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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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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최대 한간 왕정위
2014년 06월 09일 15시 40분  조회:7461  추천:0  작성자: 넉두리

중국 최대 한간 왕정위

 
(번역)





 
왕정위(汪精卫)의 본명은 왕조명(汪兆铭)이고 자는 계신(季新), 호는 정위이다. 1883년 5월 4일에 광동성 삼수현서(三水县署—지금의 광동성 불산시 삼수구 하구진)에서 출생한 왕정위는 1904년 9월에 동경정법대학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서방의 민주사상을 접촉했다. 그때로부터 그의 가슴에는 봉건전제제도를 뒤엎고 서방식민주공화국을 건립하겠다는 신념이 있게 되였다. 1905년 7월에 손중산을 만나서 동맹회에 가입했고 동맹회장정을 작성하는데 참여했으며 한달후 동맹회 평의부 평의장으로 임명되였다. 그후 “정위”라는 필명으로 《민보》에 《민족의 국민》, 《혁명의 추세를 론함》 등 일련의 문장을 발표하여 3민주의 사상을 선전했으며 강유위, 량계초 등 개량파의 황제보호론을 호되게 꾸짖어 손중산의 호평을 받았다.
1907초에 손중산을 따라 남양으로 들어간 왕정위는 동맹회분회를 세우고 남양혁명당보인 《중흥일보》의 주필을 맡아 보황당의 《남양총회보》와 론전을 벌렸다. 1908년에 먄마에 동맹회 앙광분회를 세웠는데 그해 3월에 왕정위는 말레이시아의 삐낭시(槟城)에서 화교거부 진경기의 딸 진벽군을 알게 되였다. 그후 싱가포르에서 동맹회 남양지부를 세우는 등 사업을 하면서 혁명경비를 마련했다. 1909년 10월에 남양에서 일본으로 들어가 《민보》의 주필을 담당하면서 비밀리에 《민보》 제25기와 제26기를 발행했다. 1910년 1월에 황복생 등과 함께 북경에 돌아와 수진사진관을 꾸리고  암암리에 섭정왕 재풍암살을 계획했다가 일이 탄로난후 경찰에 체포되여 종신감금형에 언도되였다. 처음에 그는 죽음으로 나라에 보답하려고 결심했으나 숙친왕 선기의 구슬림에 넘어가 뜻을 굽히고말았다.
왕정위는 1912년초에 상해에서 진벽군과 결혼식을 올렸다. 왕정위와 진벽군은 6남매를 보았는데 다섯째가 요절한외에 나머지는 모두 장수했다.
1925년 3월에 손중산이 사망되고 그해 6월 26일에 왕정위의 주최하에 국민당중앙정치회의가 열렸다. 회의에서는 국민당총리의 칭호를 영원히 손중산에게 남겨주고 이후 국민당은 집체령도의 위원제를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회의에서는 또 손중산생전의 대원수부행정기구를 철소하고 국민당의 최고행정기관을 국민정부로 고치기로 결정했다. 7월 1일에 국민정부가 정식으로 성립되였는데 왕정위가 국민정부 상무위원회 주석 겸 군사위원회 주석, 선전부 부장 등 직에 임명되였다. 그는 또 1926년 1월에 국민당 2차 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회 위원으로 당선되였다. 그러나 “중산함사건(‘3.20사건’이라고도 하는데 1926년 3월에 장개석이 국공합작을 파괴하고 혁명의 령도권을 쟁취하려고 의도적으로 중국공산당을 배척하고 타격한 정치사건)”이 발생된후 핍박에 의해 사직하고 프랑스로 갔다. 1927년 2월에 프랑스를 떠나 구쏘련을 통해 귀국했다. 구쏘련에 들렸을 때 쓰딸린이 이 국민당좌파령수를 접견했다. 귀국후 무한국민정부 주석직을 맡은 그는 혁명을 배반한 장개석과 권력싸움을 벌렸다.
1927년 4월 5일에 왕정위와 진독수는 련명으로 “국공량당령수 왕조명, 진독수의 련합선언”을 발표했다. 4월 18일에 남경의 장개석국민정부가 성립되였다. 장개석은 국민당중의 원로 반공분자 호한민을 청하여 국민정부 주석을 맡게 하고 자신은 중앙군위주석과 국민혁명군 총사령을 맡았다. 이렇게 국민당은 공개적으로 왕정위의 “무한정부”와 장개석의 “남경정부”로 분렬되였다. 왕정위는 7월 15일에 무한에서 공산당을 등지고 장개석과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그후에도 줄곧 장개석과 암투를 벌렸다. 왕정위는 12월 16일에 정계에서 은퇴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진벽군과 함께 프랑스로 갔다. 그는 1929년에 귀국한후 “중국국민당 제2기 중앙집행감독위원련석회의”의 명의로 명령을 발부하여 각지의 “호당구국군(护党救国军)”에 위임장과 부대번호를 내주었다.
1928년 11월에 진공박(陈公博) 등이 상해에서 개조파를 성립했는데 왕정위가 수령으로 선거되였다.
1930년에 왕정위는 풍옥상(冯玉祥), 염석산(阎锡山), 리종인(李宗仁)과 련합하여 장개석을 반대하려다가 실패한후 향항으로 도망쳤다. 1931년에 왕정위는 장개석을 반대하는 각파의 세력을 모아가지고 광동에서 따로 국민정부를 세웠다. 9.18사변후 전국인민들이 각 당파가 단합하여 일치하게 항일할것을 요구하자 왕정위는 다시 장개석과 합작했다.
