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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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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을 팔아먹었다는 오명을 쓴 탕은백
2016년 01월 10일 10시 48분  조회:5295  추천:0  작성자: 넉두리

선생을 팔아먹었다는 오명을 쓴 탕은백
 
(번역)


 
 
상해에서 후퇴할 때 국민당 제37군은 강만(江湾)에서 후퇴할 준비를 하고 기다리라는 탕은백(汤恩伯)의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부대는 강만에서 오래도록 기다렸지만 탕은백한테서 소식이 오지 않았다. 군장 라택개(罗泽闿)는 사처에 사람을 파견하여 수소문해서야 탕은백이 강만의 수만명군사를 버리고 이미 상해에서 군함을 타고 도망쳤다는것을 알았다. 인민해방군이 공격해오자 갈길이 없는 37군은 손을 들고 투항하는수밖에 없었다. 라택개는 혼란을 틈타서 백성의 옷으로 갈아입고 사천로의 한 친구집에 숨었다. 며칠후에 조용해지자 라택개는 배를 타고 향항으로 도망쳤다.
라택개는 향항을 거쳐서 대만으로 갔다. 구사일생으로 대만에 도착한 라택개가 첫번째로 한 일은 부하들의 목숨은 상관하지 않고 자기만 살겠다고 달아난 탕은백을 질책하는것이였다. 탕은백의 측근은 탕은백을 감싸면서 도리여 라택개를 비난했다. 상대방은 서로 공격하면서 충돌은 더욱 격화되였다. 이 송사는 나중에 장개석까지 나서도록 커졌다.
상해를 잃은데는 탕은백에게 일정한 책임이 있었지만 필경 그는 장개석이 배치한 “서둘러 운송하는 계획”을 완성했고 마지막의 후퇴명령도 장개석이 내린것이였다. 후퇴질서가 매우 혼란하여 이미 후퇴명령을 기다리고있던 한개군을 포기한데는 탕은백의 책임이 있었다. 이 일에 대해 장개석은 탕은백을 두둔할수 없었다. 그는 회의를 열어 상해보위전에 대해 검토하는것으로 이 일을 해결하려고 했다. 회의는 진성(陈诚)이 주최했다.
“여러분, 오늘 회의를 열게 된것은 상해전을 돌이켜보려는것입니다. 상해를 잃은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가를 토론해보고  제가 회의의견을 장총재께 보고해드리겠습니다.”
진성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라택개는 벌떡 일어나서 “상해를 잃은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난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탕사령은 전장(战场)의 최고지휘관으로서 전투가 가장 치렬할 때 부대를 버리고 먼저 도망쳤습니다. 우리 37군의 수만명 장병들은 전쟁터에서 벼려져서 하늘을 향해 하소연해도 대답이 없었고 땅에 대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늘에 눈이 있어 나를 망하게 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진작 내가 공산군의 총에 맞아 귀신이 되였을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부하들은 불쌍하게도 부상당하고 포로되여 모두 대륙에 남았습니다. 난 그들에게 미안합니다!”
회장은 끓는 가마처럼 대번에 술렁거렸다. 어떤 사람들은 탕은백을 질책하면서 상해를 잃은 책임을 모두 그가 져야 한다고 했고 어떤 사람들은 “옹군 국민당이 모두 대륙을 잃고 대만으로 도망쳤는데 그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고 따지면서 탕은백을 두둔했다. 탕은백은 줄곧 침묵을 지키다가 회의가 끝날 무렵에야 손을 들고 발언했다.
“여러분, 상해를 잃은데 대해 전구(战区)사령관인 내가 응당 주요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후퇴명령은 총재께서 실력을 보존하기 위해 친히 내렸습니다. 후퇴는 질서있고 계획에 따라 실시되였습니다. 당시 오송구(吴淞口)밖의 배는 적재량이 8톤이였는데 장갑병을 포함한 8만명의 부대를 모두 싣고 후퇴했습니다. 37군도 원해 배를 타고 후퇴할수 있었지만 후에 공산군의  선두부대가 오송구를 공격하여 전화가 통하지 않아서 내가 파견한 련락원과 련계할수 없었습니다. 만약 후퇴하지 않고 좀 더 기다렸다면 우리 모두 공산군의 대포밥이 될것이 뻔했습니다. 나는 할수 없이 배를 출발시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37군이 후퇴하지 못한것에 대해 나도 몹시 가슴이 아팠습니다.”
여기까지 듣고있던 라택개는 탕은백의 말을 중동무이를 하고 화가 나서 소리쳤다.
“형제들이 채 후퇴하지 않았는데 당신이 먼저 도망치고도 무슨 체면이 변명하는겁니까? 당신은 응당 총으로 자살하여 당국에 사죄하고 천하에 사죄해야 합니다. 당신은 가슴이 아파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 말에 탕은백은 노하여 소리쳤다.
