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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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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위와 그의 부인들
2014년 01월 04일 19시 17분  조회:7483  추천:0  작성자: 넉두리

강유위와 그의 부인들

(번역)

 

 
 
강유위(康有为)는 모순된 사람이였다. 그는 “1부1처제”를 주장했지만 자신은 본 부인 장운주외에 둘째부인 량수각, 셋째부인 하전리, 넷째부인 세즈코, 다섯째부인 료보미, 여섯째부인 장광을 선후로 맞아들였다.

1858년 3월 19일, 광동성 남해에서 출생한 강유위는 중국 근대사에서 저명한 정치가이고 사상가이며 사회개혁가일뿐만아니라 서법가이며 학자였다. 그는 외래침력자들이 다투어 중국의 령토를 강점하자 강유위는 여러번이나 광서황제에게 글을 올려 변법을 실시할것을 요구했다. 광서황제는 강유위의 글에 깊은 감동을 받고 1898년 6월 11일에 :무술변법:을 실시했지만 자희태후를 위수로 한 완고파들의 반대로 103일밖에 실시되지 못하고말았다.

강유위는 “무술변법”이 실패하자 향항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후에 또 미국으로 넘어갔다. 그는 자신의 정치주장을 선전하기 위해 미국서부로 갔다. 당시 해외화교들은 강유위가 나타나는 곳이기만 하면 떼를 지어 모여들었다.

1907년, 강유위가 강연한다는 소식이 몇십리밖에 있는 종식원에까지 퍼졌다. 종식원의 주인은 로화교였는데 슬하에 10여명의 자녀를 두고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총명하고 미모가 뛰여난 딸은 하금란이였다. 하금란은 하전리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갖고있었는데 어릴 때부터 학식이 깊은 유생의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란 그녀는 4개 나라의 언어를 통달하였을뿐만아니라 중국문화에 대해서 익숙했으며 춤과 노래에 능했다. 하전리는 오래전부터 강유위의 전기적경력을 듣고 흠모해오던터라 강유위가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 동생들을 데리고 강유위의 구국론설을 들으러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날 강유위는 화교수령의 안내하에 강단에 올라 손을 흔들면서 2시간에 달하는 격정적인 연설을 했다. 그는 격정적으로 손을 흔들며 웨쳐댔다.

“동포들! 제국주의 렬강들은 우리 나라를 나누어 삼키려고 발광하고있습니다. 이건 우리가 약하고 힘이 없기때문입니다. 변혁하지 않았기때문에 우리는 힘이 없는 것입니다. 변혁해야 합니다! 반드시 변혁해야 합니다! 변법을 실시하는것만이 나라를 멸망으로부터 구원하는 유일한 출로입니다!”
하전리는 강유위의 청산류수같은 말재주와 박학다식하고 우아한 기품에 홀딱 반해버렸다. 강유위의 연설이 끝나자 그녀는 강유위의 앞에 다가가서 공경스럽게 인사를 하면서 흠모의 마음을 토로했다.

“선생님의 론술은 정말 훌륭했습니다. 저는 다시 한번 듣고싶습니다.”
강유위는 놀란 눈길로 눈앞의 예쁘장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한떨기 해당화처럼 곱게 피여난 소녀는 진지한 표정을 짓고있었다.

그날밤, 강유위는 해당화처럼 탐스럽게 피여난 하전리의 얼굴이 눈앞에 삼삼거려서 도무지 잠들수 없었다.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박식하고 어여쁜 소녀에게 정이 들었던것이다. 이튿날 그는 다른 곳으로 연설하러 떠나야 했다. 그가 짐을 꾸려가지고 주숙집문을 나서는데 놀랍게도 하전리가 문앞에 서있었다. 하전리는 그를 송별하려고 새벽이슬을 차고 몇십리길을 달려온것이였다. 강유위는 기쁨과 감격으로 하여 그녀의 손을 덥석 잡고 “전리, 전리…”하고 그녀의 이름만 부를뿐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도 눈물을 머금고 강유위의 손에 자신의 주소를 적은 쪽지를 쥐여주었다. 강유위는 17세의 소녀 하전리와 애틋한 작벽을 하였다.

그후 미국각지를 돌아다니며 연설을 하면서도 강유위는 하전리를 잊은적이 없었다. 밥을 먹을 때도 그녀의 얼굴이 눈에 삼삼거리고 잠을 잘 때에도 그녀의 얼굴이 눈에 삼삼했다. 그는 사흘이 멀다하게 하전리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젊은이처럼 글줄마다 끓어넘치는 사랑을 토로했다. 하전리도 그에 대한 그리움과 애틋한 사랑의 뜻이 담긴 회신을 보내왔다. 이렇게 50세의 로인과 17세 소녀는 편지로 불타는 사랑을 주고받았다.

청정부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정부가 일떠서자 강유위는 귀국을 서둘렀다. 그는 떠나기전에 하전리와 만났다. 교교한 달빛아래 두 사람은 서로를 꼭 껴안은채 떨어질줄을 몰랐다. 소녀는 물기어린 그윽한 눈으로 강유위를 바라보더니 무엇인가 갈망하는듯 사르르 눈을 감았다. 강유위는 천천히 자신의 입술을 소녀의 입술우에 포갰다. 격렬한 키스를 나누던 두 사람은 잠시 떨어졌다. 하전리는 갑자기 옷을 벗으면서 말했다.

