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 속담에 아이를 보고 이름을 지으라는 말도 있거니와 빛좋은 개살구라는 말도 있다. 말하자면 사물마다 그 존재의 형태에 딱 맞는 실속을 갖추고 있다고 말할수 없다. 그만큼 우리는 어떤 사물의 본질을 옳게 파악하기 위해서 그 이름에 담긴 내함을 전적으로 맹신할수 없는 말이 되겠다.
천태만상의 우주만물에 알맞게 이름을 정할 때에 그 기준이 무엇일가? 로자가 도덕경에서《이름을 붙일수 있는것은 영원불변의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것 즉 무명(无名)천지의 시작이고 이름이 있는것 즉 유명(有名)은 만물의 어머니다. 그런 까닭에 상유(常无)에서 그 지극히 미묘한것을 보고자 하고 상유(常有) 에서 그 결과를 보고자 한다.》라고 쓰고있다.
하다면 맨 처음 누가 어째서 허공을 하늘이라 하고 지각변동으로 치솟은 높고 험한 곳을 산이라 하였는지 알배없이 그냥 하늘이고 산이라 인지하듯 수많은 사물을 선인들이 이름지은대로 알고 그렇게 부르기에 습관이 되였다. 로자는 하늘과 땅보다 먼저 존재한 무엇인가가 있는데 그것이 만물을 낳은 모체라고 하였다. 원래 인간에게는 직관이라는 능력이 있지만 별로 따지지 않고 그대로 부르는 관습이 응고되여 있다. 습관이 제2천성이듯이 관습이란 그렇게도 검질긴것이다.
강바닥이 다 드러나도록 물이 말라버렸어도 무슨 강이라 부르고 물은 없고 높은 뚝만 남아도 그냥 저수지라 부른다. 농촌에서는 한번 생산대장질 한사람이면 죽을 때가지 무슨 대장으로 불린다. 옛지명같은것은 이런저런 수요에 맞게 개칭하면 곧 그대로 호칭하지만 그 누구에게 한번 붙인 직함은 그렇게도 생명력이 있는것이다.
우주의 아득한 과거와 무궁한 장래도 쉽게 이야기할바가 아니다. 이를테면 별자리는 사람들이 이름을 지었을뿐이고 지구에 위도와 경도라는것도 인간이 그은것이지 지구에 원래 그렇게 금그어져있은것은 아니다. 그러니 천지만물이 사람들에게서 이름을 지어 받고나서 그 이름에 맞는 내용을 담고있는것인지 누가 알랴!
자기의 눈으로 볼수 없다는 사실만으로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서는 안될것이다. 장자(내편)에 이런 구절이 씌여있다. “사물은 저것이 아닌것이 없고 이것이 아닌것이 없다. 저것은 저것의 립장에서는 드러나지 않지만 이것으로써 알게 되면 곧 저것을 알게 된다.” 모든 인식작용은 내가 이것을 안다는식의 의식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안다고 말하는것은 이미 과거가 되여버린 기억속에 인식을 그대로 믿었다는것이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다시 한번 고찰해 볼필요가 있다. 표상은 과거에 내가 알고있던것을 재현하는 행위이지 새로운 지각은 아니기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존재의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그것이 갖고있는 이름에 좌우되여서는 안된다. 명실상부, 명불허전이라는 말에 반해 유명무실이던가 허명무실이라는 말이 공연히 생겨난것이 아니다. 도금은 불수강인지, 백금인지 당장은 판별할수 없게 하나 언젠가는 도금이 벗겨지고 원래의 질감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옛사람들이 지어놓은 이름을 가지고 그 사물의 본질로 생각하기 어려운 경우가 점점 더 많아졌다. 존재는 필요에 의한 뜻의 산물로서 그 이름이 붙여지고 그 이름에 맞는 쓰임을 다하다가 쓰임이 다하면 그 이름도 유명무실해진다. 례컨대 물레라든가 발방아라든가 가대기 같은것들은 이미 력사의 박물관 에 이름만 새기고있듯이 말이다. 꽃은 지고나서 꽃나무로 남고 나무는 목재로 되면 원초적 존재의 리유를 상실하는 도리와 마찬가지이다.
