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력사적 착오 문화적 반성
2009년 05월 16일 14시 21분  조회:1779  추천:0  작성자: 방룡남

-<<<볼쉐위크>의 이미지>>에 대한 평론 몇편과 함께

오랜 침묵속에 얼굴을 파묻고있던 작가 정세봉이 갑자기 큼직한 <<돌멩이>>를 호수에 던져 끝없는 파문을 일으켜놓았다. 무려 팔구만자에 달하는 중편소설 <<<볼쉐위크>의 이미지>>는 한동안 잠잠하던 우리 문단에 커다란 충격파를 주었던것이다. 뒤골목에서 시야비야하거나 현대화도구에 목소리를 담는것도 인간이란 원래부터 새로운것에 대해 명확한 태도보다 먼저 수군수군 의론하기를 즐긴다는 전제하에서는 나쁠것이 없지만 그래도 사명이니 임무이니 의무이니 하는 책임감을 지니고 간행물을 통해 력사니 현실이니 인생이니 미적감수니 이미지니 하고 얼굴을 붉히며 <<티각태각>>하는이들이 퍽 대견스럽고 보배롭다. <<배우>>는 <<관중>>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관중>>이 없는 <<배우>>란 연기의 영원한 실패자이다.
<<이미지>>가 발표된지 인제 4개월밖에 안되는 사이에 5편의 무게있는 평론들이 여러 간물을 통해 발표되였다. 그중 <<문학과 예술>>지에 발표된 두편은 대담히 쟁명에 응하여 나선것이다. 필자는 그들의 대범함에 힘입어 주제넘게 바로 그들의 평론을 상대로 감놓아라 배놓아라 하고 시비를 걸고든다.
이 두 평론은 아주 공교롭게도 하나는 절대격, 또 하나는 토를 달았다는 부동한 형식의 동일한 제목으로 되여있다. 그러나 내용면에서는 서로 아주 접근된 주장이 있는가 하면 또 아주 현격한 이질성도 있다.
평론 <<력사 현실 인생>>의 경우 평론가는 전반 글에 거쳐 <<당원으로서, 인간으로서, 강자로서 자기의 량심과 직분을 잊지 않았으며 자기의 생명을 마지막까지 힘차게 연소시키려고 노력>>한 <<한 숨쉬는 인간의 진실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을 분석하고있으면서도 나중엔 <<이미지>>는 력사의 반성과 현실의 파악을 시도한 작품이란 <<어떤 사람들>>의 견해를 부정하면서 <<실리주의적인 관점으로 분석해보면 쌍디아고나 윤태철의 거동은 아무런 실제적인 가치도 없는것이다. 오직 미적인 관점에서 분석하여야만이 정확한 결론을 도출해낼수 있는것이다>>라고 결론짓고있다. 분석과 결론의 이률배반에 빠진것 같다. 사실 평론가 자신이 글의 서두를 <<인간들의 정신활동은 이미 력사로 되여버린 어제날의 매듭에서 언제나 떠날수 없다>>고 떼고있을뿐만아니라 계속하여 <<력사는 가능하게 생활의 표면현상에서는 그 자취를 감추었지만 현실생활의 밑바닥에서는 계속 암류로 흐르고있다. 때문에 많은 문학작품들에서는 현실생활에서의 모순을 제출하면서도 거기에다가 력사의 종적인 궤적을 립체적으로 교차시킨다. 이리하여 력사와 현실의 모순충돌속에서의 인간의 가치와 인생의 발로를 묘사한다.>>고 쓰고있다. 평론가 자신이 력사란 골동품이 아니며 력사란 오직 문화창조에 노력하는 인간에게만 유의미한것이며 문학은 바로 그러한 창조적인 문화행위라는것을 밝히고있는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차피 창조적문화행위란 각도에서 문학작품의 창작, 교환, 분배, 소비와 관계해서 그 문화적가치를 계산해보지 않을수 없는것이다.
이것은 문학작품이 그 한 공간에서 력사의 모든것, 사회의 모든것 또는 인간 모두를 등장시킬수 없는것만큼 선택적으로 취사함으로써 일반성에로의 확대가능성을 모색하게 된다는 특성으로 보아도 성립될수 있는것이다. 즉 다시말하면 우리는 도식적이거나 관념적인 류형 내지 전형을 반대하지만 개성적 인간이 어떤 시대적공간이나 문화적인 환경에서 부득불 류형적인 자아로 되여 그 시대의 한 문화류형의 상징으로 된다는것을 부인할수 없으며 그만큼 우리는 작품의 주인공에 대해서 그의 운명에 관심이 쏠리는 동시에 그 주인공이 시대적으로 갖고있는 문화적의미에서도 아주 큰 흥미를 가지게 되는것이다.
