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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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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시절에 거지행세를 하며 돌아다닌 모택동
2015년 02월 16일 10시 30분  조회:6174  추천:0  작성자: 넉두리

청년시절에 거지행세를 하며 돌아다닌 모택동

 
(번역)




 
 
모택동의 사적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알고있지만 그가 청년시절에 동학 소유(萧瑜)와 함께 거지행세를 하며 돌아다닌 이야기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소유는 저명한 시인 소삼(萧三)의 형으로서 모택동과 함께 신민학회를 발기한 인물이다. 1916년 여름에 모택동과 소유는 몸에 1전한푼도 지니지 않고 천리길을 걸어서 장사, 녕향, 안화, 익양, 원강 5개현을 돌아다녔다.

1916년 7월에 장사제1사범학교에서 공부하고있던 모택동과 소유는 사회에 대해 료해하기 위해 여름방학기간을 리용하여 거지처럼 화장하고 호남성을 돌아보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우산과 자그마한 헝겊가방을 하나씩만 휴대하고 길을 떠났다. 헝겊가방안에는 옷한벌과 세수수건, 종이, 펜 등 간단한 물건이 들어있었다. 그들은 몸에 1전한푼 지니지 않고 걸어서 길을 떠났다. 상강앞에 이르렀을 때 그들은 첫번째 난관에 부딪쳤다. 돈이 없어서 강을 건널수 없었던것이다. 그들이 거듭 사정해서야 배사공은 그들을 배에 오르라고 했다.

강을 건넌후 그들은 장사에서 녕향현으로 가는 길을 따라 걸어갔다. 그들은 이야기를 하면서 걷다보니 시간이 가는줄도 몰랐다. 배가 고파서야 그들은 비럭질을 시작했다. 그들은 길옆의 농가를 찾아다니며 밥을 빌었다. 하지만 농민들은 배를 곯고있는 처지인지라 좀처럼 음식을 주지 않았다. 여러집을 돌아다녀서야 배를 절반쯤 불릴수 있었다.

그들은 밥을 빌어먹기가 쉽지 않다는것을 깨달았다. 후에 그들은 지식인의 집을 찾아가 보기로 결정했다. 어느날에 그들은 류씨성을 가진 로신사의 집으로 찾아갔다. 그들은 먼저 밥 한그릇을 달라는 뜻의 시 한수를 써서 로신사에게 드렸다. 그들의 재주에 탄복한 로신사는 그들을 청하여 한끼를 대접한후 려비로 쓰라고 40전까지 주었다.

류씨댁에서 나온 그들은 시내물을 따라 걷다가 날이 어두워지자 강뚝아래에서 로숙하기로 마음먹었다. 피곤했던 그들은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모택동이 밤중에 깨여나보니 소유가 어느새 굴러갔는지 부근의 나무아래에서 자고있었다. 다시 잠을 자려던 모택동은 멀지 않은 곳에서 호랑이 한마리가 웅크리고있는것을 발견했다. 모택동은 몹시 놀라고 두려웠지만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생각나서 살금살금 소유한테로 기여갔다. 호랑이가 아직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했으니깐 소유가 깨여나서 소리지르는것을 방지하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모택동은 소유의 옆에서 날이 밝을 때까지 지켰다. 그런데 날이 밝은후에 보니 호랑이로 보였던것은 원래 커다란 돌이였다.

두 사람이 방금 일어났는데 풀숲에서 뱀이 나타나서 그들한테로 다가왔다. 깜짝 놀란 그들은 “걸음아 날 살려라”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여갔다. 그후부터 두 사람은 다시는 야회에서 밤을 자지 않기로 약속했다.

녕향현소재지에 도착한후 모택동은 며칠동안 거지생활에서 받은 감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총결지었다.

“몸에 1전한푼도 없이 지내기는 매우 힘들지만 머리를 쓰면 끝까지 견지할수 있고 어떠한 곤난이든지 극복할수 있다.”

이튿날에 그들은 녕향현 소재지에 도착했다. 그때 그들은 동창생 진소휴와 하숙형이 이 부근에서 살고있다는 생각이 나서 찾아가보았다. 그들은 먼저 진소휴의 집에서 며칠을 지내면서 주위의 농가들에 대해 조사했다. 그들은 조사를 통해 농민들이 량식이 모자라고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다는것과 대부분 농민들이 50세까지도 살지 못한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 기간에 그들은 농민들과 함께 물도 긷고 밭일도 하면서 생활체험을 했다.

다음 그들은 하숙형의 집으로 찾아갔다. 하씨댁은 자체로 돼지를 기르고 농사질을 하면서 자급자족하는 전형적인 농민이였다. 하숙형의 아버지는 자신의 농장, 돼지우리, 논밭을 참관시켰다. 그는 자신의 두손으로 분투하여 가업을 일떠세운 이야기를 하면서 자급자족하는 생활에 매우 만족하고있었다.

