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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수길 소설의 서사구조 연구
2009년 05월 16일 15시 19분  조회:3801  추천:0  작성자: 방룡남

-만주이주민소설을 중심으로                          

 

 

목   차



1. 서론                                                                 

1.1 문제 제기                                                           

1.2 연구사 검토                                                         

1.3 연구 목적과 연구 방법                                              


2. 재만 조선인 사회와 안수길의 현실 인식                       

2.1 역사의 만주와 현실의 만주국                                        

2.2 정착 의지와 북향정신                                               


3. 만주이주민소설의 서사구조 특성                               

3.1 입체인물-식민 시대의 인물 풍속화                                   

3.2 화자의 중립성-현실 극복의지의 확인                                 

3.3 이념의 예술적 표현-의미담론과 서사구조의 조화                      

3.3.1 내부인물의 갈등 구조-식민 사회의 축도                          

3.3.2 단절 구조의 예술적 조형화-이주민 사회의 지평 제시              

3.3.3 이중 갈등구조-억압 현실의 서사화                               


4. 결론                                                                


5. 참고문헌                                                           


                                                          

1. 서론



1.1 문제 제기


한국의 근대문학은 일제의 식민 정치와 악연을 맺은 상태에서 발아하게 된다. 민족문학의 생존이라는 근본적인 위기를 운명적으로 받고 비운의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것이다.

한국의 근대문학은 세계 근대 역사의 태동과 병행하여 발생한 것이 아닌, 식민지 민족문학이라는 특수성을 안고 있다. 문학 종사자들이 역사 철학적인 인식 하에 세계 근대 문명 사조를 받아들이고 주체적으로 활동한 것이 아니라 식민통치라는 민족 억압형식을 통한 것이어서 문학사조마저 굴절되어 투사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한국 근대문학의 구축은 탈식민지 국가독립사상 내지 민족의 주체의식과 직․간접적으로 맥을 같이 한다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 한국의 근대문학은 식민정치와의 조우 속에서 식민지 민족주의 의식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식민지배에 저항하며 억압을 시시각각으로 감내해 왔다.

이처럼 민족의 식민지 역사의 비운 속에서 식민통치의 민족동화정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던 한국문학은 그 역사적 고찰에서 식민담론을 간과할 수 없었다. 식민지인 전체를 동화대상으로 하는 식민시대에 저항과 공모, 역행과 순응의 논리는 식민지인의 생존 논리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많은 식민지 작가들의 문학창작이 식민통치와 공생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이었다. 독자들을 교양하는 함양훈도를 목적으로 하기도 하는 문학이기에, 그 함양훈도의 성격을 밝혀내는 것은 역사의식의 올바른 정립과 문학정신의 정직한 계승을 위해서 바람직한 것이다.

이러한 특수한 역사 현실 속에서 창작된 문학을 바라보는 견해는 여러 가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연구자의 시각에 따라서 구체적인 작품에 대해 통념적인 판단을 하기도 하고 식민 피해의식에 의해 과잉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문학텍스트에 대한 본체론적 해부보다는 형이상의 주장이나 논리를 잣대로 텍스트를 재단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식민지정책, 시대주제, 작품매체 등 시대적 성격이 뚜렷한 요소들을 식민지인의 대응논리에서 정밀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친일여부와 직결시키기에 여념이 없어 보인다.

작품매체에 대한 절대론이 그 한 예이다. “작품매체는 작품의 성격을 알 수 있는 하나의 시금석이다.”1)는 말은 언뜻 듣기에 틀린 말이 아닌 듯하다. 그러나 이 주장은 벌써 작품매체의 성격에 반대하는 작품의 저항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즉 작품의 성격을 달리 규명할 필요 없이 작품매체의 성격만 규명하면 자연히 작가 내지 작품의 성격은 판단된다는 논리이다. 작가는 작품매체의 부속물이거나 협력자 외에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된다.

국권을 상실한 식민지배 하에서는 작품매체의 성격과 작품의 성격이 서로 충돌하거나 대립하는 모습이 오히려 지배와 저항의 구도를 형성한다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나라를 잃고 민족이 몰락하는 식민지인으로서의 작가나 작품을 작품매체의 성격에 의해 판단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식민피해의식에 의한 과잉반응이라고 할 수밖에 없겠다. 이는 식민지배 하에서의 작품매체라는 판단에서 식민지 작가의 식민지배에로의 공모의식만을 일방적으로 확대 해석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국권마저 상실한 민족에게 그 민족의 목소리를 정당하게 낼 수 있는 매체란 과연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그럼에도 민족의 언어를 지키고 민족의 문화를 이어가며 민족성에 호소하려는 식민지 작가의 애끓는 노력을 우리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특정시대, 즉 국권상실과 민족말살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작품매체의 성격에 직결되는 해석은 오히려 민족의 열등성 내지 패배주의를 확인하는 결과에 이를 수 있다. 이러한 작품매체에 대한 성격 확인은 민족문화를 말살하려는 식민지배의 문화정책이 어느 정도 침투되어 있고 검열제도는 어떤 방식을 취했으며 우리의 대응방식은 어떠하였는가를 총체적으로 파악할 때라야만 의의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작품매체를 통한 식민지배는 일제식민통치의 한 부분임에 다름 아니고, 그만큼 총을 들고 일본군과 싸운 독립투사들이나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의 수립을 도모한 교육자들과 마찬가지로 검열에 대응한 작가들의 작품창작 역시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행위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물론 식민지배 하에서는 작품매체의 성격이 작가의 창작행위를 규제하겠지만, 그것은 식민지 작가의 공모와 저항, 순응과 역행의 착종 관계를 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발표지의 성격과 작가의 극복의지라는 이항대립이 성립된다. 그런 대립이 가능하다거나 역사적으로 기성사실이라면 발표지의 성격 규명은 작가나 작품의 성격을 확인하기 위한 근거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극복의지와 그 한계를 확인하는 전제 조건이 될 뿐이다. 결국 발표지의 성격 규명은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담론의 한 분석방법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겠다.

