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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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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전과 그가 거느린 녀인들
2015년 06월 07일 10시 48분  조회:6780  추천:0  작성자: 넉두리

홍수전과 그가 거느린 녀인들

 
(번역)




 
 
홍수전은 청정부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태평천국봉기군의 령수였지만 눈앞의 승리에 도취되여 주색에 빠진 졸장부로 변해버렸다. 홍수전의 눈에 녀인들은 모두 그의 노리개이고 노예였다. 그는 녀인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그는 천왕의 권력을 13세밖에 되지 않았으나 이미 색에 빠진 맏아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태상황으로 되였다.

홍수전은 도광23년(1843년)에 배상제회(拜上帝会)를 조직한 때로부터 “천하의 남자들은 모두 형제이고 천하의 녀자들은 모두 자매이다”라는 평등사상을 들고 나와서 농촌의 가난한 녀성들이 많이 참가했다. 홍수전은 또한 “사람을 한명 죽이는것은 내 아버지를 죽이는것과 같이 처리하고 녀인을 한명 간음하면 내 처를 간음한것과 같이 처리하겠다”는 말도 한적이 있다. 이리하여 태평천국의 초기에는 태평군내에 녀성들로만 구성된 녀군도 있었다. 그들은 남자들과 함께 용감하게 전투에 참가했고 무한까지 밀고 올라올 때까지만 하여도 남녀는 모두 같이 직위를 받고 같이 벼슬을 지냈다. 남경을 함락시킨후 태평군이 동쪽으로 향할 때에도 녀군은 여전히 선봉에 섰다.

그러나 자그마한 승리를 얻은후에 홍수전은 이미 강산의 절반은 손에 넣었고 대국은 이미 정해졌다고 생각해서인지 문을 닫아걸고 태평천자노릇을 하려고 하였다. 동시에 차지한 지역의 녀인들을 자신의 노리개로 삼으려고 하였다.

홍수전은 소년시절부터 후궁을 가득 둔 제왕의 궁정생활을 그리워하였다. 금전봉기때에 그는 이미 비(妃)를 15명이나 두고있었다. 1년후 광서에서 포위전을 벌릴때에 홍수전에게는 이미 36명의 녀인이 있었다. 광서땅을 얻고 호남에 도착했을 때 현지에서 헌납한 미녀 4명을 받아들였다. 무창을 점령한후에 홍수전은 첫번째 왕비선발을 통해서 민간녀자중 자색이 뛰여난 60명을 뽑았다.

남경에 도착한후 홍수전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녀인을 거느렸는가? 홍수전이 모두 얼마나 많은 녀인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통계를 낼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것이다. 청왕부에는 2000~3000명의 미녀들이 있었는데 남자는 태감을 두지 않고 홍수전 1 명이 살았다. 그리고 이런 미녀들은 모두 낮에는 홍수전을 시중들고 밤에는 홍수전을 침대에서 모시는 녀인들이였다. 이것은 고대의 군왕이 3000궁녀를 둔다는것과 비슷했다.

미시적으로 보면 홍수전의 맏아들이며 후계자인 유천왕(幼天王) 홍천귀복(洪天贵福)이 1864년 10월 25일에 강서성 석성황산에서 포로로 잡혀서 쓴 진술서를 보면 앞부분에 자신을 소개하는 글이 나오는데 “현재 나이는 16세이고 로천왕이 나의 부친이다. 그는 88명의 모후를 두었는데 내가 9살때 4명의 처를 두었다”는 내용이 있다. 이것이 아마도 믿을만한 기록일것이다. 이와 비교하자면 호색하기로 유명했던 함풍화제도 겨우 18명의 비빈만을 두었으므로 홍수전에는 미치지 못했다.
홍수전은 41세에 남경에 들어가서 52세에 자결할 때까지 미녀들만으로 둘러싸인 천왕부에서 11년을 보내면서 천경의 성문을 한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그는 전투를 지휘한적도 없고 조정의 일에 대하여 물어본적도 없다. 그당시 그는 장년이였고 체격이 건장하였는데 11년동안 겨우 25편의 조서만을 내려보냈다. 그리고 함풍 4년부터 함풍8년(1854~1848년)까지는 비여있다. 이 5년간 단 1편의 조서도 내리지 않은것이다. 그동안 그는 무슨짓을 한것일가?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비빈들과 술을 마시고 시를 지으면서 색에 빠져있었던것이다.

홍수전은 글을 얼마 읽지 않았다. 그가 지었다는 소위 “부시(赋诗)”는 그저 말나오는대로 쓴것에 불과하다. 함풍 7년(1857년)에 태평천국에서 인쇄하여 발행한 “관서(官书)”중의 하나인 《천부시(天父诗)》에 수록된 500수의 시를 보면 대부분이 홍수전이 천경에 진입한 초기 3년동안 궁중생활을 하면서 후궁들에게 보라고 쓴 남자와 남편의 권리에 관한 내용이였다. 례를 들어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비빈, 녀관들은 아침마다 천왕을 위하여 몸을 씻고 옷을 입고 머리칼을 다듬으며 주인의 고민을 잘 풀어주어야 한다. 주인이 존엄이 높고 바르게 지켜지면 강산에서 영원히 위엄을 누릴수 있다. 그후에 천왕에게 문안인사를 해야 한다. 그리고 천왕에게 차와 가래침통을 올려야 한다: 차를 바칠 때에는 바르게 해야 한다. 침통을 제대로 받치지 않으면 용서할수 없다.
이런것을 보더라도 홍수전의 위엄과 황음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만할것이다. 그가 4번이나 과거를 보았음에도 합격하지 못한 원인도 쉽게 알수 있다.

