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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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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2)
2014년 06월 01일 10시 09분  조회:6658  추천:0  작성자: 넉두리

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2)



 
 
1934년 5~6월경에 리운학은 이름을 리학으로 바꾼후 다시 상해로 돌아와서 기독교상해청년회 로동부의 소개로 녀공야학교에서 가창과 연기 등을 가르쳤다. 그후 다시 서명청이 있던 포동의 야학교로 옮겨 장숙정(张淑贞)이란 이름으로 교사생활을 계속하였다.
1934년 10월말에 리운학은 상해조풍공원(지금의 중산공원)에서 옛친구 아락을 만나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때 공청단중앙 련락원이였던 아락은 국민당특무들의 추적을 받고있던 상태였다. 그들이 만날 무렵에 아락은 이상한 낌새를 채고 급히 도망쳤는데 아락을 놓친 특무들은 그 대신 리운학을 체포해갔다. 리운학은 상해시 공안국에 약 1개월간 갇혀있다가 기독교상해녀청년회의 도움을 받아 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때 마침 황경이 상해로 돌아왔다. 마땅히 갈곳이 없던 리운학은 황경의 큰어머니네 집에서 황경과 함께 동거생활을 했다. 1935년 봄에 그녀는 상해업여극인협회에 들어가 유명한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의 녀자주인공 노라역을 맡게 되였다. 이것은 그녀의 인생을 또 다시 바꾸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였다.
“1935년 봄…난 영원히 그날을 잊을수 없다. 그날은 내 마음처럼 음산한 날이였다. 나는 한없이 따뜻한 고향을 떠나 일생에 있어 가장 소중하면서도 다시는 얻지 못할것을 버리고 상해로 가서 《인형의 집》을 공연하였다. “노라”의 공연은 내가 본격적으로 희극계에 발을 들여놓는 계기가 되였다…”(강청의 자술 중에서)
여기에서 강청이 “일생에 있어 가장 소중하면서도 다시는 얻지 못할것을 버리고”라고 술회한것은 바로 그녀와 황경사이의 아이를 가리키는것이다. 당시에 강청은 이미 임신을 하고있던중이였는데 무대에 서기 위해 락태수술을 했던것이다. 이 공연에서 그녀는 그간의 불행을 말끔히 씻고 세상에 이름을 떨칠수 있기를 열망했다. 1935년 3월에 그녀는 예명을 람평(蓝苹)이라 하였다. 《인형의 집》은 당시에 공연되기전부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작품으로서 1935년 6월 27일에 상해의 금성대극원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인형의 집》은 첫 공연부터 련일 초만원을 기록하면서 대단한 호응을 받았다. 상해의 각 언론에는 노라역을 맡았던 람평에 관한 기사가 쏟아져나왔다. 《인형의 집》의 대성공으로 강청은 불과 21세의 어린 나이에 다소 유명세를 타기는 했으나 대스타가 되기에는 아직도 험난한 길이 많이 남아있었다. 그녀는 관객이 적은 연극무대에서는 대스타가 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관객이 훨씬 더 많은 영화계로 시선을 돌렸다.
1935년초에 전통영업공사가 상해에서 영화 《풍운아녀》를 촬영하고있었다. 이 영화의 주제가 《의용군진행곡》이 바로 현재의 국가이다. 《풍운아녀》의 제작이 끝날 무렵에 강청은 전통영업공사에 들어갔다. 그후 강청은 전통영업공사의 세번째 작품 《자유신》의 여월영(余月英)역을 맡았다. 그러나 극중의 여월영은 그다지 비중이 높지 않은 배역이여서 자못 실망이 컸었다. 1935년 9월에 그녀는 당시 상해영화계에서 영향력이 있던 영화평론가 당납과 열애에 빠져 동거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강청이 당납의 이름을 빌어 유명세를 타려한다는 소문이 무성하기도 했다. 1936년 4월 21일에 강청은 당납과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때 심균유의 주례하에 강청과 당납, 조단과 엽로천, 고이기와 두소견이 동시에 집체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식에는 정군리, 리청 그리고 촬영사 마영화가 참석했다. 그후 강청은 영화 《도시풍광》과 연극 《흠차대신》 등에 출연하였으나 그다지 비중이 있는 배역을 맡지 못하고있었다. 연화영편공사의 《랑산첩혈기》에서 주인공 유삼의 안해역을 맡았으나 그 역도 허명뿐이였다.
