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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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시 10대촉구 8.하이퍼시는 자아가 아니라 타자를 촉구
2017년 12월 20일 09시 51분  조회:596  추천:1  작성자: 최룡관
8.하이퍼시는 자아가 아니라 타자를 촉구


 
시는 자아가 아니라 타자란 말은 시는 일인칭이 아니라 삼인칭이라는 말이겠다. 타자란 말은 초자아 또는 무아와 통한다. 자아란 말은 인간제일주의와 통하고, 타자란 말은 자연제일주의와 통할것 같다. 자아를 내세우는 시작법은 현대시가 시인자신의 유토피아를  추켜들던 시였고, 타자를 내세우는 시작법은 유토피아를 허물어 중심을 버리는 하이퍼시다.  타자를 주장한 석학중에  자크 라캉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정신을 전혀 개입하지 않고서도 문자가 인간에게 가능한 진리효과들을 모두 만들수 있다는것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정신이 내건 주장들은 난공불락의것으로 남아있을것이다. 다름 아닌 프로이트가 이런 사실을 발견해냈으며 그는 자신이 발견한것을 무의식이라 불렀다.>>(자크 라캉 <<욕망이론>>73쪽) 자아란 시에 자기정신을 개입하는것을 말한다고 할수 있다. 그런데 라캉은<<정신을 전혀 개입하지 않고서도 문자가 인간에게 가능한 진리효과들을 모두 만들수 있다>>고 한다. 이제까지 문학작품에서는 정신을 내건 작품들을 창작하는것이 오랜 세월을 거치였다.   때문에 << 난공불락의 요새>>를 쌓았다고 할수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라는 새로운 명제를 내놓은 다음부터 <<난공불락의 요새>>에는 금이 가기 시작하였고 해체되기 시작하였다. 해체를 주장한 사람은 자크 데리다이다. 필자의 소견에는 하이퍼시를 간단히 말하면 세글자로 요약할수 있을 같은데 <<덧보대>>이다. 소위 <<덧>>이란 덧붙인다는 말이고, 소위 <<보>>란 보충한다는 말이고, 소위 <<대>>란 대체한다는 말이다.
이 세마디를 종합하면 대리보충이다. 대리보충이란 엄청 중요한명제이다. 데리다는 <<대리보충에 대한 맹목이 작가들의 법칙이라고 주장한다>>(<<자크 데리다의 유령들>>. 니콜러스 로일.135쪽)고 하였다. 법칙이란 말에 우리는 반드시 주목하여야 한다. 법칙이라면 꼭 그대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법칙을 위반하면 벌을 받게 된다. 과거에 우리가 이런 법칙이 있다고 꿈이나 꿔보았던가? 바로 랭보가 말한것처럼 <<나의 우월성은 어떠한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데 있다>>(<<현대시구조>>96쪽. 후고 프리드리히작) 그래서 롤랑바르트는 <<근대적시는 객관적시가 된다. 그속에서 대자연은 고독하고 끔직한 대상들의 불연속체가 된다.>>(<<글쓰기 0도>>. 48쪽.)고 하였으리라. 타자란 유령과 같은것이지만 시에서는 절대로 홀시해서는 안되는 유령인것이다. 
한국의 오남구시인은 오래동안 고독하게 시쓰기를 한 시인이다. 그의 시 한수를 보자.
 
밤비
오남구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빗소리가 깊게 깊게
몸 속을 지나가면서 적시고
짐승이 비를 맞고 서 있다.
깜박 깜박이는 신경 어디쯤일까
새파란 의식이 불을 켜고선
키 큰 미루나무가 선
밤비 속
짐승, 환하게 떠올랐다 캄캄하고
바람 몇 칼로리의 그리움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ㅡ「밤비」전문
 
이 시를 리해하기 쉽게 풀어 시로 쓰면
 
깊은 밤이다
내 몸은 몇카로리 짐승이 되여
새로운 깨침을 얻는다
비가 내리며
내 마음의 갈피갈피를 적시고
나는 짐승이 되여 비를 맞으며 서있다
깜박이는 깨달음이
새파란 의식의 불을 켜고
키 큰 미류나무에서 반짝인다.
밤비의 번개속에서
짐승이 환하게 떠오르다가 사라진다.
바람이 몇카로리 그리움이 되여
미루나무 이파리들을 흔든다
 
이렇게 <<밤비>>를 개조해 놓으면 시의 리해에 어려움이 없으리라 생각된다. 필자가 여기서 중점적으로 착안하려는것은 내용이 아니라 첫단위를 비롯한것이다. 
 
깊은 밤,
내 몸은 몇 칼로리의 짐승이
불을 켠다.
 
