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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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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소평과 화국봉의 아슬아슬한 쟁론
2016년 02월 20일 09시 34분  조회:7017  추천:1  작성자: 넉두리

등소평과 화국봉의 아슬아슬한 쟁론
 
(번역)


 
 
등소평이 갓 복직했을 때는 의연히 화국봉이 중국의 방향을 장악하고있었다. 국정방침은 어떠한 실질적인 변화도 없었다. 계급투쟁은 의연히 “기본고리”였고 “두가지 무릇”은 의연히 주류사조였다. 또 “세세대대로 모택동사상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추켜들자”는 화국봉의 가르침이 전국에 전해지고있던 시기였다. 등소평은 앞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과거에 대해 설명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는 중국을 이끌고 미래를 향해 달릴 때 무거운 과거의 짐을 지고갈수 없었다. 과거에 대해 똑똑히 말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수 없었다. 이는 의식형태의 문제이면서도 권력이 누구에게 속하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전자의 문제: 모택동이 아직도 중국인의 도사로 될수 있는가? 만약 될수 있다고 하면 모택동에게 여러번이나 비판을 받고 두번이나 타도되였던 등소평이 무슨 리유로 다시 정치에 나설수 있겠는가? 만약 될수 없다면 정신지주가 없는 중국이 미래로 향해 나갈 힘이 있겠는가?
후자의 문제: 문화대혁명이 남긴 지금의 권력체계이다. 이것을 절대로 계속 이후 중국의 원칙근거로 할수 없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화국봉과 관련되여있었다.

“두가지 무릇”에 대한 비판은 화국봉과 련계되지 않게 할수 없겠는가? 만약 화국봉과 련계된다면 또 허락을 얻을수 있겠는가? 중국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은 리해할수 없을것이다. 지금의 중국사회 가치관념으로 가늠해보아도 어리둥절해할것이다. 그러나 당시는 1978년 가을이였고 이 문제는 확실히 중국의 전반적인 대세중의 결정적인 부분이였다.

“두자지 무릇”은 모택동의 후계자와 정치유산계승자인 화국봉이 형세를 안정시키고 자신의 정치지위를 든든히 하기 위해 제출한 주요한 정치방침이였다. “두가지 무릇”은 “무릇 모주석께서 결정한 결책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모두 옹호해야 하며 무릇 모주석께서 내린 지시에 대해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이 따라야 한다”는것이다.

북경에서 나타난 이 쟁론은 1977년 봄부터 시작되였지만 멈추지 않았다. “두가지 무릇”을 견지하는 진영의 사람들은 패배중에 있었고 반대진영의 사람들은 점차 강대해지고있었다. 마치 한가닥의 “화근”이 1978년 여름에 닥쳐와 중남해의 높은 담장을 뚫고 나가 전국을 휩쓸은것 같았다.

그런데 가장 먼저 진동을 받은것은 머나먼 지방인 대서남이였다. 6월 25일에 감숙성당위 제1서기 송평은 리론학자들을 모아놓고 “용기를 내여 진리를 추구하라”고 했고 또 “이것은 금지구역이고 저것도 금지구역이라고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두 주일이 지나서 이 “역류”는 다른 한 머나먼 지방인 동북으로 휩쓸어갔다. 흑룡강성당위 제1서기 양역신은 부하들에게 “사상을 해방”하라고 하면서 무슨 말이나 다 할수 있고 약점을 잡지 말고 모자를 씌우지 말며 몽둥이로 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또 두 주일이 지났을 때 료녕성당위제1서기 임중이는 더욱 단호하게 말했다.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유일한 표준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현재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바른 상태로 되돌릴수 있는 최선의 선택입니다.”

그후 서북방향에서 또 호응했다. 신강위글족자치구당위제1서기 왕봉은 이렇게 말했다.

“진리의 표준은 오직 사회실천뿐입니다.”

그는 또 “이 문제를 승인하는가 안하는가 하는 문제는 하나의 리론문제일뿐만아니라 우리 당과 국가의 사상로선, 정치로선과 관계되는 문제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이 “역류”는 남쪽으로 흘러내려갔다. 그해 9월 상순에 복건성당위서기 료지고는 “과학리론은 객관적법칙을 증명하는 론거이지 진리를 검험하는 표준이 될수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는 당과 국가의 전도, 운명과 관계되는 큰 문제입니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확실히 고의로 과장하여 듣는 사람을 놀라게 하려고 한 말이 아니였다. 적어도 등소평이 보기에는 그랬다. 그러나 등소평은 이 몇몇 성당위서기들이 나서서 말했다고 해서 일이 다 된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는 이 쟁론을 전국에 확대하여 “무릇파”가 부끄러워 얼굴을 들수 없게 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래야만이 자신의 리론도 새 시대의 주류로 될것이고 진일보 행동하면서 가는곳마다 “불을 지필수” 있다고 여겼다.

