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택동은 왜서 대약진착오를 승인했는가?
1960년 여름이 되여 모택동은 압력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창도한 “대약진”과 인민공사운동중에서 일부 일처리방법과 구호에 대해 확신이 없었고 동요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상상할수도 없지만 1959년 봄에 중남해의 중앙지도자들의 집에는 비서가 지도자들에게 식량분량을 자보받아 그 표준대로 공급하는 일이 벌어졌다. 당시 국가에서는 매개 도시인구에 규정된 배급식량을 최저한도로 감소하고 량식배급에 대해 저표준분량으로 정할것을 요구했으며 남새로 량식을 대체하게 했다.
당시에 몸이 웅장한 모택동이 자보한 정량은 매달 26근이였고 류소기가 18근, 주은래가 24근, 주덕이 26근이였다. 이 정황이 중앙의 각 당지부와 당소조에 알려진후 모두들 중앙고위급지도자들의 식량표준이 너무 낮다고 인정하면서 적어도 절대 대부분 남성간부들의 식량표준(28근)과 같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중앙지도자들은 모두 만족된다고 하면서 변동하지 말라고 견지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자보한 분량만큼 그들에게 량표(粮票)를 발급했다.
이런 국면은 하루 아침에 조성된것이 아니였다. 1958년부터 “대약진”을 시작하면서 1959년에 모택동은 또 착오적인 려산회의에서의 투쟁을 발동했다. 그번의 “반우경”운동은 극좌사조가 늘어나게 만들어 짧디짧은 3년내에 국민경제가 엄중하게 불균형을 이루었고 전국적으로 량식이 대폭 줄어들었으며 삼림이 엄중하게 파괴되였을뿐만아니라 농민들이 기아에 시달렸고 질병이 련이어 발생했다. 그 시기 굶어죽고 질병에 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모택동은 백성들이 기아에 시달리고 굶어죽는다는 소식을 들은후 근심걱정으로 애가 타서 안절부절못했다.
1960년 6월 14일부터 18일까지 중공중앙에서는 상해에서 정치국확대회의를 열고 경제문제와 국제문제에 대해 토론했다. 회의의 마지막날에 모택동은 두시간에 거쳐 《10년총결》을 써냈다. 말이 10년총결이 사실은 주요하게 3년동안의 대약진총결이였다. 그날 오후의 페막식에서 모택동은 3년보충계획지표와 《10년총결》에 대해 연설했다.
모택동은 《10년총결》에서 자아비판을 했다.
“나 자신도 많은 착오가 있었습니다. 어떤것은 당사자와 함께 범한것입니다.”
모택동은 고지표는 결심하고 고쳐야 합니다. 고쳐야만 완전히 주동을 쟁취할수 있습니다. 주동권은 극히 중요한 일입니다.”
모택동은 또 사회주의시기의 혁명과 건설에 있어서 매우 큰 맹목성이 있었고 인식하지 못한것이 있었다고 승인했다. 그는 “우리는 아직도 그에 대해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고있는데 두번째 10년기간에 조사연구하여 그에 대한 고유의 규률를 찾아내야 하며 그 규률을 리용하여 사회주의혁명과 건설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고 말했다.
《10년총결》은 모택동이 처음이자 유일하게 계통적으로 3년동안의 대약진을 총결한 문장이였고 또 그 자신이 처음으로 “대약진”과 인민공사운동중에서 착오가 있었다는것을 승인한 중요문헌이였다. 하지만 당시의 정황에서 모택동은 지도사상상의 “좌”적인 착오를 인식하지 못했고 또 인식할수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쏘련에서 재중전문가를 전부 철수시키는 엄중한 문제가 발생되였다. 당시 중국을 도와주려고 온 쏘련전문가는 모두 1300명이 있었는데 경제, 국방, 문교, 과학연구 등 200여개 기업과 부문에 분포되여있었다.
그들이 전부 철수하면 중국의 일부 중대한 설계항목과 과학연구항목이 중도에서 중단하게 되고 일부 시공중에 있는 건설항목도 중지하게 되며 일부 실험생산에 들어간 공장과 광산도 기한내에 생산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이는 곤경에 처한 중국경제에 설상가상이 아닐수 없었다.
1960년 7월 31일에 모택동의 주최하에 주은래는 회의에서 쏘련전문가들이 철수한 문제와 외교무역문제에 대해 보고했다. 후르쑈브가 고압정책을 쓰며 핍박하자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고 빚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모택동은 묵묵히 줄담배만 피우다가 마지막에 “명년내로 빚을 다 갚읍시다”라고 말했다.
회의의 마지막날에 모태동은 1시간동안의 강화를 했는데 국내문제에 대해 말하다가 갑자기 량식생산을 틀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택동은 전답관리를 잘하고 가을걷이, 가을곡식심기를 잘하며 량식을 많이 심고 량식을 많이 생산하라고 지시했다.
