입니다. 하하하…”
“목숨을 건 일인데 무슨 장난처럼 말하네요. 전 정말 죽는가 했었는데…”
그린듯 고운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듯싶더니 어느새 똥랑똘랑 떨어지고있었다.
“아, 그러니 전혀 낯선 얼굴이 아니구만. 우리 고모네 맞은켠집에 살던? 이름은 유나이고…역시 우린 어떤 인연이 있는 모양입니다. 아마도 어제 신이 아가씨를 구해주라고 나를 보낸것같습니다. 안그래요?”
“네, 당신은 필주라고 하지요? 전 이번에 정말 수호신을 만난것이야요. 우린 어릴 때 몇번 강변에랑 가서 놀았지요? 그때 방학이 되면 고모네집에 놀러온다고 하던 말이 기억에 남았어요. 고중을 다니면서부터 놀러오지 않는것같던데 이번엔 어쩐 일로…? 두분이 다 한국에 나가고 집이 빈지 몇달 된다고 하던데요?”
“네. 그래요. 고모네집이 내집과 같아서 열쇠도 그냥 가지고있지요. 어제 저녁에 기차에서 내리자바람으로 집에 안나가고 먼저 여기 들렸어요. 고모부의 서재에서 욕심나는 책이랑 가져가려구요. 그런데 이런 공교로운일이 있을줄이야, 어느 집에서 먼저 불이 난것같은데 아가씨는 어떻게 되여 그 위급한 관두에 혼자 쓰러지게 되였나요? 다른 식구들은?…”
“예, 어머니와 단둘이 살고있었는데 3년전에 엄마가 그만 저 사망……”
“아참, 홀어머니의 손에서 커가는 애라고 저의 고모가 말씀을 하던것을 깜박 잊고있었군요. 정말 훌륭한 아주머니이셨는데…미안합니다.”
“아니요, 참 그런데 고모에게서 관내 어느 대학에 갔다는 말은 들었는데 지금은 어데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나 재작년에 졸업하고 서부지구지질탐사국에서 일합니다. 늘 배낭을 걸머지고 승냥이처럼 산발을 누비고다니지요.”
그저 우연한 상봉만이 아니였다. 서로가 어떤 기연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들은 대번에 친숙해졌다. 유나로 말하면 방학마다 룡정에서 놀러오던 준수하게 생기고 마음도 계집애처럼 부드러웠던 필주란 사내애가 그냥 잊혀지지 않는 소중한 존재였는데 이번엔 생명의 은인으로 되였으니 정녕 운명적인 만남이라고도 할수 있었다.
아직은 서로간에 어떤 고백도 약속도 할수는 없지만 서로를 응시하는 시선속에는 그 이상의 절절함이 숨어있었고 이미 서로의 그 진한 무언의 고백을 감지하고있다는 신호가 깔려있었다.
희고 번듯한 이마, 숱많은 새까만 눈섭, 산줄기처럼 곧추 뻗어내린 코마루, 골깊은 인중아래 륜곽이 선명한 붉은입술…세월은 한 소년을 이렇듯 준수한 남자로 만들어주었다. 그 남자가 넓고 미더운 등으로 자기를 불속에서 업어내왔다는 사실이 유나를 다시 한번 목이메게 하였다. 이미 다 숙성한 처녀이고 여러 남자들의 추구를 받고있는 그녀였지만 가슴에 처음으로 끝도 한도없이 만들어지는 인연의 실이 청실홍실 늘여지고 있음을 느끼면서 몰래 얼굴을 붉히고있었다. 남자가 아무리 험한길로 멀리멀리 가도 끊어지지 않고 동이 나지 않을 그런 금실이라고 믿었다.
가슴이 설레이기는 필주도 마찬가지였다. 한창 나이에 일년치고 절반이상을 산속에서 천막을 치고 되는대로 자고 먹고하는 생활을 하여야 하는 그로 말하면 인젠 사랑이 넘치는 가정을 이루고 아기자기하게 살고싶기도 한것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랑할 사람이 없는 사람일것이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지금 바로 사랑을 하는 사람일것이다. 사랑, 이 얼마나 젊은 혼을 사로잡는 감미로운 말인가?
