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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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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의 신변에 잠복한 군통특무
2014년 07월 19일 16시 11분  조회:6409  추천:1  작성자: 넉두리

모택동의 신변에 잠복한 군통특무

 
(번역)




 
 
1913년 2월 18일에 절강성 선거현 하각향 서륙촌에서 출생한 심지악은 공산당의 신분으로 자신을 감추면서 연안의 모택동신변에 잠복해있은 군통특무였다.
1933년에 22살 되는 심지악은 상해복단대학에서 공부하면서 공산당동학들의 영향을 받아 적지 않은 공산주의서적을 읽었고 로동자운동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후 공산당을 통해 포동석탄회사에서 로동자로 있으면서 로동자운동을 지도하다가 붙잡혀 국민당정부의 감옥에 들어갔다. 
심지악은 비록 로동자운동을 동정하고 좌파청년들과 접촉했지만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대립은 한고향사람인 심지악이 총명하고 예민한것을 보고 호감을 가졌다. 대립은 심지악을 설복하여 비밀리에 국민당특무조직에 가입시키고 단선련계를 가졌다. 대립은 심지악에게 중국공산당조직에 가입하여 잠복해있으라고 지시했다.
심지악은 대립의 지시대로 로동자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였을뿐만아니라 중국공산당조직의 정보를 얻기 위해 정식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상해에서 공산당의 정보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1937년 봄에 서안사변이 결속된지 얼마안되여 국민당과 공산당이 2차합작협의를 맺었지만 국민당정부는 공산당에 대해 우려하면서 의연히 공산당을 심복지환의 대적으로 인정했다. 은페된 전선은 쌍방의 승부를 결정할수 있는 주요한 전장(战场)이였다. 대립은 장기적인 관찰을 거쳐 심지악이 성숙되고 신중하며 조심스럽고 빈틈이 없어 능히 중임을 담당할수 있다고 인정했다. 대립은 심지악에게 공산당조직의 심장인 연안에 깊이 잠복해있으면서 정보를 수집하라고 지시했다.
대립의 명령을 받은 심지악은 혁명의 성지인 연안에 있는 《항일군정대학(원 홍군대학)》에 가서 공부하겠다고 조직에 신청했다. 심지악은 상해에서 다년간 로동자운동을 지도했고 국민당감옥에 갇힌적이 있었으며 복단대학에서 맑스주의서적을 읽은적이 있었기에 공산당조직에서는 그의 신청을 곧바로 비준했다.
연안에 도착한 심지악은 항일군정대학 제2기생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심지악은 재치있고 로련하며 학습성적이 우수했기때문에 학교간부들의 호감을 샀다. 연안지도층에서는 조국의 방방곡곡에서 모여든 진보청년들속에 적지 않은 국민당특무들이 혼입했을것이라고 단정했다. 엄밀하게 판별하고 고찰하는외에 돌연습격으로 방법으로 항일군정대학 학생들속에서 특무들을 사출해냈다. 어느날에 어느 교원이 수업강의를 하다가 갑자기 손으로 학생들을 가리키며 “저 보시오. 국민당이 파견한 특무놈을 좀 보시오!”하고 큰소리를 친다. 그러면 담이 작은 학생들은 몸을 떨면서 즉시 낯색이 파랗게 질린다. 그때 학생들속에 있던 사업일군들이 공포에 떨고있는 학생들을 붙잡으면 틀림없는 특무였던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황에서도 심지악은 태연자약했기에 신분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는 공산당요원들과 친하면서 중공중앙기관의 정보를 수집했다. 심지악은 성적이 우수했기때문에 졸업후 모택동의 신변에서 사업할 비서중의 하나로 선발되였다. 심지악은 신분을 감추고 깊이 잠복해있었다. 항일전쟁이 폭발된후 중공중앙에서 발부한 약간의 중요서류와 심지악이 수집한 중요정보들은 비밀리에 중경으로 전달되였다.
1933년에 대립의 설복에 의해 군통특무로 되여서부터 1941년 겨울에 중경으로 돌아가기전까지 심지악은 공산당핵심조직에 9년동안 잠복해있었다.
심지악과 함께 사업한 적이 있는 장애평은 심지악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 적이 있었다.
“심지악은 9년동안 공산당원으로 있는 기간에 7년은 모범당원이였다. 그는 개성이 주은래와 비슷했는데 내성적이고 온화하고 함축적이였다.”
