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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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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대통령과 프란체스카
2013년 12월 29일 09시 53분  조회:6342  추천:0  작성자: 넉두리


리승만대통령과 프란체스카



 
 
한국의 초대대통령 리승만(李承晩)의 호는 우남(雩南)이고 1875년에 황해북도 평산에서 태여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배웠으며 1897년에 배재학당을 졸업하고 1904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1907년에 워싱톤대학을 졸업하였다. 1908년에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1910년에 《미국의 영향을 받은 영세중립론》이란 론문으로 프린스턴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수여받았다.

리승만은 1895년에 명성황후가 시해당하자 친일정권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렸고 1896년에 서재필이 미국에서 돌아와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자 거기에 가담하였다. 리승만은 《협성회보》와 《매일신문》의 주필을 지내면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개화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고 중추원설치를 주장하다가 1898년에 황국협회의 무고로 체포되여 투옥되였으나 1904년에 출옥하였다. 그해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미국에 건너가 루스벨트대통령을 만나 일본의 세력을 몰아내는데 협력해줄것을 요청하였다. 1910년 8월 29일에 대한제국이 국권을 상실당한후 귀국해 리상재 등과 조선기독교청년회를 중심으로 후진을 양성하다가 1912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1914년에 《한국태평양》지를 발간하였고 1919년에 상해대한민국림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국무총리로 추대되였다. 림시정부의 직제를 대통령제로 바꾸고 1920년에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1921년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돌아오지 않자 의정원의 불신임을 받았다. 그뒤 워싱톤, 하와이 등지에서 항일외교활동을 벌리다가 광복후 귀국했다.

리승만은 독립촉성중앙위원회 총재, 민족통일총본부 총재 등을 지냈고 1948년에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고 이어 초대국회의장, 대통령이 되였다. 정부가 부산에 피란해있던 1951년에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자유당을 창당했고 이듬해에 정치파동을 일으켜 대통령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제2대 대통령에 재선되였다. 1954년에 초대대통령에 대한 중임제한조항철폐를 골자로 한 사사오입개헌으로 제3대 대통령에 세번재로 당선되였고 1960년에 제4대 대통령에 4번재로 당선되였으나 “4․19”로 자리에서 물러났다.

1960년 4월 19일에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학생과 고등학생을 비롯하여 서울시민 10만여명이 대통령의 관저인 경무대로 향하였다. 이에 당황한 정부는 서울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경찰은 시위군중에게 무력진압에 나서 이날 하루동안 전국에서 186명이 사망되고 6천여명이 부상당하였다.
리승만은 리기붕을 사임시키고 자유당총재직을 버리는 등 자구책을 마련했으나 국민의 분노를 잠재울수는 없었다. 1960년 4월 25일에는 대학교수 300여 명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구호판을 들고 서울시내를 행진하며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하면서 시위는 더욱 격렬해졌다. 미국도 사태를 수습하려면 리승만의 퇴진이 절대적이라고 권고하였다. 결국 1960년 4월 26일에 리승만은 퇴진성명을 발표하고 4월 29일에 하와이로 망명했으며 리기붕일가는 자살함으로써 자유당정부는 종말을 고했다.

하와이로 망명한 리승만은 1965년에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로 《독립정신》, 《일본폭로기》 등이 있다.
리승만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는 뛰여난 속기와 타자능력 그리고 국제자격증을 보유한 영어통역능력 등으로 당시 비서실체제가 약했던 경무대에서 실질적인 비서실장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리승만대통령의 건강과 신변문제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져 음식뿐아니라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르는 모든 정보를 차단하는 “과잉내조”로 리대통령의 정치적 시야를 좁게 만든 “우물안 내조”에 그쳤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함께 받고있다.

프란체스카녀사는 1900년에 오스트리아에서 태여나서 1934년에 뉴욕에서 리승만과 결혼했다. 리승만에게는 아들이 없어서 리기붕의 아들인 리강석을 양자로 삼았다.
리승만을 업고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리기붕(李起鵬)은 1896년에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후산리의 몰락한 량반가정에서 독자로 태여났다 그는 1923년에 미국 아이오와주 데이버주립 대학교 문학과를 졸업했다. 대학졸업직후 류학생 박마리아를 알게 되여 1935년에 결혼하였다. 부인 박마리아와의 사이에 큰딸 리강희와 리강석, 리강욱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딸 리강희는 중학교때 사망됐기에 자녀들은 두아들만 남았다.

