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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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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장개석을 최고권좌에 올려놓았는가 (1)
2014년 11월 22일 09시 46분  조회:5856  추천:0  작성자: 넉두리

누가 장개석을 최고권좌에 올려놓았는가


 
 (번역)




 
 
많은 사람들은 장개석을 손중산이 선정한 후계자인줄로 오해하고있다. 손중산은 림종시에 송경령과 왕정위의 이름을 부른적이 있지만 장개석의 이름을 부른적은 없었다. 그리고 림종시에 후계자를 지정하지 않았다.
1911년 10월 10일에  무창봉기가 일어났다. 손중산은 미국에서 그 소식을 듣고 12월에 귀국했다. 17개성의 대표들은 손중산을 중화민국 림시대통령으로 천거했다. 손중산은 1912년 1월 1일에 남경에서 정식으로 취임하고 중화민국림시정부를 세웠다. 1912년 2월 12일에 청나라의 선통황제(부의)가 핍박에 의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이렇게 되여 2000여년의 군주전제제도가 결속되고 공화국이 건립되였다.
1925년 3월에 손중산이 사망되고 그해 7월 1일에 중화민국국민정부가 광주에서 성립되였다. 소위 “총리의 유일한 후계자”인 장개석은 국민정부의 상무위원회 위원도 아니였고 위원도 아니였으며 국민당중당집행위원회 위원도 아니였다. 심지어 후보위원도 아니여서 큰 영향력이 없는 인물이였다.
장개석은 1905년에 일본 도꾜에서 진기미(陈其美)의 소개로 손중산을 알게 되였다. 그러나 손중산이 의지할만한 군사인재로 본 인물은 처음에는 황흥(黄兴)과 진기미였고 후에는 주집신(朱执信), 등갱(邓铿), 거정(居正), 허숭지(许崇智), 진형명(陈炯明)이였다.
장개석이 유럽전쟁형세와 원세개를 반대하는 투쟁방책을 내놓아서야 손중산은 그에게 주의를 돌리게 되였다. 그후 장개석은 련속 손중산에게 “장래의 남북량군행동에 대한 판단”과 “월계군(粤系军)제2기작전계획” 등 견해를 써서 바쳤다. 하지만 손중산은 장개석을 괜찮은 참모인재쯤으로만 보았을뿐이다. 때문에 손중산은 장개석에게 참모장, 참군(参军)류의 실권이 없는 직무만 맡겼다. 장개석은 선후로 거정수하의 참모장, 손중산대통령부의 참군, 진형명수하의 작전과 주임, 허숭지수하의 참모장, 손중산대원수행영 참모장 등 직을 맡았다.
가장 먼저 장개석의 재능을 알아본것은 진형명이였다. 그는 장개석이 참모직에만 국한될 인물이 아니라는것을 발견했다. 진형명은 자신의 수하에서 작전과주임으로 있던 장개석이 사직을 하려고 하자 극구 만류하면서 “월군(粤军)이 백번 이겼다고 해도 자네 한 사람이 없어서는 안되네”라고 말했다. 진형명의 말은 옳았다. 나중에 진형명은 장개석의 손에 패했다.
1922년 4월에 손중산을 배반할 준비를 하고있던 진형명은 손중산에게 월군총사령직과 광동성 성장직에서 사직하겠다고 말했다. 손중산은 진형명의 사직을 비준했다. 진형명의 뜻을 모르는 장개석은 손중산을 찾아가서 진형명을 대신하여 통사정을 하려고 했다. 하지만 통하지 않자 자신도 사직하고 진형명에게 환난을 같이하겠다는 편지를 써보냈다. 그러나 진형명이 손중산을 배반하자 장개석은 진형명과의 우의를 포기하고 자신에게 리익이 더 많을 손중산의 편에 섰다. 그 일로 손중산은 처음으로 장개석을 주의하기 시작했다.
손중산은 장개석의 성격을 좋아하지 않았다. 장개석은 화를 잘 내서 주위사람들과의 사이가 늘 긴장했다. 걸핏하면 사직하겠다고 나섰고 비준도 받지 않고 옷소매를 뿌리치고 간후 전보를 쳐도 회답하지 않았다. 1922년 10월에 손중산은 장개석을 허숭지의 참모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몇개월후 장개석은 군부의 일에 진전이 없다는 리유로 사직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손중산이 료중개(廖仲恺)를 파견하여 군부로 돌아오라고 하였으나 장개석은 외고집을 부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1923년 6월에 손중산은 장개석을 대원수행영 참모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한달도 못되여 배척되는 화를 당하지 않겠다는 리유로 사직하고 계구(溪口)로 되돌아갔다.
1924년초에 손중산은 장개석을 황포군관학교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한달만에 장개석은 경비가 락착되지 않았다는 리유로 준비위원장직을 사직했고 그해 9월에 군관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나겠다고 사직서를 바쳤다.
1918년 7월에 진형명의 작전과 주임직을 사직해서부터 1924년 9월에 황포군관학교 교장직을 사직하기까지 6년사이에 장개석이 사직했다가 복직한 차수가 14번이나 된다.
