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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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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의 음지에 사라진 4인방
2014년 03월 18일 19시 33분  조회:9380  추천:2  작성자: 넉두리

력사의 음지에 사라진 4인방

 

문화대혁명시기에 중국을 암흑천지로 만들었던 강청, 왕홍문, 장춘교, 요문원을 일컬어 “4인방”이라고 부른다.



 
강청의 앞잡이 왕홍문
 
 
왕홍문(王洪文)은 본명이 왕홍원이며 1935년에 장춘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1950년에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였으며 그후 조선전쟁복구에 나가기도 하였다. 1951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군에서 제대한 후에는 상해 면방직 제17공장에서 로동자로 근무하다가 면방직 제17공장 보위과 간사를 지냈다.
1966년에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상해로동자혁명반란총사령부"를 조직하여 사령관을 맡았다. 같은 해 11월에는 철로에 가로누워 렬차의 운행을 막은 상해 "안정사건"을 주동하여 중국공산당 상해시위원회를 협박하였다. 1967년초에 장춘교, 요문원과 손잡고 상해 "1월폭풍"을 만들어 권력탈취의 바람을 일으켰다. 그후 상해시 혁명위원회를 결성하여 부주임을 력임하고 상해 면방직 제17공장 혁명위원회주임을 력임하였다. 1968년에 중국공산당 상해시위원회가 다시 신설되자 제3서기를 력임하였으며 그후 상해시 로동자대표대회 주임, 상해시 로동조합 총련합회 주임, 상해 경비구 정치위원을 력임하였다.
1969년 4월 중국공산당 9기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되였다. 1973년 8월 중국공산당 10기대회에서 중앙위원, 중앙정치국 위원, 상무위원회 위원, 중앙 부주석에 선출되였으며 이와 동시에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상무위원을 겸임하였다. 1956년 2월에 쏘련공산당 제20차대회에서 쓰딸린을 비판하고 쏘공량당의 관계가 악화되자 모택동은 수정주의를 방지하고 수정주의를 반대하는것을 초점으로 삼았고 계급투쟁을 틀어쥐고 날마다 말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으며 또 미제국주의가 사회주의중국을 자본주의로 변화시키려는 희망을 제3대, 제4대에 두고있는 형세하에서 후계자문제를 급선무로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림표를 후계자로 두었다가 실패하자 다시 젊고 전도가 있다고 여긴 왕홍문을 후계자로 정하였다.
왕홍문은 후계자로 지목된 기간에 강청의 당권 및 국가 최고권력 찬탈행위에 적극 가담하여 강청반혁명집단의 핵심인물이 되였다. 1974년부터 1975년까지 강청, 장춘교, 요문원과 더불어 4인방을 결성해 “림표를 비판하고 공자를 비판(批林批孔)”하는 운동을 일으켜 주은래를 중심으로 한 원로무산계급 혁명가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하고 당중앙을 총괄하고있던 등소평의 일상적인 업무를 반대하여 당권과 국가 최고권력을 탈취하려고 모의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북경 제1차 천안문사건의 류혈진압에 적극 개입하였다. 그후 직접 상해로 내려가서 그의 직속하에 있는 무장조직을 결성하여 상해 민병폭동을 획책하려 하였다.
1976년 10월 7일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결정에 의해 구속 수감되였다. 1977년 7월, 중국공산당 10기 3중전회에서는 그의 당적을 영원히 취소하고 당내외에서의 모든 직무를 해임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1980년 11월 20일부터 1981년 1월 25일 사이에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에서 공개재판을 받았다. 1981년 1월 25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종신토록 정치권리를 박탈당했다.
1992년 8월 3일에 간염으로 옥중에서 병사하였다.
 


 
야망으로 가득찬 음모가 장춘교
 

장춘교는 1917년 2월에 산둥성 거야에서 출생하여 1932~1937년 제남과 상해에서 문예활동에 종사하였다. 1938년 연안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진찰기일보", "신석문일보"에서 총편으로 있었고 1954년 상해 "해방일보" 사장이 되였다. 1963년 중국공산당 상해시위 상무위원회, 서기처 후보서기 겸 선전부장, 1966년 당 중앙문화혁명소조 부조장, 1967년 상해시위 혁명위원회 주임 겸 남경군구 제1정치위원 및 상해경비구 제1정치위원, 해방군총정치부 주임을 지녔고 1969년 당 제9기 중앙위원․중앙정치국 위원, 1973년 당 제10기 중앙위원․중앙정치국 위원․중앙정치국 상임위원, 1975년 제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부총리에 선임되였다.
1966년부터 76년까지 10년동안 이어진 중국 문화대혁명의 광기를 주도한 4인방중의 한 사람인 장춘교는 기타 세 사람과 함께 극좌적인 문화대혁명을 통해 중국 전통문화와 가치관을 말살시킴과 동시에 수백만명의 무고한 사람을 박해받아 사망에 이르게 했으며 수천년에 걸쳐 내려온 중국 전통문화재가 대부분 소실되게 했다. 장춘교는 강청이 녀황제를 꿈꾸고 왕홍문이 모택동의 자리를 꿈꾸고 유문원이 주덕의 위원장 자리를 꿈꿀 때 총리의 자리를 찬탈하려는 야심을 품고 강청 등과 결탁하여 주은래를 타도하는데 앞장섰다. 홍콩과학기술대학 중국사회 전문가 데이비드 교수는  권력에 대한 야망으로 가득 찼던 장춘교의 사상은 현대 경제개혁의 수요와 어긋났다고 평가했다.
1976년에 4인방의 일원으로 체포된 장춘교는 1981년에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형집행이 2년간 유예되였고 1983년에 무기형으로 감형되였다. 장춘교는 재판을 받는 동안 처음부터 마감까지 입을 꾹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 1998년 신병 치료를 위해 교도소를 나와 병원에서 지내다가 2005년 4월 21일 암으로 사망되였다.