남경에 온 천왕 홍수전은 처음에는 광서에서 그를 따라온 옛날 녀인들의 거친 성격과 더러운 습관을 싫어하기 시작했다. 어떤 녀인이 큰 소리로 얘기하는것을 듣고는 바로 시를 지어 질책했다.

“아름다운 녀인의 가는 목소리가 귀한것이다. 어찌 개가 짓는것같은 소리를 내느뇨?” 어떤 녀인이 이발을 닦고 분을 바르고 향수를 뿌릴줄 모르는것을 보고 그는 아주 심하게 놀려주었다.

“주인을 따라 오르지 못하면 영원히 오르지 못하고 영원히 태양을 볼수 없다. 얼굴은 튀여나와 시꺼멓고 몸에서는 악취가 난다. 입에서는 류황을 태우는 냄새가 난다.”

홍수전은 꺼리낌없이 새 녀자를 좋아하고 이미 데리고 놀던 녀인을 싫어하는 감정을 드러냈다:
그는 재수없는 녀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처벌할지도 규정했다.

“첫째, 나를 모시는데 경건하지 않으면 맞아야 한다. 둘째, 고개를 빳빳이 하고 가르침을 듣지 않으면 매를 맞아야 한다. 셋째, 눈을 들어 남편을 바로 처다보면 매를 맞아야 한다. 넷째, 천왕에게 경건하지 못하게 물어보면 매를 맞아야 한다. 다섯째, 기가 바르지 못하면 매를 맞아야 한다. 여섯째, 말을 큰 소리로 하면 매를 맞아야 한다. 일곱째, 입이 있으면서 대답하지 않으면 매를 맞아야 한다. 여덟째, 얼굴에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면 매를 맞아야 한다. 아홉째, 눈을 좌우로 돌리면 매를 맞아야 한다. 열째, 말하는것이 침착하지 않으면 매를 맞아야 한다."
이외에 또 하나의 기괴한 규정이 있다.
“주군을 쳐다볼 때는 어깨까지 
보아야 한다, 가장 좋은것은 가슴앞을 보는것이다; 감히 눈을 우로 드는것은 왕을 태만히 한것이고 하늘을 태만히 한것이다.”
부녀들이 형벌을 받을 때 억울하더라도 변명해서는 안된다. 그저 때리는대로 맞아야 하고 그렇지 않았다가는 처벌이 배가된다.

“때리면 잘못을 아는것은 한 죄이고 때려도 잘못을 모르는것은 두 죄이다; 한 죄는 맞음으로써 소멸되지만 두 죄는 절대 용서할수 없다.”
알려진 바로는 최소한 3명의 녀인이 천왕부에서 처벌받을 때 억울하다고 하며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가 피살당했다. 피살당한 사람중에는 죽을 때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심지어 홍수전에게까지 대들었다가 결국 오마분시(五马分尸)의 혹형을 당했다. 이 점만 보더라도 홍수전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알수 있다.

태평군이 남경에 들어온 이후에 가장 먼저 동왕 양수청의 명령을 받아 주민들은 군영을 따를 사람은 군영으로 복귀하고 군영을 따르지 않을 사람들은 각자 민가로 복귀했다. 나중에 북왕 위창휘가 병이 든 양수청을 대신하여 정사를 돌보았는데 일체의 공상업을 몰수하고 남녀를 분리거주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남자들은 군영에 들어가 병사가 되고 녀성들은 려관에 들어가 로동에 참가한다는것이다. 당시 천경에는 토목공사를 많이 벌렸는데 녀성들은 모두 천왕부의 건축에 참가했다. 천왕부주위의 담장은 높이가 2장이고 넓이가 4척이였다. 성벽우에는 갈라진 도자기조각을 추가했고 성밖에는 붙잡혀온 녀성들이 도랑을 팠다. 어떤 사람은 집을 짓는데 동원되였다. 이 점을 보더라도 홍수전은 자신의 향락을 위해서 백성의 고통은 아랑곳하지 않았다는것을 알수 있다.

태평군이 민심을 얻어 남경을 점령하였다가 민심을 잃어 민중들이 대거 떠나게 되는데까지 겨우 몇달밖에 걸리지 않았다. 태평군이 성에 진입하기전에 남경에는 원래 80만명이 살았는데 봄에 태평군이 들어온후 9개월만에 등기인구를 조사해보니 15만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중 로약자인 남자가 4만명, 부녀가 11만명이였다. 홍수전이 스스로 “작은 천당”이라고 부른 천경이 사실은 인간지옥이였던것이다.

홍수전은 수천수만의 녀성을 동원해서 집을 짓고 도랑을 파고 성벽을 만들었다. 비바람이 불거나 눈이 내려도 계속 일하도록 핍박했다. 사람을 때려서 죽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홍수전은 천왕부의 미녀들속에서 11년의 제왕생활을 보냈다. 동치 3년(1864년)에 홍수전은 증국전(曾国荃)이 거느린 호남군이 공격해오자 말일이 다가왔음을 알고 2000여명의 미녀들을 버리고 52세의 나이에 자살했다. 그가 죽은후 48일후에 천경이 함락되였고 태평천국이 멸망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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