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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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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4)
2014년 06월 01일 10시 16분  조회:7262  추천:0  작성자: 넉두리

강청이 태여나서 자살하기까지 (4)



 
 
그해 8월에 중앙문화대혁명소조 조장 진백달이 병으로 휴직하는 동안 강청은 제1부조장 겸 대리조장을 맡아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후 중앙문화대혁명소조는 조직과 권한이 강대해져 중공중앙서기처와 중공중앙정치국을 압도하였다. 이로써 강청의 권한은 더욱 막강해져 “중앙수뇌”로서 사실상 모택동, 림표, 주은래, 주덕의 다음 가는 권력을 휘두르게 되였다. 1966년 11월 28일에 강청은 인민대회당에서 개최된 수도 문화계의 무산계급문화대혁명대회에서 “문예혁명의 기수”로 등극함과 동시에 중국인민해방군 문화사업고문을 맡았다. 1969년 4월 28일에 거행된 중국공산당 9기 1중전회에서 강청은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으로 들어가 공식적으로 상무위원 다음의 자리에 오르게 되였다. 1971년 9월 13일에 모택동의 후계자로 지목되였던 부주석 림표가 반란사건으로 사망되고 1972년 1월에 강생이 병으로 물러난후 강청은 지위가 3~4위로 올랐다. 강청의 권력이 급부상됨에 따라 장춘교와 요문원의 위치도 강청의 다음에 오르게 되였다. 림표사건이후 건강상태가 점점 악화된 모택동은 79세의 나이를 이기지 못하고 1972년 1월에 심장병으로 드러누웠고 4월에는 또 주은래가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는 모택동과 주은래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고하는것이기도 하였다. 모택동은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문제에 부딪히게 되였다. 원래 후계자로 지목되였던 림표가 타도된후 그의 뒤를 이을 마땅한 인물이 없었기때문이였다. 강청은 내심 자기가 후계자자리에 오를수 있다는 기대를 하였지만 모택동은 그녀를 안중에 두지도 않았었다. 1973년 3월에 강청은 서렬에서 한참 뒤로 밀려나고 모택동의 총애를 등에 업은 왕홍문이 강력한 후계자로 부상되였다. 강청은 그러한 왕홍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장춘교, 요문원과 함께 일종의 정치사조직인 “4인방”을 결성하여 정치적주도권을 잡아나갔다.
1974년 1월에 강청 등은 모택동의 승인을 받고 제2차 문화대혁명이라 할수 있는 “비림비공(림표와 공구를 비판하는)”운동을 일으켰다. 강청 등은 이 운동을 통하여 공자의 극기복례는 노예제도를 복귀시키려는것이고 림표의 “반혁명수정주의 로선”역시 극기복례를 통하여 자본주의를 복귀시키려는것이라고 공격하였다. 표면적으로는 림표와 공자를 비판하였지만 그 리면에는 강청의 최대 정치적 걸림돌인 주은래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가 숨어있었던것이다. 1974년 6월에 암진단을 받았던 주은래의 병세가 위중해져 병원에 입원하였다. 모택동과 주은래의 운명이 눈앞에 다가와있다는것을 감지한 강청은 그들의 사후에 정권을 장악할 새 내각을 구상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준비를 하였다. 주석에 강청, 국무원총리에 장춘교, 인민대표대회 위원장에 요문원…
그러나 모택동이 이미 그러한 사실을 간파하고있었던데다가 1973년에 국무원 부총리로 복권된 등소평이 주은래의 권력을 도맡아 행사함으로써 강청의 구상은 큰 난관에 부딪히게 되였다. 1974년 7월에 모택동은 중앙정치국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강청과 4인방을 “상해파”, “4인소종파”라고 지칭하면서 그들의 정치적행동에 대하여 엄중히 경고하였다. 이로써 강청의 정치적무대는 많이 좁아지게 되였다. 1974년 10월에 거행된 중앙정치국회의에서 강청은 자신의 지위를 만회하기 위하여 주은래와 등소평을 공격하였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1974년 12월에 모택동은 왕홍문을 불러 “4인방으로 활동하지 말라! 네사람이 함께 종파를 무어 일하는것은 좋지 않다”고 경고하였다. 그리고 1975년 1월에 발표한 인사문제에서 주은래와 등소평체제를 강화하고 왕홍문을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명단에서 제외했다. 이로써 왕홍문을 전면에 내세우고 공작을 준비하려했던 강청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말았다.
