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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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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강 림표가 항미원조를 반대했는가?
2017년 01월 01일 12시 34분  조회:4428  추천:2  작성자: 넉두리
고강 림표가 항미원조를 반대했는가?




 
 
1954년에 중국공산당 제7기4중전회에서 고강, 요수석사건에 대해 결정을 내린후 고강이 항미원조에 출병할것을 반대했다는 설법이 있었다. 1971년의 “9.13”사건후에도 또 림표가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는 설법이 있었다. 20세기 90년대말까지 항미원조전쟁에 대해 언급한 개별적인 저작에서 이런 설법이 있었다. 그럼 고강과 림표가 정말로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는가?
 
고강과 림표가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는 설법은 근거가 부족하다. 1950년 6월 하순에 미국이 무장으로 조선내전을 간섭하고 대만해협을 침입하자 중공중앙에서는 항미원조에 출병하고 대만해방을 뒤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당시 각 중앙국의 주요지도자들중 고강이 제일 먼저 알고있는 사람중의 하나였다.
 
1950년 7월 7일에 중앙군위에서 동북변방군을 조직할데 대한 문제를 연구했고 그 이듵날에 변방군에 편입된 부대는 즉시 광주, 중원 등지로부터 동북으로 집중되였다. 이미 확정된 변방군 사령원 겸 정치위원 속유, 부사령원 소경광, 부정치위원 소화는 병으로 잠시 와서 직무를 맡을수 없었다. 1950년 7월 22일에 주은래와 섭영진은 련명으로 모택동에게 “변방군을 먼저 동북군구에 귀속시켜 고강사령원 겸 정치위원의 지휘를 받게 하는게 어떻겠습니까”하고 건의했다. 모택동은 그 건의를 비준했다.
 
동북변방군의 공급과 참전에 수요되는 물자준비, 장비의 보충과 수리, 운수, 전방동원 등 참전준비는 모두 동북군구 사령원 겸 정치위원인 고강의 직접적인 지도하에서 진행되였다.
 
1950년 8월중순후에 조선전쟁은 작아대치국면이 나타났다. 그해 8월 31일에 고강은 모택동에게 조선전쟁상황과 변방군준비사업에 대한 몇가지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 보고했다.
 
“현재 아군의 어떤 간부들중에는 일본군이나 국민당군과 싸울 때의 안광으로 오늘의 적을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적들의 전술, 공군, 대포 등 특점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 말입니다. 또 일부 간부들은 미국공군에 대해 속수무책인데 전문가들을 조직하여 적의 작전특점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래야만이 작전시 적을 소멸할 파악이 있게 됩니다.”
 
모택동은 1950년 9월 3일에 고강에게 “반드시 현대전쟁의 관점으로 부대를 교육해야 합니다. 절대 적을 경시해서는 안됩니다. 당신의 의견은 정확합니다. 그 문제에 대해 연구해봅시다”라는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이는 고강이 동북변방군의 작전준비사업에 대해 적극적이고 주동적으로 나섰다는것을 말해준다.
 
주은래와 팽덕회가 그후에 했던 보고에서도 볼수 있다싶이 중공중앙정치국에서 항미원조출병에 대해 토론할 때 확실히 부동한 의견이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양상곤신변에서 사업했던 일군의 말에 의하면 양상곤은 “당시 출병에 대해 찬성하는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출병을 하지 말자거나 잠시 출병을 하지 말자는 의견이 다수였습니다”라고 말한적이 있었다.
중앙정치국회의에서 결정을 내리기전에 고강이 출병하는데 찬성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가 혼자 아니였을것이다. 찬성했건 반대했건 모두 당내의 민주체현으로 정상적인것이였다. 더구나 어떤 의견이든 모두 당과 국가의 리익을 책임지기 위해 고려한것이였다. 때문에 누가 찬성하지 않는다는 의견을 내놓았다고 해서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고 하는것은 공정하지 못한것이다. 중공중앙정치국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여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결정을 내린후 출병을 찬성하는 고강의 태도는 견결했고 매우 적극적이였다.
 
1950년 10월 8일에 모택동이 중국인민혁명군사위원회 주석의 명의로 서명한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할데 관한 명령중의 규정에는 “중국인민지원군은 동북행정구를 총후방기지로 한다. 총후방기지는 모든 후방사업과 조선을 지원할데 대한 사무를 담당한다. 동북군구 사령원 겸 정치위원 고강동지가 총부방사업의 배치를 지휘하고 책임진다”는 내용이 있다. 그날 고강은 방금 지원군 사령원 겸 정치위원직을 맡은 팽덕회와 함께 심양으로 날아갔다. 1950년 10월 9일에 고강은 팽덕회와 함께 지원군 군이상간부회의를 열고 출국작전에 대해 상의했다.
 
