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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서 자아가치실현
2014년 02월 14일 13시 09분  조회:6419  추천:1  작성자: 최균선
                                         시에서의 자아가치실현
 
                                                최 균 선
 
   시에서 창조적정신의 석방은 자유적인것으로서 시와 미의 특정적인 관계로 볼 때 “어떠한 목적을 초월하는것”이다. 이 시점에서 시적대상물 문제가 제기된다. 보통 시에서 미적대상이라 하면 인간의 의식과 정감속에 침투된 사물, 현상이다. 종국적으로 자연에 대한 시인의 정감의 침투는 시를 잉태하는 수정이(受精)이다.
   하다면 시적대상물이 낳은 시에서 어떻게 자아가치를 실현할것인가? 이 문제에 해답하기전 잠간 동서양의 시적상황을 살펴보아야 할것이다. 동양의 시인들은 객체에 기탁하여 정감을 토로하기에 유의적으로 자아를 스쳐버리거나 혹은 포기하지만 서양 시는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버리거나 혹은 사물속에 함의를 숨긴다.
   주체를 중히 여기는 서양시에서는 창조적주관성을 내세우는 동시에 사물과 그속에 여러가지 함의도 밝히려 한다. 시를 낳는 불새인 상상력과 더불어 지성은 시의 정수이다. 그만큼 시는 우리로 하여금 지성, 일종 리성(반리성이 아님)혹은 비론리적 방식 의 작용도 고려하게 한다. 그리하여 이런 창조성활동은 아주 특수한 지성의 발전과 정이 된다. 이는 대조적인 동서양의 시에 공통되는 인소이다.
   시적충동을 주는 계기는 자연과 시인간의 호상침투이지만 호상흡수는 아니다. 시인이 미적희열을 감수할 때 인지된것은 사물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변형된 다른 한 사물이다. 거기서 새로운 시종자가 발견되고 지성의 협조속에 창조된 시적이미지를 창출 한다. 그러나 근근히 감관을 자극하는 미적표현이 감관의 도취에 이르는것이 바로 현대시의 본질적인 매력인것은 아니다.
   시는 정감이 포만할 때에 더 아름답고 가치롭다. 정감은 심미감지에서 불가결의 인소이지만 비리성적 혹은 순주관적정감이 아니라 인식이 수반되는 정감이다. 이런 정감은 보다 보편성을 띠면서 주관적감수를 초월한다. 그러므로 심미정감 혹은 미적 감지와 련관된 자연과 시인의 호상침투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즉 자연과 시인의 흡인력속에서 이끌어내는 자아세계만이 새로운 시적경지를 펼칠수 있다. 그로써 자아를 현시하고 자아가치실현에 이른다.
   현대에 이르러 시창작에서 자아가치실현이 전면에 나서지만 실천적으로 쉽게 체현 되는것이 아니다. 시에서 창조된 천태만상의 실재가 완전완미한 이미지로 승화될수는 없다. 자아의 의의와 인간의 주관성이의 의의가 국제화의 시대에 들어선 현시대라해 도 우리에게 절대적이고 최고의 자아란 있을수 없다는 말이다. 시인의 자아가치란 독자정서와 동질감을 전제로 한 공명에서 실현될수밖에 없으므로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추구가 극단에도 치달으면 물극상반의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특히 주지시를 주축으로 하는 현대파시는 전통적인 경물시보다 목적의도적인 자아표백이 목적이지만 자아실현은 격세유전이 아니라 점진적으로 이룩되는것이다. 례컨대 위대한 현대화가들이 부단히 혁명을 일으켰지만 과거의 위대한 대화가들과의 뉴대를 완전히 단절하지 않았다. 그와 마찬가지로 전통시에 대한 절대적부정은 비합리적이다. 전통적동양시와 대립되는 서양의 현대시는 시인의 자아를 내세우지만 극단 에 이르면 주관성의 늪지대와 전달불능의 령역에 깊이 빠져들어가게 된다. 즉 자아의 현대시가 시에서의 외적미에 대한 묘술을 완전히 배제해버리는 극단에 이른것이다.
   현대시에서 진정으로 창조적주관성을 표현할수 있게 된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바로 같은 리유로 사물에 내재된 오묘하고 무궁한 함의와 사물에 고유한 객관적의의와 미를 배제해서도 안되는것이다. 현대시가 자아를 표현하기에 천방백계를 할 때, 시적감지와 더불어 자연경물의 요긴한 내용과 표면적인 실재와 오묘한 함의를 제시해야 금상첨화이다. 왜냐하면 어느 시인도 현실미를 떠날수 없기때문이다.
