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저으기 격동된 심정으로 방순애 두번째 시집의 서언을 쓴다. 중국조선족문림에서 첫하이퍼시집 <<시간은 원이 되여>>를 출간한지 일년남짓한테 두번째로 <<황금률하이퍼시집>>을 출간하게 되니 가히 경하할 일이다. 이것은 시인의 령혼이 뼈를 녹이는 노력으로 이룩한 성취이다.
필자는 시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시는 탐구이며 새것이며,시인은 초행길만 걷는자이다.
황금률하이퍼시!!
아마 이런 시가 고금중외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그러니까 시의 새로운 형식을 발견하였다고 하겠다. 우리 시에는 3장6구로 된 시조가 있었고 자유시가 있었고 민조시가 있었고 가로세로 시가 있었고 지금은 새로운 시 황금률이라는 시가 있다. 황금률이라는 것이 어떤것인가? 시인의 말을 들어보자
<< 황금율은 예로부터 아름답기로 비할 데 없이 신비로운 색채를 띠고 있으며 천연적으로 합리한 가장 아름다운 형태의 비율이라고 인정받아 왔다. 황금율은 구도원칙일 뿐만 아니라 자연사물의 최상의 상태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알고 있다. 중세기 이태리 수학자인 피보나치는 많은 식물의 잎사귀와 꽃잎, 솔방울 조각은 작은 것에서 큰것으로 0.618:1과 근사한 비율로 배열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 바로 유명한 <비보나치 수열>인 1, 2, 3, 5, 8, 13, 21, 34……등으로 이루어진 황금율이다. 첫행이 한자라면 두번째 행은 두자이고, 세번째 행은 첫두행의 합이고, 네번째 행은 두세번째 행의 합이고, 다섯번째 행은 뒤의 세네번째 행의 합으로 된다. 이렇게 그냥 음보가 올라가는 것이 문자로 표기된 황금율이다. 동물들의 몸에 나 있는 채색도안도 로마의 네스크식성당도 황금비율에 부합되여 아름답고 웅위로움을 자랑한다고 한다.
황금율은 황금과 같은 율법이라는 뜻으로, 매우 깊은 뜻을 담고 있어 인생에 유익한 교훈이 되는 말을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황금분할의 원리에 의한 조화의 원리를 이용하여 시를 쓰면서 시의 음보를 황금율 수열형식으로 배렬해 보았다.>>
방시인의 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1.생명선률
점
문턱
밟고간
바다의 언어
동해의 물결을 타고
이그러진 얼굴에 시간을 뿌리고
미역을 감던 돌 자연의 소용돌이에서 사랑에 물들어
2.려명직전
어둠
빛과 리별
짝짓는 금시간
허리띠를 푼 둥근 달자궁
영원히 잦아들지 않는 빈들판의 돌담들
흐느끼는 노을을 잠재우고 지평선에 떳던 소리의 다리를
3.악수
긴호흡
팔벌리는 심장
쿵당 방아를 찢는 목젖
대야안에서 큰 진주를 걸러내는 하루
귀벽을 후치던 말소리 튕겨나와 파다닥 거리는 가슴팍사이
골짜기에서 경련을 일으키다 주눅들어 울고있는 파란 자존심 바람에 졸린 여운으로 빳빳해지다
시 1에서는 첫행을 한자로부터 시작하였고 시2에서는 두자를 한단위로 시작하였고 시3에서는 석자를 한단위로 시작하였다. 하지만 시들은 다 1.2.3.5…의 비율을 지키면서 전개되고 있다.
그러니까 방순애의 황금율시는 자유시가 아니고 율시이다. 황금율에 맞게 시문을 배렬하면서 쓴 시이다. 이것은 방순애시 인만의 발견이며 창조이다. 우리 시림으로 말하면 하이퍼시가 새로운 형태로 대두되고 있는데 거기다 황금율이란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일정한 율에 의하여 시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다는 것은 누구나 다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황금율시는 방순애 시인의 시법이고 방순애시인의 시법은 황금율하이퍼시이다. 한시인이 한 시법을 가진다는 것은 너무나 어마어마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필자는 첫머리에서 경하드릴 일이라고 하였고 저으기 격동된다고 하였다..
2
시간과 세상은 사라짐과 탄생의 그라프를 그리고 있다. 한쪽으로 태여나고 한쪽으로 사라지는 것이 모든 사물의 움직임이다. 이런 움직임은 법칙이라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방순애시인의 황금율하이퍼시가 바로 이런 법칙에 기대여 시를 다루어지고 있다.
