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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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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공쌍방은 왜서 모두 담평산을 면직시켰는가
2015년 11월 01일 14시 34분  조회:4539  추천:1  작성자: 넉두리

국공쌍방은 왜서 모두 담평산을 면직시켰는가
 
(번역)


 
 
1886년에 광동성 고명에서 출생한 담평산(谭平山)은 담언상(谭彦祥), 담명겸(谭鸣谦), 담빙삼(谭聘三)이라고도 한다. 그는 중국근대사에서 공적이 뛰여나고 영향력이 있는 민주혁명가이다. 그는 신해혁명시기에 손중산을 따라 동맹회에 가입했고 5.4운동후 진독수의 도움을 받아 광동중공지부를 건립했으며 제1차국공합작과 농민운동, 남창봉기에서 불멸의 력사공적을 남겨놓았다. 그는 불요불굴의 정신으로 중화혁명당을 조직하고 3민주의동지련합회를 창건했으며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는 또 중국공산당의 새 정치협상회의에 참가하였으며 민주독립과 조국의 부강을 위해 평생의 정력을 이바지했다. 특히 중국공산당의 “5..1구호”에 호응하여 새 정협을 전개하는 운동에서 그의 주장과 영향력은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와 각 민주당파들이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접수하고 새 중국의 건설을 협상하는데 적극적인 작용을 일으켰다.
제1차국공합작시기에 담평산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풍운인물이였다. 담평산은 중국공산당 당원의 신분으로 국민당에 가입한후 1924년에 열린 중국국민당제1차전국대표대회에서 중앙상무위원으로 당선되였고 중앙조직부 부장직을 맡았다. 그리고 1927년 3월에 무한국민정부 위원 겸 농민부 부장직을 맡았다. 담평산은 성심성의로 손중산의 신3민주의를 옹호했다. 그는 손중산의 국민당개조를 도와준 국민당좌파의 중요한 령도인물중의 한 사람이였다.
더욱 관건적인것은 중국공산당의 일원인 담평산이 국민당내의 실권을 장악한것이다. 그는 국민당 제1기와 제2기의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과 중앙조직부 부장의 신분으로 국민당내의 좌파세력과 민주인사를 령도하여 각종 농민운동을 조직했으며 농민운동간부를 양성했다. 그는 국공량당의 합작을 기초로 한 혁명통일전선촉진과 제1차국내혁명운동의 발전을 위해 불멸의 공적을 세웠다.
제1차국내대혁명이 실패한후 담평산은 중국공산당이 령도한 8.1남창봉기에 적극적으로 참가했으며 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의 명의로 국민당중앙위원, 각 성위, 특별시 등 대표련석회의를 주최하여 선거로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를 산생시켰다.
1927년 8월 8일에 무한국민당중앙에서는 담평산의 당적을 제명하고 일제직무를 박탈한다고 선포했다. 그후 담평산은 봉기부대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갔다.
1927년 11월 9일에 중국공산당은 림시정치확대회의를 열고 담평산의 당적을 제명한다고 선포했다.
국민당좌파의 령도인물인 담평산이 숙당후의 국민당우파에 의해 당적을 제명당한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였다. 그러나 그는 그와 동시에 또 중국공산당중앙에 의해 당적을 제명당했다. 그 원인은 무엇이였을가?
주은래동지는 1944년 3월에 《당의 제6차대회에 관한 연구》중에서 담평산이 당적에서 제명당한것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담평산이 당적에서 제명당한것은 장국도가 남창봉기를 반대했을 때 담평산이 한 사장을 보고 ‘장국도가 만약 봉기를 반대한다면 그를 죽여버려야 한다’고 말했기때문이다. 당시 나는 전적위원회 서기직을 맡고있었는데 그 사장은 장국도살해여부에 대해 나의 의견을 물었다. 나는 당내투쟁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대답했다. 후에 누군가 이 사실을 공산국제대표에게 알려주었는데 공산국제에서는 담평산의 당적을 제명하기로 결정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의 결정이 타당한것이 아니였다.”
만약 담평산이 장국도를 죽여버려야 한다고 말한 일로 공산국제에 의해 당적이 제명했다면 이 처벌은 너무 과중한깃이며 도리에 맞지 않는것이다.