 

 
붓으로 사람을 죽인 요문원
 
 
문화대혁명 시기에 림표, 강청 반혁명집단의 핵심 인물이였던 요문원(姚文元)은 1932년 절강성 제기에서 출생하여 대학을 졸업한 후에 문화홍보활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다가 1948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일찍이 중국작가협회, 상해 로만구로동운동위원회, 구위원회 선전부, 상해 "해방일보", 중국공산당 상해시위원회정책연구실에서 선후로 업무를 맡았다.
1965년 11월, 강청과 장춘교의 사주를 받고 "신편역사극 〈해서파직〉을 평함"이란 글을 발표하였으며 이로부터 강청반혁명집단의 핵심인물이 되였다.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자 중국공산당 중앙문화대혁명 소조구성원을 력임하였다. 1967년초 장춘교, 왕홍문과 함께 상해 "1월폭풍"을 만들어 정권찬탈 바람을 전국적으로 일으켰다. 그후 중국공산당 상해시위원회 제2서기, 상해시 혁명위원회 제1부주임 등을 력임하였으며 중국공산당 제9, 제10기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였다. 1974년부터 1975년까지 그는 "림표와 공자를 비판하는(批林批孔) 운동"을 리용하여 인민민주전정을 타도할 목적으로 많은 문장을 발표하여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을 모함하고 박해하였다. 강청, 장춘교, 왕홍문과 더불어 4인방을 결성하여 당과 국가의 최고권력 찬탈을 기도하였다.
요문원은 1976년 10월 6일 회인당에서 회의에 참석하라는 통지를 받고 갔다가 체포, 7일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의 결정에 의해 구속 수감되였다. 1977년 7월, 중국공산당 10기 3중전회에서는 그의 당적을 영원히 취소하고 당내외의 모든 직무를 해임한다는 결정을 하였다. 그는 1980년 11월 20일부터 1981년 1월 25일 사이에 중화인민공화국 최고인민법원 특별법정에서 공개재판을 받고 징역 20년에 5년간 정치권리 박탈을 선고받았다.
감옥에서 그는 강청처럼 야단치지도 않고 장춘교처럼 묵묵히 침묵을 지키지도 않았으며 열심히 개조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애썼다. 매일 신문과 책을 읽으며 반성문을 써바치면서 림표, 강청반혁명집단과 계선을 가르겠다고 보고했다. 그는 개조표현이 적극적이였으며 신문을 보고 자기의 제기하기도 했다. 가소로운것은 그가 신문에서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입쌀고 밀가루가 남아돈다는 보도들 읽고 감옥당국에 "이렇게 흥청망청 먹고 랑비하면 몇년 못가서 량식이 거덜날것이니 다시 량표를 발행하여 계획적으로 제한해야 합니다. 당신들이 저의 의견을 중앙정치국에 전하여 간고분투하는 정신을 견지하지 않고 마구 먹어버리면 나라의 창고가 텅 비게 된다고 귀띔해주십시오."하고 제기한것이다.
1996년 1월 출옥할 때 요문원은 10여년동안 갇혀있던 감방을 둘러보며 길게 한숨을 지었다. 그런후 천천히 죄수복을 벗고 가족들이 가져온 중산복을 갈아입었다. 그는 바깥의 찬란한 태양을 바라보며 감옥문을 나서서 이미 기다리고있는 가족들한테로 다가갔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북경기차역으로 가서 상해로 가는 기차표를 끊었다. 지난날 문밖을 한발작만 나서도 수많은 경호원들과 수행인원들이 전후에 따라서는 으리으리한 큰 인물이였던 그는 누가 자신을 알아볼가봐 모자를 꾹 눌러썼다. 그러나 상해역에 도착하여 마중을 나온 안해 김영을 보았을 때 그는 눈물이 글썽하여 "후-정말로 꿈같은 10년이구려!"하고 탄식했다.
요문원은 2005년 12월 23일에 당뇨병으로 사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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