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녀라면 사족을 못쓴 조조
조조(155~220년)는 미녀라면 사족을 못쓰는 위인이여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손에 넣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다. 출신성분도 가리지 않았다. 창기든 유부녀든 눈에 들기만 하면 방법을 대여 손에 넣고야 말았다.
후일 조비를 낳아 황후가 된 변부인은 창기출신이였지만 그녀의 미모에 반한 조조는 그녀의 신분이 천하다고 해서 꺼리지 않고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두부인의 경우는 더욱 한심했다. 그녀는 남편이 멀쩡히 두눈을 펀히 뜨고 살아있는 유부녀였다.
류비가 조조와 함께 하비성에서 려포를 포위했을 때의 일이였다. 하루는 관우가 조조를 찾아왔다. 조조는 느닷없이 찾아온 관우를 의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러자 관우는 조조를 보고 낮은 소리로 부탁했다.
“려포의 부장중에 진의록이라는 자가 있는데 이제 우리가 이겨 성이 함락되면 그의 처를 나에게 주십시오.”
“허허, 이제보니 운장도 어지간히 녀색을 밝히는구려. 그러지요.”
조조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런데 성이 곧 함락되려고 하자 관우가 몇번 더 찾아와서 “진의록의 처를 꼭 나한테 줘야 합니다”라고 다짐을 받았다.
조조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진의록의 처가 어떤 미인이기에 저 관우라는 사내를 이토록 애태우게 했을가? 려포가 항복하고 성이 함락되자 조조는 장난삼아 먼저 진의록의 처를 데려오게 했다. 보니 대단한 미인이였다. 그녀가 다른 사람의 처였고 관우가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녀의 뛰여난 미모에 반한 조조는 다른것을 고려할 겨를이 없었다. 진의록의 처라고 하지만 미인은 전리품이니까 승자가 가지는것은 당연하지. 비록 관우가 먼저 탐내서 달라고 했지만 내 마음을 설례이게 한 미인을 어찌 그에게 내줄수 있겠는가? 먼저 차지한게 임자지! 그래서 조조는 그녀를 자신의 첩으로 삼았다. 후일 조조의 비빈이 된 두부인이 바로 그녀였다.
조조는 두부인을 꽤나 사랑했었던것 같다. 두씨가 조조의 첩이 되였을 때 이미 진의록과의 사이에서 낳은 진랑이라는 아들이 하나 있었다. 조조는 진랑을 아들처럼 궁에서 키우며 심히 예뻐했다. 매번 손님들을 맞을 때마다 무릎에 앉히고는 이렇게 말하군 했다.
“세상에 나처럼 의붓자식을 친아들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또 있을가?”
한편 련모했던 녀인을 빼앗긴 관우는 깊은 원한을 품었다. 후일 관우가 조조의 후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끝내 그에게 심복하지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세상에 사랑하는 녀인을 빼앗아간 사람의 밑에서 일하고싶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관우는 간적 조조를 도모해 중원을 되찾고 한나라 황실을 회복하겠다고 거창한 구호를 내걸었다. 하지만 그것은 꿈에 지나지 않았다.
조조는 미녀를 좋아한 덕분에 무려 25명이나 되는 아들과 6명의 딸을 얻을수 있었지만 그 과정에서 평생의 원한을 사기도 하고 목숨을 잃을번하기도 했다. 진의록의 처 두부인을 빼앗았다가 관우에게 한을 품게 했던 일도 조조에게 교훈이 되지 않았다. 장제가 죽자 과부된 추씨를 슬쩍 취했다가 거의 죽을번했던 적도 있었다.
표기장군 장제는 홍농에 주둔하고있을 때 사졸들이 굶주려서 남쪽의 성을 공격하던중 날아오는 화살에 맞아 죽고말았다. 장제의 부인 추씨는 장제의 조카인 장수에게 의지했다. 조조가 남정할 때에 군대가 육수에 이르자 장수가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그때 과부 추씨를 본 조조는 첫눈에 반하여 그날밤으로 그녀를 품었다. 조조가 자신의 숙모를 건드린것을 알게 된 장수는 치욕을 느끼고 조조에게 원한을 품었다. 조조는 그것을 알고 몰래 장수를 죽이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책이 새여나가 장수가 조조를 엄습하였다. 장수는 조조가 추씨에게 빠져 음탕한 놀이를 하는 틈을 타서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그 싸움에서 전위가 조조를 지키다가 죽고 조조는 뒤문으로 달아났다. 도망칠 때 조조의 조카 조안민이 란도질 당해 죽었다. 조조의 맏아들 조앙도 조조를 구하자마자 장수의 군사들의 손에 죽고말았다.
조조의 맏아들 조앙은 유부인의 소생이였다. 그러나 유부인이 일찍 죽었기에 정실부인인 정부인이 조앙을 맡아 키웠다. 자식이 없었던 정부인은 조앙을 친자식처럼 정성껏 키웠다. 정부인은 조조가 장수의 숙모와 염문을 뿌렸다가 조앙을 죽게 하고 홀로 살아 돌아온것에 몹시 분개했다. 그녀는 조조를 볼 때마다 늘 이렇게 바가지를 긁군 했다.
