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9월 12일부터 1949년 1월 31일까지 료심대지에서 화북평원에까지, 황해에서 회하량안까지 드넓은 지역에서 인민해방군은 국민당주력부대와 중국의 운명을 결정한 전략적인 대결전을 치뤘다. 3대전역의 승리는 중국인민해방전쟁사에서 빛나는 리정비로 되였다.
항일전쟁이 승리한뒤 중국은 두가지 운명과 두가지 전도의 갈림길에 서있게 되였다. 중국공산당은 전국 광범한 인민군중의 근본리익을 대표하여 평화적인 방식으로 독립, 민주, 부강의 신민주주의 새중국을 건설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대지주, 대자산계급리익을 대표한 국민당통치집단은 내전의 방식으로 전쟁승리과실을 독차치하며 독재적인 반동통치를 꾀했다.
국민당은 내전준비를 마친뒤 3~5개월내에 공산당이 령도하는 인민군대를 소멸하겠다고 떠벌이며 1946년 6월 26일에 22만명의 군대를 출동하여 중원해방구를 진공했다. 이로써 전면내전이 폭발되였다.
전쟁초기 쌍방의 력량대비는 현저했다. 국민당군의 병력은 430만명으로서 비행기와 땅크로 중무장했다. 해방군병력은 120만명에 불과한데다 장비는 대부분 “좁쌀에 보총”격이였다.
이 시기 모택동은 “일체반동파는 모두 종이범”이다는 저명한 관점을 제출하고 정치상에서 인민군중을 발동하고 군사상에서 우세병력을 집중하여 각개 섬멸하는 정확한 전략방침을 세웠다. 전면내전이 폭발된 첫 8개월에 인민해방군은 71만명의 국민당군대를 섬멸하여 전면진공을 파탄시켰다.
1947년 6월 30일 밤에 류백승과 등소평이 령솔한 12만 해방군이 황하를 강행도하하여 “로서남전역”을 발동하여 인민해방군의 전략진공의 서막을 열었다. 그해 10월 10일에 중국인민해방군 총부는 “장개석을 타도하고 전 중국을 해방하자”는 구호를 공개적으로 제출했다.
방어에서 진공으로 전환한뒤 해방군은 드높은 혁명기백과 탁월한 군사지휘예술로 전략결전의 시기를 정확히 파악하고 1948년 9월 12일부터 1949년 1월 31일까지 료심전역,회해전역, 평진전역 3개 대전역을 거쳐 국민당주력부대 154만명을 섬멸했다.
1949년 4월 21일에 “백만대군 장강도하전역”을 시작하여 4월 23일에는 국민당통치수도였던 남경을 승리적으로 점령함으로써 22년간의 국민당통치를 뒤엎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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