“라택개! 네가 적전을 잘못해 진지를 잃고 37군이 대륙을 잃은거야. 그러니 넌 직접적인 책임을 져야 해! 너야말로 진작 자살해야 했어. 무슨 낯짝에 목숨을 달고 대만까지 도망쳐왔어?!”
두 사람은 서로 손가락질하며 상대방을 질책했다. 진성은 하는수없이 37군문제는 군사법정에 넘긴다고 선포했다.
이 송사는 후에 진성이 라택개와 탕은백을 찾아가서 화해를 시키면서 흐리부지해지고말았다.
라택개의 송사가 해결되지 못했는데 진의(陈仪)에 대한 처리문제가 또 탕은백을 골치아프게 했다.
진의는 대만에 호송되여온후 기륭요새사령부에 감금되였다. 그는 정서가 저락되여 온종일 한마디 말이 없었으며 어떤 사람과의 담화도 거절했다. 탕은백은 대륙에서 대만으로 도망쳐온 초기에 면구스러워 찾아가지 못하고 측근 진대경을 시켜 두번 일상용품을 사가지고 진의를 보러 가게 했을뿐이였다.
1950년 6월, 조선전쟁폭발전야에 대만형세는 급변했다. 장개석은 인민해방군이 대만을 공격할가봐 진의를 재판하라고 명령했다.
원래 진의는 탕은백이 고발한것이였다. 1948년 11월에 절강성정부 주석직을 맡고있던 진의는 절강성경보처 처장 모삼(毛森)이 처결하라고 비준했던 100여명의 공산당원과 진보인사들을 풀어주었다. 그는 또 1949년 1월에 중공지하조직의 도움을 받아 이전의 부하 탕은백에게 봉기를 일으키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탕은백은 장개석에게 고발했고 진의는 “공산당과 결탁하여 모반음모를 꾸몄다”는 죄명으로 붙잡혔다.  
탕은백은 장개석에게 보고하면 장개석이 자신과의 정분을 생각해서 진의에게 최대로 해직처문만 내릴것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모인봉이 진의를 압송하여 대만으로 왔을 때 “총재께서는 진선생을 대만으로 호송해오면 안전할것이라고 말했는데 별일이 없을것입니다”라고 말했던것이다. 그런데 지금 군사법정에서 재판을 한다고 하니 진의는 죽음을 면할수 없을것이 뻔했다.
탕은백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는 장개석이 이미 대남으로 가고 대북에 없었다. 즉시 대남으로 찾아간 탕은백은 장개석을 만나려고 했다. 그러나 사흘을 기다려도 장개석은 만나주지 않았다. 나흘째 되던날에 장개석의 시종이 탕은백에게 말했다.
“총재께서 이미 대중(台中)으로 갔는데 떠날 때 진의의 문제가 해결된 후에 당신을 만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탕은백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해 서있었다. 하지만 탕은백은 포기하지 않았다. 급히 대북으로 돌아간 그는 선후로 상해에서 환난을 같이 겪었던 곡정강, 뢰진, 방치, 진량을 찾아가서 장개석앞에서 좋은 말을 하여 진의를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모두들 진의는 죽은 목숨이나깐 구할 방법이 없다고 대답했다. 뢰진은 “그 어른이 죽이겠다고 마음먹으면 꼭 죽이고야 마는것이니깐 당신은 찾아가지 마십시오”하고 직방 말했다.
아무리 해도 어쩔수 없게 된 탕은백은 마지막으로 동갑인 모인봉을 찾아갔다.
“자네가 장총재께 잘 말해보게. 당년의 약속을 지켜 진선생의 목숨을 살려달라고 말이네.”
모인봉은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대답하고 장개석을 찾아갔다. 그러나 며칠후에 모인봉이 탕은백을 찾아와서 말했다.
“내가 장총재를 찾아가서 애걸했지만 줄욕만 얻어먹었네. 이제 나도 방법이 없네.”
1950년 6월 18일에 진의는 사형장에 끌려가 총살당했다. 진의는 큰 걸음으로 사형장으로 걸어가면서 소리쳤다.
“사람은 죽어도 정신은 죽지 않는다!”
탕은백은 진의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대성통곡했다. 그는 자택에 고인의 빈소를 세우고 절하면서 참배했다.
사흘째 되는 날에 장개석은 탕은백을 불렀다. 장개석을 만난 탕은백은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분을 다 풀지 못한 장개석은 탕은백을 훈계했다.
“진의는 법에 의해 처결되였고 죽어 마땅한데 자넨 왜 아직도 우는거야? 듣자니 자네가 집에 진의빈소를 세웠다던데 돌아가서 당장 없애버리게!”
탕은백은 집에 돌아간후 눈물을 흘리면서 빈소를 없애버렸다.
진의가 죽은후 탕은백은 대만군정계에서 “선생을 팔아 부귀영화를 누린다”는 죄명을 쓰게 되였다. 친구들도 래왕이 적어졌다.
1954년 6월 29일에 탕은백은 일본에서 치료를 받다가 수술대우에서 사망되였는데 그의 죽음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되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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