음악, 시, 춤, 그림, 조각 등등 모든 예술은 영원히 명실상부한다. 그런 심리적, 심령적인 행위에는 그 행위에 등가물들이 체현된다. 예술에는 예술에 도취되는 자와 예술작품으로 도취시키는 자가 있다.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자가 존재한다면 예술에 관중을 심취시키는 형식이 있기때문이 아니라 그 심오한 내용이 있기때문이다. 시인 의 노래처럼, 화가의 그림처럼 지성은 그렇게 우리 자아에서 투영되고 있는것이다.
괴테는 말한다. 예술이나 미가 최고의 리상이 아니고 그것은 보다 고상한 존재에 이르는 힘을 부여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것은 그저 활동이며 남을 위하는 희생적인 활동만이 인간에게 최대의 행복을 남긴다고…
희랍신화에 제우스신이 동물을 만들때 곰과 코끼리에게는 억센 힘을 주었고 토끼와 사슴에게는 빠른 발놀림을 주었으며 물고기에게는 지느러미를 주었고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으므로 매우 서운하게 생각하고 나중에 물으니 생각하는 슬기와 사랑을 주었다. 그래서 인간이 만물의 령장이 되였다고 하였다. 인간은 만물의 령장 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이 지구촌에 사는 생령들을 대하고 있는가? 아니다.
사람이나 사물은 어떤 능력을 가지고있다는것만으로도 훌륭한 일일것이다. 장자는 대지가 내뿜는 숨을 바람이라고 이름했다. 어떤 위치에 앉았던, 어떤 직종의 사람 이든 자신의 근원을 알고 자신의 용도를 알면 자신을 소중히 여기고 귀히 여길줄 알게 되고 더불어 존재하는 타자를 자기 존재와 동등 하게 소중히 여길줄 알게 된다. 그것이 함께 하는 이 세상을 사는 지혜요, 살아가는 진정한 리유가 아닐싶다.
존재함으로써 존재의 리유로 된 우리는 사람이라는 미명으로, 자식이라는 이름, 아버지,엄마라는 이름으로, 각종 직업인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존재의 리유를 현시한다. 하다면 직장에서 직업자로서 맡은바 소임을 다하는 사람인가? 몸은 교단에 섰지만 다가 진정하게 가르치는 자라고 말할수 있는가? 학자라는 호칭은 어마어마하지만 지식폭발의 이 시대에 상응하는 학자로 자기를 향상시키고 있는가?
자기의 내속이야 어떠하든 사람들은 흔히 남들의 긍정에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 특히 남들의 칭송속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려 백방을 다한다. 마크 트웨인은 "멋진 칭찬을 들으면 그것만 먹어도 두달은 살수 있다" 고 했는데 객관적긍정이란 그렇게 중요하다. 복잡한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서로의 격려와 칭찬과 긍정적인 말은 한 사람의 가치의 가늠하는 저울판과 같다. 그런데 남의 칭찬이 무슨 대순가?
세상에 허명무실한 사람이 그 얼마던가? 허명무실과 같은 말로 유명무실(有名无实),남기북두(南箕北斗), 명존실무(名存實無)가 있다. 이와 반대의 의미로 명불허전이 라는 말도 만들어졌는데 이를테면 부모라는 허울은 썼으나 자식을 길거리에 내버리고 팔아먹은 그런 인간들도 있으니 그런 자들에겐 부생모육지은이란 말과 애초에 인연이 없는것이다. 그래서 허명무실이란 말이 적격이 되는것이다.
비록 속이고 속는 세상이라 남을 속임은 비일비재이지만 자기를 속이는것보다 더 무료한 일은 없을것이요 실속없는 자신을 분식하는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으리라. 자기를 자꾸 과장하고 분칠하노라면 나중에 원래의 자신의 모습도 모르게 된다. 자신을 속이면서 허장성세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하는것이 론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것은 무모한 아집이나 넘쳐나는 자아감각에서 출발하기때문일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너무 많은 시행착오를 범한 뒤에야 깨닫는 약점을 가지고있다. 그래서 졸문에서 언감생심 누구를 훈계하려고 하는것이 아니고 오래 살다보니 곤혹스럽고 안타까운 일이 한두가지가 아님을 뒤늦게 깨닫고 인생철학의 조목들을 두루 베껴보았을 따름이다. 플라톤은 육신의 눈이 둔해져야만 마음의 눈이 예리해진다고 하였지만 그 이름에 맞는 소임을 착실하게 담당한다는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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