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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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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문에서 아편을 소각해버린 림측서
2016년 01월 24일 18시 03분  조회:5944  추천:2  작성자: 넉두리

호문에서 아편을 소각해버린 림측서
 
(번역)




 
사방을 메운 구경군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흠차대신 림측서(林则徐)는 영국을 비롯한 서양상인들에게서 압수한 2만 1000상자가 넘는 아편을 20일에 거쳐 소각해버렸다.
 
1839년에 생긴 중국의 아편문제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당시 중국에 수입되는 아편의 량은 년간 4만상자에 달했다. 한 상자의 아편을 대략 100명의 아편중독자가 소비한다고 볼 때 중국의 아편중독자는 400만명으로 추산되였는데 그것은 당시 중국인구의 1%에 해당되였다. 그리고 그 수자는 매년 급속히 늘어갔다. 1만상자에서 4만상자로 되기까지 10년도 걸리지 않았던것이다. 경제적문제도 심각했다. 18세기후반에 중국은 영국에 차(茶)를 팔아서 대량의 은을 얻고있었으나 그후 영국이 은대신 인도에서 생산된 아편으로 차의 대금을 치르는 정책으로 바꾸었다. 그러자 1807년을 기점으로 중국이 아편때문에 은을 영국에 지불하는 형태로 역전되였다. 1827년에는 1800년을 기준으로 전국류통량의 20%에 달할 정도로 은류출량이 심각해졌는데 당시 중국의 세금은 은납제였으므로 국가재정과 국민의 살림살이가 동시에 급격히 나빠져갔다. 실로 이대로라면 아편은 “수십년후에는 세금을 낼 사람도 없어지고 무기를 들 사람도 모조리 없어질것”이라는 우려가 과장이 아닐 정도의 위협을 가져오고있었다.
림측서는 1785년 8월 30일에 복건성 후관현에서 태여났다. 시골의 훈장인 아버지의 수입으로는 생계가 어려워서 어머니와 누이들이 베를 짜서 살림에 보태야 했다. 아들이 태여나자 그의 아버지는 당시 복건성의 순무였던 서사증이 명성이 높았기때문에 “서순무와 같은 사람이 되여라”는 뜻에서 아이의 이름을 “측서”라고 지었다. 때문에 림측서는 일찍부터 관계진출을 목표로 학문에 열중했으며 유능하고 깨끗한 관리가 되여 고통받는 백성을 구제하겠다는 포부를 가졌다. 스물일곱이 되던 1811년에 과거에 급제해 진사가 되였고 8년 뒤에 운남성의 향시 감독관이 되는것을 시작으로 절강성, 강소성, 섬서성 등을 다니며 지방행정직을 두루 력임했다. 그는 청렴하면서 공정하게 직무를 수행하여 송대의 전설적인 명관 포청천에 빗대여 “림청천”이라고 불리웠다.
1830년초에는 북경에서 근무했는데 이때 공자진, 위원 등과 교류하며 개혁파의 지식인과 관료들의 모임인 “선남시사”에 가입하기도 했다. 비록 반년만에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여 시사활동을 오래 하지는 못했으나 공자진 등의 개혁사상에는 크게 공감하여 그후 림칙서의 활동은 모두 그런 사상에 따라 이루어졌다.
1832년부터 1838년까지는 강소성 순무와 호광성 총독을 잇달아 맡았는데 낡은 수리시설을 개축하고 재해를 입은 지방을 구호하는 일에 관가의 힘만이 아니라 상인들의 조직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는 부패하고 무기력한 관료집단보다 상인의 조직이 훨씬 현지의 사정에 밝고 행동도 효률적으로 한다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그는 상인들을 활용할뿐만아니라 그들의 상업활동을 장려하고 후원했으며 소금판매문제에서 상인들에게 최대한 자률성을 부여하는 시책을 썼다.
다만 부도덕하고 반사회적인 상업활동은 엄격하게 규제하고 처벌했는데 대표적인것이 아편판매였다. 그는 어느 지방의 총독보다 효과적으로 아편판매를 근절하는데 성공했다. 이로써 마침 아편문제로 골머리를 앓고있던 도광황제의 눈에 들게 되였다. 당시 청나라조정은 아편문제해결책을 두고 철저히 금지해야 한다는 엄금론(严禁论)과 은페된 아편판매를 차단하기란 현실적으로 어려우니 차라리 판매를 합법화하고 대신 세금을 거두자는 이금론(弛禁论)으로 갈라져있었다. 이금론도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으나 널리 도덕적모범을 보여야 할 조정이 취할 태도는 아니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였다. 림측서도 상소를 올려 엄금론에 찬성했으며 그에 필요한 여섯가지 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황제의 관심을 끌었다. 그리하여 1838년말에 림측서는 도광황제의 아편근절특명을 받고 흠차대신으로서 광동성에 파견되였다. 광동성의 광주는 오래전부터 해외무역의 창구였기에 서양에서 아편이 들어와 전국으로 퍼지는 출발점이기도 했다.
림측서는 먼저 아편이 거래되는 광동 지하조직부터 일망타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현지정보에 밝아야 한다고 여긴 그는 온갖 수단을 써서 정보를 수집했는데 과거시험을 치르면서 과제를 “아편판매망을 뿌리뽑는 법”으로 내걸어 과거에 응시한 현지인들의 현실성있는 의견을 널리 취합하기도 했다. 1839년 1월에 광주에 도착한 그는 먼저 아편과 관계된 4000명 가까운 중국인을 붙잡아들이고 류통되고있던 아편 3만근을 몰수했다. 그리고 1839년 3월부터는 외국인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서양인의 힘과 탐욕스러움을 잘 알고있던 그는 마구잡이로 그들을 압박하기보다 좋은 말로 타이르는 일부터 시작했다. 그러면서 아편과 무관한 외국상인들의 립장을 키워주는 한편 영국과 미국상인들 사이를 리간질하는 술책도 썼다.
