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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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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조선족영웅 무정장군
2015년 07월 19일 19시 49분  조회:8565  추천:0  작성자: 넉두리

전설의 조선족영웅 무정장군





 
 
“무정(武亭)장군이 엄지손만 척 꺼내들고 어디를 겨냥하면 그곳에 백발백중의 포탄이 떨어져 적들에게 불벼락을 안겼다.”
이는 지난 세기 20년대로부터 40년대를 걸치면서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제국주의침략자를 반대하여 싸우고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싸운 중국조선족의 걸출한 대표이며 전설의 영웅인 무정장군에 대한 전설적 이야기이다.

1905년에 조선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태여난 무정(본명 김무정)은 서울에서 가난한 고학시절을 보내면서 나라를 잃은 비애를 온몸으로 겪었다. 혁명에 뜻을 두고 청년운동과 로동운동에 종사하던 그는 일제에 체포되여 세번이나 옥살이를 하면서 갖은 혹형을 받았다. 1923년에 18세에 나는 무정은 조선공산주의자 려운형의 영향으로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듬해에 하남보정군관학교 포병과를 졸업하고 국민당부대에서 포병중좌로 활약하던 그는 군벌혼전에 실망하고 1925년에 장가구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그후 무한, 상해에서 지하투쟁을 하다가 두차례 체포감금되였으나 조직의 구명운동으로 석방되여 향항으로 망명했다가 1930년 6월에 중앙쏘베트근거지로 찾아갔다. 거기서 무정은 팽덕회수하의 홍군제3군단 포병련 련장으로 임명되여 남정북전을 시작했다. 그해 7월에 미, 영, 일 제국주의 군함은 동정호반의 악주성을 미친듯이 포격하였다. 격분한 무정은 팽덕회에게 반격을 제의하였다. 팽덕회장군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본때를 보여주라고 고무하였다. 당시 홍군내에는 포를 쏠줄 아는 사람이 팽덕회와 무정뿐이였다. 수중의 야전포 4문과 산포 2문으로 전사들을 지휘하여 다가오는 적함을 겨누고 포격하자 10여척의 적함이 삽시에 불에 탔다. 홍군전사들은 사기가 충천하여 “제국주의를 타도하자”고 소리높이 웨쳤다. 이는 중국인민해방군력사상의 첫 대포소리였다. 이로부터 무정의 이름과 함께 조선인의 명성이 홍군내에 널리 알려졌다.

1931년에 홍군중앙군사위원회 직속포병퇀이 창건되면서 무정은 제2임퇀장에 부임되였고 1933년 10월에 홍군대학 특과학교가 세워지면서 교장을 겸임하여 홍군내의 최초포병인재들을 키워내는데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홍군의 2만 5000리장정이 시작되자 무정은 중앙군위기관으로 편성된 제1종대 제3지대 사령원 겸 정위로 임명되여 장정에서 가장 치렬한 상강나루터점령임무를 수행했다.
장정도중에 당중앙의 북상항일을 반대한 장국도의 음모로 각 군단과 군위, 모택동과의 련계가 끊어진 상황에서 무정은 팽덕회의 지시를 받들고 목숨걸고 비밀전신번호를 제1군단에 전해줌으로써 당중앙과 홍군을 위기에서 만회했다. 무정은 주덕총사령, 팽덕회부총사령 등 중앙군위지도자들의 가장 신임받는 장군의 일원으로 되여 장정을 마치고 연안에 도착했다.

1936년 6월에 무정은 홍군사단급이상 38명으로 조직된 연안항일군정대학 제1기고급간부과 학원으로 해당학과를 배우면서 강의도 하고 항일군정대학을 졸업한 뒤 홍군총부작전과 과장, 팔로군총부작전과 과장으로 되였다.

1937년 8월 25일에 중국공농홍근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 개편되였다. 그해말에 항일전쟁의 새로운 수요에 따라 팔로군총부에서는 포병퇀을 건립하기로 결정했다. 중앙군위에서는 포병퇀건립임무를 무정에게 맡겼다. 원 소속병력에 유격 제2대를 포함하여 총 1000여명을 6개 련으로 편성했다. 그외에 기관련, 관통대 및 선전대를 가진 포병퇀을 건립하였다.