필주와 유나는 그렇게 알게되였고 드디어 첫사랑의 뜨거운 열풍에 혼신을 불태우게 되였다. 녀자애가 비록 대학도 졸업하지 못하고 백화상점에 영업원으로 박봉을 타고있는 흔하디 흔한 그런 도시아가씨였지만 필주에게는 둘도없는 백설공주였고 자신은 백마왕자이고싶었다. 유나는 당당한 대학졸업생이 평범한 녀자인 자기를 그렇게도 좋아하는지 야릇했지만 녀자로서는 그이상의 행복한 일이 있을수 없었다. 문벌도 없고 재산도 없다. 밑천이라면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미모뿐이다.
…사랑하는 녀자를 홀로 남겨두고 머나먼 곳으로 다시 떠나야 하는 필주의 마음은 더없이 아팠다. 떠나기 전날 유나가 필주를 찾아 룡정으로 달려왔다. 그들은 달빛을 밟으며 해란강둑길을 거닐었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듯이 백년후의 일을 생각하며 가슴을 달구었다. 필주가 식지를 내들었다. 유나도 촉기빠르게 길고 매끈한 자기 식지를 내들었다.
“유나! 사랑해!!이밤 손가락을 걸고 한 우리의 사랑은 백년을 가도 변치않는거야, 자신있으면 걸어,”
“필주씨도 마음이 변하면 안돼요. 알았지? 나 유나는 렬녀춘향처럼 일부종사를 맹세한다. 호호호…”
연두색 적삼에 받쳐입은 짧은치마는 그녀의 준치같이 미끈한 몸매를 더없이 우아하게 해주면서도 조금은 현대파적인 거리아가씨를 련상시켜주었다. 그림속에 선녀를 련상시키는 이쁘장한 얼굴은 달빛아래 빨갛게 홍조를 머금고 있었는데 온몸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음을 암시해주고있었다. 그토록 은근하게 달래오던 갈망이 그대로 불길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몇번은 떨리는 혀가 엉켰고 다음은 본능적인 몸짓이 더욱 격렬해졌다. 미칠듯한 열정과 흥분에 휩싸여있을 때 누구에겐들 감정상에서의 은밀한 활동이 발로되지 않으랴!
유나는 소녀시절의 부끄러운 꿈을 회상했다. 그때의 몽롱하던 꿈이 오늘 필주라는 멋진 남자로 구체화되여서 지금 자기를 억세게 안아주고있다는 느낌이 황홀하기만 했다. 바야흐로 몸과 몸이 하나로 엉켜질것을 바라는 필주의 뜨거운 입김을 얼굴에 느끼며 남자와의 첫비밀을 가져얄 자신이 두렵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하여서 숨이 막혀버릴것만 같은 감동으로 몸을 비틀었다. 이자리에 아예 누워버리고싶기도 하였다.
“필주씨. 나 다 내줄게 가져, 다가져, 아무때건 나는 당신거니까.”
“고마워, 유나! 그러나 지금은 아니야, 나 너를 곱게곱게 지켜주다가 화촉동방 에서 순결하고 향기로운 꽃을 마음껏 흔상할테야, 알았지? ”
필주는 더욱더 녀자의 몸을 밀착시키고 오래오래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을뿐 그 이상의것을 요구해오지 않았다. 그러나 유나는 녀자의 본능으로 남자가 무엇을 바라 고있다는것을 너무나 잘 알고있었기에 불덩이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필주의 몸을 받을 준비를 하고있었다.
“사랑해요, 필주씨!지금 내가 원하는거애요. 나도…”
필주는 처녀의 푹신한 육체를 부시고 파뭉개고 다시 조합하고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소중함을 이렇게 경솔하고 창졸하게 파괴하고싶지 않은 내심의 갈등때문에 몸서리쳤다. (아, 얼마나 아릿답고 사랑스럽고 순결하고 다정다감한가! 눈을 꼭감고 자기의 줄키스를 열렬하게 받아무는 이 녀자의 머리속엔 어떤 화면들이 떠오르고 있을것인가? 한창 흐드러지게 꽃피여있는 꽃이 한줄금 격정의 비를 바라는 심정일가? 그러나 나는 이 녀자에게 리성의 우산을 씌워주고있구나…)
유나는 그저 말없이 남자가 하는대로 자기를 맡겨두고 숨소리만 끓여올렸다…
필주가 떠나는 날 유나는 목에 매달리며 울먹거렸다.
