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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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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벌거두 손전방을 암살한 녀호걸
2014년 04월 26일 10시 03분  조회:6680  추천:2  작성자: 넉두리

군벌거두 손전방을 암살한 녀호걸

 
(번역)




 
시검교(施剑翘)는 본명이 시곡란(施谷兰)이다. 그녀는 1905년에 안휘성 동성에서 태여났고 생부는 혁명렬사 시종운(施从云)이다. 생부가 사망된후 시검교는 아버지 시종운의 동생 시종빈(施从滨)의 양녀로 들어가 삼촌 시종빈을 아버지라고 불렀다. 시종빈은 1925년에 산동성군무조리 겸 봉계제2군 군장을 담임했다. 시종빈은 그해 11월의 직봉대전에서 패배하여 손전방(孙传芳)에게 포로되였다. 당시 5성련군통수(五省联军统帅)였던 손전방은 포로된 시종빈을 즉시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손전방은 시종빈의 시신을 동강낸후 머리를 안휘성 방부기차역꼭대기에 7일동안 걸어놓았다. 아버지가 비참하게 살해된 소식을 들은 시검교는 비분강개하여 주먹을 불끈 틀어쥐고 꼭 손전방을 죽여 아버지의 원쑤를 갚겠다고 하늘에 맹세했다.
그러나 당시 연약한 녀자가 손전방같은 군벌거두를 암살한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였다. 그리하여 시검교는 복수의 희망을 사촌오빠 시중성에게 걸었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읜 시중성은  시검교의 아버지 시종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다. 시종빈이 살해되였을 때 시중성은 연태경비사령부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고있었다. 시검교는 이런 사촌오빠의 힘을 빌면 손전방을 암살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가 찾아갔을 때 유망한 전도와 부귀영화에 미련을 둔 시중성은 단마디에 시검교의 부탁을 거절했다. 몹시 실망한 시검교는 집에 돌아간후 장편편지를 써서 시중성과의 남매관계를 단절했다.
몇년후 시검교는 산서성 태원에 갔다가 산서군벌 염석산의 부대에서 첩보계장을 담임하고있는 시정공을 알게 되였다. 그때까지 시검교는 한시도 원쑤를 갚을 일을 잊은적이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비참하게 살해된 사실을 시정공에게 털어놓으면서 복수를 도와달라고 했다. 시검교의 미모에 반한 시정공은 비분강개하는척 하면서 “만약 기회가 있다면 내 이 몸이 분신쇄골이 되더라도  검교를 대신하여 원쑤를 갚아주겠소”하고 호언장담했다. 그 말을 믿은 시검교는 시정공에게 몸까지 바쳤다. 하지만 결혼후 시정공은 안락한 생활에 빠져 결혼전에 맹세했던 말을 말끔히 잊어버렸다. 시검교가 기다리다못해 여러번이나 원쑤를 갚아달라고 말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차일피일 미루기만 했다.
시검교는 더는 참을수 없어 1935년 6월에 아이를 데리고 태원을 떠나 천진의 친정으로 돌아왔다. 그후 그녀는 다른 사람이 나서서 자신을 대신해 아버지의 복수를 해줄 생각을 버리고 직접 손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시검교는 손전방과 관계되는 정보라면 모두 수집하면서 손전방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1935년 추석날에 시검교는 프랑스조계지의 대광명영화관문앞에 세워놓은 검은색승용차를 발견했다. 차번호가 1093호인 그 차는 틀림없는 손전방의 승용차였다. 영화가 끝난후 시검교는 처음 가까운 거리에서 검은색안경을 낀 기세등등한 손전방을 만났다. 그러나 떼를 지어나오는 관중들이 많아서 손을 쓸수 없었다. 그녀는 아버지를 살해한 원쑤가 승용차에 올라 사라지는것을 눈을 펀히 뜨고 보고있는수밖에 없었다.
