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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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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소기의 “살인멸구사건”은 어떻게 조작되였는가?
2015년 03월 22일 10시 55분  조회:5628  추천:1  작성자: 넉두리

류소기의 “살인멸구사건”은 어떻게 조작되였는가?

 
(번역)




 
 
문화대혁명기간에 당시 국가주석이였던 류소기는 참혹하게 박해를 받았다. 강청, 강생, 사부치 등이 조직한 전문사건조사소조에서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죄명을 만들어 냈다. 바로 “류소기가 사람을 죽여 입을 막았다”는 사건을 조작했던것이다. 아래에 조작한 내용을 보기로 하자.
 
“5.30운동이후에 계급투쟁이 격화되면서 당시 상해총공회의 책임자였던 류소기는 적들에게 붙잡힐가봐 무서워서 벌벌 떨면서 업무를 다 팽개치고 홀로 상해에서 도망쳐 장사로 갔다. 하지만 그는 1924년 12월 16일에 장사계엄사령부에 체포되였다. 호남성의 성장인 군벌 조항석은 직접 나서서 류소기를 즉시 처결하라고 지시했다. 류소기는 목숨을 보존하기 위하여 비겁하게 조항석이 제출한 조건을 받아들였고 국민당에 항복하였다. 1950년에 양검웅(楊劍雄)이라는 자가 류소기가 항복한 내용을 알고있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류소기는 적에게 항복한 일이 들통날가봐 두려워 1953년에 양검웅을 죽여버리라는 비밀명령을 내렸다. 이렇게 류소기는 양검웅을 총살하고 살인멸구(杀人灭口)를 하였다.”
 
그럼 양검웅은 어떤 사람인가? 양검운은 원래 호남성 영향현 칠복교향의 철라충 사람이였다. 소학교를 다닐 때 양검웅은 류소기와 함께 녕향현의 옥담고등소학당을 다녔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같은 반에 있지는 않았다. 바로 이 리유때문에 50년이 지난후에 류소기는 억울한 루명을 쓰게 되였다.
 
양검운은 나중에 장사에서 중학교를 다니고 상해의 대하대학을 졸업했다. 양검웅의 이모부가 조항석이였는데 조항석은 그 시기에 군벌혼전중에 두각을 나타내여 호남성의 성장 겸 독군직을 지내고있었다. 양검웅은 공부를 그만두고 장사성에서 회계를 맡았다. 조항석을 업은 양검웅은 배경이 든든하였기에 많은 돈을 몰래 고향집으로 빼돌렸다. 비록 나중에 조항석이 물러나기는 하였으나 양검웅의 집안은 이미 고향에서 논밭을 사서 현지에서 가장 큰 부자로 손꼽혔다.
 
중국인민해방군은 1949년 4월에 장강을 건넜고 장개석정권은 와해되였다. 이때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유격부대 하나가 신속히 성장하였는데 녕향현이 그 유격부대가 활동하는 중심무대였다. 국민당정부는 중앙군 778사단을 녕향현에 보내여 유격대를 소탕하려고 했다. 양검웅은 구원병이 왔다고 생각하고 동네사람을 이끌고 778사에 량식이며 땔감을 보내주었다. 양검웅은 또 현지에서 누가 공산당이라는것을 밀고하여 10여명의 공산당원들이 국민당에 붙잡혀 살해되는 비극을 빚어냈다.
 
그후 국민당이 계속 패배하자 양검웅은 도박하는 심정으로 현성과 고향을 왔다갔다 하였는데 자신이 공산당을 밀고한 사실이 알려질가봐 몹시 두려웠다. 만일을 대비하기 위하여 그는 몸에 두자루의 총을 지니고 다녔고 한구에서 사귀였던 두명의 무술고수를 개인경호원으로 두었다. 이 무술고수는 하남성 광산현 사람인 곽기풍과 팽옥린이였는데 그들은 낮에는 양검웅의 곁에서 한걸음도 떨어지지 않았고 밤에는 한명씩 번갈아 당번을 서며 양검웅을 지켰다.
 
1949년 8월 5일에 호남성이 해방되자 양검웅은 얼음구덩이에 빠진것 같은 심정으로 절망을 느꼈다. 그해 10월 1일에 개국대전이 북경의 천안문에서 거행되였는데 양검웅은 천안문의 성루에서 모택동과 함께 서서 군중의 환호를 받고있는 낯익은 사람을 알아보았다. 그가 바로 탄자충(炭子冲)사람인 류소기였다. 탄자충은 양검웅의 고향인 철라충(铁锣冲)과는 3~5리 떨어져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같은 학교에서 공부한 사이였다. 양검웅은 내심 기뻐서 이 옛동창을 찾기만 하면 자신이 편안하게 살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양검웅은 류소기에게 요행을 바라는 심정으로 편지를 썼다. 편지에서 양검웅은 자신의 처지를 전혀 말하지 않고 두 경호원을 류소기에게 추천한다는 내용만 썼다. 그들이 무술전문가로서 뛰여나고 사상도 괜찮다는 내용을 적었다.
 
