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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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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전역에서 국민당 거목 진성을 물리친 림표
2014년 03월 22일 19시 58분  조회:7430  추천:0  작성자: 넉두리


동북전역에서 국민당 거목 진성을 물리친 림표

 
(번역)





 
동북민주련군의 가을철공세가 결속된후 1947년 10월 15일에 모택동은 동북민주련군 총사령 겸 정위인 림표에게 전보를 보내여 더욱 큰 규모의 겨울철작전을 앞당겨 개시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림표는 현재 그의 부대가 관을 넘어 작전한다는것은 현실적이 못된다는것을 의식하고 모택동에게 회답하는 전보에서 기동출격작전을 1948년초로 늦출것을 건의했다.

“금주에서부터 심양일대까지의 하류가 모두 얼어야 아군의 대부대가 행동하기 편리하고 금주와 심양사이의 작전에 최대의 병력을 투입할수 있습니다. 대거점공격, 대증원작적의 수요에 적응하기 위해 우리는 래년 4~5월에 다시 100개의 새 병퇀을 확대하기로  했습니다. 기동과 평수로작전에 관해 림표, 라영환, 류아루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현재 대군이 움직인다면 보충공급이 곤난합니다. 그렇다고 규모가 크지 않은 부대가 나간다면 병력이 분산되여 작은 전투는 찾기 어렵고 큰 전투를 하려고 해도 병력이 모자라게 됩니다. 때문에 우리는 잠시 움직이지 않고 명년에 강물이 언후 다시 형세를 보아서 움직이기려고 합니다.”

동북전역에서 국민당군이 병력을 집중하여 대도시를 고수하고있는 상황에서 림표는 4~5개 종대를 집중하여 도시공격작전을 발동하거나 6~7개의 종대를 집중하여 대규모의 운동전을 하는수밖에 없었다. 공격할수 있는 작은 거점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기때문이다. 그 시기 재정비와 확충을 거쳐 림표의 병력은 가을철작전시기보다 근 22만명이 더 증가되여 총병력은 이미 74만명이 되였다.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군대는 동북지구에서 처음 병력이 국민당군을 초과했다.

12월초에 동북지구의 기온은 마침내 령하 20도로 내려갔다. 강울이 얼어 무거운 군수물자를 실은 차도 통과할수 있게 되였다. 동북민주련군은 두꺼운 솜옷을 입고 신선한 우랍초를 받친 신을 신고 한자 깊이 쌓인 눈길로 전진했다.

12월 15일에 2종대와 10종대는 심양이북의 법고를 포위했고 7종대는 법고이서의 창무를 포위했으며 8종대는 창무이남의 신립툰을 포위했다. 1종대, 3종대, 6종대는 법고, 신민, 심양사이에 도착했고 4종대는 심양에 접근했으며 9종대는 심양서북방향의 신민부근에 이르렀다.

동북민주련군이 전면적으로 출동하자 긴장해난 군민당군의 국방부참모총장이며 동북군영주임 진성은 즉시 철령을 고수하던 신6군 신22사에 법고를 증원하라고 명령했다. 신22사의 출동은 림표에게 전투하기 적합한 기회를 가져다주었다. 림표는 아래와 같이 명령했다.

(1) 10종대 29사는 법고를 물샐틈없이 포위하여 적들이 도망치지 못하게 할것. (2) 2종대와 7종대의 주력은 신속하게 법고동남을 돌아서 측면으로 진공할것. (3) 3종대는 철령으로 우회하여 적군 22사의 퇴로를 막아 신3군 14사와의 련계를 끊어놓을것.

12월 16일에 신22사(적군)는 철령과 법고사이의 진서보루와 랑랑묘의 일선에 도착하여 법고이동의 2종대(아군)의 진지를 공격했다. 2종대는 즉시 반격하면서 5사를 적의 측면과 후면으로 우회하게 했다. 신22사는 자신이 공격대상으로 되였다는것을 발견한후 급히 철령으로 후퇴했다.

신22사가 얻어맞자 12월 20일에 진성은 급히 장춘을 고수하던 신1군 54사와 림시편제로 된 53사, 사평을 고수하던 제71군 87사와 91사, 개원을 고수하던 제53군 103사와 림시편제로 된 30사, 료남을 지키던 제52군 제2사에 심양과 철령지구를 증원하여 심양을 포위한 림표군의 군사위협을 해제하라고 명령했다. 국민당군의 대규모의 이동은 림표가 줄곧 기다리고있던 바였다. 림표는 동쪽을 치는척 하고 서쪽을 치는 전술로 사면이 산으로 둘러쌓여 견고한 법고를 포기하고 2종대와 7종대에 서쪽의 창무를 공격하여 이동한 적군과 분산된 적군을 소멸하라고 명령했다.

창무는 심양이북철로선의 중요한 거점의 하나로서 국민당군 제49군 79사의 3개퇀이 지키고있었는데 병력이 1만명나 되였다.

12월 28일에 총공격이 시작되였다. 5시간후 창무성을 지키던 1만여명의 적군은 소멸되였고 군민당군 제49군 79사 소장 부사장 리불태와 7000여명의 적군이 포로되였다. 이는 림표군이 첫번째로 대낮에 발동한 도시공격전이였다. 그후로 동북민주련군은 대부분 대낮에 도시를 공격했다.

