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간만에 서랍을 뒤져 량표를 찾아보게 된것은 1955년도에 발행한 전국통용량표가 값이 간다는 소식을 듣고 혹시 나에게도 해당량표가 있나 하는 요행을 바라는 마음때무이였다. 예전에는 서랍안에 꽤 두툼하게 쌓여있었는데 몇번 이사를 하면서 어디에 흘렸는지 남아있는 량표는 몇장밖에 되지 않았다. 이리 보고 저리 보고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살펴봐도 나에게 그런 행운은 차려지지 않았다.
비록 졸부가 될 행운은 따르지 않았지만 량표를 펼쳐놓고 보노라니 못살고 배고프던 시절의 추억이 떠오르면서 마음이 착잡했다. 흔한것이 쌀이여서 배고픈 걱정을 모르다보니 량표가 생명처럼 귀중하던 그 세월을 까망게 잊고 산것이다.
지금은 어쩌다가 옥수수떡을 먹어본 이들은 맛있다고들 하겠지만 날마다 먹으면 질린다는 사실을 배고프던 시절을 거치지 않았던 지금의 신세대들은 알지 못할것이다. 궈테(锅贴)가 무엇인지, 옥수수밥이 어떤것인지, 옥수수가 좀 덜 섞인 이밥이 어떤것인지 알지 못할것이다. 매일 먹다 남은 밥상의 음식이 쓰레기통에 들어가고 식당에서 푸짐하게 차린 진수성찬이 거의 그대로 구정물에 들어가는 지금에 살고있는 신세대들은 배고프던 그 시절의 고충을 알지 못할것이다.
우리가 소학교에 다닐 때 도시락을 싸들고 가는 일이 많았다. 산놀이를 갈 때나 학교밭으로 일하러 갈 때 그리고 싸리나무하러 갈 때에는 꼭꼭 도시락을 싸들고 가야 했다. 또 학교가 먼 애들은 날마다 점심도시락을 싸들고 왔다. 이때면 부모들은 될수록 옥수수쌀이 덜 섞인 이밥에다 맛있는 반찬으로 도시락을 만들어보낸다. 점심이 되면 아이들은 빙둘러 앉아 각자 자신이 싸들고 온 도시락을 꺼내놓는다. 그런데 우리 반에는 저 혼자 구석쪽에 가서 돌아앉아 먹는 아이가 있었다. 나중에 일고보니 그 애의 도시락에는 이밥은 보이지 않고 싯누런 옥수수밥만 꽉 들어있었던것이다. 게다가 반찬도 된장에 파였다.
그 시기 우리 이웃에 한족이 살았는데 아들 일곱형제가 있었다. 한창 성장하는 나이인지라 옥수수궤테를 한 가마 해놓으면 게눈 감추듯 먹어치운군 했다. 물론 아이들도 배불리 먹지 못했지만 어른들은 항상 배를 골아야 했다. 그 시기에는 집집마다 달마다 주는 일쌀배급이 얼마 되지 않았기에 옥수수밥과 옥수수떡, 옥수수궤테를 질리도록 먹어야 했다.
이 모든것은 식량부족때문이였다. 그 시기 중국은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해 량표로 제한적인 공급제를 실시했다. “량표(粮票)는 20세기 50년대로부터 20세기 90년대까지 중국이 특정경제시기에 발행한 일종 량식구매증명서였다. 그 시기에는 반드시 량표가 있어야만 량식을 구매할수 있었다. 량식으로 만든 과자나 만두도 량표가 있어야 살수 있었다. 최초로 배급표공급을 실행했던것은 량식이였다. 새 중국이 성립된 초기에 물자가 극도로 부족했다. 량식은 더구나 부족해 제한하지 않고 풀어놓고 공급할수 없었다.
1960년대에 들어서며 중국에서 량식과 부식품공급이 엄중하게 부족했다. 1961년에 시장에서 구매표로 공급한 상품은 156종에 달했다. 그 시기에는 량표, 기름뿐만아니라 담배를 사려고 해도 담배표가 있어야 했고 술을 사려고 해도 술표가 있어야 했다. 1전에 성냥 한갑을 사려고 해도 성냥표가 있어야 했다. 그외 고기표, 사탕가루표 등등 별의별 표가 다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해결할수 없어 호적에 따라 량식배급통장, 부식품통장, 석탄통장 등 물건구매통장을 발급했다. 자전거, 재봉침, 시계마저 표가 있어야 살수 있었다.