“필주씨, 곧 일자리를 바꿀거죠? 난 당신없는 날을 상상할수 없어요. 그리구 나 원래 고독과 기다림에 견뎌내는 검질긴 체질이 아니애요. 어서 달려와 날 지켜야해요. 알았지? 응!”
필주는 말없이 녀자를 꼭 껴안아줄뿐 시원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사랑하는 남자는 훌쩍 가버렸다. 유나는 삽시에 모든 끈이 떨어져나가고 혼자 남겨진것같은 허탈감이 그녀의 가슴을 가득 채워주었다. 고독속에 누구를 그리워한다는 마음은 슬픔이면서도 절절한 희열이 숨겨진 기쁨이기도 하건만 저혼자 익어가는 가을이 쌀쌀한 바람과 함께 밀려들 때 그녀의 마음에도 붉게 타다못해 누렇게 황이든 락엽이 한잎 두잎 쌓여가기시작했다. 견우직녀처럼 그리운 님을 만날 그 일년이 그에게는 진짜 십년맞잡이로 느껴지였다. 유나는 자기의 일기장에 사랑시를 끄적이는것으로 필주에 대한 그리움을 보듬었다.
첫사랑의 감회는
몽롱한 초생달
수집어 자꾸만
엷은 구름속에 숨네요.
첫사랑의 감회는
피기를 기다리는 꽃망울
조용히 조용히 봄비의
애무를 기다리네요
첫사랑의 감회는
심령의 탐색인가요
모지름쓰며 또 다른
절반의 자기를 찾네요.
그런 지루한 나날속에 격정에 넘지치던 첫사랑의 서정시는 그리움에 애간장이 녹고 기다림에 지친 그녀의 마음속에서 차차 산문시로 번져가고있음을 발견했을 때 그녀는 무서움에 몸을 바르르 떨었고 방울방울 눈물을 흘렸다.
필주는 다음해 음력설에야 날아왔다. 비행장에 달려나간 유나가 거칠어진 남자의 얼굴을 얼없이 쳐다보다가 불쑥 튀여나온 말이 걸작이였다.
“아이, 미워죽겠어!”
“보고싶어 미칠번했어.”
“거짓뿌리, 그렇게 나 보고싶으면 그동안 일터를 바꾸어버릴게지?”
“나 배운것이 지질탐사가 아니야? 그리구 사람은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할 때 가장 빛나는법이야, 좀 기다려줘, 실적을 쌓으면 연구원으로 들어앉게 될거야. 그땐 유나를 그냥 업고다닐테니까. 하하하…아니면 이번에 아예 결혼해버릴가? 응!”
“싫어, 결혼하고나서 더구나 어떡해? 독수공방 생과부가 되라구? 혹시나 그새에 아이나 생기면 혼자 어떻게 키워요?”
유나는 잔뜩 성난 눈길로 필주를 쏘아보며 동가슴을 막 두드려댔다. 그리고 앵돌아져서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견우직녀의 상봉은 그렇게도 짧았고 그나마도 티각태각하다보니 나날은 흐르는 강물이 아니라 폭포처럼 쏟아져내리는 정신없는 나 날이였다. 헤여지던 날. 유나는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응석부리듯 말했다.
“이번엔 직업을 바꿀거지? ”
“… …”
다시 시들해진 봄을 밀어내고 6월이 푸름을 자랑하며 폭염속의 계절에로 걸어가는듯싶더니 어느새 호화롭던 가을이 찬서리속에 스러져갔다. 유나는 필주를 다시 인식해야겠다는 두려운 생각에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러나 그런 두려운 생각은 그녀 자신이 지배할수 없을만큼 집요하게 갈마들었다. 만남이 없으면 리별이 없듯이 리별이 없으면 그리움도 없다. 필주는 먼곳에 있다. 그들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하지 편지들은 더구나 그리움만 덧쌓을뿐이였다.