등소평은 17개월전부터 개혁의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1977년 4월 10일에 그는 “완전히 정확하게 모택동사상을 리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1977년 5월 24일에는 또 “두가지 무릇”은 안된다고 말했고 1978년 5월 30일에는 또 “지금 실천은 진리를 검증하는 표준이란것마저 문제가 되고있습니다. 그야말로 해괴한 일입니다”라고 말했으며 1978년 6월 2일에는 “어떤 사람들은 누가 실사구시를 견지하고 실제로부터 출발하여 리론과 실천을 결합하면 천추에 용납못할 큰 죄악이라도 지은줄로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관점은 사실상 맑스, 레닌, 모택동의 본래 말대로 따라하고 그대로 전하고 그대로 적용하면 된다고 주장하는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맑스레닌주의, 모택동사상을 위반하고 중앙정신을 위반한것이라고 여깁니다. 그들이 제기한 문제는 작은 문제가 아니라 맑스주의, 모택동사상을 어떻게 보는가에 관계되는 문제입니다.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 정상으로 되돌리고 정신적 속박에서 벗어나려면 우리의 사상을 크게 해방해야 합니다.”

1978년 7월 22일에 등소평은 “론쟁은 피면할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나서서 론쟁하는 근본원인은 ‘두가지 무릇’입니다”하고 말했다.
등소평의 말은 모두 북경의 높은 담벽안에 한 말이였다. 지금 그에게 수요되는것은 중남해에서 나와서 이 옛도시밖으로 나가는것이였다. 그는 황금의 가을에 전문렬차에 올라 북방으로 달려갔다.

1978년 9월 14일 새벽에 등소평일행은 길림성 도뢰소역에 도착했다. 흑룡강성당위서기 리력안이 플래트홈에서 기다리고있었다. 기차가 잠간 멎은후 등소평은 흑룡강성 대경유전으로 곧추 달리라고 요구했다. 이어 또 멈추지 않고 할빈까지 달려갔다. 그는 마음속에 할말이 많았다. 그는 리력안과 물질장려에 대해 담론했고 대경시당위서기 진렬민과 외국설비를 도입할 문제에 대해 담론했다.
9월 16일에 등소평은 길림성 장춘시에 도착했다. 남호호텔에 들어간후 길림성당위서기 왕은무가 강화를 요청했을 때 그는 다시는 말을 에두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지금 우리앞에 놓여있는 문제는 두가지입니다. 첫째문제는 리론과 실천의 련계인데 모든것은 실천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지금 사람의 사상이 경직되여 무엇이나 모두 우에서 말한것이면 그대로 합니다. 화주석이나 그 부주석이 말한것이면 그대로 하지요. 자기절로 사고하려고도 하지 않고 진정으로 소화하려고도 하지 않지요.”

이 말은 직방적일뿐만아니라 신랄하고 예리해서 현장에 있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흥분하게 했다. 그런데 생각밖에도 등소평이 더욱 예리하게 말했다.

“두번째문에는 어떻게 모택동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받들겠는가 하는것입니다. 이는 큰 문제입니다. 여러분들도 과거에 ‘두가지 무릇’에 대해 의론했지요? 무릇 모주석께서 서명하고 말씀한것은 움직이지 못하고 무릇 모주석께서 해놓은것은 무두 움직이지 못한다고 했는데 이것이 모주석의 위대한 기치를 높이 든것이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잘못하면 모주석의 명성을 손상시키게 됩니다. 모주석의 가장 위대한 점은 실사구시입니다. 맑스와 레닌은 종래로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포위해야 한다고 말한적이 없습니다. 당시 세계상에도 그런 선례는 없었습니다. 모주석의 위대한 점은 무엇입니까? 바로 중국의 구체적인 조건에 근거하여 혁명의 구체적인 도로를 밝혀준것입니다. 만약 실사구시의 기본사상이 없었다면 중국의 실정에 맞는 이런 길을 가르켜줄수 있었겠습니까? 중국혁명을 승리에로 이끌수 있었겠습니까?”

이 말을 마친후 등소평은 장춘을 떠나 심양으로 갔다. 이번에 등소평은 “두가지 무릇”이 진정한 모택동사상이 아니라는것을 말했을뿐만아니라 “두가지 무릇”이 이미 중국의 백성을 편안히 생활수 없게 했다는것을 암시했다. 등소평은 이렇게 말했다.

“모주석께서 우리에게 수립해준 실사구시의 우량한 전통과 작풍을 회복하지 않으면 우리의 네가지 현대화는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가난하고 너무 뒤떨어졌는데 솔직하게 말해서 인민들에게 미안합니다. 우리의 인민은 너무 좋습니다. 참을성도 이제는 한계에 달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반드시 생산력을 발전시켜야 하며 인민의 생활조건을 개선해야 합니다.”

그의 이런 말은 앞에 있는 고급관원들을 들으라고 한 말이였다. 그러나 분명히 백성들에게는 더욱 듣기 좋은 말이였다. 사실 등소평은 전국에서 모두 일떠나 그에게 호응할것을 바라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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