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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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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만에 장씨성을 찾은 장개석의 쌍둥이손자
2013년 12월 08일 10시 46분  조회:6759  추천:1  작성자: 넉두리

60년만에 장씨성을 찾은 장개석의 쌍둥이손자

 
(번역)




 
장개석의 아들 장경국에게는 아들 다섯이 있었는데 장효엄은 지금까지 유일하게 생존해 있는 장경국의 아들이다. 하지만 장효엄과 그의 쌍둥이동생 장효자는 어릴 때부터 외삼촌의 장(章)씨성을 가지고있다가 장장 60년만에 친아버지 장경국의 장(蔣)씨성을 찾았다.

1938년에 장경국은 아버지 장개석의 파견을 받고 강서성 남창으로 갔는데 거기서 그는 사업관계로 예쁘고 령리한 장아약을 알게 되였고 얼마 안되여 서로 사랑하게 되였다. 당시는 장경국이 이미 장방량과 결혼한지 3년이 되는 때였다. 1942년 1월에 장아약은 장경국의 쌍둥이아들 장효엄과 장효자를 낳았다. 그러나 아이를 낳은지 6개월 이후에 장아약은 갑자기 사망되였다. 불행하게 어머니를 잃은 이 쌍둥이의 안전을 위해 외삼촌 장호약은 효엄과 효자를 자신의 아들로 호적에 올렸다. 그리고 아버지 장경국의 장(蔣)씨성 대신 자신의 장(章)씨성을 따르게 했고 쌍둥이의 출생 일을 1년이나 앞당겨 놓았다. 당시 성씨를 바꿔 호적에 올린데 대하여 장효엄은 이렇게 말했다.

“내 생각엔 외삼촌이 이렇게 한것은 그로서의 도리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어머니의 돌연한 사망을 놓고 당시 많은 사람들은 한가지 추측을 했지요. 정치적 고려, 가족의 고려 등등 각 방면의 많은 원인이 있었겠지요. 이 때문에 나와 쌍둥이동생은 장효엄, 장효자라고 불리던 원래 이름을 숨겼고 아버지 장경국의 ‘장’씨성을 감히 쓰지 못하게 되였습니다. 그저 따모(大毛), 쑈모(小毛)라고 불렀지요.”

장아약이 사망된후 장경국은 사람들의 이목을 숨기고 불필요한 시끄러움을 피하기 위해  아이들의 외할머니더러 어린 쌍둥이를 강서성 만안에 데리고가서 키우도록 배치했다. 1942년 겨울에 쌍둥이형제는 외할머니를 따라 외삼촌 장호약이 현장으로 있는 귀주 동인현으로 갔다. 그후 외할머니는 또 쌍둥이형제를 데리고 고향 남창으로 돌아왔다. 그 당시 쌍둥이형제와 관계되는 모든 일은 장경국이 직접 결정했다. 그 때의 일을 장효엄은 이렇게 추억했다.

“우리가 태여난후 아버지는 여러번이나 찾아왔는데 번마다 우리를 안아주었습니다. 이는 외할머니와 이모가 나한테 알려준 사실입니다. 그 때는 너무 어려서 기억에 없었지요. 내가 네댓살 때 외숙모가 우리 쌍둥이형제를 남경에 있는 아버지한테로 데리고간 적이 있었지요. 또 중산릉에 간것이 기억되는데 그 땐 어렸고 놀음에 탐하다나니 내가 아버지를 아빠라고 불렀던지 아니면 다르게 뭐라고 불렀던지 그리고 아버지가 우리를 어떻게 불렀던지 생각나지 않습니다.”

1949년에 장경국은 왕승장군더러 장효엄일가를 남창에서 하문으로 그리고 하문에서 대만 신죽으로 데리고가도록 배치했다. 당시 쌍둥이형제는 7살이였다. 대만 신죽에서 쌍둥이형제는 외할머니의 슬하에서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행복한 동년시절을 보냈다. 당시 쌍둥이형제는 자신의 아버지가 장경국이란것을 몰랐다. 그들은 외삼촌과 외숙모를 자신의 부모로 알았다. 장효엄은 그때의 일을 추억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시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관심은 모두 왕승장군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왕승장군은 아버지의 위탁을 받고 신죽에 와서 우리에게 생활비를 갖다주었습니다. 왕승장군이 올때마다 우리는 육류와 해산물을 먹을수 있었고 새옷을 사서 입을수 있었습니다. 왕승장군은 늘 외할머니와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군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활이 우리가 중학교에 다닐 때 돌연히 변했습니다. 왕승장군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음력설에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초중, 고중시절을 어렵게 보냈고 대학에 다닐 때는 학비마저 낼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고중에 다닐 때의 어느날 밤에 외할머니가 우리에게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친아버지가 큰 인물인 그분이란 말을 들은 우리는 매우 놀랐습니다. 그때 사생아로 태여나 친아버지의 사랑도 못받고 자란데 대한 불평과 불만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친아버지의 사랑을 갈망했지요. 하지만 이러한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자신을 설복하려고 힘썼고 이런 객관적 환경에 대해 적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는 우리에게 남에게 의거하지 말고 자기 절로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외할머니의 교육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자포자기하지 않았으면 반역의 길을 걸었을지도 모릅니다.”