시국정책, 시대에 대한 주의․주장도 마찬가지이다. 우선 그런 정책, 주제나 그와 관련된 언어들이 작품에 등장하면 무작정 친일로 몰아붙이는 건 아무래도 식민피해의식에 의한 과잉반응이거나 절대적 억압의 현장을 살지 않은 사람들의 안이한 사유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지적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역시 문학 본체론적인 사유 방식에서 볼 때 작품에 투입된 소재를 문학텍스트의 서사요소로 재확인하고 유기적인 서사 구조 속에서 의미 담론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표층적인 의미에만 집착하는 소재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작품매체에 대한 분석과 함께 시국정책, 시대 주제는 절대적 억압시대를 상대한 작가의 임기응변이거나 심층저항수단 혹은 부득이한 포장장치이었을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시점에서 식민통치시대를 거쳐 온 한국 근대문학에 대한 조명은 식민담론분석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것도 문학텍스트에 대한 본체론적 사고로부터 출발하고 억압시대 극복의 대응논리로서 살펴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게 된다.

이러한 특정한 식민지 억압시대에 한국문학의 가지 또는 지류로 생성된 만주조선인문학도 당연 이와 같은 시각에서 접근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한국의 근대문학에 대한 연구에서 제기된 위와 같은 문제점들이 만주조선인문학 연구에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는 것 또한 조응 현상이랄 수밖에 없다.

많은 연구가 현경준, 안수길 등의 만주이주민소설들에 대해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주요하게는 그들의 작품 대부분이 만주국 국책홍보지인 󰡔만선일보󰡕를 통하여 발표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런 잣대로 보아 “왕도 낙토”, “오족협화”, “유축농업”과 같은 만주국 국책에 순응한 혐의가 있다는 것이었다.

작품은 접촉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발표매체인 󰡔만선일보󰡕의 성격을 들어 작품을 일방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작품매체의 성격에 반대하는 작품의 저항성을 철저하게 부정하는 것이다. 물론 작품매체의 성격이 작가 작품에 끼치는 영향 내지 제한은 승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국권을 상실한 식민지배 하에서 민족의 목소리를 합법적으로 낼 수 있는 매체란 벌써 존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작품매체와 작가 작품이 ‘결합’된 배후에 암장된 규제와 대응, 지배와 저항의 구도를 밝혀내는 데 두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구도 속에서 구체적인 작품매체의 규제 방식과 지배 역도를 분석하는 것은 역사적인 현실상황을 밝히고 이런 상황이 식민지인 작가한테 어느 정도의 대응 공간을 제공할 수 있었고 어떤 방식의 저항을 가능하게 하였는가를 파악할 때라야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만주 역시 일제치하의 식민지이고 󰡔만선일보󰡕는 식민지배 하의 작품매체이라는 성격 때문에, 그리고 이민 작가는 곧 식민지인 작가이고 그들은 결국 식민지배 하의 작품매체를 발표지로 하고 있었다는 사정 때문에 단순하게 작품매체의 성격으로 작품을 확인할 수는 없다. 이런 경우 자칫 작가 내지 작품의 저항의식이나 언설을 일방적으로 묵살하고 단지 식민지인의 식민지배에로의 공모성이나 타협만을 확대하여 과잉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나라가 국권을 상실하고 민족이 멸망위기에 처한 식민지 현실에서 식민주의자의 통치이념으로 식민지인의 의식을 일방적으로 재단하는 식민사관을 가능하게 한다. 실제로 이러한 극단적인 식민 피해 의식은 작가의 작품에 대한 판단을 넘어서서 만주 조선인에 대해 “만주에서의 조선인 위치란 무엇인가? 항일투쟁에 나서지 않는 한, 한편으로는 제국주의의 피지배자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 제국의 힘을 뒤에 업고 타자의 삶을 위협해 들어가는 존재가 만주에서의 보통 조선인이 처한 현실이다”2)는 결론을 도출해내고 있기도 한다. 열강들과의 역학관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만주국을 독립국가로 표방하고 민족이 더불어 공존하는 오족협화정책을 구상해낸 일제가 안으로 강력하게 작품매체의 검열제도나 조선인 집단부락의 건설 같은 식민지 지배정책을 병행시킨 자체가 조선인의 반일정서나 저항의식 내지 민족의식을 역설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항일투쟁에 나서는 것만이 저항이라 한다면 일본어를 사용하고 창씨개명을 한 반도의 조선인은 모두가 친일이었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런 극한의 시대 환경에서도 우리는 어떻게 민족의식을 키워왔던가 하는 주체적인 역사관으로 우리 민족의 삶의 모습과 대응자세를 조명해 보는 것이 바람직한 분석 틀이 될 것이다.

