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룡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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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선 ㅡ 다양체의 시에 대하여 ㅡ한춘시에 대한 탐구 /최흔
2019년 05월 07일 20시 30분  조회:516  추천:0  작성자: 최룡관
한춘시평.1
 
다선 ㅡ 다양체의 시에 대하여
ㅡ한춘시에 대한 탐구 /최흔                
 
 
한춘은 1990년 4월에 첫시집 “주소없는 편지”를 남기였고, 2003년에는 “무지개는 뿌리내릴 곳을 찾는다” 펴내였고, 2013년에 3월에 “높은 가지끝에 달린 까치둥지”를 출간한 시인이다. 그로 말하면 시집 세권이란 많은 수자가 아니다. 하지만 이 시집 세권이 중국조선족시단에 획을 끄은 이쁜 시집이다. 시인의 생전에 사람들은 그의 시를 몽롱시 난해시라고 몰아부치면서 타매도 많이 하였다. 독자들 말이 맞았다. 그의 시는 몽롱시 난해시였다. 그런데 몽롱시 난해시라고 말하게 되는 것은 여러가지 원인이 있다. 그 한가지는 그의 시는 계몽이 드러난 시가 아닌 현대시였고, 다른 한가지는 많은 독자(필자도 포함)들이 시를 무엇을 위해 복무하는 것으로 알았기 때문이였고, 더욱 중요한 것은 현대시란 어떤 시인가 하는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하나의 이미지를 둘러싸고 시를 쓴 것도 알아보지 못하던 당년에 여러가지 이미지로 시를 쓰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양체에 속하는 것이였다. 시인자신은 이미지로 시를 쓴다고 하였고 자신은 주지주의자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미지로 시를 쓴다는 것은 맞는 말이였지만 그의 시는 주지주의를 넘어서는 때가 많았다. 다시 말하면 주지주의는 모더니즘이고 주지주의를 넘어선 시는 포스트 모더니즘에 속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주요한 원인의 하나는 한춘의 적지않는 시가 단선구조인 것이 아니라 다선구조였기 때문이였고 다양체였기 때문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다선구조로 된 시들은 “주소없는 폊지”에서는 (12) (15) (22) (23)등등 많은 시들이고, “무지개는 뿌리내릴 곳을 찾는다”에서는 (그리움) (기타소리) (십년고독) (간단한 진실) 등등 많은 시들이고, “높은 가지끝에 달린 까치둥지”에서는 (무제18) (21세기 심우도(21)) (심야명상 (7)) (두견화) 등등 많고많다. 필자는 본 평론에서 한춘시의 다양체에 대하여 말하고저 한다. 아래에 한수의 시로써 구체적으로 살펴보려한다.
 
더위에 지지는 베짱이 울음소리, 목표는 박수소리가 아니라오. 해살과 록음사이, 암석과 강물사이, 초가삼간과 고속도로사이. 절벽과 바다사이… 모든 계절풍이 동쪽으로 불어요.
 
자꾸만 회답을 기다린다는것은 자꾸만 생명을 소비한다는 것이지만 맘속의 해살 한아름 건사한다는것은 생명이 진해도 빛보일 씨앗을 영그는 작업이라는것을 주해달지 않아도 알겠지요.
 
송화강대교 가로등에 물들은 붉은 구름이 이마를 스쳐가는 6층집 한칸에 한밤이 지새도록 어둠을 밀어내는 등불이 보이거든 살풋이 눈을 감아도 좋아요.
 
올빼미의 피빛 울음은 행복을 절단하여 절반은 몸에 걸치고 절반은 마음에 심어놓고 에이즈병이 무섭지 않다는 선언, 수리개만 하늘의 적자인것이 아니라요.
 
