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령을 받고 비밀리에 상해로 들어간 소진화 (1)
(번역)
“4인방”이 체포된후 상해의 “4인방”여당들은 무장폭동을 일으키려고 시도했다. “4인방”의 잔여세력을 제거하고 상해의 “제2무장”을 해제하여 전국을 안정시키는것은 당중앙에서 반드시 착수해야 할 급선무였다.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이며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회의 해군상장인 소진화(苏振华)는 위험한 시기에 명령을 받고 부하들을 거느리고 상해로 갔다.
“4인방”을 분쇄한 이튿날인 1976년 10월 7월에 중앙정치국에서는 상해시, 강소성, 산동성, 호북성과 남경군구, 무한군구, 제남군구의 책임자들이 참가한 첫번째 통지회의를 열었다. 상해시에서는 시당위서기(당시에는 제1서기가 없었음)이며 시혁명위원회 부주임인 마천수(马天水)와 시당위서기이며 상해경비구 사령인 주순린 (周纯麟)이 참석했다. 그번 회의에 출석한 중앙령도들로는 화국봉(华国锋), 엽검영(叶剑英), 리선념(李先念), 왕동흥(汪东兴), 진석련(陈锡联), 소진화(苏振华), 예지복(倪志福)이였다. 다른 사람들은 “4인방”을 제거할데 관한 중앙의 과단한 조치를 옹호했지만 마천수만이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진듯 놀라면서 큰소리로 “4인방”을 위해 변호했다. 그리고 상해로 돌아간후 분에 못이겨 중앙에 “돌연습격을 한다”느니 “권력쟁탈을 한다”느니 뭐니 하는 글을 올려 “4인방”을 제거하는데 대해 강렬한 불만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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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의 반응을 분명하게 파악하기 위해 중앙에서는 10월 8일에 소진화, 예지복을 파견하여 주돈린을 만나보게 했다. 주돈린은 중앙의 결정을 견결히 옹호한다고 태도표시를 하면서 마천수가 상해로 돌아간후의 반상적인 행위에 대해 적발했다. 그후 소진화, 예지복, 주돈린은 마천수를 찾아가서 담화하면서 마천수의 거부태도에 대해 엄숙하게 비판하고 경고했다. 소진화는 주돈린의 건의를 받아들여 상해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긴급조치로 “4인방”잔여세력인 서경현과 왕수진을 북경에 불러들일것을 중앙에 요청했다. 이는 산을 울려 호랑이를 놀라게 하는 방법으로 상해의 “4인방”잔여세력을 당황하게 하므로써 수시로 가능하게 발생될수 있는 반혁명무장폭동을 피면하기 위해서였다.
“4인방”이 무장폭동을 일으키려고 한다는것은 일부러 사람을 놀라고 두렵게 하는 말이 아니였다.
1975년 8월에 “4인방”의 핵심성원인 왕홍문은 상해에서 여러번이나 “수정주의가 정권을 잡는것을 경계해야 한다”, “유격전을 할 준비를 해야 한다”, “도시내에서의 지상전투를 할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공개적으로 직접 그들의 령도를 받는 “상해시민병지휘부”를 건립했다. 왕홍문은 여버번이나 민병장비를 시찰했을뿐만아니라 민병들을 거느리고 군사훈련을 했다. 왕홍문은 친신인 왕수진(王秀珍), 진아대(陈阿大), 엽창명(叶昌明), 황금해(黄金海) 등을 민병두목으로 임명했다. 이렇게 민병은 명실상부한 해방군이외의 독립된 왕홍문의 “제2무장세력”으로 되였다. 왕홍문은 기고만장해 거리낌없이 “상해민병은 나와 장춘교 두사람이 조직한것이기에 다른 사람의 지휘를 듣지 않는다”고 떠들어댔다. 왕홍문과 장춘교는 지방경비 3000여만원을 함부로 사용하여 사사로이 대량의 무기를 제조했다. 모택동의 병세가 위급하다는 통지가 내려진후의 이튿날에 그들은 즉시 마천수에게 통지하여 창고에 있는 몇십만자루의 총을 기층민병들의 손에 쥐여주어 수시로 명령을 기다리게 했다. 모택동이 사망된후 장춘교는 사람을 상해에 파견하여 마천수, 서경현, 왕수진에게 “상해에 큰 시련이 닥쳐올것이니 큰 싸움을 할 준비를 하라”는 편지를 보냈다.
상해에서 무장폭동이 일어나는것을 피면하고 상해의 “4인방”잔여세력을 철저하게 분쇄하기 위해 중앙정치국에서는 즉시 중앙사업소조를 파견하여 상해의 중요한 부문을 접수하여 관할하게 하기로 결정했다.
누가 이 중임을 맡을수 있을가? 엽검영은 소진화를 추천했다.
“군대와 지방을 능히 제압할수 있는 사람을 보내야 합니다. 내 생각에는 소진화가 가는것이 합당하다고 봅니다. 그는 ‘4인방’에게 처참한 피해를 보았고 ‘4인방’을 분쇄하는 긴급한 시각에 중요한 작용을 하였을뿐만아니라 전쟁년대에 작전을 지휘한 풍부한 경험도 있습니다. 그는 정치사업에도 여러해동안 종사했고 조직사업에도 익숙하며 정책수준도 높습니다. 그는 건국초기에 귀주성 당위서기직을 맡은적이 있고 여러번이나 중앙과 모주석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상해에 해군동해함대기지가 있기에 사업하기도 편리한 조건이 있습니다. 때문에 나는 소진화가 상해에 가는것이 제일 합당하다고 봅니다.”