그후 시검교는 여러번이나 영국조계지에 있는 손전방의 호화저택주위를 돌아보았으나 경계가 삼엄하여 손을 쓸수 없었다. 시검교는 손전방을 미행하여 그의 행동규률을 알아냈다. 그때 손전방은 갑자기 불교신도로 탈바꿈하여 천진거사림(居士林)의 부림장으로 되였다. 1935년 10월에 시검교는 “동혜”라는 이름으로 불교절당인 거사림에 들어가 거사(거사림의 불교신도)로 되였다. 그후 그녀는 손전방을 암살할 기회가 오기만 기다렸다.
1935년 11월 13일은 불경을 강의하는 날이였다. 시검교는 그날에 근운붕과 손전방이 모두 경문을 들으러 거사림에 온다는것을 알고있었다. 그날은 비가 내리고 찬바람이 불어서 거리에는 오가는 사람들이 매우 적었다. 근운붕은 비때문에 오지 않았지만 손전방은 비를 무릅쓰고 제 시간에 거사림에 도착했다. 거사림에서 부처에게 절하고 불교강의를 들을 때 남녀거사들은 두줄로 갈라서 앉았다. 마침 남거사들의 줄앞에는 근운붕이 앉고 녀거사들의 줄앞에는 손전방이 앉는것이 규칙으로 되였다. 그날도 손전방은 녀거사들의 줄앞에 앉았다. 그전에 시검교는 세번이나 불교강의를 들었지만 강의를 들어러 온 거사들이 많아서 손을 쓰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은 비때문에 강의를 들으로 온 거사들이 적었다. 시검교는 손을 쓰기가 좋다고 여겼지만 맨 뒤에 앉아서 손전방과의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뒤의 난로가 뜨겁다는 리유로 앞으로 옮겨 앉았다.
거사들이 부명법사를 따라 경문을 읽을 때 손전방도 거사들과 함께 눈을 감고 경문을 읽었다. 기회가 왔다고 생각한 시검교는 남몰래 가방에서 브라우닝권총(勃朗宁手枪)을 꺼내들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전방의 머리를 겨낭한후 방아쇠를 당겼다. 불교절당에 울려퍼진 “땅!땅!땅!”하는 세방의 총소리와 함께 손전방은 당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혼비백산한 거사들은 그 자리에 굳어져 한 사람도 일어나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시검교는 사람들을 향해 큰소리로 말했다.
“모두들 무서워하지 마십시오! 나는 아버지의 원쑤를 갚았을뿐 무고한 사람을 해칠 마음이 없습니다. 손전방은 내가 죽였으니 내가 책임지겠습니다. 절대 여러분들에게 련루되게 하지 않을것입니다.”
말을 마친 시검교는 가방에서 삐라와 《국민들에게 알리는 글》이란 책자를 꺼내 사방에 뿌렸다. 그리고 그녀는 집에 전화를 걸어 거사에 성공했다고 말한후 동해스님한테 가서 자신이 자수하겠으니 경찰국에 통지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 손전방의 부하가 달려들어왔다. 그는 시검교가 총을 들고있는것을 보고 서뿔리 다가서지 못하고있다가 경찰이 온후 시검교를 붙잡아갔다.
그날 오후 6시에 《신천진보》는 호외를 발행하여 “시종빈의 딸이 쏜 복수의 총에 손전방이 비명에 쓰려지다”는 특대뉴스를 보도했다. 다음날에 천진, 북평, 상해 등지에서도 이 소식을 보도하여 전국이 들썽했다.
다음날에 사건은 천진지방법원검찰처에 이송되였다. 시검교는 자신이 손전방을 살인한 경과와 원인에 대해 숨김없이 진술했다. 시검교의 진술을 들은 사람들은 그녀의 용기에 감탄하면서 그녀를 “녀호걸”이라고 불렀다. 연약한 녀자가 혼자서 손전방같은 거물을 암살할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처음에 그녀의 배후에 누가 있지 않을가고 의심했다. 이런 의문에 대해 시검교는 아래와 같이 진술했다.
