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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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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류소기암살사건의 시말
2014년 08월 31일 10시 13분  조회:7716  추천:2  작성자: 넉두리

1963년 류소기암살사건의 시말

 
(번역)



 
 
1960년 5월에 주은래는 캄보쟈를 방문하여 시하누크친왕과 캄보쟈인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중국과 캄보쟈가 우호적인것을 보고 중국의 최고령도자가 꼭 프놈뻰을 방문하리라고 단정한 미국과 대만당국(当局)은 북경의 동향을 면밀히 주시했다. 1961년 9월에 대만정보국에서는 류소기가 1963년에 중국대표단을 거느리고 캄보쟈 등 나라를 방문할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런데 대만정보국에서 정보를 입수한 정황을 중국안전부문에서 알게 되였다. 그해 10월에 대만에서는 상좌급 특무 장패지를 호지명시의 제3사업지휘소에 파견하여 류소기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게 했다.
“지리적으로 놓고볼 때 미얀마나 라오스에서 손을 쓰기보다 캄보쟈에서 손을 쓰는것이 더 유리할것이요. 만약 시하누크와 류소기를 함께 암살하면 더욱 좋고 그중 한 사람을 죽여도 중국과 캄보쟈의 관계는 악화될것이요.”
그들은 이번 행동을 “상강(湘江)계획”이라고 하고 프놈뻰소조를 세운후 구체적인 암살임무를 포치했다. 류소기의 고향이 호남성이라는 리유로 호남성에 있는 상강이란 강이름을 붙였던것이다.
원적이 광동성 학산시인 장패지는 7살 때 부모를 따라 윁남으로 이민했는데 18살에 화교인 리박생을 만났다. 리박생의 소개로 대립의 군통에 들어간 장패지는 전문정보훈련을 받았으며 직접 저명한 일본미녀갑첩 가와시마 요시꼬(川岛芳子)를 붙잡기도 했다. 가와시마 요시꼬는 만주인이며 본명이 아이신줴러 현우(爱新觉罗·显玗), 한족이름이 김벽휘(金壁辉)이다.
장패지는 윁남화교이기에 동남아일대에 대해 손금보듯 잘 알고있었다. 30여년후 그는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캄보쟈에 가서 류소기암살계획을 집행하라는것은 당시 장경국이 특별히 우리를 불러놓고 직접 말한것입니다. 나와 농임상, 량명, 문석령 넷은 작탄, 수류탄, 독약 등을 준비해놓고 목숨을 바칠 각오를 했습니다. 암살과정은 전부 사전에 세심한 실험을 거쳐 작성한것인데 비밀이 새여나갈줄은 몰랐습니다”라고 말했다.
남부윁남에 자리잡은 대만제3사업지휘소의 계획에 따라 1962년 2월 1일에 대만특무들은 캄보쟈의 수도 프놈뻰에서 장패지를 조장으로 하고 농임상을 부조장으로 하는 프놈뻰소조를 세우고 40여명의 행동대를 조직했다.
그들은 여러가지 행동방안을 세웠다.
첫째, 시하누크가 꼭 프놈뻰에서 제일 큰 현대나이트클럽에 류소기를 청해서 연회를 베풀것이라는 정보에 따라 부근에 매복해있거나 호텔복무원으로 가장하여 잠복해있다가 기회를 타서 류소기가 앉은 자리에 수류탄을 던진다.
둘째, 류소기가 영화거나 공연을 관람할 때 류소기에게 수류탄을 던진다.
세째, 독약을 류소기가 식사하게 될 음식에 넣는다.
그들은 여러명의 료리사를 접촉해보았지만 믿음직하지 못하다고 인정되여 세번째방안을 포기했다.
