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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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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소평에 대한 7번의 암살시도사건
2015년 05월 24일 19시 42분  조회:7157  추천:1  작성자: 넉두리

등소평에 대한 7번의 암살시도사건

 
(번역)




 
 
호금도는 2개의 비밀기록자료를 비밀해제하였는데 그중의 하나는 “절대기밀”로 분류된 자료로서 이미 사망된 국가지도자가 건국후에 맞은 폭력공격, 암살, 상해사건의 기록자료이다. 이 기밀해제문건에는 건국후에 이미 사망된 당, 정, 군의 국가지도자에 대한 암살시도사건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그중에는 등소평에 대한 7번의 암살시도에 대한 자료가 있었다.
 
 
첫째, 1969년에 등소평거처가 총격을 당한 사건
 
1969년 10월 21일에 등소평은 억울한 루명을 쓰고 중공중앙의 제1호명령을 받아 강서성 신건현 망성강의 버려진 한 보병학교에 연금되여있었다. 3일째 되던날(10월 23일 새벽)에 여러명의 무장”민병”들이 보병학교에 란입하여 등소평의 거처에 향하여 총을 쏘아댔다. 그러나 목표를 잘못잡아서 총기란사를 당한 곳은 등소평을 감시하던 경비들이 머무는 곳이였다. 경비들은 즉각 반격하였는데 여러명의 무장”민병”들은 총을 맞고 죽었다. “9.13”의 림표사건후에 내부에서는 “이 사건은 림표가 강서성 군구에 지시하여 이루어진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80년대초에 림표집단을 조사할 때 림표가 꾸몄거나 지시한것이 아님이 립증되였다.
 
 
둘째, 1973년에 등소평전용기가 공중해체된 사건
 
1973년 2월 20일에 중공중앙 판공청은 구쏘련제 비행기를 강서로 보내여 등소평을 북경으로 되돌아오게 하여 업무를 맞기려고 하였다. 그러나 강서성군구는 등소평을 기차에 태워서 북경으로 보내라는 긴급통지를 다시 받았다. 군구의 참모장이 직접 경비를 이끌고 기차 한칸을 붙여서 북경으로 보냈다. 결과 등소평이 타려고 했던 구쏘련비행기기는 북경으로 돌아가던중 안휘상공에서 공중해체되였다.
 
 
셋째, 1975년에 산보를 하다가 총격을 받은 사건
 
1975년 9월의 어느날에 산서성의 어느 지역으로 갔던 등소평, 강청 등의 일행이 경비와 함께 언덕에서 산보를 하는데 어디선가 총알이 날아왔다. 경비는 곧 총을 쏜 방향을 향하여 반격했다. 그러자 총을 쏜 자는 도망쳤다. 이 사건은 수수께끼로 남았다.
 
 
넷째, 1976년에 등소평이 연금된 초대소에 갑자기 화재가 발생된 사건
 
1976년 4월의 어느날에 등소평은 당내외의 모든 직무를 박탈당했다. 그리고 북경군구의 옥천산초대소 5호청사의 1층에 연금되였다. 저녁에 등소평이 연금된 1층에 갑자기 전원합선이 일어나 불이났고 1층의 101호방에서 10호방까지 전부 불에 타버렸다. 그날 저녁에 등소평은 학습이 예정되여있었다. 그런데 그 후에 경비와 함께 목욕탕에 가서 목욕을 하는 바람에 화를 면하였다. 나중에 등소평은 북경성내의 주택으로 옮겨졌는데 내부기록에는 이것이 엽검영이 보낸 경비가 등소평의 안전을 보호한것이고 암살의 위험을 피하게 하였다고 적었다.
 
 
다섯째, 1976년에 등소평이 탄 차의 차축이 부러진 사건
 
1976년 7월의 어느날에 등소평은 하북성 승덕의 피서산장으로 가라는 통지를 받았다. 그러나 등소평은 건강을 리유로 병원에서 검사를 한다고 하고 가지 않았다. 등소평을 승덕으로 보래려고 준비했던 작은 일제차량은 나중에 국방부로 보내졌다. 국방부에서는 사용하려고 검사를 했는데 결과 전륜축이 이미 부러져있었다. 만약 도로를 달렸다면 언제든지 차가 뒤집히고 불이 날수 있었다. 나중에 왕동흥은 등소평이 화를 면한것은 자신이 세운 공이라고 줄곧 자랑하였다. 그는 당시 등소평에게 승덕으로 가지 말라고 통지했다.
 
 
여섯째, 1980년에 등소평이 회의좌석에서 총격을 받은 사건
 
1980년 3월의 어느날에 등소평이 제남군구에서 부대를 시찰할 때의 일이다. 등소평이 군구의 회의에서 보고를 마치고 좌석으로 돌아왔을 때 회의장의 당번경비가 “모주석의 혁명로선을 보위하자! 등소평을 타도하자! 강청을 위하여 복수하자”는 구호를 웨치면서 등소평의 좌석을 향하여 련속 몇발을 발사하였다. 등소평의 신변에 있던 경비가 막아주어 등소평은 위험을 피하였다. 총을 쏜 자는 나중에 제압당하였다.
 
 
일곱째, 1988년에 등소평이 일곱번째 암살을 모면한 사건
 
 
1988년 2월의 어느날에 등소평, 진운, 양상곤 등이 상해의 서교빈관에서 설명절을 보내고있었다. 그런데 “모택동주의전투대”라고 자칭한 4명의 총을 든 무장분자들이 서교빈관으로 진입하여 당번을 서고있던 무장경찰들과 전투를 벌렸다. 3명은 그 자리에서 죽었고 1명은 체포되였다. 그들의 몸에서는 등소평을 암살하는데 사용하기 위한 거주지의 지도, 폭파약, 소음총, 발화기재 등이 발견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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