1945년에 리승만의 비서로 정계에 들어갔으며 윤보선의 뒤를 이어 1949년 6월부터 1949년 8월까지 서울특별시 시장을 지냈다. 1949년 8월부터 1951년 5월 8일까지 다시 서울시장에 재선되였다. 1951년에 국방부장관이 된 그는 리승만의 지시로 자유당을 창당했고 2년후에 리범석의 세력을 축출하고 자유당중앙위원회 의장에 올라 명실공히 자유당의 제2인자가 되여 실권을 장악하였다. 1954년 5월에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되여 민의원 의장이 되였고 1956년에 부대통령경쟁에 나섰으나 락선되였다. 1957년에는 자기 아들 리강석을 리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1960년 3월 15일에 공개부정선거로 부대통령에 당선되였다. 그러나 “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4.19”혁명이 일어나 결국 부대통령을 사임하고 경무대관사 36호실에 피신해 있었다. 1960년 4월 28일 새벽 5시 40분에 당시 륙군장교였던 큰아들 리강석이 권총으로 아버지 리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동생 리강욱을 차례로 쏘아죽이고 자살하였다. 리기붕일가족자살에 대해서는 의혹과 론란이 되였는데 당시 곽영주가 리승만의 퇴진을 막기 위해 여론을 무마시키려고 그를 비밀리에 살해했다는 설이 있으나 그것이 진실인지 알수 없다.

리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는 자식을 낳지 못했지만 외교활동 즉 미국과의 관계가 두드러졌다. 그녀는 사적인 친분관계는 물론 타고난 사교술로 워싱톤정가의 실력자들부인과 친밀한 교분을 유지하였다. 특히 루즈벨트대통령 부인과의 관계는 돈독하였다. 그녀는 한국을 워싱톤정가의 관심거리로 만드는데 일조하였다. 그녀는 내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자존심과 고집이 강한 편이였다. 그녀는 경무대내에서 대인관계에 대한 불쾌감을 대통령에게 솔직하게 표현함으로서 결과적으로 정부인사에 개입하고 국정에 간여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녀는 리승만의 건강과 신변문제에 지나치게 관심을 가졌다. 음식뿐아니라 대통령의 심기를 거스르는 모든 정보를 차단하였다.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대통령의 만남을 의도적으로 방해하였다. 물론 그것은 고령의 대통령을 편안하게 보필하고싶은 안해의 순수한 마음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공인으로서의 대통령책무를 저버리는 결과를 가져올 정도로 철저한 통제였다. 이런 그녀의 “우물안내조”는 국내정세에 어두웠던 대통령의 정치적 시야를 더더욱 좁게 했다. 그러나 프란체스카의 이 모든 행동들과 개입이 정치적관심으로 야기된것이 아니라 단지 대통령의 건강에 대한 지나친 관심과 애정으로부터 야기된 결과였다는 점은 상당히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프란체스카는 본인의 의도와 다르게 상당한 정도의 정치적 영향력을 대통령에게 행사하였다. 고집스럽게 남편의 건강을 위해 노력한 결과가 오히려 리승만대통령의 장기독재와 말년의 정치부패, 뒤이은 망명생활을 가져오게 했다. 리승만과 그녀의 경우는 서로의 능력을 인정하고 깊이 의존하는 애정의 관계를 가졌지만 정치지도자와 그 안해로서의 적합하고 건강한 긴장관계를 갖지 못하여 국가와 지도자의 발전적 동인을 제공하지 못한것으로 평가할수 있다. 그러나 사실 프란체스카는 경무대시절 양말을 직접 기워신는 등 절약생활을 몸소 보여준 모범적인 대통령부인이였다. 프란체스카는 자신이 입는 옷마다 뒤목이 닿는 부분에 명주를 대놓아 빨리 닳지 않도록 했고 긴양말도 늘 기워서 신을 정도로 검소했다. 그녀는 대통령부인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집와서 평생동안 단 한벌의 례복으로 지냈다. 그녀는 1960년 “4․19”혁명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리승만대통령과 함께 하와이로 망명을 갔고 1965년에 리승만박사가 타계하자 오스트리아로 돌아갔다. 프란체스카녀사는 1970년에 영구귀국하여 양아들 리인수내외와 함께 리화장에 정착했고 1992년 3월 19일에 동성동국립묘지 리승만박사묘소옆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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