1994년 2월에 심지악이 대북에서 사망되였을 때 대북 《중앙일보》에 실린 추모문장에는 “중공의 전임 국방부장 장애평은 심지악을 ‘지용이 겸비하고 나라를 사랑하고 두 주인을 섬기면서 량쪽이 모두 상하지 않게 했다’고 평가했다”는 구절이 있었다. 바로 이 “두 주인을 섬기면서 량쪽이 모두 큰 손실을 입지 않게 했다”는것은 사람들에게 무한한 추측을 불러일으켰다. 숱한 사람들이 그 비밀을 알려고 심지악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누구도 심지악의 입에서 반마디의 해석도 듣지 못했다.
중국인민해방군이 도강을 시작하던 1949년 3월에 대량의 국민당군은 주산(舟山)으로 철퇴했는데 그 시기 심지악은 보밀국의 “소절정보소(苏浙情报站)”의 소장직을 맡고있였다. 심지악은 주산에서 정보소 소장직을 맡고있는 1년기간이 자신의 정치생명에서 전환점이 될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1950년 3월에 보밀국에서는 중국공산당 대만성사업위원회 서기 채효건의 공산당간첩사건을 해명했다. 채효건은 중공화동국에서 파견한 지하당 녀당원 주심지를 고발했다.
“주심지는 대만전략방어도를 포함한 중요한 군사정보를 가지고 주산으로 달아났는데 곧 배를 타고 상해로 가려고 준비하고있습니다다.”
공산당의 변절자 채효건을 통해서 이런 정보를 장악한 대북보밀국은 주산의 정보소 소장 심지악에게 비밀전보를 보내 꼭 녀공산당원 주심지를 붙잡으라고 명령했다. 만약 주심지를 붙잡지 못하게 되면 중국인민해방군이 주심지가 전해준 정보를 리용하여 대만에 등륙할수 있다고 했다. 이 위급한 정황에서 조심스럽고 빈틈이 없는 심지악은 시간앞에서 달리는 정신으로 수색작업을 벌렸다. 그는 주산도(舟山岛)의 45만명 군민들속에서 주심지를 찾아내여 붙잡았다.
1905년에 절강성 진해현에서 출생한 주심지는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며 혁명렬사이다. 그녀는 본명이 주이음이고 애명이 주계봉였는데 혁명에 참가한후 이름을 주풍으로 고쳤다. 5.30운동후 혁명에 참가한 주심지는 1945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49년 겨울에 대만에 파견되여 정보수집사업을 출중하게 완성하였다. 그녀는 반역자 채효건의 고발로 심지악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가 1950년 6월 10일에 대만 마장정 사형장에서 영용히 희생되였다. 2010년 12월 9일에 주심지렬사의 골회는 고향땅에 안치되였다. 2011년 7월 14일에 주심지렬사의 골회는 다시 절강성 진해혁명렬사릉원에 안치되였다.
심지악이 공을 세울 때는 바로 장경국이 특무계통을 정돈하려고 계획하고있을 때였다. 1950년 5월에 장개석은 심지악을 “대통령부자료소조” 석비훈련반 부주임으로 임명했다. 주요임무는 “대통령부자료소조” 주임인 장경국을 협조하여 석비훈련반의 툭무를 배향하는 일이였다. 이때는 또 심지악과 장경국의 관계가 밀접한 시기였다.
그후 심지악이 대진방위사령부 정치부주임을 맡은 4년남짓한 기간에 장경국은 대진에 자주 찾아오면서 심지악과 조석으로 만나서 심후한 감정을 쌓아갔다. 심지악도 에누리없는 “태자계(太子系)”의 사람으로 되였다.
1958년 봄에 심지악은 조사국(调查局) 부국장직을 맡았고 1964년에는 조사국 국장으로 승진되여 대만 “조사국의 아버지”로 불리웠다.
1979년 3월에 심지악은 리직했지만 장경국은 그를 자신의 곁에서 떠나지 못하게 했다. 장경국은 그를 “대통령부 국책고문”으로 초빙하고 대통령부인 장경국판공실옆에 심지악의 사무실을 만들어놓았다. 장경국이 사망될 때까지 심지악은 줄곧 국민당정부에서 가장 신임하는 특무계통의 원로였다.
심지악은 1990년에 전위선암말기였는데 1993년 11월에 암세포가 페부에까지 확산되였다. 그 기간에 심지악은 안해 서로(徐露)의 권고대로 북경에 가서 명의를 찾았다. 북경에 체류하는 기간에 심지악은 북경조어대 국민관에 들었지만 대륙방면의 초대를 받지 않겠다고 고집하면서 주숙비를 포함한 전부의 비용을 자신의 돈지갑을 털어 물었다. 대륙의 최고층에서 심지악을 접견하겠다고 했지만 그는 “저는 북경에 병을 보이러 왔을뿐 다른 뜻은 없습니다”하고 거절했다.
심지악의 옛 동창생인 장애평은 명나라의 명의인 리시진의 후대를 찾아서 심지악의 병치료를 해주도록 배치했다. 치료기간에 장애평과 심지악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 국가주석 양상곤은 심지악을 만나 대륙을 떠난후 대만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알려줄것을 바랐다. 대륙방면에서는 심지악이 대만에서 생활한 기간에 대한 기록이 공백이였기때문이였다.
1994년 2월에 심지악은 병으로 대북에서 사망되였다. 82세로 일생을 마치면서 그는 그 어떤 서류도 세상에 남기지 않고 수많은 력사의 비밀을 가지고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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