첫번째방안과 두번째방안도 위험이 크고 명중률이 높지 않으며 도망칠 뒤길이 없기에 부결되였다. 나중에 류소기가 캄보쟈로 방문할 때 꼭 지나야 할 길에 갱도를 파고 작탄을 가설하는 방안을 새로 내오고 그렇게 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중국지도자의 출국방문안전보장사업은 중공중앙 부비서장이며 중앙사무청 주임인 양상곤이 책임졌다. 이미 대만특무들의 음모활동을 눈치채고 사태의 엄중성을 느낀 중국안전부문에서는 1963년 3월 28일에 중앙안전지도소조를 성립하고 양상곤을 조장으로 임명하여 류소기의 출국방문안전을 보장하도록 했다. 4월중순에 류소기는 인도네시아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중국안전부문에서는 대만특무들이 동남아시아에서 빈번하게 활동하고있다는것을 발견하고 대만특무들이 꼭 암살음모를 꾸미고있는것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방식과 방법에 대해서는 똑똑히 알지 못했다. 적들의 암살음모를 똑똑히 알아내기 위해 중앙안전지도부에서는 조사부의 원경, 국무원화교위원회 오제생 사장(司长)과 공안부 양세서 등으로 조성된 선견소조를 세워고 캄보쟈에 가서 류소기의 캄보쟈방문안전보위사업을 책임지게 했다.
4월 7일에 원경 등 선견소조성원들은 전용비행기를 타고 프놈뻰으로 날아갔다. 프놈뻰에 도착한 선견소조성원들은 화교골간들을 만나서 화교적극분자대오를 조직하여 대만특무들을 미행하고 감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 깡패조직들의 자료를 수집했다.
4월 11일에 대만특무 진해통은 변계에서 초성에게 “무선전부속품”이라고 하면서 뢰관(雷管)을 2개 넣은 두꺼운 종이함을 넘겨주었다. 진해통은 그 물건을 농임상에게 가져다주라고 부탁했다. 초성은 정말로 무선전부속품인줄로 알고 들고가다가 조심하지 않아 하나를 떨궈버렸다. 그때문에 농임상이 노발대발하면서 욕설을 퍼붓자 초성은 몇푼도 되지 않는 무선전부속품을 가지고 화를 낸다고 두덜거렸다.
4월 16일에 초성은 진양, 원경 등에게 그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경험이 풍부한 원경은 그것이 무선전부속품이 아니라 국내에서 이틀전에 전화로 통지한 미국제 군용뢰관이라고 판단했다. 그는 대호 P021인 정보원과 만나서 뢰관에 대해 알아보았다. 결과 의심스러운 여러통의 비밀암호편지를 발견했다. 캄보쟈측과 중국측에서는 함께 그 비밀암호편지를 해독했다.
대만특무들의 편지내용은 주요하게 공항에서 캄보쟈왕궁으로 가는 길에서 작탄을 폭발하려는 계획과 행동에 참가한 20여명의 특무명단이였다. 선견소조에서는 장달창 등 두 사람을 붙잡았다. 장달창은 전부의 암살계획을 털어놓았고 작탄4개, 뢰관 1개, 수류탄 6개를 바쳤다.
1963년 4월에 이미 특무들의 암살음모를 알게 된 중앙안전지도부에서는 사람을 향항에 파견하여 료시량을 만나게 했다. 그 목적은 첫째로 그를 쟁취하려는것이고 둘째는 “산을 울려 호랑이를 놀라게(敲山震虎)”하는 방법으로 그에게 경고를 하여 “암살계획”을 포기하게 하려는것이였다. 료시량은 1939년에 국민당 군통국에 들어갔고 1949년 10월에 중국인민해방군의 포로로 되였다가 도주하여 향향을 통해 대만으로 건너갔다. 그는 1955년에 호지명시주재 대만 “대사관”에 파견되였는데 공개적인 신분은 “외교관”이고 실제로는 정보소 소장이였다. 그는 이번 “암살계획”의 직접적인 지휘자였다.
료시량의 활동에 대해 감시하고있던 중국공안부에서는 료시량과 한고향 사람이며 대학동창생인 라형림을 물색해놓고있다가 료시량이 향항에 도착했을 때 라형림을 파견했다. 1963년 4월 23일에 라형림은 계덕공항에서 료시량을 만났다. 라형림이 우리측에서 이미 대만특무들의 암살음모를 알고있다는 경고신을 가져왔다고 하자 료시량은 정황이 매우 엄중하다는것을 의식했다. 편지를 읽어본 료시량은 라형림을 보고 “난 힘이 닫는 범위내에서 사건이 벌어지지 않도록 힘써 보겠어. 하지만 다른 방면의 행동은 보장할수 없어. 난 대만에 미련이 없지만 공산당에 대해서도 믿을수 없어. 난 생각은 해보겠지만 믿음직한 보장이 없으면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을거야”하고 말했다.