“강선생님, 오늘밤 저는 이 몸을 선생님께 바치겠어요! 전 선생님의 녀자로 되겠어요!”
17세 소녀의 하얗고 탱탱한 가슴이 달빛아래 반짝거렸다. 강유위는 온몽이 화끈 달아올랐지만 리지를 잃지 않고 끓어오르는 정욕을 참으면서 소녀의 옷을 도로 입혀주었다.
“전리, 난 널 사랑해. 하지만 우린 나이 차이가 많아서 결합하려면 저애력이 많을거야. 만약 우리 둘이 결혼하지 못한다면 난 전리를 해친것으로 되는거야.”

집에 돌아간 하전리는 부모앞에서 강유위와 결혼하겠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녀의 부모와 오빠, 언니들은 깜짝 놀랐다. 새파란 처녀가 처첩이 있는 로인한테 시집을 가겠다니!

부모와 오빠, 언니들이 견결하게 반대했지만 하전리는 울고불고 떼를 쓰면서 강유위가 아니면 시집을 가지 않겠노라고 야단쳤다. 부모는 하는수 없이 이 혼사에 동의하고말았다. 며칠후 두 사람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렇게 하전리를 셋째부인으로 맞아들인 강유위는 1913년 12월에. 해외에서의 15년이란 망명생활을 결속짓고 귀국했다. 정처없이 떠돌던 그들의 류랑생활은 금방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이제는 행복하게 살아갈 일만 남았다. 그런데 미인은 박명하다고 하전리는 성홍렬증에 걸려 1914년에 행가의 화원에서 불행하게도 24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되고말았다. 강유위는 사랑하는 셋째부인을 잃자 너무도 비통하여 밥술도 뜨지 않고 울기만 했다.

1912년, 강유위는 일본에 건너가 어느 한 별장에 거주하였는데 그때 그는 중개인의 소개로 16세 되는 일본 소녀를 하녀로 두었다. 세쯔꼬라고 부르는 일본 소녀는 신비스러운 감을 품고 중국인의 집에 들어섰다. 그녀는 병장의 호화로운 장식을 보면서 이 집의 주인이 범상하지 않은 인물이란걸 느꼈다. 일본인의 전통적인 복장인 화복을 입고 게다짝을 신은 그녀는 강유위의 앞으로 아장아장 걸어가서 허리를 90도로 굽히고 곱게 인사했다. 강유위가 일본소녀를 찬찬히 바라보니 눈은 좀 작은 편이였지만 입술은 앵두같고 얼굴이 하야말쑥했다. 미인은 아니지만 부끄러움을 머금은 표정이라든가 방금 피여난 꽃봉오리같은 얼굴이 매우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강유위는 일본녀성 특유의 온화함과 유순함을 가진 착하고 사리밝은 소녀를 날이갈수록 사랑하게 되였다.

어느날밤, 강유위는 소녀의 방에 가서 그녀와 후지산에 대해 대화를 나누다가 중국의 만리장성과 황하, 장강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소녀가 신비함과 호기심에 도취되였을 때 강유위는 소녀를 끌어안고 연신 사랑한다고 말했다. 소녀는 놀란듯 몸을 떨었으나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온몸이 화끈 달아오른 강유위는 소녀를 끌어안고 침대우에 올라갔다…그후 한달동안 강유위는 하전리를 빈방에 둔채 하녀의 방에서 일본소녀를 안고 즐겼다.

강유위는 1913년에 귀국하여 상해에 돌아와서도 세쯔꼬를 잊을수 없었다. 그는 즉시 세쯔꼬를 초정한다는 편지를 써보냈다. 절절한 사랑이 담긴 편지를 받아쥔 세쯔꼬는 주저없이 바다를 건너 강유위의 곁으로 찾아왔다. 강유위는 너무도 기뻐서 잔치를 차리고 세쯔꼬를 넷째부인으로 맞아들인다고 선포했다.

1920년, 강유위는 항주 서호강반에 30무나 되는 “일천원”를 일떠세웠다. 그해 봄날 강유위는 사람을 취하게 하는 수려한 경치를 감상하면서 시를 읊조리다가 풍령사앞부두에서 고기그물을 씻고있는 농가의 처녀를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그 처녀는 타고난 아름다움에 매력적인 건강미가 흐르고있었다. 항주처녀가 천하미인이란 소문을 들은 강유위는 그날로 매파를 보내 혼사를 성사시켰다. 그 처녀의 이름은 장광이고 아명은 아취로서 당시 19살이였다.

5월의 푸른 계절에 강유위는 장광을 여섯번째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강유위와 장광은 결혼후에 서호 거룡교 18호에서 한동안 살았는데 63살의 신랑과 19살의 신부는 아침이면 배를 타고 서호를 유람했고 저녁이면 산에 올라 항주의 경치를 감상했다. 장광은 강유위가 마지막으로 총애한 부인이였다.

강유위가 1927년 3월 31일에 70세를 일기로 청도에서 세상을 떠나자 장광은 과부로 되였다. 강유위는 서예작품을 비롯한 귀중하나 물품을 만년에 총애하고있던 장광에게 맡겼다. 장광은 강유위의 유물을 목숨처럼 귀중히 여기고있었다. 그런데 장광은 1945년에 자택에서 강유위의 유물을 도적맞히자 그 충격으로 병이 들어 사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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