1935년 11월 1일에 국민당은 제5기전국대표대회를 열었는데 4기6중전회가 개막되였다. 개막식이 결속된후 중앙위원들이 대문앞에 모여서 사진을 찍을 준비를 했다. 왕정위는 득의만면하여 배를 쑥 내밀고 맨 앞줄의 걸상에 앉았다. 그의 옆의 장개석자리는 비여있었다. 중앙위원회 주석인 장개석은 무슨 영문인지 그때까지 회의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진사가 사진을 찍을 준비를 하고있는데 갑자기 사진기를 둘러싸고있던 사람들속에서 한명의 기자가 불쑥 달려나오면서 총을 꺼내들고 왕정위를 향해 련속 세방을 쏘아댔다. 총소리와 함께 왕정위가 쓰러지자 대경실색한 사람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왕정위의 경호원 양개평은 자객을 향해 련발사격을 해댔다. 그때에야 도착한 장개석은 왕정위암살을 지시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중상을 입은 왕정위는 요행 목숨을 건졌다.
1936년에 서안사변이 발생된후 왕정위는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장개석을 대신해 정권을 장악할 준비를 했다. 장개석이 남경으로 돌아온후 왕정위는 국민당정치위원회 주석을 담임했다. 1937년 7월에 항일전쟁이 폭발되자 왕정위는 국방최고회의 부주석, 국민당 부총재, 국민당참정회의장으로 선발되였는데 당, 정 권력이 모두 장개석의 아래였다.
1938년 12월에 웥남의 하노이로 도망쳤다가 귀국하여 남경으로 돌아온 왕정위는 “염전(艳电—왕정위가 1938년 12월 29일에 림백생을 시켜 장개석에게 보낸 전보식성명으로서 일본에 대한 타협정책을 지지한다고 표시한 친일성명)”성명을 발표했다. 1938년까지 일본에 투항한 괴로군은 7만 8000명이였지만 왕정위가 일본에 투항한후 괴로군수는 14만 5000명으로 증가되였다. 그후 일본의 주구로 된 괴로군수는 놀라울 정도로 늘어나 100만명을 넘었다.
후에 왕정위는 일본측대표와 비밀리에 “중광당협의(重光堂协议)”를 체결하고 공개적으로 일본과 합작했다. 왕정위는 1940년 3월 20일에 남경에서 괴뢰민국정부를 성립했다. 그해 11월 30일에 남경에서 “화일기본조약(华日基本条约)”체결의식을 거행했는데 왕정위는 행정원장의 신분으로 출석하여 조약에 서명하고 자체로 주석직을 맡았다. 일본에 충성한 매국역적 왕정위는 1944년 11월 10일에 일본의 나고야시에서 병으로 악명높은 일생을 마감했다.
왕정위의 안해 진벽군도 중국의 최대 녀한간이였다. 진벽군은 1891년 11월 5일에 말레이시아의 삐낭시(槟城)에서 태여났는데 아버지 진경기는 남양거부였다. 일본이 투항하자 그녀는 국민당감옥에 갇혔다.
1949년 4월에 소주가 해방된후 진벽군은 사자구감옥에서 공안국 간수소로 이송되였다. 7월 1일에 상해가 해방된후 진벽군은 또 소주감옥에서 상해제람교감옥으로 압송되였다. 처음에 진벽군은 중국공산당과 인민정부에 매우 깊은 저촉정서를 가지고있어 자신이 한간이란것을 승인하지 않았다. 진벽군은 국민당감옥에 있을 때에는 조건이 악렬하여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공산당감옥에서 인도주의정신으로 대우를 잘해주자 너무 뜻밖이여서 “내가 반평생 공산당을 반대했는데 공산당이 이렇게 날 잘 대해주다니? 하하하. 이건 다 내 신분이 특수하기때문이지”하고 득의양양하여 어깨를 으쓱했다.
새중국이 성립된후 국가 부주석인 송경령과 중앙인민정부 위원인 하향응이 련명으로 감옥에 갇혀있는 진벽군한테 편지를 써보냈다. 송경령과 하향응은 일찍 진벽군과 사업을 함께 해온 동료였고 손중산의 령도아래서 함께 혁명사업을 해온 동지였으며 사적으로도 감정이 깊었다. 송경령과 하향응은 함께 모택동과 주은래를 만나 “진벽군문제는 왕정위와 다름니다. 나라를 팔아먹고 적에게 투항하는데 지지하고 참여했지만 결책자는 아닙니다. 적당한 시기에 진벽군의 태도를 보아 석방해주기 바랍니다”라고 제기했다. 모택동과 주은래는 송경령과 하향응의 의견을 존중하여 “진벽군이 죄를 승인하는 간단한 성명만 발표하면 중앙인민정부는 명령을 내려 진벽군을 석방해주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진벽군은 송경령과 하향응의 호의를 거절하면서 말했다.
“내가 일본과 화친한것은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였는데 무슨 죄가 있겠는가? 나는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후회하지도 않는다. 나는 달갑게 감옥에서 일생을 마치겠다.”
진벽군은 또 어이없게도 “나는 장개석을 반대했고 당신들 공산당도 장개석을 반대했으니 우린 동지라고 말할수 있어. 그러니 날 장개석역적처럼 대해선 안돼”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1959년 6월 17일에 진벽군은 상해제람교감옥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는데 향년 68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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