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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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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색한 대립이 제일 총애한 군통미녀
2014년 07월 06일 09시 45분  조회:7451  추천:2  작성자: 넉두리

호색한 대립이 제일 총애한 군통미녀


 
(번역)




 
 
대립(戴笠)은 유명한 호색한이였는데 그가 일생중에서 범한 녀인은 부지기수였다. 녀색을 즐기기로 소문난 그의 친구 당생명마저 “대립은 괴짜야. 그는 한시도 녀자를 떠나서 살지 못한단 말이야”하고 개탄했다.
군통(军统)에는 미녀가 모자라지 않았기에 군통의 대두목 대립은 권세를 미끼로 수많은 꽃같은 미녀를 마음껏 품에 안을수 있었다. 군통은 국민정부군사위원회조사통계국(国民政府军事委员会调查统计局)의 간칭이다.
 
 
군통의 수많은 미녀중에 대립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녀인은 “화매(华妹)”라고 불리운 진화(陈华)였다. 진화는 군통에서 “꽃중의 꽃”이라고 불리운 미녀였다. 그녀는 남달리 아름다운 미모를 가졌을뿐만아니라 머리까지 총명하여 대립을 도와 적지 않은 큰일을 성사시켰다. 어느 한번 대립은 진화를 안고 꿀맛을 본후 감개무량하여 “진화, 나의 천하에서 절반은 네가 날 대신해서 얻어온거야”하고 말했다.
집안이 가난하고 출신이 비천했던 진화는 생활의 핍박에 의해 13살이 되던 때에 어린 기생으로 되였다. 그러다가 16살에 손중산의 휘하부대에 참군했다가 상해경비국 사령 양호의 눈에 들어 그의 정부로 되였다.
진화에게 있어서 양호라는 큰 나무는 여간만 든든한 뒤심이 아니였다. 양호는 일찌기 동맹회에 가입했다. 원세개가 황제로 칭하던 1915년에 손중산은 군대를 동원하여 원세개를 쳤다. 양호는 강소군 총사령, 해군륙전대 사령 겸 대리해군총사령에 임명되였다. 1922년에 광주비상대통령부 근위대장, 광주비상대통령부 참군(参军)에 임명되였고 1924년에 북벌토적군 제2군 제1사 사장을 력임했다. 손중산이 사망된후 양호는 장개석과 의형제를 맺고 1927년에 상해경비사령으로 되였다. 그해 4월 12일에 양호는 진군과 함께 백숭희(白崇禧)의 지휘하에 장개석이 상해에서 일으킨 반혁명정변을 구체적으로 집행했다. 5월 7일에 “숙당위원회” 위원으로 임명된 양호는 “숙당”기회를 리용하여 선후로 상해, 항주, 녕파 등지에서 공산당원 진연년, 선중화, 하적화, 양미산, 왕곤, 선중선, 동자흥, 탁란방, 호초금, 오자형 등을 살해했다.
1932년에 진화는 우연한 기회에 대립을 만나게 되였다. 당시 대립은 군통의 전신인 복흥사(复兴社)특무처를 세우고있었는데 각 방면의 인재가 급히 수요되였다. 대립의 전도를 보면 양호를 릉가할것이라고 여긴 진화는 대립의 수하로 들어가 사방에 소문난 복흥사의 미녀로 되였다. 진화는 미모가 뛰여났을뿐만아니라 사업능력도 매우 강했다. 그녀는 대립을 위해 수많은 인재를 발굴해냈다. 그녀는 교묘하게 류과청, 리복양 등 9명을 설복하여 대립을 위해 일하게 했다. 이 9명은 그후 군통의 철혈자객으로 되였다. 특히 류과청은 군통 상해구역 행동조장으로 임명된후 왕정위괴뢰정부의 중요한 한간두목을 암살하는데 큰공을 세웠다. 이때문에 대립은 군통미녀 진화를 새로운 안목으로 보게 되였다.
대립은 뛰여난 미모에 총명한 두뇌까지 가진 나젊은 미녀를 더욱 좋아하게 되였다. 대립은 그녀를 품에 안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했다. 하지만 대립이 어떻게 사랑고백을 하든 진화는 딱 잘라 거절했다. 이때문에 대립은 몹시 락심하면서 고민했다. 그후 진화는 대립이 어릴 때 매우 고생스럽게 살았다는것을 알게 되였고 또 대립이 이름을 고친 사실에 감동을 받았다. 가난했던 대립은 1926년에 황포군관학교에 신청할 때 가지고온 돈이 다 떨어졌다. 그날에 마침 큰비가 내렸는데 돈이 없어 려관비까지도 빚지게 되였다. 그때 어떤 사람이 그에게 삿갓(斗笠) 하나를 주면서 빚진 려관비까지 물어주었다. 그 사람이 바로 후에 군통고위층으로 들어간 서량이였다. 이 우정을 기념하기 위해 대립은 자신의 이름을 삿갓을 쓰다는 뜻으로 대립(戴笠)이라고 고쳤던것이다.
비스한 경력을 겪은 진화는 대립에게 호감을 가지면서 그의 품에 안겨버렸다. 그때로부터 진화는 대립의 일생에서 유일한 이성지기로 되였다. 대립은 왕정위, 손과 등 중요한 인물을 감시하는 임무를 그녀에게 맡겼다. 진화는 자신의 뛰여난 지혜와 비범한 능력으로 어떤 임무든지 훌륭하게 완성하여 대립의 총애를 받았다.
바로 당생명이 말한것처럼 대립은 괴상한 사람이였다. 국민당특무 두목인 대립은 일생에서 영화부귀를 누릴대로 다 누리였다. 그는 부동산과 자가용차는 많았지만 현금과 금은보석은 별로 없었다. 때문에 대립은 녀인을 돈으로 유혹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는 그저 녀인을 데리고노는것으로 그쳤다.
