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국도(张国焘)는 자가 개음(恺荫)이고 특립(特立)이라는 이름도 가지고있다. 1897년 11월 14일에 강서성 평향시 상률현 금산향 산명촌에서 출생한 장국도는 1916년에 북경대학에서 공부하면서 여러가지 새로운 사조의 영향을 받았다. 힘없고 가난하며 내우외환에 시달리고있는 당시의 시국에 대해 불만을 품고있던 장국도는 반일애국의 청원시위활동에 참가하였으며 학생구국회에서 성립한 《민국》잡지사에서 적극적으로 애국활동에 종사했다.
1919년 5월 4일에 폭발된 5.4운동에서 장국도는 등중하, 황일규, 고군우 등과 함께 핵심적인 지도작용을 일으켰다. 모든 애국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장국도는 지대한 열정으로 이 운동에 뛰여들었다.
1920년 4월에 장국도는 리대소의 건의로 맑스주의저작과 사회주의를 소개한 서적을 계통적으로 학습했다. 7월초에 북경의 국세가 긴장해지자 리대소는 장국도에게 상해로 가서 진독수와 함께 앞으로의 계획을 세워보라고 했다.
진독수를 만나보고 북경에 돌아온 장국도는 리대소에게 진독수가 상해에서 공산당창건준비에 착수하고있는 정황을 회보했다. 리대소는 당창건조건이 초보적으로 구비되였다고 인정하면서 찬동을 표시했다. 일련의 준비를 거쳐 10월에 리대소, 장국도, 장신부 세 사람은 북경대학 도서관 주임실에서 회의를 열고 정식으로 북경공산당조직을 성립하고 후에 여러 사람을 가입시켰다. 11월말에 북경공산당조직에서는 회의를 열고 중국공산당북경지부를 명명하기로 결정하고 리대소를 서기로 추천했다. 그리고 장국도에게 조직사업을 책임지게 하고 라장룡이 선전사업을 책임지도록 결정했다.
리대소의 지도하에 장국도, 등중하, 라장룡, 류인정 등은 사회주의청년단을 조직했다. 북경공산당조직이 성립되여서부터 중국공산당 1차대표대회가 열리기까지 장국도는 맑스주의리론학습에서나 로동자들을 조직하는 사업에서나 모두 매우 큰 성과를 이루었다. 이는 장국도의 정치생애에서 매우 중요한 한페지로 되였다.
1921년 7월에 중국공산당 제1차대표대회가 상해에서 열렸다. 장국도는 북경공산당조직의 대표신분으로 회의에 참석했는데 추천에 의해 회의를 주관했다. 그번 회의에서 장국도는 중앙국(中央局) 성원으로 선거되였으며 조직사업을 책임졌다. 회의후 중국로동조합서기부 주임 겸 《로동주간》 주필로 임명된 장국도는 로동운동을 지도했다.
중국공산당 제3차대표대회에서 장국도는 국공합작을 반대했기에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지 못했다. 의기소침하여 북경으로 돌아온 장국도는 양자렬과 결혼했다. 북경에서 반역자의 고발로 장국도와 양자렬은 함께 체포되였다. 적들의 고문에 견디지 못한 장국도는 죽음이 두려워 리대소, 진독수, 담평산, 장곤제 및 북경의 공산당원들을 고발하여 공산당을 배반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력사는 당시에 누구도 몰랐기에 장국도는 조직을 속이고 적과 투쟁한 영웅으로 되였다.
중국공산당 제4차대표대회에서 중앙집행위원으로 선거된 장국도는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사업했다. 국민당우파가 공산당을 배척하고 타격하며 국공합작을 파괴하는 음모활동에 대해 장국도는 타협하고 양보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국민당 제2차대표대회, 중산함사건, 당무사건정리 이 3대사건에 대해 장국도는 모두 국민당에 양보했다.
1926년말에 장국도는 중공호북구당위 서기직을 담임했다. 대혁명이 실패한후 장국도는 림시중앙상무위원회 위원직을 맡았는데 남창으로 가서 남창봉기를 제지하려고 했다. 그의 의견이 부결된후 그는 봉기에 동의했을뿐만아니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봉기의 전과정에 참가했다.
1928년에 장국도는 구쏘련으로 건너가 중국공산당 6차대표대회에 참가했으며 제6기 1중전회에서 중앙정치국위원으로 당선되였다. 회의후 그는 중국공산당 공산국제대표로 모스크바에 남았다.
1931년 4월에 중공중앙에서 장국도, 진창호, 심택민을 악예환쏘베트구역에 파견했다. 장국도는 악예환쏘베트구역 중앙국 서기 겸 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임명되였다. 장국도는 권력을 장악한지 얼마 안되여 악예환특위와 홍군에 대해 전면적으로 개조했다. 그는 “볼세비크의 개조”, “숙반강화” 등의 명의를 내걸고 악예환쏘베트구역의 반대파숙청을 확대하여 수많은 혁명동지들을 죽음으로 몰아갔다. 1935년에 홍군 제1방면군과 제4방면군이 합류하자 8만여명의 군대를 장악한 장국도는 1만여명의 군대밖에 장악하지 못한 모택동과 맞서 따로 중앙을 세우고 당과 홍군을 분렬하려고 시도했다.
