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을 탐하여 모택동에게 엄한 징벌을 당한 두 장군
(번역)
1928년 3월에 로농혁명군을 거느리고 계동 사전에 도착한 모택동은 군기를 바로잡으려고 “3대규률과 6항주의”를 반포했다. 후에 “3대규률과 8항주의”로 수정하여 1947년에 다시 반포했다. 그중 “8항주의”중에는 군인이 “녀성을 희롱하지 못한다”고 규정했다. 그런데 아군의 두 고급군관이 이 규률을 위반하여 한명은 목이 잘리는 처형을 받았고 다른 한명은 관직을 강직당하는 처분을 받았다.
“눈물을 흘리며 마속을 참수”한 모택동
1911년에 강서성 남강에서 출생한 황극공은 소년시절에 중국로농홍군에 참가하였고 장정중에 대공을 세웠다. 홍군 1방면군과 2방면군이 회합할 때 황극공은 홍군려장직을 맡았다. 1937년에 연안항일군정대학 제6대 대장을 력임한 그는 문무를 겸임한 고급장령으로 되여 모택동의 칭찬까지 받았지만 류천과의 혼인문제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본명이 동추월인 류천은 태원시우인중학교의 진보적인 학생이였다. 로구교사변이 발생된후 적극적으로 공산당의 항일호소에 따라 연안에 찾아온 그녀는 항일군정대학에 들어가 공부할 때 황극공을 알게 되였다. 단기간의 접촉을 거쳐 서로 호감을 가진 두 사람은 편지거래를 통해 련애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황극공은 류천이 다른 남동창생과 래왕한다는 리유로 질투했다. 게다가 황극공은 떠도는 소문을 믿고 류천이 다른 남자를 사랑하며 자신을 배반했다고 책망하면서 즉시 결혼하자고 재촉했다. 류천은 황극공의 옹졸함에 반감을 가지면서 결혼을 거절했다. 그렇게 되자 화가 난 황극공은 1937년 10월 5일에 20세도 안된 류천을 연하의 강뚝에 데리고가서 총 두방을 쏘아 죽여버렸다.
항일군정대학 부교장 라서경은 중앙령도의 비준을 거쳐 황극공을 체포했다. 이 사건을 심사하는 과정에 연안의 각 단위에서 이 사건을 놓고 토론을 조직했다. 어떤 사람은 황극공은 홍군의 중요한 간부이고 당에 대한 공헌이 많기에 립공속죄의 기회를 주자고 했다. 또 어떤 사람은 황극공은 비록 공이 있지만 규률을 무시하고 살인했기에 반드시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극공은 중앙에 편지를 보내여 만약 사형을 집행한다면 공산당의 법원에서 죽지 않고 전쟁터에 나가 적과 싸우다가 죽겠다고 요구했다. 그는 자신에게 기관총을 주면 집법대의 감독하에 적진에 돌격하다가 죽겠다고 했다. 하지만 고급군관이 그런 일을 범하여 영향이 나빴기때문에 모택동은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마속을 베듯이 황극공을 참형에 처하지 않을수 없었다. 모택동과 중앙의 지시를 받은 섬감녕변구(陕甘宁边区)고등법원에서는 황극공을 사형에 처한다고 최후판결을 내렸다.
안해를 버리고 처제를 취하려다가 관직을 강직당한 왕근산
1915년에 호북성 황안(지금의 홍안)의 한 가난한 농가에서 출생한 왕근산은 9살에 소몰이를 했고 13살에 품팔이를 했다. 성격이 강직한 그는 악패지주에 대한 원한이 깊었다. 홍군이 황안을 점령했을 때 15살밖에 안된 왕근산은 홍군에 참가했다. 그는 반장으로부터 제2야건군 제3병퇀 부사령원 겸 12군 군장과 정치위원으로 되였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후 그는 천동군구(川东军区) 사령원, 지원군제3병퇀 부사령원, 산동군구 부사령원, 사령원대릴, 북경군구 부사령원,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 부부장을 력임했다. 그는 1955년에 중장계급과 1급8.1훈장, 1급독립자유훈장, 1급해방훈장을 수여받았다.
팔로군 129사 부퇀장직에 임명되였을 때 부상당한 왕근산은 팔로군병원에 실려갔다. 당시 팔로군병원에는 “병원의 꽃”이라고 불리우는 간호원이 있었다. 그 간호원의 이름은 한수암이였다. 한수암의 살뜰한 간호덕분에 왕근산은 빨리 건강을 찾았다. 그렇게 알게 된 그들은 서로 호감을 가지게 되였다. 그후 왕근산과 함께 입원했던 진석련의 중매로 왕근산은 한수암과 결혼하여 선후로 자녀 여덟을 보았다.
하지만 왕근산은 이미 새 중국이 성립된 초기부터 녀대학생인 자신의 처제를 사랑했던 왕근산은 안해를 버리고 처제와 재혼하려고 했다. 왕근산의 안해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당중앙과 모택동에게 편지를 써보냈다. 이 일은 당중앙과 모택동의 고도로 되는 중시를 받았다. 먼저 왕근산의 로상급 등소평을 파견하여 담화하게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후 주은래가 직접 찾아가도 마찬가지였다. 왕근산의 부하들도 찾아와서 가정을 지키라고 권고했다. 마지막에 모택동은 왕근산의 처리문제를 류소기에게 맡겼다. 결과 왕근산은 당적이 제명되고 강직을 당하여 중장으로부터 대좌로 떨어졌고 북경군구 부사령원 겸 공안부 부부장으로부터 하남성의 한 농장의 부농장장으로 떨어졌다. 왕근산은 1978년 5월 10일에 병으로 남경에서 사망되였다. 왕근산은 텔레비죤련속극 《량검(亮剑)》의 주인공 리운룡의 원형으로서 중국인민해방군의 저명한 장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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