<<불을 켠다>>는 새로운 깨침을 얻는다는 말이고 <<내 몸은 몇카로리의 짐승 >>, 짐승이라고 한것은 은유인데 나를 짐승으로 변형시키고 있다고 할수 있다. 즉 한 인간인 나를 다른 사물인 타자로 만들었다는것이다. 시는 타자가 주요하다. 시는 존재를 추구하므로 일인칭인 나가 중요한것이 아니라 삼인칭인 타자가 중요한것이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고 하였으나 자크 라캉은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곳에서 존재한다. 바라보기만 하는 ‘나’가 아니라 보여짐을 당하는 ’나’도 있다는 주체의 객관화이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의 주장은 반대이다. 데카르트는 글의 대상과 작자가 동일하다는것이고, 라캉은 글의 대상과 작자가 다르다는것이다. <<구조주의력사>>를 쓴 푸랑스아 도스는 이렇게 말한다. <<무의식은 언어의 산물,  언어코드의 산물이 된다…나는 내가 있지 않는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곳에서 존재한다. >>(172쪽) 이제 결론이 내렸다. 푸랑수아 도스와 자크 라캉은 다 구조주의자로서 같은 말을 한다. 데카르트는 근대철학의 아버지라 불리기에 한물이 간 철학가라고 할수 있다. 데카르트는 자아를 중시하고 도스와 라캉은 타자를 중시한다. 필자는 타자를 중시하는 당대철학자들의 말을 믿고싶다.
<<나는 몇카로리 짐승>>이란 시구는 주관의 객관화이며, 주체의 객관화로서 나로부터 <<몇카로리 짐승>> 이라는 타자를 탄생시켰다. 시의 마지막행에 나오는 <<미루나무>>도 타자이다. 
콩싹은 콩에서 나왔지만 콩이 아니며 사과는 사과나무에 달려서 익지만 사과는 사과나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새로 탄생된 언어는 원래있던 언어와는 완전히 다른것이다.  둘은 아무런 관계도 없고 아무런 련민도 없다.  언어는 언제 어디서나 변형을 꿈꿀뿐이다. 언어의 꿈은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 새로운 언어를 불러낸다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작자는 언어를 넘어선 언어를 불러낸다는것이라겠다. 언어를 넘어선 언어란 변형된 언어이고 새로운 언어창출에 속하는 사물이라고 할수 있다. 언어가 언어를 넘어선 언어가 바로 타자로 된다는 말이겠다.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을 쓴 니콜러스 로인은  <<재창조의 유희-다양한 방식으로 환기되는 언어의 타자 즉 언어를 넘어서있으면서 언어를 소환해내는것으로서의 타자라는 관념이다.>>( 91쪽) 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는 의미와 중요성을 밝힌것이라고 하겠다.
중국 청나라때 유명한 문학비평가 왕궈우이(王国维)라는 평론가가 있었다. 그는 동서양을 결합하여 문학비평서를 썼는데 그것이 《인간사화》(人间词话)이다. 그는 시에는 <<유아경>>(有我境)과 <<무아경>>(无我境)이 있다고 하였다. 유아경은 자아가 시속에 있는것이고 무아경은 자아가 시속에 없는 타자경이란 말이겠다.이 어구를 해석한 縢咸惠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王国维는 다수의 시인들은 오로지 유아지경(有我之境)을 창조하고 오직 걸출한 시인만이 비로소 무아지경(无我之境)을 창조한다고 인정하였다>> <<유아지경은 굉장(宏壮)하고 무아지경은 우미(优美)하다. 王国维는 우미함을 숭상하였다>> 고 하였다(<<인간사화>>8쪽)유아경과 무아경은 다 좋은 시를 쓸수 있는데 왜王国维는 무아경을 더 숭상하였을까? 王国维가 좋하하는 시구의 하나가 이런것이 있다,<<红杏枝头春意闹>>,자역하면 <<바알간 살구나무초리에 봄이 자지러지다>>이다. 번역은  잘되지 못했더라도 원이미는 나타난것 같다. 이 시구는 봄물이 오르는 가지와 봄사이에 일어나는 관계를 썼다고 할수 있다. 王国维가 좋아하는 이미지는 아무 사람이 읽어보아도 아름다움을 그지 없이 느끼게 되는 시구이다. 이 이미지는 두사물의 관계를 말했을뿐 시인의 감정을 꼬물만치도 시에 개입시키지 않고있다. 
유아경에는 시인의 주장이 있고 바램이 있지만 무아경은 그런것이 없다. 유아경은 주관화이고 무아경은 객관화이다. 주관화는 자기 중심주의이고 객관화는 존재를 존중한다. 우미한것은 개인과 리해충돌이 없다. 아름다운것은 누구나 다 좋아하지만 굉장한것은 이데올로기에 관여되기에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따로 있게 된다. 우미한것은 흔히 자연대 자연이고 사물대 사물로  이루어지고, 굉장한것에는 작자의 립장, 관점, 주장이 로출되여있기  마련이다. 사람은 자유를 바라지 예속을 바라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독자들중에는 시인의 립장, 관점, 주장을 옹호하는 사람과 별로라고 보는 사람이 있을것이고, 반대하는 사람도 따로 있을수 있다. 독자에게 자신의 관념을 강요하는것은 시적으로 모자라는 부분일것이다. 계급과 계층에 관계없이, 총통도 죄인도 관계없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시의 아름다움 즉 우미한 시를 왕궈우이는 상등으로 치부한것 같다.