지금의 신세대들은 상상도 할수 없을것이다. 배고프던 시절에는 부모의 집, 형제의 집을 방문해도 량표를 가지고 다녀야 했다. 농민들은 량표 대신 쌀주머니를 메고 다녔다. 도시호적을 가진 공인(그때는 로동자를 공인이라고 불렀음)들은 농민친척들이 쌀주머니를 메고 오면 금덩이를 들고 온것보다 더 반가워할 정도였다.
그렇게 배고프던 시절도 끝날 때가 있었다. 전국의 농촌에서 개혁개방을 한후 량식은 이미 증장하기 시작해 예전처럼 긴장하지 않게 되였다. 그렇게 되니까 1984년 말에 심수에서 먼저 량표를 취소하고 량식가격을 높였다. 그리고 량식을 제한하지 않고 풀어놓고 공급하기 시작했다. 1993년에 전국적으로 량식과 식용유를 제한하지 않고 풀어놓고 공급한 결과 량표는 쓸모가 없게 되여 정식으로 사용정지를 당하게 되였다. 이렇게 되여 장장 40년에 달하는 “구매증경제”는 막을 내리게 되였다.
이제 두손으로 부지런히 일하기만 하면 배고픈 걱정은 하지 않게 되였다. 집집마다 량식이 남아돌아 배부르게 되니까 밥투정, 반찬투정을 부리고 고급음식점에 산해진미, 진수성찬을 차려놓아도 맛이 없다고 한다. 또 묵은 밥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는가 하면 다이어트를 한다고 일부러 밥을 적게 먹기까지 한다. 우리는 아직도 지구상에 먹을것이 모자라 기아에 시달리는 많은 나라들이 있다는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유엔식량농업기구와 세계식량계획에서 발표한 《2014 세계식량 불안상황》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전세계 기아인구는 8억 530만명으로 조사되였다. 전 세계에는 세계인구의 1.5배가 충분히 먹을 량의 음식이 있지만 이 음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돌아가지 못하고있다. 중국처럼 식량이 남아도는 나라도 있지만 가난, 전쟁이나 독재, 분쟁이나 질병 등의 리유로 식량수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 나라들도 있다.
중국에서 집집마다 먹다 남으면 버리는 음식과 식당마다 손님들이 버리고 간 음식만으로도 식량난에 허덕이는 한 나라를 먹여살릴수 있다고 한다. 저 배고파 우는 아이들을 어찌할가? 유엔아동기금회는 2014년의 보고서를 통해 레바논지역의 시리아난민 아동가운데 약 2000명이 굶주림때문에 사망될 위기에 처해있다고 밝혔다. 수단의 약 5만명의 아이들도 심각한 영양실조때문에 죽음의 문턱에 있다. 세계 곳곳에서는 식량위기로 1억명이상이 굶주림에 내몰리고있다. 매년 5세미만의 어린이 300만명이상이 영양실조로 목숨을 잃는다고 유엔식량농업기구와 세계보건기구가 지난달에 밝혔다.
일부 나라들에서 식량이 남아서 썩어나가도 인구의 6분의 1이 굶어 죽는 험악한 현실이 눈앞에 보이는데 내 배만 부르다고 어찌 흥타령만 부르고있을수 있겠는가? 국제원조도 필요한 상황이겠지만 배부른 사람들이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따뜻한 사랑이 수요된다. 쌀이 남아돌아 하수도에 던지는 중국에서 쌀이 없어 굶어죽는 나라의 아이들을 어찌 보고만 있을수 있겠는가? 배고프던 시절의 량표를 떠올리며 이제부터 집에서 식사할 때에는 묵은 밥을 버리지 말고 외식할 때에는 먹을만큼 주문하는것이 어떨가? 그렇게 절약했다가 모은 자금으로 기아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따뜻한 사회가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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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작성자 : 두리번
날자:2014-11-10 17:30:15
우리 조선족 사회만 해도 불쌍한 애들이 숱한데 언제 세계를 내다보며 다른 나라 애들을 걱정하겠냐? 제코도 못씻고 남의 코 씻겠다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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