이번에는 필주가 늦가을에 왔다. 차디찬 기류에 실린 가을바람이 각일각 락엽을 재촉한다. 푸른 여름옷을 떨쳐입었던 강둑의 백양나무는 어느새 여름옷을 다 벗기우고 누렇다못해 거밋하게 풀이죽은 잎들을 지난밤 도적비에 질척해진 강둑에 맥없이 던지고있었다. 한잎, 또 한잎…
“당신 직업을 바꿀거야? 안바꿀거야? 나 더는 고독과 기다림에 지치고싶지 않아! 나 벌써 스믈 일곱이야, 오래지 않으면 여덟, 할망구가 될날도 멀지 않았구,”
필주는 아무대답도 주지 않고 녀자를 더 살뜰하게 껴안아주었다.
“나 비둘기같이 구구하며 사는 잉꼬부부가 되고싶단말이여, 그러나 당신은 나에 게 그런 행복을 줄수 없어,”
“내가 목숨처럼 사랑하는데두? 사랑이면 다 아니야? 이 성급한 계집애야!”
필주는 길게 해석조로 말할수 없었다. 말은 비록 마음의 고백이라지만 내심의 충동을 형상적으로 표달하기에는 너무나 창백무력한것이다.
“남녀의 사랑은 함께 하면서 크는거야, 기억과 추억속에서 크는줄 알았나봐, 그리고 편지나 전화속에서 사랑의 불길이 타오를수 있어? 아무래두 우린 만나긴했지만 두갈래 철길같아, 영원히 평행선으로 달리는…”
“그러니까 갈라지자구? 무엇때문에? 시간은 사랑의 시금석이고 리별은 고험의 천평이라지 않아? 기다림은 사랑의 열화를 지펴올릴 도화선이구!”
“에이, 나몰라! 나 어떡해? 사랑의 별명이 단속이란 말두 몰라? 남자들이 자꾸 못살게 묻어다닌단 말이야! 나 자기를 지켜낼 힘이 없어…직업을 바꿔요. 네? 대학생들이 어디 철밥통에 매달려 살기좋아하나요. 하해하면 알락달락한 꽃밥통이 지천으로 널려있는데, 지금 그런 로임으로 현대적인 신혼살림을 꾸릴수 있어?”
비록 유나가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남자가 진정 목숨까지 내댈수 있을만큼 자기f를 사랑한다는걸 너무나 잘 알고있다. 그리고 영구하리라는것도 알고있었다. 그러나 자기 직업에 대한 남자의 집착이 무엇때문인지 읽을수 없었다. 남자의 툭한 손가락에 녀자의 가녀린 손가락을 걸고 심장속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쌓아올린 맹세의 금빛기둥에 어느새 녹이 잔뜩 낀때문일가? 마치도 뱀이 허물을 벗는것이 고통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해마다 벗어야 하듯이 유나는 자기도 격에 맞지 않는 사랑의 갑을 벗고야말리라는것을 가슴으로 알고있었다.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놓아줘요. 이젠 남자가 없으면 못살것같아, 난 늘 나를 지켜봐줄 남자를 찾을거야,”
필주는 말할수 없는 비애와 분노를 느꼈다. 거센 숨소리를 삼키느라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둥근달은 손가락걸고 백년가연을 맹세하던 그밤의 달처럼 둥글었으나 그 달빛은 아니였다. 즐거울때는 달도 따라 웃어주는법이지만 괴로울 땐 달마저 함깨 차거워지는법인가? 달빛이 오늘처럼 싸늘하다는것을 처음으로 느끼는듯싶었다. 필주는 녀자아이를 죽이고싶었고 갈기갈기 찢어발기고싶었다.
“나 죽음으로 담보할만큼 널 사랑한단말이야! 나쁜 계집애같은게,”
“미안해요. 그러나 죽음으로 담보하는 사랑이라해서 다 숭고한 사랑이 아니고 더구나 행복한 사랑은 아닐수 있잖아요? ”
“좋다. 네입으로 처음 사랑한다는 말을 할 때 정말 천사의 말처럼 들렸어, 그런데 지금 사랑한다는 말은 순전히 타협하기 위한 입발림이야, 흥, 그래, 가라구!너의 치마폭에 싸여도는 남자를 찾아가란말이여, 넌 행복이란 끈덕진 인내라는것을 영원히 알것같지 못하구나. 그리구 꼴뚜기는 생선이 아니란걸 알게될거야, 하지만 네가 엮으려는 그 사랑책에 부디 눈물자국이 없기를 바란다. 안녕히!”