 “저는 아버지의 원쑤를 갚으려고 오래동안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배후는 없습니다. 저의 아버지가 만약 싸움터에서 돌아갔더라면 저는 손전방을 원쑤로 여기지 않았을것입니다. 하지만 손전방이 잔인하게 포로된 아버지를 살해하고 수급을 매달아 가족들이 일주일이나 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지 못하게 하였기에 저는 그를 불공대천의 원쑤로 여긴것입니다. 저의 시집형제들과 남편은 모두 총이 있고 세력이 있지만 은혜를 저버리고 우리 아버지의 원쑤를 갚아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가족도 믿을수 없는데 어찌 남을 믿을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다시는 다른 사람을 찾지 않고 어머니도 모르게 행동했습니다. 권총은 태원에 있는 저의 남편한테서 가져온것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총을 가지고놀았기에 사격에 대해 잘 알고있었습니다.”
손전방의 가족대표와 시검교의 가족대표가 법정에서 수개월동안 변론했지만 결과를 보지 못했다. 얼마후 천진지방법원에서 시검교를 유기형 10년에 처한다고 1심판결을 내렸다. 그후 변호사의 신고로 천진고급법원에서 다시 심리하고 징역을 유기형 7년으로 정했다.
당시 사회각계에서는 시검교가 죄악이 하늘에 사무친 대군벌 손전방을 암살한것은 나라와 인민을 위해 유익한 일을 한것이라고 일치하게 평가했다. 당시의 《대중생활》잡지는 손전방이 이미 불문에 귀의했기에 그의 과거를 추궁하지 말아야 한다는 일부 사람들의 설법에 대해 “중국의 수많은 군벌과 관료들은 무고한 인명을 도살한후 늘 념불을 외우면서 불교에 몸을 담고있는데 이는 불교의 허울로 자신의 몸에 묻은 피흔적을 씻고 비렬하게 나라를 팔아서 긁어모은 돈을 세탁하려는 음모이다. 손전방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는 글을 실어 반박했다.
당시의 전국부녀회인 료녕, 양주, 강도부녀회와 려경안휘학회, 안휘성 립휘주사범 등 단체에서 시검교를 동정하여 나서서 최고법원에서 시검교를 석방해줄것을 요구했다. 또 이 사건은 풍옥상장군까지 놀라게 했다. 풍옥상은 시검교를 알지 못했지만 신해혁명시기에 시검교의 친아버지 시종운과 함께 용감히 적을 물리친적이 있었다. 풍옥상은 소식을 알게 된후 즉시 중화민국 개국공신 리렬균, 장계 등과 함께 련합으로 남경정부에 압력을 가해 아버지의 원쑤를 갚은 효녀이며 인민을 위해 해를 제거한 녀호걸인 시검교를 석방해줄것을 요구했다. 일부 신문에서는 풍옥상장군이 단독으로 장개석에게 전화를 걸어 시검교를 석방해줄것을 요구한 사실을 보도했다.
결과 시검교가 감옥에 들어간지 1년이 채 되지 않는 1936년 10월 14일에 중화민국 국민정부 주석 림삼은 전국에 공고를 발표하여 시검교를 사면한다고 선포했다. 그후 중화민국 최고법원에서 특사령을 내려 시검교를 석방했다.
시검교가 사면된지 얼마안되여 항일전쟁이 폭발하였다. 즉시 남방으로 달려간 시검교는 선후로 장사, 중경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항일전사들을 위해 위문품을 모으고 학교를 꾸리는 등 나라와 인민을 위해 유익한 사업을 했다. 새중국이 건립된후 시검교는 1952년에 북경으로 이사왔는데 줄곧 거사의 신분으로 벽운사에서 수행했다. 그녀는 1957년에 북경시의 정협특별초청위원으로 되였다. 시검교는 1973년에 병으로 사망되였는데 그때까지 줄곧 북경시의 정협특별초청위원으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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