     완성된 시한수는 실제상 하나의 목적이다. 현대시인은 자신을 자연과 자연의 형식에서 해탈하려고 모지름 쓰는데 그것이 곧 시의 목적이다. 하여 자연의 외재형식을 극력 변형시켜 우리들의 꿈, 분노, 고뇌 혹은 우울에 보다 접근시키려 시도한다. 즉 시자체의 의미적색채의 구조조합 혹은 어휘조합의 구조물로 원시적자연을 변형 시키려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에 대한 어떤 경시와 탈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모종의미에서 자연속에서 시적오묘함을 절취하는것이라고 말하는게 좋을것이다.
   현대예술가들중 가장 위대한 예술가들이 일반적운동에 휘말려들었지만 극단으로 나간적이 없었다. 그들은 론리적, 리성적인 운용을 개변했지만 취소하지는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론리적리성에서 해방되였다고 말할수 있다. 우리가 처음 현대파 시를 인입하고 시험할 때 위험을 배태하고있었다. 이런 시도는 수많은 우연성적인 대가를 지불하기마련이다. 혹시 기본적인 착각에 빠지지 않았는지 의혹을 가지지 않을수 없었다. 기실 유럽에서도 언녕 색바래진 리론이고 실험이였기때문이다.
    외부적인 충격에서 오는 방황과 내부적으로 인기된 곤혹이 없을수 없었다. 시인의 목적은 자아를 인식하려는데 있지 않다. 시인의 근본목적은 새로운 예술경지를 창조하는것이다. 그러나 시인이 만약 자기의 주관성이란 이 문턱너머에서 전개될 일체를 넘겨짚지 못하면 시창작을 진행시킬수 없다. 만약 시인이 창조한것이 존재와 본질이 아니라면 시창작이라는 지성활동에서 표현되고 현시시킬 무엇이 있겠는가?
   인간인식의 실질은 자기에 대하여 모호한것이다. 사람은 오로지 현실세계에 대한 인식에서 일어난 반응에서만 자신을 감각할수 있기때문이다. 만약 그 사람이 인지된 현세계로 자신을 충전하지 않으면 그는 곧 공허한 껍데기로 되고만다. 시인도 오로지 이런 상황속에서 자기를 인식하고 사물에서 인기된 반향에서 감오를 얻게 된다. 그런 즉 시인은 인간일반의 그런 모호한 본질로 자기를 인식할수 없으며 그런 모호표상을 표현하면서 공감, 동조를 바라는것은 자가당착이 된다.
   물론 시인의 인식은 객관현실을 파악함에서 개념과 개념화된 인식이 아니라 정감과 결합되여 이루어진 인식이다. 이런 시적인식은 일종 무의식 혹은 잠의식의 방식으로 시인의 사상을 계발한후 거의 감각할수 없는 일종의 강제성적이고 벗어날수 없는 방식으로서 정감적이면서도 지성적인 영향을 통하여 자아를 확인하게 된다.
   하다면 직각의 원천인 시적대상물은 무엇인가? 일컬어“객체”라는 단어는 복합 어인것처럼 모호하다. 인간이 사물에 비교적 접근한 명칭을 달아주었지만 기실 사물의 본질이 개념화과정에 객관화되였기에 모호하다고 말할수밖에 없는것이다. 사람은 자기를 인식하기전에 사물을 인식하는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시적직 각을 얻는 가장 중요한 인소는 객관현실, 사물에 대한 경험임은 틀림없다. 그 경우, 가장 중요한 경험은 바로 자아경험이다. 모든 진정한 시인으로 말하면 다 이와같은 상황속에서 창작한다. 그래서 시는 어디까지나 자아를 표출하게 되는것이다.
   그러므로 시창작활동 자체가 본질적으로 수요하는것은 초연성(超然性)이다. 이 초연성은 자아로 하여금 가장 은밀한 정서와 사상을 품게 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자아를 위해서만이 아니기에 리기주의는 시활동에서 천적이기도 하다. 그만큼 자아의 실현은 참된시의 령역에서만이 가능한것이다. 시인은 시적미를 창조하는 작업을 한다. 시적미는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 미라는 이 단어의 완전한 의미를 말한 다면 미란 곧 지력의 결정(结晶)이기도 한것이다.
