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딸리아 파쑈당의 괴수이고 독재자이며 제2차세계대전의 원흉인 베니토 무쏠리니(贝尼托·墨索里尼)는 1883년 7월 29일에 이딸리아의 작은 진에서 태여났다.
학교에 다닐 때 무쏠리니는 말썽꾸레기였다. 툭하면 친구들과 싸웠고 선생에게도 대들기 일쑤였다. 하지만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기에 공부를 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집중할줄도 알아서 사범학교를 나왔다.
1919년 3월 23일에 무쏠리니는 밀라노(米兰)에서 “파쑈(法西斯)전투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는데 1921년에 이 조직을 “이딸리아국가파쑈당”이라고 고치고 이 당의 령수로 되였다. 1922년 10월 28일에 무쏠리니는 파쑈당의 군사조직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다. 폭동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한 무쏠리니는 그해 10월 30일에 내각총리로 되였다. 세계 최초의 파쑈국가가 이딸리아에서 탄생된것이다.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维托里奥·伊曼纽尔三世)는 이름뿐이고 실권은 무쏠리니에게 있었다. 무쏠리니는 정권을 잡은 직후 의회를 위협해서 법률을 독자적으로 개정할 권한을 가짐으로써 령수가 되였다. 이듬해에는 “선거결과 가장 많이 득표한 정당이 의석의 3분의 2를 차지한다”는 선거법을 만들어 파쑈당이 영구적으로 집권할 토대를 마련했다. 군대와 경찰간부는 파쑈들로 채워졌다. 집권이전과 마찬가지로 파쑈행동대가 날뛰며 정권에 비판적인 언론사나 사회주의자들을 습격했는데 징역중이던 흉악범들중에서 행동대 대장들을 특별채용했다. 무쏠리니는 “사납고 잔인한 자들이 좋다…불굴의 기백을 가진 자들! 범죄자들중에 쓸만한 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1924년 5월에 행동대가 정권의 비리를 고발한 사회당의 마테오티를 암살하자 맹렬한 반정부운동이 벌어졌는데 무쏠리니는 언론을 검열하고 사회주의자들을 무차별 검거함으로써 대응했다. 또한 1927년까지 지방자치제를 없애며 파쑈당외의 모든 정당을 페지하는 일련의 조치로 명실공히 독재체제를 수립했다.
하지만 겉보기와 달리 이딸리아파쑈은 같은 전체주의로 분류되는 독일의 나치스주의나 구쏘련의 스딸린주의처럼 절대적인 권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무쏠리니의 파쑈당은 아돌프 히틀러(阿道夫·希特勒)의 나치스(纳粹)당이나 쓰딸린의 쏘련공산당처럼 국가우에 군림하는 권력집단이 아니였고 국민의 사상을 개조하며 “열성집단”을 박멸한다는 목표를 추진하지도 못했다. 무쏠리니의 집권을 도와준 자본가들과 국가관료들 그리고 가톨릭교회는 막강한 힘을 유지했으며 이름뿐이라 해도 국왕의 대권도 유지되였다. 이들은 21년후에 결국 무쏠리니를 타도해버렸다.
무쏠리니의 권력은 화려하고 자극적인 볼거리로 유지되였다. 그는 로마식의 경례를 했으며 장교출신이 아니였음에도 원수군복을 입고다녔다. 그는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특유의 웅변술로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리고 해외원정으로 그 허풍을 조금이라도 실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국제련맹탈퇴를 불사하며 1935년에 에티오피아를 침략하고 1939년에 알바니아도 병합했다. 그러나 이딸리아군대의 허약체질은 개선되지 않아서 거의 두손을 들고있었던 알바니아를 점령하는데도 한껏 힘이 들었다. 제2차세계대전이 시작된후에는 독일에 압도당하고있던 프랑스와 힘들게 싸웠고 그리스와 애급을 침략하다가 도리여 반격당해 독일군의 힘을 빌리는 치욕을 겪었다.
히틀러는 권력을 잡으며 무쏠리니를 많이 본받았으나 얼마후에는 히틀러가 무쏠리니를 아래사람 대한듯하는 관계가 되였다. 독일과 이딸리아의 국력차이와 나치스와 파쑈의 국민장악력차이때문이였다. 히틀러는 어려움에 부닥친 무쏠리니를 여러번 도와주었으나 1939년의 “강철협정”에 명시된 조항에도 불구하고 타국과 전쟁을 벌릴 때 무쏠리니와 협의는커녕 통보조차 하지 않았다. 전쟁이 계속되며 히틀러가 무쏠리니에게 바라는것은 지중해쪽에서 련합군을 막는 방패막이와 “총알받이”에 지나지 않는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무쏠리니는 리해관계가 전혀없는 쏘련전선에 병력을 보내라는 히틀러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했다. 이때문에 10만명의 이딸리아인이 얼어붙은 땅에서 쓰러져갔다.