이것은 력사, 현실, 인생의 시각에서 보아도 틀림없는것이다. 왜냐하면 력사의 현실을 미래지향적인 기본방향에서 재검토하는것은 인생을 련습할수 없는 우리로서는 현실을 보다 합리하게 꾸밀수 있는 바람직한 수단이기때문이다. 선인들의 경험교훈이 우리의 인생투자를 조금이라도 줄여준다면 그것으로 우리는 행복할수가 있는것이며 선인들에게 감사할것이다. 과거의 상처와 오늘의 삶과의 관계를 외면하고 력사를 다만 골동품으로만 삼을 때 우리는 자칫하면 그 틀림을 이어받을수 있는것이다.
그리고 또 과거의 현재성, 즉 력사의 계승성과 인간자체의 의식의 제한성으로 하여 사회발전의 굴절의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수 없다는 상황에서 력사에 대한 진지한 검토와 문화반성은 의연히 필요한것이다.
문학은 이러한 사명을 훌륭히 완성하고있다. 문학은 직설적인 론리와 사변적인 분석으로 이런 사명을 완수하는것이 아니라 상기 평론가가 결말에서 쓴바와 같이 <<문학은 변화다단한 생활속에서 인간들의 감정이 생기게 된 가장 합리한 예술적근거를 만들어낸다. 이럼으로써 소리없이 현실생활에 의하여 단절된 거의 력사적인 련계를 잊어버린 의식심층의 심령활동을 재현하면서 과거, 현실, 미래를 의식의 심층에서 한곳에 단단히 이어놓는것이다.>>
그럼 <<이미지>>의 주인공 윤태철은 어떤 형상이며 그의 공헌과 오유는 어떤 문화적의미를 띠고있는가.
평론 <<력사 현실 인생>>이나 <<력사와 현실 그리고 인생>>에서 모두 윤태철은 <<외형상에서 강자의 기질을 가졌을뿐만아니라 정치상에서도 강자이다>>, <<쟁쟁한 쇠소리가 나는 중국공산당 당원이였으며 또 훌륭한 아버지였다>>고 인정하고있다. 나중에 평론가 일언은 윤태철이 <<허수빈일가에 독재를 실시하고 그의 일가로 하여금 장기간 수난을 겪게 하고 아들이 그렇게도 사랑하는 순정이를 죽음에로 몰아간 오유도 그렇고 더우기는 <당의 말을 앵무새처럼 받아외우고 당의 지시대로 로보트처럼 움직여온> <두뇌없는 순복도구>로 되여 구룡대대 농민들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준 오류도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불가피면적인것이며 련습할수 없는 인생길에서 필연적인 오유였던것이다.>> <<윤태철의 오유는 력사적으로 빚어낸 오유이며 광범한 인민의 량해를 받을수 있는 오유이며 그가 인민을 위해 기여한 공헌과 융합된 오유이다.>>라고 결론짓고있다. 그런데 이처럼 최대의 량해를 주고서는 인차 소설의 결함을 지적할 때에는 또 <<윤태철의 반성은 정치적시각에서는 철저하지만 도덕적, 문화적, 심리적, 당성 측면에서의 반성은 아주 없거나 매우 얕다.>> 고 질책하면서 인격심리요소, 봉건적인 가장제적작풍, 사회변태적도덕 등 면으로부터 윤태철을 철저히 부정해버리고있으며 나중엔 상급의 지시를 앵무새처럼 외우고 농민들에게 피해를 주게 된것은 당의 실사구시라는 우량한 작풍과 언제나 실제로부터 출발한다는 사상로선 혹은 인식로선을 떠난 결과이며 언제나 자기의 눈앞의 기성리익을 지키려는 소생산자의 편견이 장난친 결과이며 성실성의 결핍, 독립인격의 부족때문이라고 지적하고있다.
한 대상에 왜서 이토록 엄청나게 이질적인 가치판단이 내려지게 되는가? <<쟁쟁한 쇠소리가 나는 당원>>과 <<성실성이 결핍하고 독립인격이 부족한 당원>>, <<훌륭한 아버지>>와 <<봉건적인 가장제적작풍이 장난치고 사회의 변태적인 도덕이 장난치는 아버지>>, 아무리 <<공헌과 오유가 융합된 인간>>이라 해도 이와같이 불과 물처럼 전혀 상극인 이질적성격을 한몸에 지닐수야 없지 않는가!
