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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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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세를 풍미한 단기서
2015년 06월 28일 09시 55분  조회:5169  추천:2  작성자: 넉두리

일세를 풍미한 단기서


 

단기서(段祺瑞)는 왕사진(王士珍), 풍국장(冯国璋)과 더불어 “북양삼걸(北洋三杰)”이라고 일컬어진 인물이다.

1865년에 안휘성 합비에서 출생한 단기서는 환계군벌의 사령관으로서 본명은 계서(启瑞)이고 자는 지천(芝泉)이다.

1889년에 천진무비학당 포병과를 졸업한 단기서는 독일에서 군사학을 공부하고 이듬해에 중국으로 돌아왔다. 1896년 천진으로 가서 신건륙군(新建陆军) 좌익포대 제3영 통대(统带) 겸 무위우군 각 학당의 총책임자직을 력임하였다. 1903년에 청나라 조정에서 군사훈련소를 설립하자 단기서는 원세개가 확대하여 개편한 북양군의 중요한 참모로 되였다.

1911년에 무창봉기가 일어나자 단기서는 칙명을 받들어 호북으로 달려가서 혁명을 진압하였다. 남북회담기간인 1912년초에 그는 원세개의 의향에 따라 청나라 조정에 두번의 전보를 보내 황제퇴위를 독촉하였다. 그해 3월에 원세개는 손중산으로부터 중화민국대통령직을 이어받았고 단기서는 륙군총장에 임명되였다.

1913년에 단기서는 한동안 국무총리대리직을 력임하다가 군대를 동원하여 2차혁명을 진압하였다.
원세개는 1916년 3월 22일에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황제의 년호를 취소하고 단기서를 재등용하여 참모총장직에 임명하였다. 그해 4월에 단기서는 서세창(徐世昌)을 대신하여 국무경 겸 륙군총장직을 력임하였다. 그해 6월에 원세개가 사망되자 려원홍(黎元洪)이 대통령직을 계승하였고 단기서는 국무총리 겸 륙군총장직에 임명되여 북경정부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북양군벌은 점차 직계군벌과 환계군벌의 두파로 분렬되였으며 단기서는 환계군벌의 사령관이 되였다. 1917년에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문제로 충돌이 생기자 려원홍은 단기서의 총리직을 해임하였다. 이에 단기서는 각 성의 군사장관들을 책동하여 려원홍을 타도하였다.

1917년 6월에 장훈(张勋)은 려원홍과 단기서의 충돌을 화해시킨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이끌고 북경에 진입하여 청나라의 마지막황제 부의의 확제복위를 시도했다. 장훈의 복벽음모가 실패되고 려원홍은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단기서는 부대통령이였던 풍국장을 대통령대리로 맞이하고 자신은 다시 총리직을 맡았다. 그러나 《림시약법》과 국회의 부활을 거부하였다. 그해 9월에 손중산이 광주에서 림시약법을 수호하는 군사정부를 세웠다. 단기서는 무력통일정책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으나 풍국장이 사령관으로 있는 직계군벌의 저지를 받았다. 그해 11월에 단기서는 강요에 의해 국무총리직과 륙군총장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단기서의 사주를 받은 각 성의 군사장관들이 풍국장에게 압력을 가했다. 그리하여 단기서는 다시 복위되여 남방정벌에 군대를 동원하였다.

북양군이 호남성 형양을 점령한 후에 직계군벌 우두머리 오패부가 1918년 8월에 휴전통신문을 련속적으로 보내고 단기서정부의 친일매국정책을 공격하였다. 이로써 직계군벌과 환계군벌간의 갈등을 더욱 심화되였다. 1918년 9월에 풍국장이 대통령대리직임기를 마치고 물러나자 안복국회(安福国会)에서는 서세창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단기서도 총리직에서 물러나 참전감독직만을 전담하였다.
1920년 7월에 직계군벌과 환계군벌간의 전쟁이 일어났다. 여기에서 환계군벌이 패배하자 단기서는 직위에서 물러나 천진으로 이주했다. 그후 단기서는 봉계군벌 장작림, 남방의 손중산과 련합하여 직계군벌의 통치를 반대하였다.

1924년 10월에 이르러 봉계군벌은 풍옥상의 부대와 련합하여 직계군벌을 물리쳤다. 단기서는 중화민국림시집정직에 추대되였다. 그는 “선후회의(善后会议)”를 소집하여 손중산이 주장하는 국민회의를 배척하였다.

1926년 3월 18일에 단기서는 갑자기 집정부호위대를 시켜 북경의 각계 인사들로 구성된 반제국주의청원대렬을 향해 총격을 가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3.18학살사건”에서 사상자는 100여명이나 되였다.

1926년 4월에 단기서는 다시 봉계군벌, 직계군벌과 련합하여 풍옥상의 국민군을 공격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사전에 루설되여 동교민항사관구로 도망쳤다. 이로 인하여 오패부, 장작림의 신임을 잃게 되자 단기서는 결국 천진의 조계지로 물러나 도피생활을 하면서 자호를 정도거사(正道居士)라고 하였다.

1933년 2월에 단기서는 상해로 이주하였다가 1936년 11월 2일에 상해에서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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