창무전투가 결속되자마자 림표는 1종대, 8종대, 9종대에 계속 남녕로로 전진하여 금주부터 심양사이의 교통련락을 철저하게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림표군이 사상자가 많아서 다시 전투하기 어렵다고 여긴 진성은 법고이남지구에서 림표군과 주력작전을 벌릴 계획을 포치했다. 국민당군의 5개군이 동쪽에서 철령으로, 서쪽에서 신민으로 료하량안의 100킬로메터를 따라 부채형으로 전면 출격했다. 진성의 대군이 출격한 날은 바로 1948년 양력설이였다. 진성은 그날부터 적수의 칭호가 변한것을 몰랐다.

1947년 12월 30일 17시에 동북민주련군총부에서는 “1948년 1월 1일부터 동북민주련군총사령부를 중국인민해방군동북군구사령부로 개칭하고 원래의 동북민주련군총사령부의 간칭인 ‘동총(东总)’을 중국인민해방군동북군구사령부의 간칭인 ‘동사(东司)’로 개칭한다”고 통지했다.

바로 그날에 림표는 진성의 3로대군(三路大军)중의 좌로 신5군이 진격이 빨라서 이미 돌출하게 앞으로 나와있고 력량이 상대적으로 박약하다는것을 발견했다. 림표는 각 종대를 동원하여 국민당군 신5군을 섬멸하는 전술을 펴나갔다.

림표군에게 포위된 신5군은 공주툰과 그 서남지구에 갇히게 되였다. 진성은 신오군 군장 진림달에게 공주툰을 고수하면서 증원을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진성은 림표가 자신의 한개 군을 섬멸하리하고는 생각도 못했기때문이다. 림표는 적군의 4개군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병력을 보전하기 위해 증원을 오지 않을것이라는것을 알고  대담하게 공격을 들이댔다.

공주툰을 계속 지킬것인가, 후퇴할것인가? 그때까지도 진성은 의연히 망설이고있었다. 각지의 증원부대에서 모두 그에게 “빠른 속도로 전진하고있다”고 보고했기때문이다.

림표는 2종대에 명령하여 새벽에 총공격을 발동하게 했다. 6일밤에 진성은 마침내 신5군에 심양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7일 아침에 림표군의 총공격이 시작되였다. 호되게 얻어맞은 국민당군은 결국 투항했고 진림달, 195사 사장 사대증, 43사 사장 류광천 등 1만 3000여명 관병들이 포로되였다. 거기에 7000여명의 사상자까지 합치면 신5군 2만여명이 전부 섬멸된것이다. 진성은 급히 료양을 지키던 제52군의 주력과 사평을 지키던 제71군의 주력을 심양으로 돌아오라고 명령했다. 그후 그는 위병으로 드러누웠다.

1월 10일에 장개석은 심양으로 찾아왔다. 장개석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진성을 만났다. 진성은 신5군이 전멸된 원인을 하급들이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기때문이라고 하면서 신6군 군장 료요상을 처벌해줄것을 요구했다. 군민당동북군영에서 사장이상의 장령들이 참석한 군사회의가 열렸다. 회의가 시작되자마자 장개석은 화가 나서 상을 내리치며 료용상장군, 리도장군 등이 무능하여 신5군이 섬멸되였다고 10여분동안 “냥씨피(娘希匹)”를 반복하며 줄욕을 퍼부었다.

장개석은 남경으로 돌아가자마자 나쁜 소식을 듣게 되였다.

“신립툰이 림표군에게 근 한달동안 포위되여 제49군 26사의 9000여명 군사가 탄알과 군량이 떨이지고 많은 군사가 동상을 입어 사기가 저락되여있던중에 갑자기 림표군의 명렬한 공격을 받았습니다.”
진성은 동북군영 부사령장관 정동국과 함께 남경으로 가서 장개석을 만났다. 진성은 장개석앞에서 다시 군민당군이 동북에서 패배한 원인은 하급들이 부패하고 타락되여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았기때문이라고 변명했다. 그의 말을 듣고난 장개석은 “진장군은 다른 일은 상관하지 말고 마음놓고 료양이나 잘하게”하고  말했다. 그제야 진성은 자신의 군사생애가 결속되였다는것을 깨달았다. “심양과 함께 생사를 같이 하겠다”, “심양을 지키지 못하면 총으로 자살하겠다”고 맹세했던 진성은 병을 핑계대고 장개석에게 사직을 제출했다.

1948년 2월 5일에 패전한 진성은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심양을 떠났다. 때는 그가 동북군을 거느린지 6개월도 안되였다.

림표가 거느린 동북인민해방군의 겨울철공세 제1단계작전이 결속되였다. 이 전투에서 림표군은 국민당군 5만 8000여명을 섬멸하고 북녕철도를 차단했으며 국민당군이 동북을 고수하는 요지인 심양의 관문을 열어놓았다. 동북야전군은 령하 40도의 날씨에 야외에서 작전하다보니 8000여명이 동상을 입었고 신5군을 섬멸하는 전투에서만도 사상자수가 1만여명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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