필자는 이런 페단이 생기게 된 주되는 원인은 평론가가 주인공의 구체적인 문화심리와 그것을 토대한 인격과 가치추구에 대해 깊이 해부할 대신 급급히 력사에 대한 총체적인 판단을 내리고 그것을 근거로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론리적인 결론에 떨어졌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그때는 그럴수밖에 없었다는식의 공식을 도출해낸데 불과했던것이다. 이렇게 되면 력사는 문학소재로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것이다. 왜냐하면 윤태철이든 김태철이든, 또는 그들이 공헌을 했든 오유를 범했든 죄다 그때는 그럴수밖에 없었다는 공식에 맞춰넣으면 그만이기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문학감상을 할 때 확대된 시점-- 즉 한시대의 문화환경 내지 문화형태라는 보다 넓은 시점에서 주인공의 형상가치를 따져보아야 하지만 결코 주인공 자신의 인격적체험과 문화본위를 떠나서는 도저히 진실을 파악할수 없는것이다.
우리가 만약 윤태철에 대한 신변정리를 잘 한다면 쉽게 그때는 그럴수밖에 없었다는 공식에 앞서 벌써 그때 그는 그럴수밖에 없었다는 공식을 도출해낼수 있는것이다.
첫째, 윤태철이 혁명에 참가한 초기의 목적은 바로 지주를 타도하고 땅을 분배받아 가난에서 해방되려는것이였다. 그것은 계급적대항, 즉 직접 지주계급과 맞겨룸하는 혁명이였는바 그만큼 지주계급은 그의 직접적인 적이였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림성이 평론 <<<볼쉐위크의 이미지>의 이미지>>(<<연변일보>> 1991년 7월 4일 제3면)에서 지적하다싶이 윤태철은 <<<계급투쟁을 기본고리>로 하던 그 세월에도 <성분유일론>이 아니고 <분자>와 자식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정책적으로 그렇듯 명확히 규정해왔건만 <싸리그루에서 싸리가 난다>고 나라를 전복시킬 위험이 그래도 성분이 나쁜 그 사람들한테 있다고 여기면서 철저히 <계급계선>을 나누고 <독재>를 강화해야 철저한 <혁명성>을 지켜나갈수 있다고 생각한것이다.
둘째, 그때의 사회력사적환경 역시 윤태철의 상술한바와 같은 심리적자세에 충분한 근거를 제공하고있었다. 당시에 비록 계급적대항의 제도가 뒤엎어졌지만 피통치자의 위치에 있던 계급이 통치자의 위치에 오르고 통치자의 위치에 있던 계급이 피통치자의 위치로 전락되였다는 자체, 혹은 적어도 원 통치계급의 <<분자>>와 현실적으로 만나고있다는 사실 자체가 사실적 아니면 감각, 인식적으로 계급적대항성의 마당을 형성하였을것이다. 바로 우리 당이 그 자신이 령도한 위대한 혁명의 승리로 하여 사회주의제도가 건립되고 그와 함께 인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여 계급존재의 사회적의미가 시대의 변화속에서 부정되고있음에도 계속 투쟁을 기본고리로 하여 계급투쟁확대화를 초래하게 된것도 상기한 사회력사적원인때문이였다. 더구나 직접 계급적대항의 사회를 체험해온 윤태철이고보면 특히 <<계급성분>>문제에서 그처럼 강경할수가 있는것이며 당의 계급투쟁확대화도 쉽게 옳은것으로 받아들일수가 있었던것이며 지어는 자각적으로, 철저하게 <<혁명>>할수 있었던것이다.
셋째, 윤태철의 소박한 혁명성과 사회력사적환경과 함께 그의 락후한 농민출신의 신분적제한성이 인과적으로 금 그어준 현실파악과 문화적자아실현의 한계성을 홀시할수 없는것이다. 어찌보면 이것이 그의 삶의 인격을 정립시켜준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요인으로 될것이다. 가난이 선물한 무식함은 그를 경험-유전형의 인간으로 키워왔기에 론리-사유형의 인간과는 너무나 아름찬 거리를 두고있다. 이것은 필연코 그의 사회에 대한 인식과 자기 자세에 대한 조절 내지 규범에서 모호성과 전통성 및 의뢰성을 나타내지 않을수 없게 하였다. 특히 이런 비자각적인 문화바탕으로서는 우리 당의 사상리론체계에 대해 령혼적으로 옳바르게 해득할수 없는것이다. 하기에 그는 다만 우리 당은 인민을 이끌어 계급적대항의 사회를 뒤엎고 인민을 나라의 주인이 되게 한 위대한 당이라는 극히 소박하고 거의 상식에 가까운 긍정으로부터 출발하여 상급의 말만 들으면 틀림없다는 심리적자세를 갖춘것이였다. 하기에 사실상 그의 모든 사유와 행위는 그 자신의 자치적노력보다는 관념적인것을 모방한 의뢰적인것이였으며 그의 인생적자세조차 적극적이고 자각적인 목적추구가 아니라 다만 시키니 한다는 심리로 삶을 조직한 순응주의적인것이였다.