1950년 10월 8일에 주은래는 모택동과 중공중앙의 위탁을 받고 림표더러 쏘련에 가서 쓰딸린 등 쏘련지도자들에게 중공중앙정치국회의에서 출병을 결정한 정황을 통보하고 쏘련측에서 무기장비와 공중엄호를 제공해줄것을 요구하라고 부탁했다. 쓰딸린은 쏘련공군이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서 3개월내에는 중국지원군작전을 엄호할수 없다고 대답했다.
 
이 소식이 북경에 전해지자 모택동은 1950년 10월 13일에 다시 중공중앙정치국위원회의를 소집했다. 그번 회의에서 고강은 항미원조에 출병하는 대해 태도가 매우 견결했다. 고강과 팽덕회는 쏘련에서 공군이 출동하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는 반드시 출병해야 한다고 표시했다. 모택동은 그날 주은래에게 보내는 전보에서 “고강, 팽덕회동지 그리고 기타 정치국동지들과 상의한 결과 우리 군은 반드시 항미원조에 출병해야 한다고 일치하게 인정했습니다”하고 썼다.
 
1950년 10월 14일 3시에 모택동은 다시 주은래에게 전보를 보내여 “팽덕회와 고강동지는 모두 괴뢰군과의 싸우면 승산이 있다고 인정했습니다. 그들과 나는 모두 참전이 꼭 유리하다고 인정했습니다.
 
첫째, 지원군이 출동한후 팽덕회는 동북총후방기지의 사업에 만족을 표시했다. 팽덕회는 항미원조전쟁기간에 “지원군이 전선에서 승리한데는 두 사람의 공로가 크기에 응당 그들에게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그중 한사람은 고강이고 다른 한사람은 홍학지(지원군 부사령원 겸 지원군후방근무사령부 사령원직을 맡았음)입니다.
 
둘째, 중공중앙정치국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여 항미원조, 보가위국의 결책을 내온후 고강의 태도와 행동을 보면 고강이 항미원조에 대해 태도가 견결했고 적극적이였다는것을 알수 있다.
 
셋째, 1951년 11월에 고강과 림표는 동시에 중앙군위 부주석으로 임명되였다.
림표가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는 설법은 주요하게 그가 병을 핑계로 지원군통수직을 맡지 않겠다고 한것과 관계된다. 그리고 또 중공중앙정치국에서 항미원조출병을 결정한후에도 림표가 의연히 출병을 반대했다는것이다.
 
모택동은 확실히 림표에게 지원군통수직을 맡기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1950년 8월 31일에 고강은 변병군이 출동후 해당문제 대해 모택동에게 보낸 편지중에는 “부대를 지휘하는 통수와 전문인재가 빨리 동북에 올것을 건의합니다. 그래야 충분히 준비할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이 있었다. 모택동은 1950년 9월 3일에 고강에게 회답편지를 보냈다.
 
“림표와 속유는 병이 있고 또 두 사람은 이 기간에 해야 할 사업이 있어서 잠시 나가지 못할것입니다. 아마 몇개월후에야 가능할것 같습니다.”
 
모택동의 이 편지에서 림표는 확실히 병이 있었다는것을 알수 있다. 때문에 한달후에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여 항미원조에 출병할 때 림표는 지원군 통수를 맡을수 없었던것이다. 중공중앙의 결정에 의해 림표는 쏘련에 가서 치료를 받았다.
 
당시 림표는 중공중앙정치국 위원이 아니였다. 양상곤의 일기와 그번 회의에 참가했던 박일파에 따르면 림표는 1950년 10월 4일 오후와 5일 오후에 중공중앙정치국확대회의에 참가했다.
 
림표가 회의에서 무슨 의견을 발표했던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고 말할수 없다. 중공중앙정치국에서 항미원조출병을 결정한후에도 림표가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는 설법은 증거가 없어 믿음성이 없다. 그러나 1951년 11월 5일에 중앙인민정부위원회 제13차회의에서 고강과 림표를 동시에 중앙인민정부 인민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 보충선거했다.
 
1951년말과 1952년초에 림표가 3개월간 중앙군사위원회의 일상사업을 주최했다. 항미원조는 당시 중국공산당과 중국인민에게 첫째가는 대사였기에 만약 고강과 림표가 항미원조출병을 반대했다면 모택동과 중공중앙에서 그들을 그토록 신임하지 않았을것이고 항미원조가 시작되여 1년이 지난후 그들을 중앙군위 부주석으로 보충선거하지 않았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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