엽검영의 제의는 기타 정치국위원들의 일치한 찬성을 받았다. 진석련상장은 엽검영의 제명에 찬동하면서 “소진화상장은 군사위원회 상무위원이으로서 군사위원회의 일상사업을 매우 유력하게 처리했습니다. 1974년에 각 군구령도를 조정할 때 그는 매우 협조를 잘하여 중요한 작용을 했습니다. 이런 경력은 모두 그가 남경군구, 해군, 공군의 로동지들의 협조를 받는데 매우 편리할것입니다. 그는 꼭 그들의 지지를 받을것입니다”고 말했다.
리선념도 이어 “엽검영원수의 의견은 심사숙고한것이기에 상해를 안정시키고 전국정세를 안정시키는데 중요한 의의가 있습니다. 소진화동지는 ‘4인방’과의 투쟁에서 매우 견결했습니다. 모주석께서는 해군관리는 소진화에게 의거해야 한다고 말씀한적이 있습니다. 이번에 ‘4인방’잔여세력을 해결하는 문제도 소진화동지가 이끌어야 핵심령도작용을 발휘할수 있습니다”고 말했다.
화국봉도 “‘4인방’은 왕홍문을 ‘로동계급의 령수’라고 했는데 왕홍문이 무슨 ‘령수’란 말입니까? 우리 이번에 진정한 로동계급의 령수를 파견합시다. 내 생각에는 소진화동지외에 예지복동지도 함께 보내는게 좋다고 봅니다. 예지복동지는 상해사람이고 “예지복드릴비트(钻头)를 발명한 저명한 전국로동모범으로서 장기간 공회사업을 한 경험이 있고 로동자들의 정황을 가장 잘 알고있으며 로동자들에게 매우 높은 위망이 있습니다. 때문에 상해로동자들에게 사상사업을 할 때 가장 설득력이 있을것입니다”고 말했다. 화국봉의 제의는 기타 정치국위원들의 찬동을 받았다. 화국봉은 이어 “상해와 강소성의 모순은 줄곧 매우 첨예했습니다. 상해와 강소성은 각 방면에서 가를수 없는 관계가 있기때문에 강소성에서 한명의 동지를 파견하여 보내는것이 좋겠습니다”하고말했다.
리선념은 화국봉의 의견에 동의하면서 일처리에 온당하면서도 강소성의 정치업적이 돌출한 팽충(彭冲)을 추천했다. 팽충은 당시 강소성당위 서기, 강소성혁명위원회 주임, 남경군구 제2정치위원, 상해경비구 제1정치위원 등 직을 맡고있었기에 그가 가서 상해를 접수관리하면 상해와 강소성의 모순을 해결하고 상해에 경제문제가 나타났을 때 강소성의 지원과 도움을 받는데 가장 편리했다.
이렇게 되여 상해에 가서 당정대권을 접수관리하게 될 소진화, 예지복, 팽충을 령도핵심으로 하는 중앙사업소조가 성립되였다.
10월 20일 오전에 소진화는 인민대회당 북경청에서 중앙사업소조 제1차회의를 소집하고 간단명료하게 중앙의 정신을 전달했다.
“‘4인방’이 격리심사를 받은후 상해의 당정대권은 아직도 ‘4인방’잔여세력의 수중에 장악되여있습니다. 때문에 중앙에서는 즉시 우리를 파견하여 상해의 당정대권을 접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특수한 임무입니다. 우리가 상해로 가는 방식, 시간은 모두 절대적인 비밀입니다. 개도 급하면 담장을 뛰여넘는다고 ‘4인방’잔여세력이 무장으로 공항을 포위할지도 모르기때문에 우리가 상해에 도착하기전에 상해시당위에 통지하지 않고 중앙에서 전용비행기를 파견하게 되며 해군동해함대 상해기지에서 책임지고 우리를 맞이하게 됩니다.”
10월 20일 오후에 중앙사업소조는 소진화의 인솔하에 중앙에서 특별히 파견한 전용비행기를 타고 상해로 날아갔다. 비행기가 홍교공항의 제1호리착륙장에 착륙했을 때 홍교공항은 이미 삼엄한 경비상태에 처해있었다.
전용비행기가 도착하기 50분전에 소식을 들은 상해시경비처에서 먼저 공항에 와서 비행기에 대해 무장감시를 실시했다. 소진화는 침착하게 사업소조성원들에게 해군상해기지 사령원 두표(杜彪)와 정위 강장(康庄)이 오기를 조용히 기다리라고 했다. 얼마후 두표와 강장이 부대를 거느리고 공항에 달려와 경례를 올렸을 때에야 소진화는 중앙사업소조를 거느리고 “4인방”잔여세력의 무장감시를 순조롭게 통과하여 상해주둔 해군기지사령부로 들어갔다.
중앙사업소조는 먼저 비밀리에 상해에 파견되여 사업을 고찰한다는 명의로 상해“4인방”잔여세력의 동향을 장악하고있는 동지들과 련계했으며 상해에 주둔하고있는 륙해공 3군의 주요책임자들을 불러들여 마천수, 서경현(徐景贤), 왕수진(王秀珍)의 동향과 그들이 부대를 장악하고있는 정황에 대해 알아보는 동시에 상해시직속단위와 주요기층단위에 심입하여 동향을 장악했다. 그리고 남경군구 정치위원 료한생(廖汉生)에게 전보를 보내여 상해에 오라고 하여 상해의 정세를 안정시킬 병력배치에 대해 상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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