항일전쟁시기에 진화는 상해간첩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대립의 요청을 받고 중경 증가암지구에 있는 대립의 거처로 날아간 진화는 기쁨에 겨워 대립의 품에 안겼다. 대립은 진화의 공로를 축하하기 위해 술상을 차렸는데 4가지 료리에 국 한사발뿐이였다. 그것을 본 진화는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대립은 진화가 입은 담비외투와 그녀가 신은 목긴 구두가 모두 수입품인것을 보고 선물용으로 쓰겠으니 남겨놓으라고 했다. 이렇게 되여 진화는 이불짐만 싸가지고 향항에 있는 집으로 날아갔다. 당시는 항일전쟁시기여서 중경에 물자가 결핍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정부의 물건마저 놓아주지 않았으니 여기서 거리낌없이 재물을 긁어내는 대립의 수단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대립은 장개석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서 점차 장개석이 자신에 대해 경계를 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토끼를 잡고나면 사냥개는 삶아먹힌다”는 말이 생각나서 개탄하면서 진화를 보고 자신의 앞날이 근심된다고 말했다. 1946년 3월초에 대립은 북평으로 가기전에 진화의 거처로 찾아가 뜨거운 밤을 보냈다. 그것은 진화와 대립의 마지막 만남이였고 마지막 정사였다. 격정의 순간이 지난후 대립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는데 진화는 그의 마음이 몹시 무거운것을 알수 있었다. 한참후 대립은 정중한 어조로 진화를 보고 말했다.
“진화, 내가 솔직하게 알려줄테니 잘 들어. 령감(장개석을 가리킴)이 날 버리려고 해. 난 곧 죽을거야.”
진화는 그때 대립이 죽을 마음을 품고있다고 인정했다. 그 당시 항일전쟁이 승리한후 특무조직인 군통국은 취소될 가능성이 있었다. 그때는 대립이 한창 득세할 때였는데 군통특무는 수십만이였고 미국의 지지까지 받고있었다. 대립은 먼저 경정부 부장으로 되고 다음 해군사령자리를 노리려고 했는데 이것이 장개석의 의심과 불만을 자아냈던것이다.
장개석은 의심이 많은 사람이였다. 그는 사람을 쓸 때 늘 부하의 세력이 너무 커서 통제불가능하게 되는것을 방지했다. 장개석은 일생에서 간첩조직과 군사를 가장 중시하면서도 이 부문을 주관하는 부하의 권력이 너무 커지는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대립은 확실히 야심이 있었다. 그는 스스로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정할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여겼다. 그는 호종남과 함께 장개석의 권력을 이어받을 계획을 세운적이 있었다. 그러나 장개석이 살아있는 한 장개석을 뒤엎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는 장개석에게 기대여 세력을 키워야 했던것이다.
이튿날 아침에 대립은 진화와 작별하고 북평으로 들어갔다. 대립이 떠난후 불길한 예감이 든 진화는 줄곧 안절부절못했다. 그녀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력사는 대립이 죽은 소식을 이렇게 기재했다.
“1946년 3월 17일 오후 1시 6분에 대립이 탄 비행기는 남경의 상공에 도착했다. 1시 13분에 작탄이 폭발되여 비행기가 남경시 강녕구 판교진 대산에 추락되였다. 대립을 포함하여 비행기안에 있던 13명이 전부 사망되였다.”
대립이 탄 비행기가 폭발된후 군통국의 조사일군들이 13명의 해골사진을 진화에게 보이자 그녀는 한눈에 대립을 가려냈다. 그녀는 익숙한 몇대의 금이외에 높이 들어올린 오른손이 주먹을 쥔 상태로 있는것을 보고 림종전의 대립의 모습을 상상할수 있었다. 그것은 대립이 사격후에 습관처럼 하던 동작이였다. 대립은 총을 쏜후에 멋있게 보이려고 늘 그런 동작을 했던것이다. 이런 원인으로 진화는 대립의 죽음을 자살로 인정했다.
“주인(老板—대립을 가리킴)은 먼저 비행사를 쏘아죽여 비행기가 통제를 잃게 하였어요. 그래서 비행기가 산에 부딪쳐 폭발된것이예요.”
진화는 대립과 지냈던 마지막밤을 생각하면서 대립의 자살을 더욱 확신했다.
그후 향항으로 이주한 진화는 리발관을 꾸려 생계를 유지했다. 40여년후 82세가 되였을 때 진화는 회고록을 써서 대립이 자살한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녀가 쓴 《진화녀사회고록》은 상하책으로 되였는데 1988년 1월에 대만독가출판사에서 출판했다. 얼마후 한때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던 군통의 꽃은 병으로 향항에서 지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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