 중국고대에 성인은 뜻을 상으로 말한다고 하였다. 시인이 성인이다. 상이란 사물이다.  시인의 관점을 사물에 의탁한다는것은 중국 시문학의 전통이다. 예로부터 시는 시인의 관점을 로출시키는것이 아니라 시인의 관점을 감추어야 한다는것이다. 즉 사물속에 시인의 감정이 녹아있어야 한다는것이다.  <<세계의 정직한 사람들이여/ 지도를 펼치라/ 싸우는 조선을 찾으라>>고 호소하던 시의 계절도 지나갔거니와 이렇소 저렇소 하고 시인자신이 판단을 내리던 시풍도 사라져야 할 때가 온것 같다. 다시 말해 시인은 사물로서 말해야 하며 사물들의 관계로서 아름다움을 말해야 하는것이다. 사물을 떠나서 자신의 관점을 토로하는것은 류협의 말처럼 골수를 뽑아내는것이다. 골수가 다 빠지면 사람은 죽을것이다. 시는 죽은 송장을 쓰는것이 아니라 살아움직이는 생명을 쓰는 일이다.  사람은 여러가지 사물들속에서 존재한다. 그래서 사람이란것은 자연의 일속에 속한다. 한 시인이 한사물을 직시할 때 다른 사물들은 시인을 직시하는것이다. 그러므로 시인도 타자로 시에 나타나야 한다. 오남구시가 바로 이런 시이다.
시인이 리용하는 언어기표도 시인의것이 아니라 타자이다. 시인은 사물과 사물의 이항대립의 관계를 재구성하여 시를 쓰기에 문자의 놀이를 한다고 할수 있다. 그 놀이란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는 놀이이다. 언어가 언어를 넘어서는 놀이가 아닐 때, 그것은 현실그대로가 된다. 현실 그대로는 시의 가장 큰 적이다.        << 언어를 넘어서있으면서 언어를 소환해내는것으로서의 타자라는 관념이다. >>(<<자크 데리다의 유령들>>.91쪽) 니콜러스 로인의 이 말은 언어가 언어를 넘어선다는것은 언어가 언어를 덧붙이고 보충하고 대체한다는것으로 리해되여야 할것으로 알고있다. 그리고 언어의 흐름이 일상성을 떠나서 새롭게 엮어져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물과 사물의 짝짓기이며 결혼이지 사물과 감정의 짝짓기거나 결혼이 아니며, 사물과 정신의 짝짓기나 결혼이 아니다. 시는 추억이나 기억을 완성시키는 일이 아니라 생성을 완성시키는 일이다. 이 말은 실로 중요하다. 시적대상을 잡은후 그와 관계되는 어떤 사실같은것을 쓰는것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그 사물의 새로운 생성을 쓰는것이 중요한것이다. 회억하거나 추억하는것은 시를 쓴다고 할것이 아니라 마땅히 수필을 쓴다고 해야 할것으로 알고 있다. 타자는 회억이나 추억이 아니다. 회억이나 추억은 시적대상과 관련되는 사물이거나 사실이지 시적대상에 의하여 새롭게 생성된 사물 즉 차원이 다른 사물은 아닌것이다. 시는 한사물에서 다른 사물이 생성을 이쁘게 쓰는것이다.  그렇게 쓰는것이  하이퍼시의 좋은 표현이 될것으로 알고있다.
시인은 시종 어느 하나의 언어만 련민하고  사랑하는것이 아니다.   련민과 사랑은 순간일뿐이다. 현실에 대한 파괴파괴이고, 새로운것에 대한 건설건설이다. 건설된것은 파괴된것과 완전히 다른 두가지 사물이다. 건설된것은 파괴된것을 연연하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 건설된것은 또 다시 파괴를 당하게 되고 새로운 건설이건설된 자리를 차지하게 될것이다. 어떠한 건설이나 다 잠시적이다. 이것이 하이퍼시에서의 타자의 의미라겠다.
아무래도 또 주역을 말해야겠다. 주역은 여덟가지 괘로 세상만물을 말하였는데 거기에는 자연사물을 말했을뿐이다. 자연사물이란것은 타자이다. 건괘. 지괘, 풍괘, 수괘, 화개, 연괘, 뢰괘,산괘 등 여덟가지 괘이다. 유감스럽게도 사람에 대하여 나에 대하여 직설한 괘는 없다. 사물속에 인간을 말하는 의미가 내포되여있고 사물의 도에서 나를 볼수 있게 하였다. 한마디로 말하면 타자속에서 나를 찾아야 한다는것이다. 그래서 류협의 <<문심조룡>>은 사물과 사물을 비긴다고 하였고, 시인의 감정은 사물에 의탁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인간을 말하여도 사물과 사물을 비기는 도리로서 말해야 한다고하였다. 보매 타자의 도리란것도 그 뿌리는 중국에 있었다는 결론을 내릴수 있지 않으랴 하는것이다.  어불성설인지는 몰라도 서양에서 지금 말하는 현대시요 하이퍼시라는것들은  근대나 현대에 와서 중국의 고전을 부활시키고 꽃피운것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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