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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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윁남독립의 아버지 호지명
2015년 06월 13일 13시 18분  조회:5009  추천:0  작성자: 넉두리

윁남독립의 아버지 호지명


 
 
1930년 2월 3일에 향항의 로동자마을의 한 작은집에 윁남의 공산주의운동가들이 모였다. 국외에서 활동하고있는 윁남의 혁명세력은 세 분파로 나뉘여 갑론을박하고있었다. 이에 윁남혁명세력의 실질적인 지도자 호지명(胡志明, 1890년 5월 19일 출생)이 회의를 소집한것이다. 먼저 자신을 소개한 호지명은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우리는 분렬되여있는 혁명세력을 하나의 당으로 뭉쳐야 합니다. 그래야만이 프랑스제국주의와 싸울수 있습니다.”
 
호지명의 말에는 거역할수 없는 힘이 실려있었다.
 
혁명가들은 통합정당의 이름에서부터 하나하나 의견을 좁혀나갔다. 그리하여 윁남공산혁명세력의 공식적인 통합정당인 “윁남공산당”이 탄생되였다. 안전을 위해 장소를 옮겨가며 회의를 하는 동안에 호지명은 지나온 세월을 반추하면서 감회에 젖군 했다. 그의 나이 이제 40이 넘었으니 고국을 떠난지 20년이 다 되였던것이다. 오직 조국 윁남의 백성들에게 행복을 되찾아주리라고 결심하고 떠난 길이였다. 경찰에 쫓기면서 하루도 편안하게 눈을 붙일수 없었던 세월, 아직도 갈길은 멀었지만 이제 초석을 다져놓았다는 마음에 호지명은 안도의 숨을 내쉬였다.
 
엄밀히 말해 호지명이 지도한 윁남공산당은 레닌의 공산국제나 중국공산당과는 질적으로 다른것이였다. 호지명에게는 식민지배를 받고있는 윁남의 현실을 타개하는것이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호지명은 프랑스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윁남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지식인, 중농, 소자산계급만이 아니라 의식이 있는 부르죠아민족주의집단도 혁명세력에 참여할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공산주의자기전에 먼저 민족주의자임을 말해주는 호지명의 이러한 생각은 새통합정당의 강령에 반영되였다. 그러나 윁남공산당의 2월강령에 대해 공산국제는 부분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했다. 강령의 민족주의적인 색채가 문제였다. 10월에 소집된 회의에서 민족주의적인 색채를 제거한 새로운 강령이 채택되였고 그에 따라 당명도 “인도지나공산당(印度支那共产党)”으로 바뀌였다.
 
이는 윁남뿐만아니라 캄보쟈나 라오스 등 인도지나를 형성하는 세 나라의 혁명을 함께 추구한다는 의미가 담겨있는것이였다. 민족독립을 우선으로 하고 이를 위해 중간계급의 협조를 구하려고 했던 호지명의 전략은 묵살되였지만 호지명은 새로운 강령을 선선히 받아들였다. 받아들일것은 군말없이 받아들이고 확신이 서면 단호하게 실천에 옮기는것, 그것이 호지명의 크나큰 장점이였다. 온화하면서도 단호하고 단호하면서도 넓은 그의 성품이야말로 성공의 일등공신이였다.
 
호지명을 영웅으로 만든것은 시대상황이였다. 19세기중반의 프랑스인들은 윁남의 가톨릭교도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윁남을 침략하여 식민지 인도지나를 건설했다. 윁남에 들어온 프랑스인들은 자본주의방식에 따라 대규모의 고무농장에 자본을 투입하여 윁남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바꾸려고 했다. 불교와 유교를 중시하는 공동체적인 생산방식을 존중하는 윁남사람들에게 자본주의는 야만적인것이였다.
 
일찍 부모를 여읜 호지명의 아버지는 어렵게 공부하여 2급박사학위를 땄다. 그러나 그는 식민지관료체제에 들어가고싶지 않았다. 호지명의 아버지는 안해의 죽음을 핑계로 조정의 관직임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버지의 이러한 성격이 아들 호지명에게도 그대로 이어졌음은 물론이였다.
 
11살의 호지명은 아버지한테서 고전공부를 하다가 아버지의 친구가 가르치는 학교로 가게 되였다. 아버지의 친구는 학생들에게 윁남의 독립을 옹호하는 정신을 불어넣었다. 호지명은 새로운 스승밑에서 너무도 즐거왔다. 그러나 나라를 잃은 슬픔에 피가 끓어오른 스승은 결국 독립운동에 합류하기 위해 학교문을 닫고 떠났다. 호지명은 다시 아버지한테로 돌아와 고전공부를 계속했다. 아버지는 한문을 공부하여 무작정 공직에 나가려고 하지 말고 고전의 속뜻을 리해하고 사람들을 리롭게 할 방법을 찾도록 하라고 가르쳤다.
 