“내 아들을 데려가 죽이고는 혼자 살아 돌아오다니 어찌 그럴수가 있습니까!?”
조조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몹시 괴로왔다. 그런 잔소리에 견딜수 없었던 조조는 정부인을 친정으로 돌려보냈다. 정부인이 기가 좀 꺾이면 다시 데려올 생각이였다. 정부인은 조조와의 화해를 거부하고 돌아오려고 하지 않았다. 조조가 직접 정부인의 친정집으로 찾아갔을 때 정부인은 베틀에 앉아 베를 짜고있었다. 조조는 정부인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면서 달랬다.
“나를 좀 보아서 함께 집에 돌아갑시다!”
정부인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조조는 발길을 돌려 나가다가 문지방에 서서 다시 말을 걸었다.
“정말로 헤여지자는것이요?”
아무 대답이 없자 조조는 하는수 없이 관계를 끊었다. 정부인은 남은 여생을 길쌈을 해서 자급했다. 조조는 정부인을 쫓은것이 끝내 마음에 걸렸었던 모양이였다. 나중에 병이 깊어져 스스로 다시 일어날수 없게 되였을 때 조조는 깊이 탄식했다.
“내가 평생에 뜻대로 살았지만 크게 마음에 빚진 일이 없었다. 다만 내가 죽어서 저 세상에 가서 맏아들 조앙을 만났을 때 그 애가 ‘저의 어머니는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내가 장차 뭐라 대답해야 할가?!”
조조는 처음부터 반역을 꿈꾸었던 적이 없었다. 그는 죽는날까지 한나라의 충신으로 남기를 원했던 사람이였다. 그의 꿈은 자신이 죽었을 때 묘비명에 “한나라 고 정서장군(征西将军) 조후지묘(曹侯之墓)”라고 쓰이기를 소망했다. 단지 시대가 그를 한나라를 빼앗은 역적으로 만들었을뿐이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하고 돌아오자 한나라 조정에서는 새로운 여론이 일어났다. 조조는 이미 큰 공을 이뤘으니 이제 2선으로 후퇴해야 한다고…그동안 조조의 위력과 업적에 눌려 잠잠하던 한나라황실과 문벌이 높은 조정대신들의 합작품이였다. 헌제는 조조의 공적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3개의 현을 식읍으로 내려주었고 문벌이 높은 조정대신들은 패전으로 한 날개가 꺾인 조조에게 이제 할만큼 했으니 군국의 대권을 내놓고 초야로 돌아가라고 은근히 압력을 가했다. 이에 대해 조조는 자신의 뜻을 분명하고 솔직하게 밝혔다.
“만약 국가에 내가 없다면 얼마나 많은 자들이 황제를 칭할지, 또 얼마나 많은 자들이 왕을 칭할지 모른다. 제군들은 내가 곧 병권을 넘겨주고 국사를 맡아 다스리는 일에서 물러나 무평후국(武平侯國)으로 귀향하기를 바라고있다. 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어째서인가? 진실로 내가 병권을 놓게 되면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당할것이 두렵기때문이다. 또 내 몸이 패망하는 즉시 국가가 위태로운 지경에 빠질것이므로 허명을 사모하여 실질적인 화를 부르는것을 옳다고 할수 없으니 그렇게 할수는 없다.”
여기서 “차라리 내가 세상을 저버릴지언정 세상이 나를 저버리지 못하게 하겠다”라는 조조의 립장이 잘 표현되여있다. 조조가 주공과 같은 성현처럼 후세사람들에게 추앙을 받기를 원했었더라면 이때 조정의 의론에 따라 군국의 대권을 반납했어야 했다. 그러나 조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조가 군국의 대권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갔다면 그 자신과 가족의 생명안전을 결코 보장받지 못했을것이다. 또 시대적상황으로 볼 때 조조가 아니더라도 다른 실력자가 결국은 한나라를 패망시키고 황제의 지위를 빼앗았을것이다. 한나라는 이미 스스로 멸망한 상태였기때문이였다. 한나라는 국가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인 국가안정보장과 질서유지에 철저히 실패함으로써 백성들의 생존자체를 위협에 빠뜨렸다. 조조에게 국가의 모든 권력이 집중된것은 이러한 혼란상황을 극복하려고 동분서주한 결과였을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조가 어떻게 권력을 내놓고 초야로 돌아갈수 있단말인가?
이런 리유로 조조는 희대의 “악당”이요 “역적”이 되였다. 그러나 인민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한나라의 황실을 부흥하겠다고 해야만 정의의 편이라고 할수 있을가? 《삼국연의》에서는 조조를 역적이라고 욕했지만 력사학자들은 조조를 영웅이라고 재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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