아침차
검은 안경을 낀
도시를 꿰뚫어 달린다
자신을 잃는 동안 늘어나는 둥근 시줄
입마다 벌리고 합창하는 이슬꽃들 새의 노래를 두려워할까
얼음도 햇님이 다가오면 굳어진 몸 푸는데 서서히 뻗어가는 세월
이파리는 단풍에 물들지 않을가
산맥을 타고 대렬을 지은 집들은 빨간 노을 모자를 쓰고
구름은 황금빛을 반죽하여 여기저기 걸어놓아
골짜기 따라 굽이치는 안개는 산촌의 머리를 쓸어준다
시 <<행로>>의 전문이다. 차의 움직임은 <<둥근 시줄>>에 의하여 밀려나있고, <<둥근 시줄>>은 <이슬꽃들>>에 의하여 밀려나 있으며, 그것은 또 <<얼음>>에 의하여 밀려나고, <<얼음>>은 또 <<집들의 빨간모자>>에 의하여 밀려나고...왜 이런가? 한사물에 가리워져있었거나 파묻혀있던 사물들이 시인의 상상에 의하여 튀여나온다. 튀여나온 사물들은 원래있던 사물들과 이렇게 말한다. <<임마 자리 좀 비켜! 너 그만 있었음 됐어. 그자린 인제 내자리야>> 한다. 구불어온 돌이 백인돌을 빼버리는 격이다. 그러면 원사물은 튀여나온 사물에게 자리를 양보하는데 실은 밀려나기이며 사라지기다. 다시 말해서 한 이미지가 밀려나고 사라지면서 새로운 이미지가 탄생하고 움직이고 있는것으로써 무쌍한 변화를 일으킨다. 어찌 보면 이것이 자연의 조화이며 생명체의 운동이 아니겠는가. 하이퍼시는 이렇다. 한사물의 이미지가 시의 시종에 관통되는 것이 아니라 제약을 받으며 밀려나게 되며 새로운 사물의 이미지가 나타나서 운동하게 된다. 그래서 횡적구성이며 다선구조이다. 그래서 주제가 하나인 것이 아니라 다주 제이다.
방순애시인은 주어진 사물을 현실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을 변형시키면서 원초적인 것을 파보고있다. <<안경을 낀 도시>>, <<늘어나는 둥근 시줄>>, <<몸을 푸는>><<얼음>> , <<빨간 모자를 쓴 >><<집들>>,<<산촌의 머리를 쓰다듬는>><<안개>> 등등은 다 변형이며 그 변형들은 원초적인것을 파내여보려는 시인의 시각에 의하여 부각된다.
방순애의 황금율하이퍼시는 이질적인 이미지집합으로서 이미저리를 이룬다. 이런 이미저리들은 여러가지 형상으로 의경(意境)을 이룬다. 그 의경은 시인의 상상의 산물로서 꿈의 재현이고 나름대로 추구하는 자연의 아름답고 황홀한 극치로서 시인의 유토피아이다.
3.
한수의 시는 하나의 생명체이다. 이 생명체는 자신의 모양새가 있다. 필자는 그것을 형태이미지라고 <<이미지시창작론>>에서 밝힌적이 있다. 방순애시인은 <<황금률하이퍼시집>>에서 시의 형태이미지를 가꾸기 위하여 많은 공력을 들이였다. 가로행의 시도 있을 뿐만 아니라 세로행의 시도 있으며, 대부분의 시들이 층층계를 련상시키는가 하면 산을 련상시키는 시도 있고(려 명직전, 눈, 차향 등등), 초모자를 련상시키는 시도 있고(새의 천국, 쉼터. 운 등등), 공작새를 련상시키는 시도 있고(내안에. 가락, 건배 등등) 수양버드나무를 련상시키는 시도 있고 (연, 오랜 세월)… 형태이미지의 다종다양함은 시각의 새로움을 추구한 것은 물론이고 시의 새로운 분위기로 독자의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하리라고 믿는다. 특히 시의 제목과는 다른 형태이미지가 설정되여서 곰곰히 새겨보면 상큼하고 신선한 맛이 짙다. 이러한 형태이미지들의 조화가 신비롭기만 하다.
방순애시인의 <<황금율하이퍼시>>는 새로움의 덩어리이다. 이 덩어리는 시문림에 새로운 황금빛을 눈부시게 발산하고 있다고 하겠다.