하로인이 열정적으로 만류했기때문에 모택동과 소유는 그의 집에서 이틀이나 묵다가 길을 떠났다. 길에서 모택동은 하로인과 함께 지냈던 시간들을 돌이켜보면서 감개가 무량했다. 얼마나 소박하고 선량한 로인인가? 자신의 하로인은 자신의 로동으로 자급자족하는 생활에 만족하고있었다. 그런데 불행한것은 헐벗고 굶주린 농민들이 많다는것이였다. 모택동은 무수한 농민들이 자신의 토지가 없어 다른 사람의 머슴살이를 하는것을 보았다. 농민들은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서 밭에 나가서 죽도록 일하다가 밤늦게 돌아오지만 자신의 로동성과는 모두 지주에게 바쳐야 했다. 사람마다 자신의 토지가 있고 즐거운 생활을 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모택동은 그런 세상을 만들고싶었다.

두 사람은 안화에 도착한후 계속 익양으로 향했다. 현소재지에 도착했을 때는 오전 10시쯤 되였다. 아침식사를 하지 않았기때문에 체면을 무릅쓰고 차집으로 들어갔다. 아침식사가 끝나자 소유가 남겠다고 했기때문에 모택동은 방법을 대여 돈을 얻으려고 했다. 그러나 두개의 골목을 돌면서 구걸했지만 21전밖에 얻지 못했다. 두 사람은 상의한후 점포에 주련을 써주는것으로 소비돈을 해결하기로 했다. 모택동은 붓을 날려 주련을 써주었는데 모두들 글씨가 멋지다고 찬탄했다. 한번은 차집주인과 한담을 하게 되였다. 원래 차집주인은 선비였는데 생활의 핍박에 의해 차집을 경영하게 되였다. 주인은 자호감을 가지고 말했다.

“나에게는 아들 셋이 있는데 두 아들에게는 장사를 하게 하고 한 아들에게는 글을 읽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니 가문에 긁읽는 기풍이 유지되고 넉넉하게 살수도 있게 되였죠.”

주인은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지만 모택동은 주인의 결정이 아주 리기적이라고 인정했다. 가정의 리익만 생각하고 아들들의 소원과 사회의 정체리익은 안중에도 없었기때문이다. 모택동은 소유를 보고 말했다.

“중국인들은 가정관념을 매우 중하게 여기기때문에 민족감정이 결핍하지요. 훌륭한 국가는 인민을 보호하기때문에 인민은 국가를 보위할 의무가 있습니다. 인민은 마땅히 나라를 생각해야지 자기 가정의 리익만 생각해서는 안되지요.”

여기까지 말한 모택동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을 이었다.

“가장 중요한것은 강유력한 정부가 있어야 한다는것이지요. 훌륭하고 강유력한 정부를 세우기만 하면 인민은 능히 조직할수 있습니다!”

그들이 익양을 떠나려고 준비하고있을 때 벽에 붙은 현장고시를 보게 되였다. 그때에야 그들은 익양현 현장이 바로 제1사범학교의 화학선생으로 계시던 장강봉선생이란것을 알고 찾아가보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대문을 지키는 위병이 그들이 거지라고 들어가지 못하게 가로막았다. 그들이 오래도록 버텨서야 위병은 하는수없이 장현장에게 아뢰였다. 장강봉은 그들의 이름을 듣고 모셔오라고 분부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장강봉과 함께 술을 마시면서 몇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두 거지가 현장의 귀빈으로 초대된것이였다.

이튿날에 그들이 떠날 때 장강봉은 위병을 시켜 그들을 성문밖까지 바래다주게 했다.

익양에서 다시 출발한 그들은 원강을 따라 걸으면서 장강봉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느날 저녁에 그들은 한 자그마한 려관에 도착했다. 다른 손님이 없었기때문에 녀주인은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모택동은 “우리는 거지인데 장사로부터 걸어서 왔습니다. 이미 천리길을 걸었지요”하고 말했다. 녀주인은 크게 놀라면서 “제가 관상을 볼줄 아는데 한눈에 두분이 대단한 인물이란걸 알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거지라니요?”하고 말했다. 그 말에 두 사람은 웃고 녀주인도 따라 웃었다. 이튿날에 두 사람이 떠날 때 녀주인은 그들을 바래주면서 “저는 호여영이라고 불러요. 이후 모선생이 출세하면 제가 모선생의 참모노릇을 할게요”라고 롱담조로 말했다.

두 사람은 호여영과 작별하고 몇시간의 길을 걸어서 원강현에 도착했다. 그러나 미처 생각지 못한것은 빙설이 녹으면서 장강에 물이 넘쳐 원강현이 완전히 외계와 차단된것이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배를 타고 장사로 되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장사로 돌아오는 배우에서 모택동은 옷을 잘 입은 두 사람이 아주 사소한 일로 손찌검을 하며 싸우는것을 목격했다. 모택동은 사람의 도덕수준을 가늠하는것은 금전이 아니라 지식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장사에 도착한후 두 사람은 이번의 경력을 기념하기 위해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의 두 사람은 해여진 옷에 짧은 바지를 받쳐입었고 짚신을 신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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