림측서는 마지막에 강제적 수단을 써서 아편을 몰수했다. 그는 외국상인들에게 “다시는 아편을 거래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도록 했다. 미국, 뽀르뚜갈 등의 상인은 서약서를 제출했으나 영국상인만은 제출하지 않고 광주를 떠나 오문의 본거지를 옮겼다. 그러다가 1839년 7월 7일에 술에 취한 영국군인이 림유희라고 하는 중국인을 살해하는 사건이 터졌다. 림측서는 즉각 범인을 인도할것을 요구했으나 영국측은 거절했다. 그러자 림측서는 오문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에게 식량과 물의 공급을 차단해버렸다. 그러자 영국인들은 오문에서도 물러나지 않을수 없었다. 결국 영국에 대해서는 정상적인 무역조차 금지한다는 조치가 취해졌다.
이제 전쟁을 피하기 힘들다고 여긴 림측서는 전력을 다해 전쟁준비를 했다. 그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다”는 손자병법에 따르려고 이미 광동에 오기전부터 백방으로 서양관련정보를 수집했다. 구할수 있는 모든 서양의 서적과 잡지를 번역시켜 주로 서양인들의 성격과 무기, 전술을 중심으로 해서 《사주지(四洲志)》를 비롯한 몇권의 책으로 엮어냈다.
또한 림측서는 서양의 대포를 사들이고 서양상선을 사들여 전투함으로 개조하였다. 또 자체적으로 증기선과 자주포까지 만들어냈다. 그는 무기확보에만 전념한것이 아니였다.
“우리가 저들에 비해 유리한 점은 이곳 지리에 밝다는것이다. 백성의 힘을 모으면 관병의 힘보다 훨씬 강력해진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해안거주민중에서 장병을 모집하여 수병을 만들었다. 그리고 영국인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는데 이는 적에게 해를 입히기보다는 중국내부에서 영국에 협력하는 자들을 색출하기 위함이였다.
하지만 당시 청나라에서 누구보다 서양사정에 밝았던 림측서는 영국이 전력으로 공격해올 경우 결국 승리하기 어렵다는 점을 알고있었다. 그래서 정면대결보다는 유격전으로 대응해야 하며 북경에 이르는 요해처를 집중적으로 방비해야 한다는 상주문을 황제에게 올렸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그의 조언을 무시해버렸다.
결국 1840년 6월에 영국은 전투함 16척과 4000명의 병력으로 광동을 습격했다. “아편전쟁”이 시작된것이다. 림측서의 지휘로 백성과 군대가 단결해서 방어한 결과 영국군은 끝내 광동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영국군의 주력은 림측서가 예측했던 그대로 북경을 진격했다. 청나라군대는 수적으로 훨씬 우세했으나 화력과 전술에 앞선 영국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결국 북경함락이 눈앞에 보이자 청나라조정은 림측서에게 전쟁의 책임을 물어 파면하고는 영국과의 교섭에 나섰다. 그래서 일단 영국군의 진격을 멈추게 했으나 얼마후 다시 강경론자들이 득세하며 맞서자 광동에 물러가 있던 영국군은 더욱 강한 병력을 출동시켜 상해를 점령하고 남경까지 진격했다. 결국 청왕조는 굴복해 1842년 8월에 “남경조약”을 맺았다. 향항을 할양하고 추가개항을 하며 거액의 배상금지불, 영국인활동의 자유보장 등에 합의한 청왕조의 위신은 땅에 떨어졌다. 이는 사실상 20세기초에 이르기까지 계속된 “동양의 굴욕사”의 시작이였다.
림측서는 결코 무턱대고 전쟁을 일으킨 사람이 아니였으나 아편전쟁이 끝나자 조정은 일제히 그에게 책임을 돌렸다. 그는 처형만은 간신히 면했지만 멀리 신강으로 좌천되였다. 그런 벽지에서도 그는 현지의 위글족들의 문화를 배우려고 힘썼으며 청나라관리로서는 처음으로 이슬람교도와 상대할 때 필요한 요점을 기록으로 남겼다. 그리고 1850년에 “태평천국”을 진압하는 일에 동참하라는 조정의 명을 받고 광서성으로 가던 도중 1850년 11월 22일에 사망되였다.
지식, 지혜, 인격 등 모든 점에서 림측서는 서양의 침략에 맞서 동양이 내놓을수 있던 가장 우수한 관료였을것이다. 그는 근대적사상의 실마리라고도 할수 있는 개혁사상을 가졌다. 모택동은 “림측서는 중국에서 자산계급민주주의혁명을 시작한 사람이다”고 그 점을 높이 평가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동양의 체제를 유지한채 서양의 기술을 가미한다는 동도서기적인 개혁사상이였지 체제자체를 변혁하려는것은 아니였다. 물론 그런 개혁사상을 계속 발전시킬 기회가 주어졌다면 동양이 자체적으로 근대화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서양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림측서는 반봉건의 뜻을 채 펴보기도전에 반제국주의의 투쟁에 나서야 했다. 서양을 가장 잘 리해한 사람이였으면서도 서양이 동양을 짓밟는 서막을 연 사람으로 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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