2014년 10월 29-30
새로운언어들의대행진
ㅡ방순애 윤동주문학상 수상시집 <<씨실과 날실의 대화>> 소평
윤동주문학상을 수상한 방순애 시집 <<씨실과 날실의 대화>>를 읽었다. 이 시집은 새로운 언어들의 대행진이다. 감동과 자극의 도가니속으로 독자를 몰아부치는 새언어들의 그림이며 교향악이다. 왜 그런가? 세가지로 해부해 보려고 한다. 첫째는 황금률의 세계를 자유로 종횡무진하고 있고, 둘째로 이미지의 생성의 세계를 들락거 리고, 세째로 객관화의 도상으로 걸어간다.
1.황금률의세계를자유로이종횡무진한다
방순애시인은 자기 시법이 있는 시인이다. 방시인은 2015년 6월에 <<황금률 하이퍼 시집>>이란 시집을 펴낸 시인이다. 그때 <<황금률은 방순애의 시법>>이라고 필자는 서언에서 지적한 적이 있다. 그 시집에서 시인은 1,2,3,5,8,13,21,…음수률을 원형대로 붙잡는 아집으로 시를 썼는데 이번 시집에서는 그것과는 많이 틀린다. 한수의 시에 여러가지 황금률 격식이 나타난다. 차례로 음수률을 맞추며 쓰는 것을 필연이라면 이번 시집에서는 그 음수률들을 자유롭게 뛰여다니면서 자유를 향수하고 있다. 한수의 시에 5,8,13,21의 음수률이 있는가 하면 3,5,8의 음수률이 있고, 8,13,21의 음수률이 있기도 하다. 창출되는 이미지의 수요에 따라서 음수률은 자유롭게 라렬하 고 있다. 그리고 어떤 때는 한가지 음수률을 몇행씩 배렬하면서 시의 분위기를 새롭 게 바꾸기도 한다.
하여 시들은 동그라미 되기도 하고 삼각형이 되기도 하고 장방형이 되기도 한다. 어떤 시는 붉은 색인가 하면 어떤 시는 까만 색이고, 어떤 시는 노란 색인가 하면 어떤 시는 커피색이고, 어떤 시는 하얀 색인가 하면 어떤 시는 파란 색이다 ... 이미지들이 횡대로 줄을 서기도 하고 서로 교차하기도 하고 덩어리로 묶이면서 리좀이 되고 재령토가 되고 새세상이 되고 새우주가 된다.
2.이미지생성의세계를들락거리다.
방순애시인이 창출하는 이미지는 좀처럼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냥 새로운 곳으로 도주한다. A로 나타났다가 B로 가고, B로 나타났다가 C로 가고, C로 나 타났다가 D로 간다. 이미지 A,B,C,D는 영어A,B,C,D처럼 순서적으로 라렬된 것이 아니다. 저마다 어떤 사물의 중간에서 채취된 찰라의 사물들 상으로서 각각 독립성을 갖고 있으며, 이질적인 이미지들이 시적으로 련결접속 되여있다. 어느것도 원인과 결과이거나 어느것도 순서적으로 나타남이 아니고, 어느것도 사물의 경과나 성질에 얽매인 표현이 아니라 초월이며 가상이며 허구이다. A,B,C,D의 이미지들은 어느것도 중심이 아니고 죄다 겉이고 곁이고 밖이고 삽입적이고 이것저것 라렬하는 드라마의 몽타쥬기법의 시적표현이다.
이미지의 현실과 생활의 현실은 불협화이다. 방순애시인의 이미지는 생활의 반영이나 의미의 반영이 아니라 상상의 생성으로써 무의식의 반복충동이다. 언어의 마술로써 언어의 평등과 언어결합의 자유를 지향하고 있으며 세상사물의 동일성과 통일성을 예리한 눈길로 집어세우고 있다. 이미지들은 생성의 도가니를 이루면서 복사된 것이 아니라 시인이 그린 지도이다. 이미지마다 기이하고 돌발적인 성격이 다분하여 독자들 의식에 부응되여 쾌락을 주는 독자적인 텍스트인 것이 아니라 독자의 의식에 자극을 주며 반감을 주며 떨림을 주며 향수(즉 음미하게하는)를 주는 시적이고 예술적인 텍스트라고 말할 수 있다.
공감이란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한가지는 시의 텍스트를 옹호하는 것이고 다른 한가지는 시의 텍스트를 의심하거나 반대하는 것이다. 방순애시인의 시는 전자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후자에 속한다. 그것은 이미지의 생성세계를 들락거리기 때문이
원인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3.객관화의도상을걸어간다.
