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은래(周恩来)가 서거하자 국무원총리자리가 비였다. 원래는 응당 등소평(邓小平)이 총리의 후계자로 되여야 했다. 등소평은 제1부총리였기때문이다. 그러나 등소평은 비판을 받고있는 처지여서 총리자리를 이어받을수 없었다.
장춘교(张春桥)와 왕홍문(王洪文)은 등소평을 타도하면 자신들이 당연히 후계자로 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1976년 2월 2일에 하달된 《중공중앙통지》에는 뜻밖에도 위대한 령수 모주석의 제의에 따라 화국봉(华国锋)을 국무원대리총리로 임명한다고 했다. 그리고 엽검영(叶剑英)이 병으로 앓고있는 기간에 진석련(陈锡联)이 중앙군사위원회의 사업을 책임진다고 했다. 이는 모택동(毛泽东)이 새로운 후계자로 화국봉을 선정했다는것을 보여주었다. 화국봉은 류소기(刘少奇), 림표(林彪), 왕홍문, 등소평후 모택동이 또 친히 선정한 후계자였다.
1970년 7월부터 모택동의 기요비서겸 생활비서를 담임했던 장옥봉(张玉凤)은 모택동이 후계자를 선정하던 정경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후계자문제에 대해 모주석은 여러번이나 저에게 ‘이 문제는 골머리를 썩여야 할 일이요. 림표도 내가 선정했고 왕홍문도 내가 선정했지만 모두 자격이 안되오’라고 말했습니다. 1970년초에 저는 한번 모주석께 ‘주총리는 그렇게 훌륭한데 왜서 그를 후계자로 선정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은적이 있는데 그때 모주석은 손바닥을 펴고 칼로 자르는 동작을 하면서 ‘총리는 비록 훌륭하지만 이것이 모자라오’라고 대답했습니다.”
주은래가 사망되였을 때 모택동의 조카 모원신(毛远新)이 병석에 있는 모택동을 보고 누구를 총리로 임명하겠는가고 물었다. 모택동은 “왕홍문과 장춘교에게 양보하라고 알려라”라고 말한후 “그래도 화국봉이 좋을것 같구나”라고 말했다. 이렇게 되여 화국봉은 대리총리로 되여 정치국사업을 주관하게 되였다.
1976년 4월 30일 오후에 모택동은 화국봉과 담화했는데 당시 모택동의 발음은 똑똑하지 않았다. 모택동은 장옥봉의 부축을 받으며 종이에 “천천히, 급해하지 마시오”, “과거의 방침대로 하시오”, “동무가 사업을 맡아하니 나는 마음이 놓이요(你办事,我放心)!”라고 써서 화국봉에게 주었다. 그후 “과거의 방침대로 하시오”라는 말은 모택동의 림종부탁이고 “당신이 사업을 맡아하니 나는 마음이 놓이요”라는 말은 후계자를 지정한것이란 설이 나돌았는데 이는 사실과 맞지 않는다. 사실 모택동은 그와 비슷한 말을 주은래, 등소평 등의 앞에서도 서너번 말한적이 있었다. 례하면 등소평이 만리(万里)를 사천성당위 제1서기, 철도부 부장으로 천거했을 때 모택동은 등소평을 보고 “좋소. 동무가 사업을 맡아하니 나는 마음이 놓이요”라고 말한적이 있었다.
1976년 1월 21일과 28일에 모택동은 화국봉을 국무원 대리총리로 임명할것을 제의한후 또 화국봉이 중앙의 일상사업을 주관하게 제의했다. 화국봉을 국무원 대리총리로 임명한것은 모택동이 장춘교가 총리로 당선될 가능성을 부정했다는것을 말해준다. 화국봉을 중앙의 일상사업을 주관하도록 한것은 모택동이 의연히 왕홍문을 랭대했다는것을 말해준다.
장춘교보다 키가 머리 하나는 더 크고 나이가 4살 년하인 화국봉은 정치수단이나 문장, 말재주가 모두 장춘교보다 못했다. 산서사투리를 하는 이 대한이 갑자기 나타나서 장춘교의 총리꿈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놓았던것이다.
본명이 소주(苏铸)이고 자가 성구(成九)인 화국봉은 1921년에 선서성 교성현의 한 제혁로동자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28살의 모택동이 상해에서 중국공산당 제1차회의에 출석할 때 화국봉은 고고성을 울리며 태여났던것이다. 1938년에 17살인 화국봉은 집에서 떠나 산에 올라 항일유격대에 참가하여 1940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46년에 화국봉은 중국공산당 교성현당위서기를 담임한지 얼마안되여 중국공산당 양곡현당위 서기 겸 현 무장대대 정치위원을 담임하여 “화정위”라고 불리우게 되였다.
1949년 8월에 동정호의 남안에 위치한 상양현성에 붉은기가 꽂혔다. 부대를 따라 남하한 화국봉은 상향현 제1임 현당위서기 겸 현무장대대 정위로 임명되였다. 그때로부터 화국봉은 호남성에서 20여년을 사업했다.
1952년에 화국봉은 상담현에 전근되여 현당위서기를 담임했고 몇달후 중국공산당상담지구 당위원회 부서기 겸 상담지구전원(专员)으로 승진했다.
1954년에 화국봉은 중국공산당 상담지구당위원회 서기를 담임했다. 당시 화국봉 자신도 상담현당위 서기, 상담지구당위원회 서기라는 직무가 특수하게 중요하다는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모택동이 바로 상담현사람이였다!