사생아로 태여난 불행한 출생과 가난한 생활은 도리여 이들 쌍둥이의 학습열을 분발시켰다. 1960년에 장효엄은 대만 동오대학 외문학부에 입학했으며 졸업후 우수한 성적으로 대만지구행정부문에 들어가 사업하였다. 그러면서도 장효엄은 종래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갈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버지를 한번 만나보는것이 그의 최대의 념원이였다. 과연 그는 아버지 장경국을 만나는 기회가 있었다. 장효엄은 그때의 정경을 이렇게 추억했다.

“1973년에 있는 어느 연회에 그분도 참가했습니다. 나는 멀리에서 그분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분의 눈길이 나의 시선과 언뜻 부딪쳤다가 다른 사람한테로 옮겨졌습니다. 이 장소에서는 누구나 그분한테로 가서 인사하고 악수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한 공무원의 신분으로 아버지인 그분한테로 다가가 악수를 청할수 없었습니다. 내가 당신의 아들이라고 당당히 말할수 있을 때 그분의 손을 잡겠노라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멀찍이 피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눈길이 부딪치는 순간 그분이 이 아들을 알아보았을거라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내 주관적인 추측이긴 하지만 그분은 나의 사진을 본 인상이 있었을것입니다. 왕승장군이 우리가 커가면서 찍은 사진을 모두 그분한테 갖다드렸으니깐요.”

장효엄은 꼭 그날이 있을거라고 믿었다. 장경국을 만나서 아버지라고 한번 부를수 있는 그날이 있을거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장효엄이 정말로 장경국을 만났을 때 아버지는 더는 아들을 바라볼수 없었고 더는 아들의 목소리를 들을수 없었다. 1988년에 장경국이 사망되였을 때 쌍둥이형제 장효엄과 장효자는 영총병원의 얼음침대에 조용이 눈을 감고 누워있는 장경국대통령을 만났다. 이러한 장소, 이러한 정경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만난 쌍둥이형제는 꿇어엎드려 통곡했지만 이미 늦었다. 왜서 좀 더 일찍 아버지를 만나지 못했단 말인가?

장경국이 사망된후 평시에 장효엄과 관계가 매우 좋던 이복(아버지는 같고 어머니가 다른)동생 장효용은 정치적 관점이 서로 다르다는 원인으로 멀어져갔다. 이 모든것은 쌍둥이형제가 장씨성을 찾는 길이 매우 어렵고 힘들다는것을 예고했다. 하지만 조상을 찾으려는 장효엄의 결심은 더욱 강렬해졌다. 그는 송미령녀사에게 도움을 청할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송미령은 6차나 거절했다. 장효엄은 부득불 증거를 찾는 방법으로 진실을 밝힐수밖에 없었다. 대만당국의 규정에 의하면 정부직무일군은 대륙에 가서 친척방문을 할수 없었다. 2000년에 모든 공직을 사직한 장효엄은 마침내 장씨성을 찾는 꿈을 이룰수 있는 기회가 온것을 알았다. 2000년 8월에 장효엄은 부인을 데리고 조국에 돌아와 58년전의 흔적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외삼촌을 찾아갔다. 그의 리력서에는 아버지란에 외삼촌의 이름 장호약이 씌여져 있었는데 그가 증명을 서주었다. 그리고 그가 태여난 계림병원에서도 증명을 서주었다. 그리고 그의 리력서의 어머니란에는 외숙모의 이름 기침이 적혀져있었는데 외숙모는 미국에 가있었다. 2003년에 그는 미국을 방문했다. 2003년 9월 3일에 그는 부인과 함께 로스안젤스에 가서 외숙모 기침을 만났다. 외숙모는 그들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의 부인이 외숙모를 보고 말했다.

“외숙모, 미안해요. 당신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가서 DNA감정을 하려고 해요. 당신이 저분의 친어머니가 아니라는것을 증명하려고 그래요.”

외숙모는 흔쾌히 동의했다. 그들은 외숙모의 머리카락을 가지고 가서 DNA감정을 거쳐 장호약과 기침이 쌍둥이의 친부모가 아니라는것을 증명했다.

그 먼저 2002년 12월 12일에 장효엄은 왕승장군의 증명으로 새로운 신분증을 얻었는데 아버지란에는 “장경국”이라 써넣었고 어머니란에는 “장아약”이라고 써넣었다. 2004년 12월 15일에 장경국의 본부인인 장방량이 사망되였고 그 석달후 장효엄은 다시 새 신분증을 얻었는데 이때 정식으로 아버지의 “장”씨 성으로 고쳤다. 2005년 4월 7일에 장효엄은 처음 장씨자제의 신분으로 장씨가족의 조상제사에 참석하였다.

1994년에 쌍둥이동생 장효자가 북경에서 뇌익혈이 돌발했을 때 장효엄은 중병에 걸린 동생을 대만에 데리고가서 치료받게 하기 위해 처음으로 비행기를 도맡아 직항할 생각을 가지게 되였다. 2002년 10월에 장효엄은 정식으로 대만상인이 비행기를 도맡아 직항할 구상을 제출했고 이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 애썼다. 2003년 1월 26일에 대만화항회사의 민항려객기가 춘절기간 대북 도원공항에서 리륙하여 상해 포동공항에 착륙했다. 이는 해협량안에서 50여년래의 처음으로 되는 공중통항이였다. 2005년 1월 29일의 춘절기간에 대만상인이 비행기를 도맡아 북경, 대북 등 5개 도시에서 왕복하며 날아다녔는데 이는 1949년이래 조국대륙의 민항비행기가 처음으로 대만에 착륙한것이다. 지금 장효엄은 대만과 대륙에서 비행기가 정기적으로 날아다닐수 있게 하기 위해 힘써 노력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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