손중산은 장개석이 다른 직무에서 사직한것은 참을수 있었지만 황포군관학교의 직을 사직한 일만은 용인할수 없었다. 1923년에 구쏘련전권대표 요페(越飞)는 손중산을 만나 《손문요페선언》을 체결한후 쏘련에서 경비와 무기, 군사교관을 보내주고 군관학교건립을 도와주겠다고 표시했다. 손중산은 몇십년동안 혁명을 하면서 자신의 군사가 없는 설음을 많이 맛보았고 손해도 많이 보았다. 이제 꿈에도 가지고싶었던 자신의 군대를 가질수 있게 되였는데 장개석이 또 사직하려고 하자 손중산은 장개석에 대해 몹시 실망했다.
병권을 매우 중하게 여겨온 장개석이 황포군관학교의 중요성을 모를리 없었다. 그가 불만을 느낀것은 “경비가 락착되지 않아서”가 아니였다. 1924년 1월에 국민당제1차대표대회를 열었는데 손중산이 장개석을 대표로 선정하지 않았고 각 성의 당부에서도 장개석을 추천하지 않았다. 국민당당사에서 매우 중요한 그번 대회에서 장개석은 한장의 입장권도 얻지 못했다. 이때문에 장개석은 불만을 터뜨렸던것이다.
1924년 11월 13일에 손중산은 북상을 시작했는데 이틀전에 황포의 새 군대를 당군(党军)이라고 개칭하기로 하고 장개석을 군사비서로 임명했다. 이는 손중산이 마지막으로 장개석에게 임명한 직무였다. 손중산은 북상하여 사망되기까지 4개월사이에 장개석에게 그 어떤 편지거나 지시를 전한적이 없었다. 손중산은 장개석에게 높은 직위를 내려준적이 없었다. 그럼 누가 장개석을 높은 직위에 올려놓았을가? 그 공로는 구쏘련의 로씨야에서 온 미하일 보로딘(米哈依尔鲍罗庭)에게 속한다. 보로딘은 손중산의 수석고문 겸 중국주재 공산국제대표였다.
보로딘은 첫사람으로 장개석을 권력의 최고봉에 오르도록 해준 사람이다. 공산국제의 파견을 받고 중국에 온 보로딘은 중국혁명의 발전에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손중산은 “보로딘은 내가 만나본 공산국제인원중에서 가장 탄복하는 사람이다”고 말했다.
보로딘과 손중산을 만나게 해준 사람은 구쏘련 외교관 가리한(加拉罕)이였다. 하지만 가리한은 보로딘에게 국민당을 개조하라고 한적이 없었다. 보로딘자신도 중국에 와서 처음 한 일이 나중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 국민당의 개조를 실시한 일이 될줄을 몰랐다.
보로딘전에 국민당은 정치상, 조직상, 리론상에서 한개의 정당이라고 할수 없었다. 강령이 없었고 조직이 없었고 장정이 없었고 선거가 없었고 정기적인 회의도 없었고 당원의 수자도 똑똑히 알지 못했다. 말로는 3만명이라고 했지만 등기된것은 3000명밖에 안되였다. 또 당비를 바친 사람은 6000명이였다. 입당도 손을 들고 손중산에게 충성한다면 가입될수 있었다. 손중산자신도 “당원”이 얼마나 되며 누구누구가 당원인지 알지 못했다.
보로딘은 손중산에게 “당을 개조하지 않으면 국민당은 존재할수 없다”고 알려주었다. 그 말에 손중산은 큰 촉동을 받았다. 그전에 누구도 그에게 이런 말을 해주지 않았던것이다. 손중산은 이미 국민당에 대해 개조를 실행할 준비를 하고있었다. “중국국민당당강(中国国民党党纲)” 등 일련의 문서도 초안을 끝내놓고있었다. 이전에 손중산은 여러번이나 본당의 력량에 의해 당을 개조하려고 했지만 효과가 별로 없었다. 이번에 손중산은 보로딘에게 의거하고 구쏘련 무산계급정당의 건당경험을 운용하여 국민당을 개조하려고 결심했다.
보로딘은 구쏘련공산당의 조직방법에 따라 중국공산당원과 국민당좌파에 의거하여 국민당에 대해 철저한 개조를 하기 시작했다. 국민당제1차전국대표대회에서 통과된 그 중요한 “선언”은 바로 볼세비크당원인 보로딘이 직접 초안하고 중국공산당원 구추백이 번역하고 국민당원 왕정위가 윤색한것이다. 보로딘이 사망된후 근 40년이 지나서 대만의 리등휘가 국민당주석으로 되였다. 서방의 저명한 평론가는 리등휘가 국민당으로 하여금 레닌의 건당모식을 철저히 버리게 했다고 지적했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그들은 몇십년동안 날마다 “공산당을 타도하자”고 웨치던 국민당이 레닌의 건당모식을 사용했을 줄은 모르고있었다.
보로딘을 만나본 사람은 모두 그의 인격적 매력에 끌려들었다. 그는 어떠한 기자를 만나든지 모두 자신의 탁월한 원견과 지식으로 그들을 정복했다. 그는 나타나기만 하면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통제했다. 그리고 그는 곧 그들의 중심이 되군 했다.
그는 중국의 전통, 습관, 례절을 매우 중시했다. 그는 방에 레닌의 초상을 걸지 않고 손중산의 초상만 걸어두었다. 무릇 보로딘을 접촉한 사람은 모두 그의 비범한 기질과 청중을 정복하는 능력에 탄복하군 했다. 그는 부동한 파들을 화해시키는 능력이 매우 강했다. 그가 있기만 하면 광주의 여러 세력들은 아무 탈없이 화목하게 지냈다. 각 파의 사람들은 일이 있으면 모두 그를 찾아와 상의하려고 했다. 그때마다 그는 언제나 합당한 방법을 내놓아 찾아온 사람들이 흡족한 마음으로 돌아가게 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그의 거처는 자연스럽게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중심으로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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