1936년 6월에 강청은 어머니가 앓는다는 거짓말로 상해를 떠나 천진에 가서 황경을 찾아 동거했다. 그후 1936년 9월에 강청은 장민과 서로 사랑의 감정이 생겼다. 1937년 5월에 강청은 당납과 헤여지고 상해연극계에서 매우 명망이 높던 연출가 장민과 동거생활에 들어갔다. 당납의 명성을 리용하여 영화계에서 스타가 되여 보려고 하였으나 영화계의 높은 벽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다시 연극계로 돌아와 장민의 명성을 리용하기로 했던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그녀의 계획은 또 다시 수포로 돌아가고말았다. 이 일로 인하여 유부남이였던 장민은 안해와 리혼하게 되였다. 사랑하는 강청을 잃고 절망한 당납은 거듭 자살소동을 벌리게 되여 여론이 강청을 부도덕한 녀인으로 몰아갔다. 상해에서 더이상 발붙일 곳이 없게 된 강청은 스타의 꿈을 접고 1937년 7월에 도망치듯 상해를 떠났다.
이때 그녀는 황경이 연안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연안으로 갈 결심을 했다. 그녀는 서안으로 가있던 서명청을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였다. 서명청은 엽검영의 부인 위공과 친분이 두터웠던지라 그녀의 소개로 팔로군사무소로 가서 주은래의 부인 등영초를 만날수 있었다. 등영초는 강청이 상해의 진보적인 좌익극단에서 활동하던 배우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그녀를 연안으로 갈수 있도록 주선해주었다. 당시 연안에서는 진보적인 문화계인사들을 적극 환영하고있었던 터였다. 1937년 8월말에 강청은 연안에 도착하여 제3초대소(서북려사라고도 함)에 투숙하였다.
여기에서 그녀는 숙박부에 이름을 적으면서 람평 대신 강청(江青)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강청이라는 이름은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 지은것으로 두가지 의미를 내포하고있다. 첫째, “청 (青) 색은 쪽에서 나오지만 쪽보다 더 푸르다”는 “청출어람”의 의미이다. 여기에서 “쪽” 즉 “람”은 바로 람평을 가리키는것이다. 다시 말하면 “청(青—강청)은 비록 람평(蓝)에서 나왔지만 람평때보다 더욱 뛰여난 능력을 발휘하겠다”는 의미이다. 둘째, 강청(江青)이란 말은 당나라시인 전기의 시 “성시상령고슬곡이 끝나도 상수의 녀신은 보이지 않고 강가의 산봉우리만 푸르구나”에서 나왔다.
강청은 연안에 도착한후 곧장 심사를 받았다. 2개월간의 심사를 거친후 강청은 황경의 도움으로 다시 당적을 회복하고 1937년 11월에 중국공산당 중앙당교에 입학하여 6개월간 교육을 받았다. 1938년 7월 7일에 “7.7” 첫돐 기념행사가 연안에서 열렸다. 그날 오전에는 모택동의 보고가 있었고 오후에는 문화행사가 있었는데 이 문화행사에서 강청은 경극 《타어살가》의 주연을 맡아 관중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공연을 끝까지 관람한 모택동은 배우들을 격려하기 위해 분장실로 들어가서 강청과 악수를 하고 담소를 나누었다. 이로써 강청과 모택동의 력사적인 만남이 이루어진것이다.
강청이 연안에 들어갔을 때 모택동의 세번째 부인 하자진(贺子珍)은 서안에 있었다. 해외의 많은 사람들은 강청이 모택동의 집에 발을 들여놓고 하자진과 크게 다투었기때문에 하자진이 서안으로 떠났다고 주장하고있지만 하자진이 서안으로 떠난 일은 강청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강청은 평생동안 하자진을 한번도 만난적이 없었기때문이다.
당시에 강청은 다른 사람에 비해 용모가 출중한 편이였으며 연기도 뛰여났다. 지금은 그녀를 삼류배우라 평가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 당시 상황에서 그녀는 분명 연안과 섬북지역의 인기배우였다. 그녀는 연기뿐만아니라 노래도 잘하였다. 모택동은 그녀가 공연한 《타어살가》를 좋아하였다. 그녀는 글씨와 문장에도 뛰여났고 특히 해서를 잘 썼다. 말타기와 트럼프를 좋아하고 뜨개질과 화장을 잘 하였으나 사격은 좋아하지 않았다. 1938년 4월 10일에 로신예술대학이 연안에 창설된후 강청은 그 대학의 연극과 지도원을 맡았다.
1938년 8월에 강청은 군위원회 사무실 비서로 발령받아 모택동과 함께 일할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였다. 그때부터 모택동과의 관계가 례사롭지 않은 사이로 발전하였다. 강청은 모택동을 숭배하고 사랑했다. 사업이 바빴지만 정력이 충만했던 모택동은 청춘의 활력이 넘치는 아름다운 강청의 격정에 빠져버리고말았다. 모택동과 강청의 련애설이 퍼져나가자 그것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중 가장 격렬하게 반대한 사람은 장문천(张闻天)이였다. 그는 하자진이 우수한 공산당원으로 빛나는 투쟁의 력사를 가지고있고 험난한 장정을 겪으면서 여러차례 부상을 입었기때문에 당연히 그녀를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모택동의 결혼이 개인의 사생활에 관한 문제이므로 누구도 간섭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에서는 모택동의 결혼문제를 토론에 붙였는데 다수가 반대하였다. 그러자 모택동은 강청과의 혼인을 동의하지 않으면 주석직에서 사직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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