백성은 식량을 생존의 근본으로 여긴다고 먹는 문제가 첫째였다. 농촌인민공사가 급히 “공산주의”로 과도한다는 바람이 부는 정황에 대해 “생산자료는 각각 인민공사, 생산대대, 생산대 3급에 속하고 생산대로 기초로 한다”는 정책은 적어도 5년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5년후에 다시 말합시다. 꼭 개인소유제부분이 있어야 하고 사원들에게 약간의 자류지를 주어야 합니다. ‘대집체, 소자유’는 1958년 무창회의결의때 제기한것인데 이 점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내가 한 말은 나 개인의 의견이 아니고 우리가 과거에 공동을 결정한것입니다. 그리고 중앙에서 지시한것인데 오늘 내가 다시 한번 중복한것입니다.”
모택동이 이런 정책을 재차 천명한것은 당의 농촌정책이 앞으로 새로운 조정이 있게 된다는것을 예시했다.
세심한 사람들은 모택동이 회의에서 한마디말밖에 하지 않았다는것에 주의를 돌렸을것이다. 북대하에서 회의를 하는 한달남짓한 기간에 모택동이 바다에 들어가 수영을 한 차수는 5~6번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는 이왕에 매우 드문 일이였다.
과연 모택동의 심정은 매우 무거웠다. 그는 늘 혼자서 오래동안 쏘파에 앉아서 침묵을 지키군 했다. 잠도 잘 자지 못했다. 국제상에서 쏘련 등 방면에서 압력을 가하고 국내에서는 당초 예상하지 못했던 수습하기 어려운 경제국면이 나타났다. 1960년 10월에 들어선후 일부 농촌에서 사람이 굶어죽는 엄중한 사건이 갈수록 많아지고있다는 정황이 모택동한테까지 반영되였다. 그 정도로 문제가 엄중한것을 보고 몹시 놀란 모택동은 다시 국내문제에 정력을 집중했다.
1961년 1월 14일부터 18일까지 열린 중공중앙 8기 9중전회에서 리부춘은 “국민경제가 3년의 대약진을 거치면서 새로운 불균형과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고 하면서 “1961년부터 2~3년내에 조정, 공고, 충실, 제고의 방침을 실행해야 한다”고 했다.
회의에서는 이 《의견》을 통과했고 회의공보중에 정식으로 전당화 전국인민에게 선포했다.
1961년부터 국민경제에 대해 “조정, 공고, 충실, 제고”의 8자방침을 실행한다. 그 주요내요은 농업을 대대적으로 회복하고 국민경제의 집중통일관리를 가강하며 종업원과 성진인구를 감소하며 시장공급을 안정, 조절하는것이다.
중앙에서 1960년 11월에 《농촌인민공사의 현정책문제에 관한 긴급지시》를 내보낸후 1961년 3월과 5월을 선후로 광주와 북경에서 사업회의를 열고 《농촌인민공사사업조례(초안)》에 대해 토론하고 수정했다. 전국 농촌에서 《긴급지시편지》와 《농촌인민공사사업조례(초안)》의 기본정신을 시행하는것은 생산대대를 기본핵산단위로 하는 3급소유제를 다시 천명한것이다. 이는 현계단 농촌인민공사의 기본제도이다. 동시에 배상정책을 견결히 실행하고 량식수매를 감소하며 농민부담을 경감할것을 요구했다. 또 농부산품수매가격을 제고하고 적당한 매매정책을 규정하며 각항각업에서 농업에 대한 지원을 가강하라고 했다.
그리고 중앙에서는 최근 2~3년내에 반드시 경제관리대권을 더욱 많이 중앙과 중앙국에 집중하고 1958년이래의 지방주의와 분산주의를 반대하기로 결정했다. 동시에 종업원인수와 비농업인구를 줄이고 1961년에 각각 960만과 1000만 두가지 지표를 완성할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사회집단구매력을 강력하게 줄이고 일상용공업제품과 수공업제품을 회복, 발전시키고 18가지 종류의 기본생활필수품가격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부분적 소비품에 대해 고가를 실행하고 류통경로를 증가하기로 했다. 상술한 조정조치의 정식시행은 엄중한 경제곤난국면을 호전시키는데 적극적인 작용을 했다. 게다가 자연재해까지 감소되여 농업생산에서 호전의 조짐이 보였다. 1961년의 량식산량은 전해에 비해 2.6% 증가해 도시주민의 최저생활수요를 기본적으로 보장했다.
몇년간의 간고한 노력을 거쳐 당시 엄중하게 균형을 잃었던 국민경제가 기본상 회복되기 시작하였고 인민의 생활도 어느 정도 개선되였다. 특히 농민, 로동자, 도시인구지표를 조정하는 동시에 공산당은 지식분자와 여러 정치파벌과의 관계를 조정하였다. 비록 이런 노력은 좌경사상이 지도하는 당시의 정황에서 전면적으로 철처하게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지만 공화국의 령수와 인민군중이 동고동락하고 함께 환난을 겪으면서 견뎌온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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