1938년 1월 28일에 산서성 림분부근의 한 광장에서 포병퇀건립의식이 성대히 치러졌다. 대회에서는 팔로군판사처 주임 팽설풍이 중공중앙군사위원회의 임명서를 랑독하면서 무정을  우리 군 첫 포병퇀 퇀장으로 선포했다. 포병퇀건립초기에 해당군사장비도 없고 간부와 기술골간도 없었다. 무정은 우선 간부를 양성하기 위해 계획있게 정치사상교육을 진행한 기초에서 제4련을 전문 간부를 양성하는 련으로 삼고 각 련에서 우수한 골간을 뽑아 단기훈련반을 열었다. 그때 훈련반에서 무정은 직접 강의를 하면서 엄지손을 척 꺼내들고 알기 쉽게 통속적으로 포사격원리와 포를 조종하는 요령을 가르쳤다.

훈련반을 나온 동지들은 기술골간으로 되여 당시의 긴급수요를 해결하였을뿐만아니라 인재로 되여 그후의 포병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포병퇀은 건립되면서 일제와 싸우는 전투에 참가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포병퇀 건립 1돐을 기념하여 모택동은 “포병퇀은 항일전쟁가운데서 주력병퇀이 되여 민족을 위해 영광을 떨치고 팔로군의 모범이 되여야 한다”는 제자를 써주고 금기를 증정하였다.
1940년에 중외를 진감하는 백퇀대전이 일어났다. 무정은 포병퇀을 인솔하여 될수록 적진지와 가까운 거리에 포를 걸어놓고 직접 사격을 지휘함으로써 적의 또치까를 백발백중하여 보병들의 작전을 엄호하고 진격로를 열어놓음으로써 아군의 승리에 중대한 기여를 하였다.

백퇀대전이 끝난후 무정은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포병퇀을 떠나 관내 조선인항일단체를 통일하고 련합하는 조직사업에 나섰다. 워낙 1939년부터 무정은 섬북조선청년련맹의 서명편지로 관내의 조선혁명동지들은 일치단결하여 공동히 항일할것을 호소하였다.

1941년 1월 10일에 태항산항일근거지의 진동남팔로군전선 총사령부소재지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제1차대표대회가 열렸다. 대회에서 회장으로 당선된 무정은 화북조선쳥년련합회 행동강령과 과업을 진술하면서 간부양성과 조선혁명단체의 통일을 언급하면서 화북 20만조선동포들은 항일투쟁에로 뭉쳐야 함을 강조하였다.

제1차대표대회후 조선청년대표들은 무정의 파견을 받고 락양, 서안 등지로 가 조선의용대의 북상을 조직지도하기 시작하였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10일에 무한에서 창립된 첫 조선인항일무장대오로서 100여명의 의용대 대원들은 전국 6개 전구(战区)에서 항일무장선전사업을 하고있었다. 몇개월간의 간난신고끝에 조선의용대 대부분 전사들은 국민당통치구역을 벗어나 태항산근거지로 집중되였다. 그들은 1941년 6월에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편성되였다.

1942년 7월 11일부터 3일간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제2차대표대회가 청장하기슭에서 열렸다. 이 대회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는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서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군으로 개칭되였고 이 부대는 조선독립동맹에 소속된 부대로 결정되였다. 대회에서는 김백연, 무정, 박효삼 등 11명을 집행위원으로 선거하였고 당중앙에서는 무정을 조선의용군 총사령으로 파견하였다. 조선의용군은 중국공산당의 령도와 팔로군의 통일지휘하에 일본제국주의와 싸우는 조선인무장부대로 확정되였다.

조선의용군 총사령으로 임명되여 태항산근거지에 이른 무정장군은 1942년 12월 1일에 섭현 곡원촌에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를 세우고 직접 교장을 담임하면서 학원들에게 정치사상교양과 군사훈련을 강화하고 적점령구로부터 찾아오는 조선청년들을 교육시켜 조선의용군에 참가시켰다.

1943년말부터 조선의용군은 당중앙의 호소에 따라 혁명의성지 연안에 가 군정훈련을 하게 되였다. 1945년 7월에 연안에 이른 무정장군은 8월 11일에 주덕총사령이 내린 연안총부 제6호명령을 받들고 9월에 조선의용군을 거느리고 팔로군 및 원 동북군 각 부대를 따라 동북으로 진출하였다. 《조선의용군행진곡》을 부르며 각 항일근거지에서 심양으로 모여온 조선의용군은 1000여명에 달하였다. 무정장군은 심양에서 조선의용군 전체회의를 열고 당면의 정세와 금후의 과업에 대해 연설하고 조선의용군을 3개 지대로 개편하였다.