1955년 7월에 모택동이 《농업합작화의 문제에 관하여》란 보고를 한후 34살의 화국봉은 《우경사상을 극복하고 농업합작화운동고조의 도래를 적극적으로 영접하자》, 《농촌 각 계층의 동태를 충분하게 연구하자》, 《합작화운동중에서 반드시 견결히 빈농에게 의거하자》라는 세편의 문장을 썼다. 모택동은 이 고향의 흙냄새가 나는 문장을 읽고 친절감을 느꼈다. 동시에 처음 화국봉이란 이름에 주의를 돌리게 되였다. 모택동은 호남성을 지날 때 상고머리를 한 화국봉을 접견했다. 1955년 10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7기 6중전회 확대회의에서 모택동은 화국봉을 렬석대표로 특별요청하여 상담지구의 합작화운동경험을 소개하게 했다. 일개 지구당위원회 서기가 중국공산당 중앙전회에서 강화를 한다는것은 아주 대단한 일이였다. 회의후 화국봉은 호남성으로 돌아간지 얼마 안되여 중국공산당 호남성당위 통전부 부장으로 승진했다.
1959년 여름에 중공중앙에서는 강서성 려산에서 제8기 8중전회(바로 제1차로산회의)를 열기로 결정했다. 그해 6월 하순에 북경을 떠난 모택동은 장사를 지나게 되였다. 당시 강청은 항주에서 휴양하고있었다. 모택동은 장사에서 화국봉을 만나 담화하면서 고향을 돌아보겠다고 했다. 화국봉은 즉시 모택동의 상담행을 배치했다. 1959년 6월 25일 저녁에 모택동은 떠난지 32년이 되는 고향 상담의 소산충(韶山冲)에 도착했다.
옛집(故居)의 벽에 걸려있는 양개혜(杨开慧)의 사진을 바라보던 모택동은 전처 하자진(贺子珍)에 대한 그리움에 잠을 이룰수 없었다. 모택동은 려산에 오른후 전용차를 보내 남창에 거주하고있는 하자진을 데려오게 했다. 모택동은 20여년이나 헤여졌던 하자진을 려산에서 만났다. 그런데 누가 고발했는지 항주에서 휴양하고있던 강청이 이 소식을 알게 되였다. 화가 난 강청은 장도전화로 “내 지금 당장 려산으로 찾아가겠어요”라고 말했다. 그 바람에 하자진은 려산에서 하루밤밖에 자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려산회의에서 모택동은 팽덕회(彭德怀)를 맹렬하게 규탄했다. 중국공산당 호남성당위 제1서기 주소주(周小舟)도 련루되였다. 주소주는 모택동과 한고향사람이고 모택동의 비서를 담임한적이 있었다.
모택동은 려산에서 내려간후 친히 화국봉을 중국공산당 호남성당위 서기처 서기로 임명하라고 지시했다. 그후 모택동이 호남성에 가기만 하면 화국봉이 곁에서 모시군 했다. 모택동은 늘 “화국봉동지는 정직한 사람이요”라고 말했다.
1968년 4월 8일에 호남성혁명위원회가 성립되였을 때 화국봉은 부주임을 담임했다. 1969년에 화국봉이란 이름은 중국공산당 제9차대표대회의 주석단명단과 제9기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의 명단에 나타났다. 화국봉은 중국공산당 호남성당위 제1서기를 담임했다.
1970년 12월 18일에 모택동은 저명한 저서 《서행만기(西行漫记)》를 쓴 미국 기자이며 작가인 에드가 스노(埃德加·斯诺)와 담화할 때 화국봉에 대해 언급했다. 스노의 글이 미국의 《생활》잡지에 발표된후 화국봉은 처음으로 국외의 주의를 일으켰다.
“친밀한 전우” 림표가 국외로 도망가다가 사망된후 모택동은 부득불 다른 후계자를 선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모택동은 상해의 왕홍문과 장사의 화국봉을 북경으로 전근시켰다. 그 시기 화국봉은 북경에 있었지만 의연히 호남성당위 제1서기, 광주부대정위, 호남군구제1정위직을 겸임했다.
공안부 부장 사부치가 1972년에 사망된후 화국봉은 모택동의 제의에 따라 공안부 부장직을 담임했다. 공안부 부장의 지위가 중요하다는것은 모두가 알고있는것이다. 때문에 화국봉은 북경에 든든하게 발을 붙인것으로 된다.
1973년 5월에 모택동은 정식으로 왕홍문을 후계자로 선정한다고 표시했다. 왕홍문을 중앙정치국회의에 렬석시킬 때 모택동은 화국봉을 예비후계자로 여기고 왕홍문과 동시에 중앙정치국회의에 렬석시켰다.
1973년 8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10차대표대회에서 왕홍문은 부주석으로 당선되여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화국봉은 중앙정치국위원으로 되여 그렇게 사람들의 눈에 띠이지 않았다. 화국봉은 말수가 적고 자신을 드러내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북경에서 그가 유일하게 의거할 사람은 모택동뿐이였다. 그는 “4인방”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주은래, 등소평, 엽검영 등과도 아무런 교분이 없었다. 중앙정치국의 날카로운 투쟁중에서 그는 언제나 중립을 지켰으며 유일하게 모택동의 명령에만 복종하였다.
“4인방”은 전력을 다해 등소평을 넘어뜨렸지만 모택동은 대권을 화국봉에게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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