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균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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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옹의 춘정
2016년 02월 06일 16시 49분  조회:5137  추천:0  작성자: 최균선
                                      로옹의 춘정
 
   봄이 오는 소리가 들린다. 봄이 오는 소리는 봄의 정취를 가진 사람만이 먼저 듣기마련이다. 옷자락 날리며 봄이 넘어오는 산언덕에 서면 여우도 눈물을 흘린다는 꽃샘철 바람의 예리한 톱날도 점점 무디여 간다는것을 피부로 느낄수 있다. 한껏 멀어져버린 하늘가에서 싸늘한 미소를 던지던 해님의 미소가 한결 온기를 머금었다.
   계절의 달력장은 어김없이 절로 번져진다. 겨울의 절정속에서도 봄은 만물의 소생을 위한 축제를 차곡차곡 준비해 온것이다. 남녘으로부터 겨울과 교대식을 하기 위해 봄이 입나팔을 불며 척척 걸어온다. 병색이 깊어가는 겨울이 계절의 무대에서 퇴장하고 늙어진 마음에 싱숭생숭이야 가당하랴만 어떤 즐거움이 저만치서 손짓한다.
   귀기울이면 겨우내 꿈을 키우던 백양나무의 속살깊은 줄기에서 가지들더러 움을 틔우라고 재촉하는 소리가 방불히 들리는듯 싶다. 이제 빈가지의 끝자락에서 꽃눈이 새록새록 솟아나오는것을 볼수 있을것이다. 젊은녀인들의 춘심이 열리고 행객들의 옷차림도 조금씩 얇아지는것이 눈에 띄인다.
   개울이나 강에서는 얼음이 쩍쩍 갈라지며 해빙기의 성에장을 준비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양지바른 산등성이에서 진달래꽃불이 타오르면 들녘에 민들레도 몰래몰래 봄단장을 서두르고있을것이다. 봄이 오는 대지에 춘색이 무르익어가고 있는것이다.
   올겨울은 유난히 메말랐지만 그리 춥지 않았다. 2월이 저믈면서 하루가 멀다 하게 낮이면 수은주가 영하 0도 주위를 맴돈다. 온난화로 지구가 더워진다는 말이 현실로 다가온것이다. 나무가지에 눈을 틔우는 바람이 올해는 자별나게 분주하다. 봄 이 오고있거니 혹독한 겨울인들 오래 버틸소냐?
   꽃샘바람 끝자락에서 먼저 꽃부터 피워올리고 다시 잎을 펴내는 연홍빛 진달래 동산에서 뒤늦게 피여난 개나리가 아지랑이를 불러낼때면 해묵은 수양버들도 머리를 풀어내린다. 봄날의 꽃비가 내리여 묵은 대지의 먼지를 말끔히 걸레질하는 멋이 좋고 손끝에 옮아든 풀향기에, 흘러가버린 추억에 가슴도 클클해진다. 퇴색해버린 인생의 낡은 페지를 슬슬 찢어서 바람에 날려보내면 더욱 감회로운 로옹의 서러움이여!
   꽃망울이 산고를 앓다가 해살에 꽃이 피고 다시 지고나면 더구나 마음속에 봉오리진다. 그리움의 꽃도 얼핏 피였다가 속절없이 지여서인가 마냥 아쉽기만하다. 웃지 않는 청년은 악마요 웃지 않는 늙은이는 바보라고 하더라만 이렇게 차차 따스해지는 봄날이면 나는 웃음대신 눈물이 난다.
   그리운것은 이미 이 세상에 없는것일진대 아쉬운것은 서서히 지워지는것, 아직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분명 어딘가 존재하기도 하겠지만 언젠가는 그 수명을 다하고야 말것을 전제로 한 존재이기에 아쉬운것은 곧 가버릴 무정세월에 대한 안타까움이 리라. 이미 사라져버린것들을 뒤쫓아 사라질것들이 모든 로옹들의 서정과 풍경이라면 아쉬움과 그리움만 빼곡히 씌여지는 인생서가 아닐가싶다. 발빠르게 사라져간것들을 기록해보자고 이 봄도 시들해진 인생의 언덕에서 봄을 손짓해본다. 유감과 애석한 일화들로 점철된 로옹의 인생풍경들이 펼쳐지고 또 모여온다.
   한창 시절엔 농군이였던 그때, 봄이면 습개논과 차질땅논을 동이땀으로 적셔가며 햇송아지와 싱갱이질 하던 나, 여름에는 불볕에 논물마저 끓던 논벌에서 제초기를 밀던 나, 가을에는 싣걱질로 분주하고 고개를 넘는 공량수레채에 매달려 황소를 헝헝 거리던 나, 겨울에는 모아산기슭을 누비며 나무등걸을 찾아헤매던 나… 아득히 흘러가서 까마득히 잊혀진 나날들이 내 삶의 궤적을 말해줄수는 없으니 추억으로 남는다
   내 인생서에 풍경선과 일화들은 농토에서 엮어진것들이다. 그나마 어떤것들은 세월의 등에 업혀가버린후 자취를 감추었다. 사라진것은 젊음만이 아니다. 부젓가락으로 화로불을 뒤적이며 콩한줌을 볶아주던 늙으신 어머니도 이미 오래전에 세상을 떴다. 그렇게 소중히 여기던 기억들과 더불어 수명을 다한것이다.
   자그마한 터밭에 호미날 긁적이시며 밭은 한번 묵이면 그냥 풀밭이 되는거라며 그렇게 악착하게 가꾸시던 모습이 이 봄에 더욱 그립다. 기껏해야 롱구장보다 조금 큰 터밭이건만 어머니는 허위허위 밭고랑을 내시고 고추랑 가지랑 심으시며 흐믓이 웃으시였다. 처음 줄칸을 쳐보는 애들처럼 삐뚤빼뚤 지은 고랑들에 당콩알도 뿌려놓고 종다래끼보다 낡은 흰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시던 어머니였다
   살폿이 흙을 덮으며 나가는 가닥탑을 바지런히 뒤쫓으며 자귀를 밟던 뒤집에 명녀랑도 세월아 네월아 가는 언덕너머 파파늙은 로친네로 섰을것이니… 그토록 많은것을 잃어버렸으니 이제 남아있는 내 삶은 얼마나 람루한가? 내 인생서의 안표지에 자화상은 그저 모양새가 구전하지 못한 모습일수밖에 없으니 그게 더 서럽다.
   청춘은 인생의 봄, 봄은 청춘의 계절이라 하지만 고목봉춘이란 말도 있거니 할미꽃의 봄이기도 한것을 어이하리. 인생은 비록 저믈었지만 늙을줄 모르는 마음을 숫제 봄언덕에 세우둔채 추억에 사는 세대들의《춘정》을 누구들은 우습게 여길수도 있으리. 그러나 세월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대한다는것을 안다면 앞서간 사람들을 그렇게 비웃지는 못하리라.
                    
                     봄이 가려하니 내랴 혼자서 말릴소냐
                     다못핀 도리화를 어찌하고 가려는가
                     아희야, 덜된 술 걸러라. 가는 봄 전송하리라.
 
 
                         2008 년 2 월 29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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