이 시는 “주소없는 편지(63)”의 전문이다. 벌써 1990년도 시집에 이런 시가 있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마 이 시집은 개혁개방후부터 1990년도까지 쓴 시들을 추려서 묶은 시집일 것이다. 그러니 한춘은 언녕부터 이런 시를 썼다고 생각한다.  그때 저를 비롯한 많은 시인들이 이런 시를 볼줄 모르는 청맹과니였다고 생각되며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오늘에도 이런 시를 볼줄 모르는 시인이나 평론가가 한두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의 시마당에는 이런 시가 많고도 많다. 그의 이런 시구성은 대개 이런 횡적구성을 이루고 있다.  필자는 이런 시를 다선시 혹은 다양체시라고 부른다. 우선 각련이 각각 한개 내용이라고 할수 있다. 그 내용들은 서로 련계되는 것이 아니라 분리되고 있다. 첫련은 더욱 세세하게 분리되고 있다. 련결이 아니라 분리되여 있기때문에 도대체 무엇을 쓰고 있는가를 가려내기 쉽지 않다. 네개의 련으로 구성된 이 시는  이미지가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것이 차요하다는 것이 없다. 높이로 말하면 똑같은 높이이고, 인격으로 말하면 똑같은 인격이고, 급으로 말하면 똑같은 급니다. 어느것도 중심이라는 것이 없다. 다 변두리이고 겉이고 곁이다. 이런 시를 다양체라고 한다. 이런 다양체로 하여 이 시는 현대시인 것이 아니라 후기현대주의시이며 하이퍼시다.
 
필자의 졸견으로는 아래와 같이 생각한다. 이 시는 시간과 공간이동이 강하다. 이 시에서 처음에는 사물과 사물사이를 라렬하였고,  어떤 회답에 대한 것을 썼고. 그담에는 송화강 대교에 대한 것을 썼고 그담에는 올빼미의 피빛울음에 대한 것을 썼다. 시를 한사물에 모를 박고 쓴것이 아니라 시의 사물(이미지)이 자꾸 딴것으로 바뀌며 시간과 공간을 확장시킨다. 이 시간과 공간의 확장은 어떤 근거나 어떤 원인으로 련계되는 것이 아니라 시를 쓰는 순간 시인의 령혼에 떠오르는 상상적 형상이다. 상상은 언제나 자유롭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밥을 먹으면서도 누구네 헛간을 생각할수도 있고, 어느 산을 생각할수도 있고, 어느 강물의 파도를 생각할수도 있고, 어느 남자나 녀자를 생각할 수도 있고, 범이나 나무를 생각할 수도 있다. 이런 생각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춘의 시는 이런 자유스러운 생각으로 시의 시간과 공간을 스스럼없이 확장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를 생각하게 되며, 한수의 시에서 그런 여러가지 상상을 쓰는 것은 시인의 사유와 자유가 아니겠는가. 상상으로 성질이 완연히 다른 여러가지 사물을 떠올리며 시를 쓰지 못한다는 제한은 없는 것이다.
 
한수의 시에서 여러가지 사물을 떠올리는 것을 필자는 령토화 탈령토와 재령토화라고 생각한다. 한 이미지를 령토라고 한다면 그 령토는 무수한 다른 령토와 련결도거나 결합될 수 있는 문을 열어놓고 있다고 하겠다. 그 문으로는 어떠한 사물(이질적 인)이나 다 들어올 수 있으며 들어와서 원래의 령토와 련합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세상사물은 모두 음과 양이라는 동일성으로 구성되였으며 한사물속에는 우주의 사물 모두가 들어 있다고 생각된다. 이 음과 양은 조건에 따라 서로 대방과 바뀌기도 한다. 남자가 녀자로 될 수도 있고 녀자가 남자로 될수도 있다. 나무가 뱀으로 될수도 있고, 강물이 산악으로 될 수도 있고, 하늘이 땅으로 될수도 있고, 땅이 하늘로 될수도 있다. 이것이 철학의 변증법이자 시의 변증법이다.  변증법에 부합되는 “주소없는 편지(63)”는 이 도리를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주소없는 편지(63)”은 이것저것 쓴 가작이다. 현대시의 사유와는 완전히 다른 별개의 수법이다. 사물들은 계속 도주하고 있으며 뒤에 나온 사물은 앞의 사물을 밀어버리기도 하고 대체하기도 한다. 각련과 련사이가 그럴뿐만 아니라 첫련은 그밀도가 더 빼다. 밀면서 련합되고 대체된다. 처음에는 베짱이 울음소리와 박수(이질적인 사물임)를 결박시켰고, 그담에는 해살과 록음이 베짱이와 울음소리를 밀어내고 자기들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그담에는 암석과 강물사이가 해살과 록음을 밀어내고 앞자리를 차지하고. 그담에는 초가삼간과 고속도로, 그담에는 절벽과 바다사이가 나타난다. 우리는 이런 시의 수법에서 적어도 시인의 사유의 자유률과 여울진 숨결의 맥박을 들을 수 있고 보아낼수 있다.
 