이 보다 더욱 설복력이 있는 설법은 1927년 11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림시정치확대회의에서 확정한 《정치규률결의안》에서 찾아볼수 있다.
“담평산동지는 제5차대회후 국민정부의 농정부장직을 맡았는데 남창봉기전후의 그의 행동과 주장은 당을 떠난 자유행동이였다. 무한국민당과 정부에서 공산당을 제거하려는 행동을 시작할 때 담평산은 비밀리에 등연달 등과 련계하여 중국CP를 취소하고 따로 제3당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지식분자동지들에게 중앙을 반대하고 따로 제3당을 조직해야 한다고 선전했으며 당의 결의를 무시하고 중앙의 동의도 없이 왕정위(汪精卫)한테 휴가를 맡았다. 그는 휴가신청서에 농민운동이 골치거리라고 욕을 퍼부었다… 그는 구강에서 중앙과 당을 무시하고 자유로 한다는 반당분위기를 불어넣었고 남창에서 계속 제3당에 대해 선전했다… 이는 본당조직의 행동과 위반되는것이기에 반드시 당적을 제명해야 한다.”
이 재료에서 볼수 있다싶이 담평산이 중국공산당에서 제명당한 원인은 당시의 중국공산당은 그가 엄중한 기회주의와 투항주의 착오를 범했다고 인정했기때문이다. 사실상 당시의 중국공산당의 이러한 관점은 공산국제의 영향을 받은것이였다. 제1차국내대혁명이 실패한후 공산국제는 즉시 국민당의 각파는 일률로 반동파라는 착오적인 판단을 내렸다. 1928년 2월에 공산국제집행위원회에서는 제9차전체회의에서 내놓은 《중국문제에 관한 결의》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원래 공산당원이였던 사람(례하면 담평산 등)들이 소위 ‘진정한 공산당’, ‘로농당’이라고 하는 새당을 창건하려고 하는것은 사실상 자산계급개량주의정당을 세우려는 시도이기에 중국공산당은 반드시 그들과 무정한 투쟁을 해야 한다.”
이 관점은 직접 중국공산당에 영향을 주었다. 중국공산당 제6차대회의 결의에서는 “중앙의 11월회의와 공산국제집행위원회 제9차전체회의에서 국민당 각파에 대해 내린 결정을 찬성한다고 하면서 그들은 모두 반혁명파벌이라고 확실하게 인정했다.
이로부터 당시의 중공중앙이 담평산의 당적을 제명한것은 공산국제의 영향을 받은 좌경사상의 착오적인 후과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평정산은 국민당과 공산당에게 모두 당적에서 제명당한후 적극적으로 국민당좌파와 중국공산당과 련계를 잃은 일부의 공산당원들을 조직하여 국민당, 공산당 이외의 새로운 혁명의 길을 개척하려고 시도했다.
1928년 3월에 담평산은 상해에서 일부분 국민당좌파, 애국지식분자들과 함께 등연달 등이 발표한 《모스크바선언》에 호응하여 중화혁명당을 조직했으며 장개석을 위수로 한 국민당우파들이 손중산의 3대정책을 포기한 내막을 폭로했다. 그는 또 중국공산당이 폭력투쟁을 강조하는것을 반대했다. 때문에 중화혁명당은 사람들에게 “제3당”이라고 불리웠다.
중화혁명당은 또 《돌격》, 《등탑》 등 주간을 출판하여 중화혁명당의 주장을 선전했는데 당시의 사회에서 일정한 영향력이 있었다. 1930년 봄에 담평산과 해외에서 돌아온 등연달은 계속 국민당명칭을 사용할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분기가 있었다. 그리하여 등연달은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림시행동위원회로 고치기전에 령도기관을 떠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평산은 의연히 농공민주당의 중요창시인의 한 사람으로 되였다.
그후 담평산은 비록 “제3당”을 떠났지만 의연히 혁명을 견지하고 조국의 독립과 부강을 위해 이바지하려는 립장은 한평생 변하지 않았다. 바로 이런 끈질긴 추구정신이 있었기에 담평산은 다시 중국공산당과 점점 더 가까와졌으며 결국 같은 혁명의 길을 걷게 되였다.
1949년 9월에 그는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기전체회의에 참가하여 전국정협위원으로 당선되였다. 그는 또 1949년 10월 1일의 개국대전에 참가했으며 건국후 중앙인민정부 위원, 정무원 정무위원, 정무원인민감찰위원회(감찰부의 전신) 주임 등 직을 력임했다. 그리고 1954년에 제1기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 제2기전국정협위원에 당선되였다. 또 1965년 2월에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 제3기전국대표대회에 출석하여 대만을 평화적으로 해방하기 위해 분투하자고 호소했으며 3월에 중국국민당혁명위원회 제3기의 중앙부주석으로 당선되였다. 그해 4월 2일에 북경에서 사망되였다. 《인민정협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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