이것은 력사에 종지부를 찍고 새로운 개혁개방의 시대가 열린 벽두에 새로운 인생무대에서 다시 자기의 생활능력을 실험코자 애쓰는 윤태철의 창백한 모지름에서 재확인하게 된다. 비록 시대가 어느 정도로 력사의 한 물결에 휩쓸렸던 개인들에게 심각한 력사적사고와 반성 및 자아발견적인 각성의 계기를 마련해주고있음에도 윤태철은 우리 당이 자기의 오유를 반성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자 도리여 자기 모멸감과 무력감을 느끼면서 정신적으로 완전히 파산당하고만다. 다만 <<<볼쉐위크>적 오기>>로써 <<자신에 대한 력사의 희롱을 달갑게 받아안으리라 했고 아들놈앞에서 주저치 않고 <두뇌없는 순복도구>질 하리라 했다.>> 그렇게 가냘프던 정신조차 허물어져버린 윤태철에게 남은것은 행위외엔 아무것도 없다. 행위자 목적이요 행위자 동기요 행위자 인생이였다. 하기에 그는 다만 <<흘러간 력사에 대한 울분>>과 <<아들놈한테 향하여진 <볼쉐위크>적 오기>>때문에 허수빈네를 도와주는것을 <<삶의 내용>>으로까지 여겨 <<그가 새롭게 걸어나갈 인생의 길인것처럼>> 느끼는것이였다. 인젠 자기몸을 주체하기도 바쁜 로인이면서도 그 육체를 허물어서라도 새로운 인생무대에서 기어코 훌륭한 배역을 담당해보려는 거기에 정신적공허와 창백함이 드러나고있으며 자아희생적으로 자기의 약점을 표현하는 비극성이 조명되고있는것이다. 달리 풀어말하면 생리적년령은 이미 인생의 황혼빛을 띄고있으면서도 비여있는 정신적공간때문에 쇠약한 육체만을 소비하지 않으면 안되는 여기에 그의 인과적인 희생이 확인되여 있는것이다.
오늘 우리 당이 경제건설을 중심위치에 놓음과 함께 당원들의 리론수양과 문화자질에 각별한 중시를 돌리고있는 자체가 이런 력사적교훈과 시대적요청을 웅변적으로 전달하고있는것이다. 필자가 <<<볼쉐위크>의 이미지>>에서 받은 계시도 바로 이런것이였다.
상술한 분석으로부터 필자는 <<윤태철의 철저한 반성>>을 강요하는 평론가 일언의 주장에 수긍되지 않는다. 사실 평론가가 지적한 결함 자체가 바로 윤태철형상의 특징으로 되고있는것이며 그것에 대한 몰자각으로 하여 그 자신이 의연히 차디찬 정신적방랑을 하고있으면서 <<무엇인가 억울한것만 같았고 그러한 평가가 도저히 납득이 되질 않았>>는데 기어이 그더러 직접 철저히 반성하라고 하는것은 생활적으로나 론리적으로나 도저히 합리성을 찾을수 없다. 그렇게 되자면 이 소설의 전반 이야기성에 질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지 그렇지 않을 경우 작가가 에누리없이 개념화, 도식화에 깊이 빠지고말것이다.
우리가 평론에서 력사의 소용돌이속에 비극의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인물을 분석, 비평하는것은 그때를 그는 그렇게 살수밖에 없었다는것을 부정하려는것이 아니라 어제의 오늘, 오늘의 력사라는 련속성에 립각하여 경험적인 삶에서 현실적인 삶을 확인하려는것이다. 즉 현재적합리성에 목적한 나무람일따름이다.
다음으로 <<정치색채가 아주 농후한 이 소설에서 윤준호의 정치태도같은것은 거의 무시되고있다>> <<그의 모든 말과 짓이 순정이에 대한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고있다>>는 지적에도 도저히 수긍이 가질 않는다.