필주는 그렇게 짜내듯 몇마디 뱉아놓고 홱 돌아섰다. 눈물이 나올것같았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에 실패하면 운명의 작간이라고 자기를 위안하지만 필주에게는 이 시각 자아위안 할 마음의 여유가 조금도 없었다. 괴로워할수록 순수하다는 증거이고 순수할수록 참사랑의 표지인것이다. 필주는 형언할길없이 괴로웠다. (에라, 갈테면 가라, 영원함과 완성이란걸 바란 내가 어리석지…)
그는 휴가기도 마치지 않고 앞당겨 이 괴로운 땅을 떠나버렸다. 세월이 흘러갔다. 그의 사랑은 승화되여 끝없는 배려로 두터워지고 증오란 그저 밑에 깔아앉은 찌꺼기였다. 사랑은 유나의 배반으로 철저히 깨졌지만 달빛아래 손가락걸고 자기 마음의 한복판에 단단히 박아세운 맹세의 기둥을 빼버릴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진실한 감정에는 결론이 없었지만 리성적으로는 차츰 매듭을 짓고 있었던것이다…
소년시절에 아리숭한 감정속에 은근히 좋아하였던 녀자애. 그 녀자애가 한껏 성숙한 미녀로 되여 자기품에 안기게 된것은 인생의 기적이라 할것이였다. 그렇게 완미한 녀자의 사랑을 받게 되였다는것은 기막힌 아름다움을 차지하였다는것, 그런 아름다움을 받아안은 자기야말로 음양으로 이루어진 이 인간세상에서 누구보다 부자라는것, 하기에 온 세상에서 행복을 혼자 껴안은듯한 느낌이 들때마다 날개라도 돋힌듯 용기백배하여 면면한 산발들을 훨훨 날아넘었고 우등불가에 지새는 심산의 밤에도 고독을 모르고 먼곳의 유나에게 심령의 전파를 보내고 또 보냈다.
필주와 결별한 첫며칠 유나도 애석함과 후회와 가책으로 모대기다가 마침내 필주에게 사죄하려고 모아산고개를 넘었다.그러나 필주는 이미 유감과 한을 안고 먼먼 천애이역으로 날아간지 며칠되였다. 유나는 그렇게 필주와 갈라졌지만 생각처럼 쉽게 잊혀지지 않았다. 필경은 자기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였고 순정을 바쳐 사랑하기로 마음을 싹 내준 남자였던것이다. 생각할수록 필주에 대한 좋은 일면과 달콤했던 추억만 봄풀처럼 파랗게 되살아났다. 필주의 어머니가 차갑게 바라보던 눈길이 칼 처럼 심장을 푹 찌를줄은 몰랐다. (아, 녀자란 남자를 등을 밀어 문밖에 쫓아내고서도 문을 닫으며 눈물짓는 모순되고 연약한 동물인가?…… )
남자와 녀자의 마음은 바이얼린줄마냥 부동한 손가락으로 부드럽거나 힘있거나 아름답거나 귀에 거슬리는 등 같지 않은 선률을 탈수 있다. 같은 사람일지라도 누가 튕기겠는지는 아무도 알수 없다. 얼마후 그녀의 감정세계에 자상하고 부드럽고 친절한 남자가 뛰여들었다. 그는 유나를 다람쥐 채바퀴 돌리듯이 싸고돌았다. 일생을 기탁할만한 남자라고 믿고 백년을 허락했다. 필주에 대한 추억의 보따리을 안고 방황하던 그녀의 마음밭에 사랑의 태양이 웃고 정열의 불비가 쏟아져내렸다.
그들은 결혼했다. 신혼은 꿀처럼 달콤했고 생활은 차분한 려행산문처럼 한페지 한페지 엮어졌다. 아이가 생겨났다. 유나는 모든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주부들처럼 아이를 키우고 밥을 짓고 빨래하고 남편에게 몸을 바치며 평온한 생활의 호수에서 자맥질했다.