이렇게 되자 “공연히 히틀러의 전쟁에 말려들어 막강한 미국, 영국, 쏘련과 적이 되면서 실제리익은 전혀 챙기지 못하고있다”는 불만이 높아져 갔다. 화려한 연극도 하루 이틀이지 황제놀음과 호언장담도 점점 싫증이 났다. 1943년에 “비밀병기로 적들을 끝장낼테니 두고 보라”는 무쏠리니의 말을 비웃듯이 시칠리아섬(西西里岛)에 련합군이 상륙하고 로마(罗马)에 폭탄이 떨어지자 이딸리아의 파쑈당중에서 배반자가 나왔다. 1943년 7월 24일에 파쑈평의회에서 측근이던 디노 그란디와 그의 사위 치아노 등이 앞장서서 무쏠리니를 당수뇌에서 끌어내렸다. 그 다음날에는 이딸리아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무쏠리니의 수상직을 해임했다. 그리고 그를 체포하여 은밀한 곳에 가둬버렸다.
21년이나 집권하며 그토록 많은 군중을 열광시켰던 무쏠리니였지만 권력을 잃은 그를 위해 나서는 이딸리아인은 아무도 없었다. 나선 쪽은 오히려 독일인이였다. 이딸리아가 련합군쪽으로 돌아서면 곤난하다고 여긴 히틀러()는 특공대를 보내 무쏠리니를 구출했다. 그후 무쏠리니는 약 20개월정도 북이딸리아의 살로에서 “살로공화국”을 다스렸다. 하지만 그것은 허울뿐이였으며 대부분의 결정은 독일이 내렸다.
그랬지만 무쏠리니는 자신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배신자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배신자들을 처단할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했다. 독일은 이를 허락했다. 무쏠리니를 배신한 자들중에는 그의 사위 치아노백작(齐亚诺伯爵)도 있었다. 무쏠리니의 딸 에다(埃达)는 어느 무도회에서 젊고 전도가 유망한 외교관 치아노백작(齐亚诺伯爵)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 1930년에 결혼식을 올린 두 사람은 일순간에 전 이딸리아가 가장 부러워하는 한쌍의 부부가 되였다. 결혼후 에다는 남편 치아노를 따라 중국의 상해로 들어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안되여 에다는 남편이 밖에서 외도하는것을 발견했다. 에다는 “치아노가 아버지의 권력을 리용하려고 나와 결혼한것이 아닐가”하고 몹시 상심했다. 혼인위기가 발생되였을 때 상해의 국세가 악화되였다. 에다는 남편을 따라 이딸리아로 돌아왔다.
에다는 치아노가 비록 자신을 배신한 적이 있었지만 부부의 정을 생각해서 치아노를 살려달라고 아버지에게 애원했다. 무쏠리니는 딸을 가장 사랑했으나 사위만은 용서할수 없었다. 무쏠리는 딸의 눈물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위 치아노를 처형했다. 남편이 죽음을 당하자 에다는 두번 다시 아버지를 보려고 하지 않았다. 무쏠리니의 안해 라켈레도 그를 떠나버렸다. 늙고 지친 허수아비독재자 무쏠리니에게는 오래동안 그만을 사랑해온 련인 클라라 페타치만이 위로가 되였다.
1945년 4월에 련합군과 남부 이딸리아의 유격대는 힘을 합쳐 북진했다. 무쏠리니는 스위스로 넘어가 다시 비행기를 타고 에스빠냐로 탈출하려고 했다. 그러나 알프스산맥의 가파로운 길에서 유격대에게 잡히고말았다. 그들은 메제그라라는 마을에서 무쏠리니를 처형했다. 전하는 말로는 유격대 대장이 권총을 겨누자 무쏠리니는 “여기, 가슴을 쏴!”라고 외치며 외투를 열어젖혔고 련인 페타치가 그를 몸으로 막았다고 한다. 두 사람의 시체는 밀라노로 보내져 로레타광장(洛雷托广场)에 거꾸로 매달렸다. 이렇게 히틀러에 버금가는 독재자는 죄많은 일생을 마쳤다.
무쏠리니가 처음 파쑈국가를 세웠지만 오늘날에 파쑈이라고 하면 그보다는 히틀러를 먼저 떠올린다. 그가 군국주의를 내세웠지만 세계대전에는 소극적이였고 인종청소를 부르짖거나 대량학살을 벌리지도 않았기때문일것이다. 사실 그는 현대적인 독재자보다 고대의 폭군에 가까왔다. 로마황제처럼 그도 개인숭배와 화려한 볼거리로 계급분렬이나 지역갈등을 무마시키며 군림했다. 하지만 로마와는 달리 그의 군대는 허약했고 훨씬 강한 국가들에게 둘러싸여있었다. 히틀러가 현대사를 뒤흔든 대악당이라면 무쏠리니는 어리광대에 더 가까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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