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70년대 상반기는 모택동과 장개석을 놓고 말할 때 모두 그들 인생의 최후의 날들이였다. 력사는 그들의 희망과 유감,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을 생명의 마지막까지 남겨놓았다. 1972년 3월, 재차 제5기 대만대통령으로 당선된 장개석은 “모택동과 중국공산당이 하루라도 존재하는 한 우리혁명의 임무는 절대 끝나지 않을것이다. 우리는 천백번의 좌절과 타격을 당하더라도 끝까지 혁명의 임무를 완수하고야 말것이다!”하고“비장한” 선언을 발표했다. 하지만 만년에 여러가지 질병에 시달린 장개석은 이 “웅대한 뜻”을 펴기는커녕 최후의 3년동안 공개적 장소에 겨우 세번밖에 나타나지 못했다. 반대로 중국혁명에 불후의 업적을 쌓은 위인 모택동은 장개석과 국민당반동파를 몰아내고 전중국을 해방하면서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여 기쁨도 많았지만 문화대혁명의 폭풍으로 피로한데다가 림표사건의 강렬한 자극으로 하여 만년에 질병과 번민에 시달렸다.
공산당과 국민당이 싸울 때 미신을 믿은 장개석은 여러번 적수인 모택동을 망하라고 모택동의 조상무덤을 파헤쳤다. 하지만 모택동은 자신의 손에 들어온 장개석의 조상무덤을 풀 한포기, 벽돌 한장 다치지 못하도록 지시했다. 문화대혁명시기 주은래가 장개석의 조상무덤을 다치지 못하도록 지시했지만 1968년에 누군가 장개석의 옛저택에 침입하여 무덤을 파헤쳤다. 다행이 유골은 가져가지 못했다. 대만에서 이 소식을 들은 장개석은 아들과 손자들을 다 모여놓고 “너희들은 영원히 이 원쑤를 기억해둬라! 모택동과 공산당을 뒤엎고 중화민국을 회복하는 날 가문의 원쑤와 나라의 치욕을 한꺼번에 씻어야 한다!”하고 훈계했다. 하지만 중앙정부에서는 재빨리 장가무덤을 수건하고 보호하는 조치를 댔다. 1972년에 중국방문을 왔던 닉슨대통령이 모택동을 보고 “장개석은 주석님을 비적이라고 부르던데 주석님은 장개석을 뭐라고 부릅니까?”하고 물어 모택동은 하하 웃었고 주은래가 대신하여“우리도 신문에 장개석을 비적이라 했습니다. 우린 서로 상대방을 비적이라고 불러왔습니다”하고 대답했다.
평화적으로 대만을 해방하기 위해 모택동은 먼저 체육운동기구에서 앞장설것을 지시했다. 그리하여 대만과 대륙의 체육선수들이 서로 래왕하며 경기를 치렀고 점차 친척방문의 길도 열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장개석은 모택동을 일생에서 용서할수 없는 원쑤로 간주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도“나라”가 있었다.
1974년 양력설에 남부윁남에서 우리나라 령토인 서사를 침입했을 때 장개석은“중공이 출병하지 않으면 내가 출병하겠다”고 말하면서 대만 외교부문에 지시하여 “중국령토는 침범할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중국과 남부월남의 해상전쟁이 폭발한후 서사해군이 증병을 요구했다. 이에 등소평이 모주석께 회보하자 모주석은 동의하면서 군함이 에돌지 말고 대만해협으로 직행할것을 지시했다. 이전에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면하기 위해 중국해군은 동해와 남해를 오갈 때마다 모두 대만동남의 공해를 돌아서 래왕했다. 중국군함이 대만령해를 통과한다는 보고를 들은 장개석은 눈을 지긋이 감더니 “서사의 정세가 그렇게 긴박한가?”하고 물은후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곧 무조건 통과시킬것을 지시했다.
만년에 장개석은 고향생각을 몹시 했다. 1975년 양력설에 장개석은 일생의 마지막으로 되는 “복국”선언을 발표했다. 그해 음력설전후에 국민당원로 진립부는 장개석의 비밀사명을 접수하고 비밀경로를 통해 중공중앙에 모택동주석께서 대만을 방문해줄것을 초청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공산당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진립부는 향항신문에 “내가 만약 모택동이라면”하는 글을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글에서 진립부는 “모택동이 대만을 방문하여 장개석과 담판의 길을 여는것을 환영한다. 나라와 인민의 리익을 위하여 모택동이 과거를 따지지 말고 북벌과 항일시기 국공량당이 두번이나 합작했던 전례대로 다시 새로운 합작의 길을 열것을 바란다”고 썼다. 모택동은 당시 명예를 회복하고 제1부총리직무를 맡았던 등소평을 불러 이 일을 토론하면서 “나는 신체가 허락되지 않으니 당신이 나를 대신해 대만을 방문할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장개석은 모택동의 정식대답도 기다리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1975년 4월 5일 청명절아침에 오랜 병상에 누워있던 장개석은 휠체어에 앉아 오래동안 있어본적이 없었던 환한 미소로 병문안온 아들을 맞았다. 그는 헤여질 때 아들 장경국에게 “휴식을 많이 해라”고 당부했다. 그날밤 혼미상태에 빠졌던 장개석은 자정이 되기 10분전에 심장의 고동을 멈추었다. 향년 89세였다. 장개석의 령구를 옮길 때 갑자기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진동하더니 소낙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장경국은 이것을 보고 “하늘도 력사위인의 죽음이 슬퍼서 운다”고 말했다.
장개석은 하나의 유감을 가지고 세상을 떠나면서 자기가 이루지 못한 꿈을 아들에게 기탁했다. 그것은 모택동과 공산당을 뒤엎는 “복국”의 꿈이였다. 장개석은 해마다 “반공”의 글을 발표했고 “반공”계획을 세웠으며 1000여종의 방안을 설계하면서 하루도 “복국”의 꿈을 중단한 날이 없었다. 사람들은 장개석을 “자신의 힘도 모르고 허황하고 어이없는 꿈에 미친 늙은이”라고 비웃었지만 “복국”은 장개석에게 있어서 하나의 신성불가침의 “신념”이였으며 그가 유일하게 고독한 섬에서 버틸수 있었던 “정신법보”였다. 하지만 그 자신도 그것은 영원히 실현불가능한 꿈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 그가 할수 있는 일은 자신의 신념을 위해 끝까지 분투하는것이였으며 유감을 유언에 남기는것뿐이였다. 그의 집착과 오만은 대만이란 이 “아이”가 모체를 떠나 밖에서 애처롭게 떠도는 비극을 조성했다.
1976년 9월 9일에 력사의 거인 모택동도 이 세상을 떠났다. 모택동은 장개석과 국민당반동파를 몰아내고 새중국을 건설했지만 량안의 통일은 이룩하지 못했다. 하지만 모택동은 장개석처럼 그렇게 과도한 정치적 짐은 짊어지지 않았다. 모택동은 “대만문제는 시간이 수요된다. 다음 세대에 가서 기다려야 해결될수도 있다”고 말했다. 모택동이 완성하지 못한 력사적 임무를 등소평이 이어받았으며 지금은 호금도동지를 위수로 하는 당중앙에서 이 력사적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있다. 어머니의 품을 떠난지 오랜 대만이란 이 “아이”는 고독하게 울면서 어머니를 몹시 그리고있다. 이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기려고 하는것을 그 누구도 막을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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