섬북에 도달한후 1937년 3월에 연안에서 열린 정치국확대회의에서 당중앙에서 장국도의 착오를 비판하고 “장국도동지의 착오에 대한 결정”을 통과했다. “결정”은 장국도가 많은 중대한 정치문제에서 원칙적인 착오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소수가 다수에 복종하는 조직원칙에 따라 장국도는 “나의 착오”라는 서면반성문을 썼다. 그제야 장국도는 섬감녕변구정부 대리주석으로 임명되였다.
1938년 4월 4일은 국공쌍방에서 공동으로 황제릉에 제사를 지내는 날이였다. 섬감녕변구정부 대리주석의 신분으로 이 활동에 참가한 장국도는 황제릉앞에서 국민당 서안안무공서주임 장정문을 만났다. 제사가 끝난후 장국도는 호송하는 사람들에게 “내 서안에 볼일이 있으니 먼저 가시오”하고 경호원 한사람만 데리고 국민당방면의 차에 앉아 거들먹거리며 사라졌다.
무한에 돌아온후 주은래 등이 여러번이나 권고했으나 장국도는 이미 장개석에게 투항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장국도는 1938년 9월에 중경에 도착했다. 대립은 장국도에게 국민당특종정치문제연구실을 책임지게 했다. 군통특무조직에 가입한 장국도는 전문 공산당을 대처하는 특공일군들을 훈련시켰다. 공을 세우기 위해 장국도는 대립에게 “팔로군129사를 투항시키겠다”고 제기했다. 그는 승산이 있다는듯 “129사는 주요하게 홍군4방면군을 개편한 부대인데 홍군4방면군은 내가 거느리던 대오입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것은 장국도의 오산이였다. 장국도가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은 대립은 화가 나서 부하들에게 당장 장국도를 불러오라고 명령했다. 얼마후 부하들이 장국도를 데려오자 대립은 장국도를 손가락질하며 한바탕 욕설을 퍼부은후 즉시 장국도의 일체직무를 철소하고 전용차를 포함한 일체 생활대우를 취소한다고 선포했다. 리용가치를 잃은 장국도는 이렇게 국민당에게 버림받았다.
1946년에 관계를 통해 사후구제총서 강서분서 서장으로 된 장국도는 “금의환향”하여 부귀영화를 누리는듯한 느낌이 들어 기뻐했다. 그러나 장국도가 일을 맡은후 그와 원쑤를 맺었던 왕릉기가 곳곳에서 그와 맞섰다. 울분을 억누르며 2개월동안 참고있던 장국도는 더는 해먹을수 없다고 생각되여 사직하고 강서성을 떠나 상해로 피해갔다.
1949년에 장가왕조의 대세가 기울어지자 장국도는 황망히 가족을 데리고 대만으로 도망쳤다. 대북에 세를 맡은 그는 계속 국민당을 위해 일하려고 생각했지만 국민당은 그에게 “사업”을 배치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그의 생활형편에 대해서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국민당제6기 중앙위원”이란것을 언제나 마음속에 잊지 않고있었으나 국민당은 그를 잊고있었다. 얼마후 그가 거주하고있는 주택은 행정원의 비준을 맡아 동남행정장관공서에 강제로 징수되였다. 그는 노기충천하여 행정원을 찾아가서 도리를 따졌지만 아무런 결과도 보지 못했다. 집을 빼앗긴 장국도는 다시 가족을 데리고 당시 영국식민지였던 향항으로 이주했다.
1956년에 중국공산당 제8차 대표대회가 열린후 국내형세가 많이 느슨해진것을 본 장국도는 귀국하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여러가지 경로를 통해 중공중앙에 자신의 요구를 전달했다. 얼마후 중공중앙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장국도한테 보냈다. 그 사람은 장국도한테 “귀국하는건 문제없다. 하지만 전제조건은 착오를 승인하는것이다”라는 중공중앙의 뜻을 전달했다. 장국도는 이런 조건을 예상했지만 정작 듣고나니 망설이였다. 그는 재삼 생각해보다가 결국 귀국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1961년에 장국도는 미국 캔자스주대학의 청탁을 받고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캔자스주대학에서 매달 2000원(향항돈)씩 주는 돈으로 생활비를 해결했다. 그후 10여년동안 장국도는 판권을 팔아 생활을 유지했다.
1966년에 향항을 떠나 카나다로 간 장국도는 카나다에서 류학중인 큰 아들 장해위한테 몸을 의탁했다. 1977년 12월에 갓 80돐 생일을 쇤 장국도는 갑자기 중풍에 걸려 관청에서 꾸린 로인무료병원에 입원했다.
1979년 12월 3일의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겨울밤이였다. 카나다의 토론토에 있는 한 로인병원의 병상에 누워있던 장국도는 엄한의 침습에 시달리다가 비참하게 이국타향에서 객사했다. 그의 옆에는 간호원도 없었고 친인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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