우선 이 소설이 <<정치색채가 아주 농후하>>다는 견해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필자도 림성의 견해와 같이 이 작품은 <<40여년에 걸친 우리의 력사에 대한 반성을 안겨주는 의의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력사의 흐름속에서 우리 매개인이 갖춰야 할 자세에 대한 사색적제시가 다 크다고 생각>>되며 력사적착오에 대한 문화적반성에 력점이 놓이고있다고 확신하기때문이다.
윤태철의 아들 윤준호와 지주아들 허수빈의 딸 허순정의 사랑의 훼멸이 소설의 갈등과 슈제트발전의 계기로 되고있으며 윤태철 자신의 심리적모순, 정신적곤혹, 량심적회심이 전반 작품을 관통하고있다.
그다음 <<윤준호의 정치태도같은것은 거의 무시되고있다.>> <<그의 모든 말과 짓이 순정이에 대한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고있다.>>는 견해에도 반기를 들지 않을수 없다. 단도직입적으로는 왜서 윤준호의 정치태도가 꼭 표현되여야 하는가? 왜서 그는 꼭 말과 짓에서 순정이에 대한 생각을 벗어나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수 없다.
작품에서 보면 사랑의 억압과 훼멸은 윤준호로 놓고말하면 개인의 삶의 전체에 절망적인 비극의 요인으로 작용하고있다. 삶의 절망까지를 느낀 뼈에 새겨진 상처, 그 상처가 주는 참을수 없는 아픔, 되돌아가 그 아픔때문에 잊을수 없는 사랑인데 기어이 거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것은 인간상정에도 어긋나는것이다. 더구나 씨앗까지 뿌려 미구에 열매를 보게 되였던 황홀한 사랑이고보면 꿈에조차 잊을수 없을것이다.
그리고 윤태철과 윤준호의 갈등이 그 내용적확장이 몇십년의 력사에까지 미치든지 아니면 전반 사회에까지 관계되든지간에 우선 그것은 가정내부의 부자갈등, 지어는 어떤 사람을 <<새사람>>으로 맞아들이는가 하는 갈등의 형식으로 표현되고있는만큼 윤준호가 꼭 아버지한테 나는 력사를 정치적으로 어떻게 보오, 현실을 정치적으로 어떻게 보오 하고 태도표시해야 할 생활적흐름의 합리성을 찾아볼수 없다. 특히 그 사랑을 억압하고 훼멸시킨 장본인이 아버지일 때 가부장제적독단에 훨씬 더 분개하게 되는것이며 갈등의 초점이 그것에 모여지기 마련인것이다. 그가 당소조장을 질책한것도 진짜 충고도 있고 야유, 조소도 있지만 기실은 아버지에 대한 울분을 터뜨린것이다. <<시어머니역정에 개배때기를 찬다>>는 격이다.
사실 작가 자신도 결코 작품에서 정치관념상에서의 세대적갈등을 반영하려는것이 아니라 사랑마저 정치적우박의 피해를 받지 않을수 없었던 인정이 메마른 특정된 사회상을 부각하려는것이다.
인물형상분석에서 작품의 얽음새에 따르는 매개 인물의 자세로부터 그 인물의 성격을 파악해야지 저 인물의 성격에는 이런것이 있는데 이 인물의 성격에는 이런것이 없다는식으로 허물한다면 오히려 개성있는 성격을 부각할수 없을것이다. 그리고 이런 류의 사람은 이럴 때 이러는것이다 하는식의 주장은 도식화, 개념화로서 그렇게 되면 작가는 생활적인 인간을 부각하는것이 아니라 론리적인 인간을 제조하게 될것이다. 사실 생활현실에서 보면 이 사람은 이러해야 하는데 이렇지 못한것이 이 사람의 성격의 거치른 면이 되고 저 사람은 저러해야 하는데 저렇지 않은것이 저 사람의 성격의 개성적인 면이 되는것이다.
이상에서 나어린 글쓰기 열성자로서 두분 평론가선생님을 비롯한 여러분들의 가르침을 믿어의심치 않으면서 설익은 관점을 가지고 하루강아지 범무서운줄 모르는 행위를 개시했다. 학술적으로 다각적풀이가 가능한 시대인만큼 개성적으로 일가지언을 주장함은 중요하지만 남을 이설이라고 억누르는것은 언어도단일것이다. 그만큼 자기의 관점만을 책임지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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