   그런데 미는 그 자체가 곧 시적대상물인것이 아니다. 시는 미적대상물이 주는 미감을 예술화함으로써 체현되는 사상경지의 창출을 목적으로 하기때문이다. 특히 주지 시는 시인의 감관을 직접 자극하는 대상물이 없어도 순추상적인 관념을 가지고도 자기 심미가치와 심미취향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특정된 녀자를 내세우지 않 고 사랑일반에 대하여 그처럼 절실하게 읊을수도 있기때문이다. 리상이니 꿈이니 고독이니 비애이니 하는 주제로 된 시들은 얼마든지 나올수 있다.
   시는 감각적사물속에 정신적예언이라고도 한다. 시는 감각적사물과 감각적희열속에서 자아를 표달하고 자아가치를 실현한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시는 매 하나의 십자로에서 우연히 그리고 자기도 절제할수 없는 방황중에서 자신을 찾는다고 할수도 있다. 전통시에서는 시적대상물에 의거하였으나 주지시에서는 창조된 대상물도 아니고 표상에 그치는 대상물이 아니라 모종 추상적상관물에 기탁하며 그로써 정신적, 자유적인 창조력의 석방과 구사를 표방한다.
   시는 표출된 내심세계의 화랑이지만 원초적으로는 령혼의 투영으로서 곧 령혼의 자아완성이다. 예술은 일종 선 (도덕론에서 말하는 선이 아님)이다. 예술이 지성적인 착함의 실천활동일진대 시도 특정된 지성의 일종 표현이다. 우리는 시예술과 리성 과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모르지 않는다. 진정한 장미의 향기는 장미꽃에만 속하는 것이고 불꽃은 불에 속한다는 도리와 마찬가지로 예술ㅡ시의 본질은 지성이다.
   현대파시라해서 완전한 몽롱이란 없다. 한것은 시가 개념 혹은 론리적의의를 완전히 벗어던질수 없기때문이기도하다. 시는 자체속에 물질적대상을 간섭하지 않거나 혹은“연금”시킬수 없다. 매 한수의 시는 모두 존재물에서 깨달은 존재와 미적보편 성에 소급되기 마련이다. 현대시는 사상을 교류하기 위해서기보다 동질의 직각령역에서의 공감을 공유하려는데 목적을 둔다해도 그럴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현대시에 대해 가장 료해가 깊고 가장 아끼고있는 사람들조차 지력방면에 엄중한, 혹은 구제불능의 약점을 가지고 있다는 지적을 하고있다. 지력문제로하여 시의 가치자체가 훼손될것이니 말이다. 현대시에서 자아가치실현은 오리무중속에서 빛나게 현연될수는 없다. 정서의 해방이란 곧 드러냄을 의미하기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의 정한과 자아에 동조할수 있는 타아들의 구성체, 다시말하면 사회적현실의 여러복합체를 하나의 새로운 유기체로 형성하되 리해되고 조화되는것을 거시적으로 현시하는 자아라야 공명대를 확보할수 있다. 사실 사르트르나 까뮈가 지향했던 실존적자아를 휴머니즘으로 규정지은것과 동일한 맥락에서 시정신을 발휘 해야 현대시원조들의 지향을 따른것이 되지 않을가? 시인의 정한을 기본핵으로 삼되 그 표현에 있어서는 일반독자들이나 전사회적범주속에 수용될수 있는 자아취향이나 인류일반의 정감과 소망으로 시적자아를 실현해야 한다는 설명이 되겠다.
   필자가 너무 보수적인 관념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참으로 계시적인 말이 늘 떠오른다. 바로 세월의 흐름속에 잊혀진 사람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위대한 평론가가 있는데 바로 벨린쓰끼이다. 그는 쓰고있다.“만약 예술작품이 시대의 지배적정신에 자기의 기초를 가지는 온갖 위력한 주관적 충격이 없이 단지 생활을 묘사하기 위해 묘사한다면, 만약 작품이 고통에 대한 통곡이거나 환희에 대한 송가가 아니라면, 만약 예술작품이 이 문제에 대한 질문이거나 해답이 아니라면 그것은 죽은것”이라고 하였다.
  “위대한 시인은 자기 자신, 자기의‘나’에 대해 말하면서 일반적인것ㅡ인류에 대해 말한다. 그런 까닭에 그의 비탄속에서 모두가 비탄을 알아차리며 그의 령혼속에서 모두가 자기의것을 느끼며 그속에서 시인뿐만아니라 인간 즉 인류적인 자기 형제를 보게 된다.”예술의 일반화ㅡ시의 공감대의 뉴대인 일반화속에서 자아가 빛나게 실현 될것은 의심할바없는 사실이다.

                                        2014년 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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