1975년 4월에 강청은 북경대학과 청화대학에서 강연하면서 “현재 당의 최대 위험은 교조주의가 아니라 경험주의다”고 비판하였다. 그녀가 말한 “경험주의”는 바로 경험이 풍부한 주은래와 주덕, 등소평 등의 로간부들을 지칭한것이다. 그리고 장춘교와 요문원을 책동하여 《인민일보》,《광명일보》,《문회보》 등에 경험주의를 비판하는 문장을 게재하게 했다. 이에 모택동은 “경험주의와 교조주의에 대한 반대를 포함하여 수정주의를 반대한다고 주장했어야 한다. 량자는 모두 맑스-레닌주의를 수정한것으로서 다른 한쪽은 놔두고 한쪽만 주장해서는 안된다. 각지의 상황이 다른것은 모두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수준이 낮아서 그런것이다. 어쨌든 교육을 시켜야 한다. 다년간 맑스-레닌주의를 제고시키는것이 좋다”라는 지시를 내리고 강청 등을 겨냥하여 “우리 당에서 맑스-레닌주의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떤 사람은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고 사실은 잘 모르면서 걸핏하면 남을 훈계하려 한다”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는 정치국에서 이 문제를 론의하라고 지시하였다.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 중공중앙정치국에서는 4월 27일에 회의를 소집하여 강청의 문제에 대한 론의를 하였으며 그 론의에서 어쩔수없이 강청은 자아비판을 해야만 했다. 이로써 강청은 문혁이후 최대의 정치적위기를 만나게 되였다.
1975년 9월에 모택동의 병세가 더욱 위중해져 말을 잘 못할 정도였으며 주은래도 4차수술을 받았다. 그 시기 모택동은 조카 모원신을 곁에 두고 자기와 중앙정치국사이의 특수련락원으로 삼았다. 모택동의 지시가 모두 모원신을 통해서 전달되게 된것이였다. 그러나 모원신은 강청을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그녀와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 이 기회를 리용하여 강청은 모원신과 결탁하고 잠간동안 “최고지시”를 반포하는 대권을 장악하였다. 모원신은 모택동에게 등소평이 문화대혁명의 성과에 대해서 거의 언급하지 않고 류소기의 수정주의에 대해서도 비판을 하지 않는다고 건의하였다.
그후 정국은 등소평 등을 우경주의로 몰아갔다. 이로써 등소평의 지위는 다시 위축되였다. 1976년 1월 8일에 중국공산당 중앙 부주석, 국무원총리, 전국정협 주석 주은래가 암으로 사망되였고 이어 주덕도 세상을 떠났다. 주은래와 주덕의 죽음은 강청에게 무엇보다도 기쁜 소식이였다. 최대의 정적이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기때문이였다. 
주은래가 세상을 떠난후 국무원총리의 자리는 비여있게 되였다. 리치대로 한다면 당연히 제1부주석인 등소평이 총리직을 맡아해야 했지만 1976년 2월 2일에 하달된 “중공중앙통지”에서는 뜻밖에도 화국봉을 총리로 임명하였다. 이는 등소평에 대한 모택동의 신뢰가 떨어지고 대신 화국봉에게 후임을 맡긴것을 의미한다. 1976년 2월 25일에 중공중앙은 각 성, 시, 자치구와 각 군부책임자회의를 개최하여 등소평에 대한 비판을 공개화 했다. 그 시기 강청 등 4인방은 모든 언론을 총동원하여 등소평과 수정주의비판에 열을 올렸다. 이로부터 화국봉이 중공중앙의 일상업무를 주관하게 되였으며 이 기회를 리용하여 강청은 다시 전면에 나설수 있었다. 1976년 3월 2일에 강청은 12개 성, 구 회의를 소집하여 등소평을 신랄하게 비판한 다음 마치 녀황제가 된듯한 어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무측천이라고 류언비어를 퍼뜨립니다. 나는 계급문제에 있어서는 그녀를 릉가하지만 능력면에서는 그녀에 미치지 못합니다. 림표에게 편지를 써서 나를 무측천이라 말한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영광스러움에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무측천은 녀자로서 봉건사회의 황제였습니다. 동지 여러분! 평범하지 않습니다. 정말 평범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남편도 병이 아주 심하였습니다. 그녀는 남편을 도와 국사를 처리했으며 그러면서 재능을 키워나갔던것입니다. 무측천은 비범한 녀걸인데 그들은 비렬한 방법으로 무측천을 비방하고 나를 비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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