편지를 보내기는 했으나 회신은 없었다. 얼마후 청비반패(清匪反霸)운동이 시작되였다. 청비반패란 토비를 숙청하고 악패지주를 반대한다는 뜻이다. 청비반패운동이 시작되자 양검웅은 겁을 먹고 도망쳤다. 현지의 사람들은 정부에 그를 잡아달라고 요청했고 공안부문에서는 계속 그를 찾아다녔다. 1952년 10월 28일에 귀주의 깊은 산속에 3년가량 숨어있던 양검웅은 끝내 체포되였다. 1953년 1월 24일에 호남성정부에서는 양검웅의 사형을 비준했다.
 
양검웅은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살려고 아득바득 애를 썼다. 그는 온갖 방법을 다해 머리를 짜내여 살구멍을 찾았다. 마침내 좋은 방법을 생각해낸 그는 법정에서 1924년에 류소기가 장사에서 체포되였다고 말한후 자신이 성장이였던 이모부 조항석에게 보증을 서서 류소기를 감옥에서 나오도록 해주었다고 얘기했다. 당시 공산당은 8가지의 관용정책을 내왔는데 그중의 하나가 “지하공작을 하던 혁명자를 구해주는데 도움을 준 사람은 처벌을 한단계 낮추어준다”는것이였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양검웅은 사형을 당하지 않을수 있었다.
 
녕향현공안국 국장이며 이 사건의 부심판장이였던 곽건국은 당시 중앙인민정부 부주석이던 류소기에게 급히 서신을 써서 확인을 요청했다. 곽건국의 서신은 3일후에 류소기의 책상에 올라왔다. 류소기는 양검웅과 소학교 동창이기는 하지만 그후 련락을 해본적이 없었다. 1949년 11월중순에 류소기는 양검웅으로부터 편지는 받았으나 답변을 하지는 않았었다. 그후 얼마 안되여 고향에서 온 친구들이 북경으로 찾아왔을 때 류소기는 양검웅에 대하여 물어보았고 그들로부터 양검웅이 그동안 저지른 일을 모두 듣게 되였다. 그리하여 그를 경계했던것이다. 류소기는 양검웅과 확실히 동창관계였다. 그러나 녕안현공안국의 공문에 의하면 양검웅은 큰 죄를 지었고 다시 개조하기 힘들다고 되여있었다. 이에 류소기는 다음과 같이 회신했다.
 
호남성 녕향중공현당위 공안국 곽건국동지:
1월 26일에 보낸 서신은 잘 받았음. 양검웅은 나와 소학교에서 같이 공부한적이 있으나 그후 30여년간 아무런 관계도 없었음. 그가 말하는 1924년에 장사에서 나를 감옥에서 구해냈다는 등의 말은 허튼소리로서 그런 사실이 전혀 없었음. 나는 1925년에 장사에서 체포되였었고 많은 사람들이 구해주었기에 감옥에서 2개월후에 나올수 있었음. 그러나 양검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음. 양검웅의 범죄는 당신들의 판결에 따라 처리할것.
류소기 1월 29일.
 
그러나 양검웅에 대한 판결은 문화대혁명기간에 류소기가 살인멸구한것으로 모함되였다.
 
척본우는 1967년 4월 1일에 《애국주의이냐 아니면 매국주의이냐? 반동영화 〈청궁비사〉를 평함》이란 글에서 창끝을 류소기에게 향했다. 그 글이 나와 며칠이 지났을 때 북경에서 내려온 몇몇 사람들이 녕향현소재지와 화명루향에서 사람을 찾아 얘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사람들의 말을 기록하고는 손도장을 찍게 했다. 사람들은 그들이 왜 그러는지 몰랐다. 나중에야 그들은 이 몇몇 사람들이 사부치가 책임진 전문사건조사소조에서 파견된 사람들이고 그들의 목적은 자료를 만들어 류소기가 녕향에서 살인멸구했다는것을 립증하기 위한것이라는것을 알았다.
 
1990년대초에 녕향현정협상무위원을 맡았던 주석선에 의하면 당시 전문사건조사소조는 그에게 서류를 써라고 했고 류소기가 살인멸구했다는것에 대한 증거로 삼으려고 했다. 주석선은 전문사건조사소조의 요구를 강하게 거절하였다. 그러자 전문사건조사소조의 성원들은 사람들을 불러 그를 비판하고 그의 륵골을 세 개나 부러뜨렸다.
 
전문사건조사소조는 주석선이 말을 듣지 않자 당시 양검웅사건의 심판원직을 맡았고 나중에 공사의 당위부서기직을 지냈던 종진기를 찾아갔다. 전문사건조사소조는 종진기에게 가짜증명을 요구했다. 그는 “양검웅은 현법원에서 사형을 판결받았고 성정부에서 심사하여 비준했습니다. 전체 사건처리과정에 대해 류소기동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류소기동지가 어떻게 양검웅을 살인멸구하였겠습니까?”하고 반박했다. 전문사건조사소조는 “이건 필요하다”고 하면서 그더러 류소기가 양검웅을 살인멸구한 증인을 서달라고 강요했다. 오전 8시반부터 한밤중까지 세 사람이 그를 둘러싸고 돌아가면서 핍박했다. 그는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증명자료우에 “살인멸구”라고 네글자를 적었다. 량심의 가책에 시달려왔던 종진기는 지금도 자기의 유약함과 비겁함을 부끄러워 하면서 “그것은 내가 일생동안 저지른 가장 비겁한 짓이였다”고 자신을 질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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