그러나 놓쳐버린 새가 귀중함을 느끼는게 인간심사의 약점이던가, 유나는 자기도 모르게 가끔씩 필주의 그 정열적이고 호협하던 모습을 그려보군했다. 지금의 남편도 별로 나무랄것없는 좋은 사람이였다. 하지만 좋은 사람이라해서 꼭 사랑스러운 사람 인것은 아니다. 련애와 결혼은 그렇게도 달랐다. 자기가 바라던것이 고요히 펼쳐진 호수와 같은 그런 애정생활이 아니였음을 유나는 날이 갈수록 절절하게 느꼈다. 소용돌이도 없고 파도도 없는 들판 한가운데를 유유히 흐르는 그런 강물도 아니였으니 더구나 물에 물탄것처럼 맥맥하였다.
어느 날, 한국에서 돌아온 필주의 고모가 유나에게 필주가 죽었다는 비보를 전해주었다. 운남의 어느 깊은 산속에서 탐사를 하다가 실족하는 바람에 벼랑에 떨어져 비명횡사했다는것이였다. 유나는 아들을 유치원에 보내놓고 공원의 소나무숲에서 슬프게 슬프게 울었다. 그제야 그는 자기를 알았다. 자기 마음속 깊은 곳에는 그래도 필주가 깊이깊이 숨어서 자기를 지켜보고 함께 숨쉬고있었다는것을, (필주씨, 구천에서라도 이 무정하고 자사자리한 저를 징벌해주세요…)
며칠후 단위에 나가니 수직실아바이가 등기편지 한통을 내주었다. 봉투안에 한장의 보험단이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가슴이 후두두했다. 그는 필주의 어머니가 쓴 짤막한 편지를 읽고서야 사연을 알게 되였다.
“유나아가씨, 이 보험단은 며칠전 아들의 유물을 정리하다가 발견했소. 이속에 있는 전부의 보험액은 아가씨의것으로 되여있소. 필주가 아가씨를 사랑해서부터 보험을 시작한것같소. 그애는 아가씨와 헤여진후에도 그냥 보험금을 낸것같소. 나는 그애 가 이 보험단이 나중에 아가씨의 손에 쥐여질것이라는것을 상상못했줄아오. 그애는 그렇게 만리이역에서 외롭게 떠돌면서도 아가씨에 대한 사랑을 안고 웃으면서 살았으리라 믿소. 그애는 다른 녀자를 얻으라고 권고할때마다 자기가 손가락을 걸고 한 사랑의 맹세는 백년을 두고 한것이라면서 종시 말을 듣지 않았소. 그러나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아가씨가 밉고 괘씸한 마음같아선 아예 불태워버리고싶지만 죽어가면서도 아가씨의 이름을 불렀을 아들애의 가긍한 마음을 저버릴수가 없어서 그냥 보내니 알아서 요량껏 처리하오…”
편지를 다 읽어내려갈수 없었다. 가슴이 미여지는것같았다. 얼굴을 하늘로 들고다닐수 없을것 같았다. 그는 화장실로 달려들어가서 수도물을 틀어놓고 얼굴을 씻고 또 씻었다. 그러나 샘처럼 솟는 눈물을 다 씻어낼길이 없었다.
누구에게서나 사랑은 영원히 미완성고로서 우리가 체득한것보다 언제나 더 풍부하고 다채로운법이다. 안온한 가정생활속에서 청춘은 차차 사라져가고 자기가 추구하던 사랑도 시들어가고 기이한 인연으로 맺었던 첫사랑의 마지막 잎사귀도 떨어졌 건만 유나의 가슴속에 새롭게 새겨진 필주에 대한 깊고깊은 사랑과 사랑한다는 말의 마지막 의미는 결코 세월과 더불어 늙지도 않을것이며 죽어가지도 않을것이였다. 사랑은 죽음보다 더 강한것이다. 그러나 유나는 너무 늦게 알았고 그리함으로써 평생의 후회막급으로 남았다. 그래서 그 의미가 유나에게는 더 각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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