호지명은 이 무렵에 유학의 경전보다는 중국의 《3국연의》와 《서유기》 같은 이야기가 더 재미있었다. 호지명은 또 마을의 힘센 아이 지엔을 좋아했는데 그에게서 용광로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기도 하고 그를 따라 새사냥을 가기도 했다. 저녁이면 지엔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지엔은 독립운동가들이 오랑캐를 몰아내려다가 실패한 이야기를 실감나게 해주었다.
 
호지명은 동네에서 구할수 있는 책이 대부분 윁남력사가 아니라 중국력사를 다루고있다는것을 확인하고 조국의 력사를 알기 위해 성소재지까지 걸어가기도 했다. 그는 서점에서 윁남력사서적을 탐독하고는 중요한 구절들을 암기해두었다가 친구들에게 들려주었다.
 
사실 호지명을 영웅으로 만든것은 용기였다고 해야 옳다. 그는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데 신중하기는 했지만 확신이 서면 항상 과감했다. 어렸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납세거부시위에 참여하여 국학에서 퇴학당한후에도 결코 락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새로운 세계에 눈을 돌리는 계기로 삼았다.
 
1911년 6월에 그는 드디여 프랑스의 기선에 주방보조로 취직하여 윁남을 떠난다. 이제 호지명에게 본격적인 떠돌이생활이 시작되였다. 중국, 프랑스, 미국, 영국, 로씨야가 호지명의 무대였다. 당시의 미국대통령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선언하자 호지명은 윌슨에게 편지를 쓰고 윁남독립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들고 련합국지도자들을 직접 찾아갔다.
 
세계를 돌아다니는 동안에 호지명은 프랑스와 영국에도 힘들게 살아가는 로동자가 존재하고 또 량심적인 지식인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것이 그를 차츰 사회주의운동에 몸담게 하는 정당성을 제공했다. 1924년 6월에 호지명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5차공산국제대회에 프랑스공산당대표로 참석하여 세차례에 걸쳐 연설을 했다. 그는 아시아의 식민지문제와 농민의 역할에 대해 힘주어 강조했다. 이 인상적인 연설은 화제가 되였지만 농민의 역할을 강조한것이 이단적이라는 리유로 나중에 제재를 당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새로운 공산주의지도자의 탄생을 예고하는 사건임에 틀림없었다.
 
무엇보다도 호지명을 성공으로 이끈 힘은 열정이였다. 그는 윁남민족해방의 열망 하나로 한평생 꿈속에서도 꿈을 꾸었다. 그 꿈은 1945년에 정말 꿈처럼 찾아왔다.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후 인도지나공산당은 전국인민대회를 소집하여 하노이를 점령했다. 민족해방위원회를 소집하여 호지명을 주석으로  내각을 구성한 혁명세력은 그해 9월 2일에 독립선언서를 랑독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여났다. 그들은 조물주로부터 누구에게도 양도할수 없는 권리를 부여받았다. 생존, 자유, 행복의 추구 등이 바로 그 권리이다.”
 
독립선언서를 랑독하는 호지명의 목소리가 온 세상에 울려퍼졌다.
 
그러나 꿈같은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윁남독립은 사실상 반토막이 되고말았다. 1954년에 제네바협정에 의해 윁남은 북위 17도선을 경계로 남북으로 갈라지게 된것이다. 이제 호지명의 열정은 독립이 아니라 통일쪽으로 향해졌지만 통일 또한 미국이나 프랑스 등의 제국주의렬강으로부터 진정으로 독립하는것이였다. 리해관계가 대립된 이상 전쟁은 필연이였는지 모른다. 1964년 8월에 시작된 윁남전쟁은 1975년까지 윁남을 온통 피로 물들인 현대사 최고의 비극이였다.
 
현대사에서의 최고비극이 진행되는 동안에 페결핵이 호지명의 건강을 위협하고있었다. 호지명은 죽음에 대비하여 유언장을 작성했다. 1965년에 처음 작성하고 이어 1968년과 1969년에 손으로 고쳐 쓴 유언장에는 “윁남인민의 생활수준을 높이는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를 함께 추구하는것이 필요하다”고 씌여져있었다. 1969년 9월 2일에 호지명은 그토록 열망했던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일생동안 힘차게 쉬였던 숨을 멈추었다.
 
실로 호지명의 일생은 조국의 운명과 함께한것이였다. 조국이 노예상태였기에 그는 외국을 돌아다니며 온갖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쳐도 참고 때를 기다렸으니 그의 일생이야말로 성공의 교과서와도 같은것이였다.
 
호지명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전세계의 언론이 그에 관한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우루과이의 한 신문은 “그는 우주만큼 넓은 심장을 가진 사람이였으며 아이들에 대한 가없는 사랑을 지닌 사람이였다. 그는 모든 분야에서 소박함의 모범이였다”고 극찬했다. 분명히 그는 권력을 통해 어떠한 부귀영화도 누리지 않았고 조금의 안락함도 추구하지 않았다.
 
호지명이 유언장에서 “내가 죽은후에 웅장한 장례식으로 인민의 돈과 시간을 랑비하지 말라. 내 시신은 화장해달라”고 당부한것은 그의 인품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권력이 있을 때나 없을 때나 한결같았던 인품속에서 그의 탁월한 정치력과 추진력이 솟아나왔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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