“주소없는 편지(63)”은 이색적인 이미지로 이루어진 이미저리라고 말할수 있다. 이미저리란 색갈과 모양이 다른 이질적인 사물들의 집합이다. 시를 약탕관이라고 한다면 약탕관 속에는 여러가지 약재가 있어야 한다. 시를 읽어보면 우리는 “주소없는 편지(63)”에서 여러가지 약재를 닳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베짱이 울음소리가 있는가 하면 박수소리도 있고 회답이 있는가 하면 송화강 대교도 있고 올빼미도 있다… 이런 수법은 하나의 사물을 보고 쓰는 재래식과는 틀린다. 수십년, 수백년을 써오던 재래식틀을 파괴하고  새로운 식으로 쓴 것이라고 하겠다. 파괴속에는 건설이 있고, 건설속에는 새로운 시풍이 있고, 새로운 질서가 있는 것이다. 시인의 파괴와 건설은 일상적인 상상을 뛰여넘는 출기불의(出其不意)이다. 왕청같고 엉뚱한 이미지 출현으로 하여 독자는 다음을 예측할수 없어 강타를 당하며 강타에서 오는 떨림을 받게 되며 혼돈을 느끼면서도 매혹되게 된다.
 
시는 대개 세가지 류형으로 분류된다고 할 수 있다. 계몽주의시, 현대주의시 (모더니즘), 후기현대주의시(포스트모더니즘)로. 계몽주의시는 봉건사회에서 쓰던 수법이고 모더니즘시는 근대주의에서 쓰는 수법이고, 포스트모더니즘은 다국화시대, 세계화해주의 시대에 쓰는 수법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히는 전자시대 ㅡ컴퓨터시대의 산물이다.  한춘시는 필자의 견해로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시라고 할 수 있다. 때론 모더니즘 수법으로, 때론 포스트 모더니즘수법으로 씌여지고, 때론 이량자의 혼합으로 씌여졌다고 하겠다. “내”자가 들어가고 나의 정서를 말한 것은 모더니즘류형에 속하고 내나 나의 정서가 없이 여러가지 사물들 관계로만 엮은 것은 포스트모더니즘 류형(례하면 <주소없는 편지(63)>)에 속한다고 하겠다. 그의 모더니즘시들은 읽으면서 생각하면 무엇을 쓴 것이 알리지만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쓴 시들은 한두번 읽어봐서는 무엇을 썼는지 알리지 않는다. 모더니즘은 일반적으로 자아를 바탕으로 쓰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일반적으로 무아를 바탕으로 쓰기때 문이다. 자아를 바탕으로 쓴 시는 일반적으로 이미지 하나를 둘러싸고 쓰게 되고, 무아를 바탕으로 쓴 시는 일반적으로 성질이 다른 이미지를 라렬집성하면서 다양체를 구성하게 된다. 이 량자를 다른 말로 하면 의식과 무의식의 차연이라고 하겠다. 의식으로 쓴 모더니즘시는 일정한 한계가 있고 일정한 주제가 있지만 무의식으로 쓴 포스트모더니즘시는 한계가 무한하고 풀이도 각자의 나름에 따라 다르게 된다. 모더니즘시는 하나의 주제를 둘러싸고 쓰지만 포스트모더니즘 시는 이미지단위마다 다른 주제를 지니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시는 절대적으로 소통을 위한 시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언어를 위한 시라고 말해야 할것이다. 풀이에서도 C가 고추라면 고추일수도 있고, N가 마늘이라면 마늘일수도 있고, D가 비행기라면 비행기일 수도 있다. 시에 대한 리해능력의 차이로 해석에도 차이가 나게 마련이다. 하이퍼시도 포스트모더니즘 계렬이다. 소통과 언어 문제에 대하여 앞으로 기회가 있을 때  말해보려고 한다.
 
많은 지적과 량해를 바라면서 각필한다.
 
 2018.11.7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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