사실이 증명하다싶이 료시량은 개 똥먹는 버릇을 못고친다고 갱도를 파서 차량을 폭발하는 외에 또 두번째 방안을 획책했다. 즉 시하누크친왕이 류소기와 함께 메콩강에서 룡선경기(龙舟赛)를 구경할 때 소음보총으로 암살하려는것이였다. 이 두번째 방안은 료시량 한사람이 획책한것으로서 극히 비밀적이였는데 사전에 오직 엽상지 한사람만 알고있었다.
료시량은 단독으로 “프놈뻰소조”의 특무 무문수와 련계하여 무문수더러 접이식소음보총 3자루를 넣은 상자를 주조명에게 갖다주라고 했다. 주조명은 애국화교내부에 잠입한 대만간첩이였다. 그는 캄보쟈의 애국화교 엽무극의 딸 엽서미와 련애한다는 명의로 애국화교들과 접촉하면서 류소기가 캄보쟈를 방문하는데 대한 정보를 알아냈다.
1963년 4월 28일에 주조명은 캄보쟈—윁남변경에서 직접 암호편지로 “총격암살계획”을 제3사업지휘소에 올려보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편지를 대호 G105인 우리측의 전략관찰원이 받아보게 되였다. 그날에 우리측의 심수양국장이 일찍 변경에 와서 G105와 접선했다. 주조명의 친필편지는 급히 캄보쟈주재 중국사무기관에 전해졌다. 요량준이 암호를 풀어보니 “내가 류소기의 방문로선을 따라 관찰해보니 방비가 엄밀하기에 나루터, 메콩강관람대의 대안에 매복해있다가 류소기와 시하누크가 나타나면 소음보총으로 쏘아죽이는것이 상책이라고 생각됩니다”라는 내용이였다. 사무기관일군들은 즉시 그 암호편지를 캄보쟈왕국정부에 보냈다.
그날 깊은 밤에 10여명의 캄보쟈경찰들이 주조명의 집으로 돌격해들어갔다. 당시 주조명은 무문수와 함께 총을 아원이란 살수(杀手)한테 넘겨줄 일을 토론하고있었다. 경찰들은 주조명과 무문수의 손목에 쇠고랑을 채웠다.
캄보쟈안전부에서는 장패지와 농임상 등 46명을 붙잡았는데 그중 한명은 윁남인이고 한명은 인도인이였다. 경찰국에서는 농임상의 집에서 류소기를 독살하는데 사용하려고 준비했던 농약 한병과 MK2작탄 2개, 시한폭탄 1개를 수색해냈다. 그때는 류소기가 캄보쟈방문을 48시간 앞두고있을 때였다.
시하누크친왕은 특무를 잡고 폭파물을 수색해냈다는 보고를 받고 놀라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했다. 그는 류소기의 안전문제를 고려하여 중국측에 류소기의 방문을 늦추는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이에 류소기는 원 계획대로 캄보쟈를 방문하겠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전해들은 시하누크친왕은 감격하여 “중국국가주석은 생명으로 량국의 친선을 보여주었소”하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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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3 ]

3   작성자 : 넉두리
날자:2014-11-08 09:59:17
관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래는 국민당특무들이 류소기를 암살하려고 시도했던 내막이라고 제목을 달았더라면 이런 시비도 없었겠는데요.

원 제목은
刺杀刘少奇:台湾特务在柬埔寨的绝密行动
刺杀刘少奇阴谋
破获密谋暗杀刘少奇始末
揭秘:1963年刺杀刘少奇案始末

등등입니다. 암살에 성공했거나 암살을 시도하다가 미수에 그쳤거나 모두 암살사건이라고 할수 있는것 같습니다. 즉 암살사건이란 암살에 성공했다는 뜻만이 아니라 암살미수란 뜻도 포함되여 있는것 같습니다.
2   작성자 :
날자:2014-11-06 11:44:10
저두 류소기가 암살된건지 알았는데, 읽고보니 제목과다르네요
1   작성자 : 넉두리님
날자:2014-09-04 05:33:56
안녕하세요 재미나게 읽었어요
근데 제목은 ...암살사건..이라 하지말고 ..암살미수사건이라 달았으면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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