1지대는 남만에 남고 3지대는 북만으로, 5지대는 동만으로 진군하여 대오확군사업을 벌리면서 동북각지에서 적잔여세력을 소멸하는 투쟁에 뛰여들었다. 당면의 형세하에서 무정장군과 조선독립동맹, 조선의용군 주요지도자들은 개인신분으로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나갔다. 조선에 진출한후 무정장군은 조선림시인민위원회 중앙위원, 로동당 제2서기, 보안간부훈련대 포병사령관 등 직무를 력임하였다. 무정장군은 1952년 10월에 조선의 한 자그마한 병원에서 사망되였는데 사망원인은 지금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일생동안 자신의 일체를 헌신해온 전설의 영웅 무정장군은 우리 조선민족의 지지 않는 전설로 오늘도 우리와 함께 새 세기속을 살아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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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5 ]

5   작성자 : 진심
날자:2015-07-23 13:59:20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올라가는 기차에서였다.
기차가 갑자기 기찻굴을 들어갈 때 무정의 동료들이 갑자기 무정의 머리에
모포를 뒤집어씌워놓고 누군가 <때려라>하고 웨치다 30여명이 몰려들어 무정을 밟고 구타했다.
그때는 기차에 전등이 없어서 기찻굴을 들어가면 새까맸다.
기찻굴에서 나오자마조 동표들은 모조리 자기 자리에 앉아 모두 모른척 잠잠했고
무정은 모포를 벗어내면서 투덜거렸다.
<제길할 자식들이, 모당개매를 치는구나>
조선으로 귀국할때 부하들을 다 버리고 비서와 경위원 그리고 본처를 버리고 새로 얻은 첩만 데리고
조선으로 귀국길에 오르다가 부하들한테 발각되였기 때문이었다.
조선에 돌아가서도 의용군에서 같이 온 부하들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고 그들이 모조리
지방 산골로 쫓겨가게 만들었기때문에 무정의 주변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조선에서 무정이 실각하게된 가장 근본적이 원인이 이때문이었다.
4   작성자 : 진심
날자:2015-07-23 13:53:07
무정의 실각은 여러면에서 원인이 있다.
조선으로 귀국할 때 그는 함께 장정을 했던 본 처를 버렸다.
본처가 압록강변까지 쫓아와서 무정의 귀뺨을 때리며 <너같은 자도 다 혁명가이냐>고
욕설을 퍼부었고, 무정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의 이름을 무정의 성씨인 김가에서 엄마의 성씨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그 딸이 지금도 북경에서 살고있다.
이 무정의 중국 본처는 바로 중국공산당의 유명한 혁명가 등대운의 여동생 등기다.
무정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의 이름도 원래 김연려에서 지금은 등연려로 바뀌였다.
연려라는 이름은 연안에서 태여났다는 뜻의 연과 고려인이라는 뜻의 려자를 달았다.

3   작성자 : 넉두리
날자:2015-07-20 19:56:25
2번님의 지적에 감사를 드립니다. 한문인테넷에 올려진 사진을 식별도 없이 무정이라고 올린 점 사과드립니다. 다시 중문을 검색해보니 확실히 먼저 올린 사전은 윁남의 홍수가 옳은데 홍수의 사진을 무정이라고 밝힌 사이트가 지금도 그대로 있더군요. 많은 지적 부탁드립니다.
2   작성자 : 답답한 사람
날자:2015-07-20 09:15:52
무정 글의 사진은 무정장군이 아니라 2만5천리 장정에 참가한 외국인 중의 월남사람이고, 중국인민해방군 소장직함을 받은 홍수입니다. 답답한 사람들이 중문 인터넷에 무정이라로 마구 올려대는사진을 식별도 없이 올려서야 되겠습니까?......
1   작성자 : 임네닉
날자:2015-07-20 06:40:37
무정장군의 사망은 수수께끼가 아니라.
남조선을 디리밀때 제대로 밀대를 놓치못했다고
김일성이 열이올라 처형시킨것이 정설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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