방순애시인의 <<씨실과 날실의 대화>>는 한마디로 말하면 이미지의 생성, 생성, 또 생성이다. 생성만 쓰다나니 대아를 말할 사이가 없고 자아를 말할 사이가 없고 객관 화만이 남게 된다. 하여 이 시집은 객관화의 도상을 걸어가는 시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시는 사물을 다루는 시인의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물들을 다루는 방법이 시인의 의식에 맞추는가 아니면 사물자체의 운동에 맏기는가가 자못 중요하다. 시인은 사물을 방출하고 사물의 스스로의 운동에 자유를 주어야 한다. 파운드의 <<지하철정거장>>이나 랭보의 <<모음>>처럼 사물들의 변용만 있고 해석과 설명은 삼가하여야 한다. 우리는 과거의 많은 세월에 시인은 자기의 의식으로 사물을 다루는 길을 걸어왔다. 방순애시인은 이런 시작법에 도전을 하고 있고 반기를 들고 있다. 방시인은 사물이 나름으로 운동하는 것을 보고 있으며 따라가며 그리고 있다. 사물운동이 끝나면 그의 이미지도 끝난다. 방시인은 사물을 자기 의사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사물 운동의 보여주기를 한다. 그의 시는 객관화의 도상을 걸어가고 있는 이미지들 집합 혹은 집성이라겠다.
재생 방순애
별똥이 불타고 있다
자라나는 어움과 싸움하는 동안
별똥들 재로 되여 빈 벌판에 내려서 새하얀 눈이 된다
뿌리 뽑힌 자리에는
무심한 바람이 채워져 빗질하고
서리맞은 시간도 환절기 모 사리 하느라 늘어져있다
백조가 검은 탈의를 벗어 버린다
알몸으로 진흙을 반죽한 비너스
알몸으로 햇빛에 머리를 감는다
바다가 신기루가
일어선다 올라선다 날아오른다
구름도 문 열고 비도 문 열고 달도 문을 열고 들어온다
<<씨실과 날실의 대화>> 중간쯤에서 아무 시나 잡히는 대로 복사한 시다. 특별해 서 뽑아낸 시가 아니다. 첫련은 별똥이 불타서 새하얀 눈이 되는 것을 쓰고, 2련 에서는 뿌리 뽑힌 자리에서 바람이 어쩌고 서리맞은 시간이 어쩌고 하는 것을 쓰고, 3련에서는 백조가 검은 탈의를 벗어버리고 햇빛에 머리를 감는 것을 쓰고, 4련에서는 바다가의 신기루 움직임을 쓰면서 구름도 비도 달도 문을 열고 들어온다고 한다. 네가지 이미지단위에 네가지 사물이 등장하며 그 사물의 운동과 다른 사물의 운동의 조화를 쓰고 있다. 시에서 자아는 철저히 축줄된 상태이다. 가히 사물운동이 객관화의 도상을 걸어간 시라고 할 수 있겠다. 방시인의 시는 다 이렇게 사물운동을 쓰고 있을 뿐 시인의 의지를 드러내는 일이 없다. 객관화는 제3자를 작동시켜 시를 만드는 작업으로써 객관화속에는 보이지 않는 주관화가 있다. 시는 주관의식을 드러내지 말아야 하며 사물의 이미지로써 객관화에다 주관화를 용해시켜야 한다. 그래서 시는 상으로 말하기라 하고 시인은 뜻을 상에 기탁한다고 하겠다. 시인은 시를 만들고 시는 시인을 만든다고 한다. 방순애시인은 <<씨실과 날실의 대화>>를 만들고, <<씨실과 날실의 대화>>는 방순애시인을 새롭게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다.
혹자는 우에서도 이렇게 례를 들면서 평했어야 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시를 읽으며 흔상해보면 번연히 알릴 것을 필자가 구태여 례를 들면서 구시렁거릴 필요가 없어서 여기서만 례를 들고 초라한 해석이라도 하였다. 필자는 방순애시인의 시집 <<씨실과 날실의 대화>>는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시집이라고 판단하며 우리 시단에 이런 시집이 더 나오기를 기대 한다..
방순애시인은 앞으로 농경언어를 좀더 삼가하면서, <<넋>>같은 추상어의 중복사 용을 피면하기를 바라며, 자신 시에 한계가 올 수 있다는 경각성을 가지기를 바란다.
2018.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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