일제 치하의 암울한 식민시기에 만주 조선인들은 형식적으로나마 ‘합법적인 민족’으로 인정되는 공간에서 민족 공동체의식을 살리고자 했다. 새로운 고향을 개척하고 민족교육을 통해 후대들에게 민족의식을 심어주려고 한 것 자체가 현실 극복의지 내지 민족의 강한 재생력을 보여준 것임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

그런 주제를 형상화한 작품 또한 정당하게 평가되어져야 할 것은 물론이다.

우선 일제의 동화정책에 의해 민족의 존재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우리말로 당당하게 쓰인 만주조선인문학은 그대로 식민주의 민족동화정책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만주조선인문학의 성격을 “민족문학의 지평을 확대․심화”시켜 “‘대륙’이라는 특이한 세계를 통하여 위기시대의 민족문제를 형상화하였으며, 일제강점기 만주 간도 이주한인의 억압되고 분열된 ‘삶의 현장’을 증언하여 문학사의 단절기를 극복하려한”3) 것이었다고 규정 할 수 있다면, 만주조선인문학은 일제 말 암흑기의 한국문학 연구에서 당당하게 한몫을 맡아 나설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만주조선인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긍정적인 진맥은 한국문학사의 맥을 잇는 작업일 것이고 한국문학으로 체현되는 한민족의 끈질긴 생명력과 자생력을 증명하는 일이 될 것이다.

한편, 만주조선인문학은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생적 시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간도 조선인’이 ‘중국 조선족’의 선대인 내지 조상이라면 ‘중국조선족문학’은 결국 ‘만주조선인문학’이 발전, 성장하다가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이라는 체제적 변화에 따라 이름을 달리한 것임에 다름 아니다. 그런 연유로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는 ‘만주조선인문학’이 ‘해방 전 중국조선족문학의 원형질’이란 분류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당연하다. 따라서 ‘만주조선인문학’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와 긍정적인 진맥은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생적 원형질을 투명하게 밝히고 그 발전맥락과 체질적 변화과정을 역사적으로, 시대적으로, 그리고 문학사적으로 올바르게 조명할 수 있는 기본이 되는 것이다. 역시 중국조선족문학의 성격규명과 발전방향의 제시에 중요한 토대가 될 것이다.

이 만주조선인문학의 연구중심에 작가 안수길과 그의 작품들이 놓여 있다. 󰡔북향󰡕, 󰡔싹트는 대지󰡕, 󰡔북원󰡕, 재만 각 민족 작품집, 󰡔북향보󰡕에 이르는 주요 창작성과를 보면 만주조선인문학에서의 안수길의 위치는 대뜸 정해지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 대한 자리매김은 만주조선인문학의 성질규명에 주요한 작용을 하게 될 것이다.

안수길만큼 ‘만주’라는 특수한 삶의 현장을 통하여, 또한 이주민의 구체적인 삶의 모습과 그 변모를 통하여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문화 정립 과정을 투시한 작가는 없을 것이다. 그런 작품을 쓴 작가는 더러 있지만 안수길은 의도적으로 만주 이주민의 개척사를 다루었으며, 그것이 그의 초기 소설세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의 창작이념이 역사의식과 민족 공동체의식에 토대한 식민지 이주민의 현실 극복의지인 ‘북향정신’에 이어지면서 단순한 만주체험소설이나 망명문학이 아닌 정착지향의 향토문학으로 정립,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안수길은 재만 시기 문학창작에서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역사, 즉 이주-개척-수난의 삶의 모습과 열악한 환경이나 억압 속에서도 민족공동체로 살아남으려는 강한 극복의지와 부조의 뼈가 묻힌 땅에 기어이 뿌리 내리려는 유구한 역사의식을 탐색하고 있다. 그런 만큼 현실을 직시하고 역사와 시대를 조명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작가의 자세는 민족의식이 투철한 현실대응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결과로 안수길을 사실주의 작가로 인정한 최경호의 판단은 비교적 정확한 견해이다.


“안수길의 소설세계는 ‘작가’와 ‘작품’의 두 상관성에 의해 개인의 운명과 민족의 운명이 증언되고 있는 특징을 보임으로써 전형적인 사실주의 작가라는 평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시대적인 변화에 상응하는 인간 존재와 인간의 존재양식을 비판함으로써 진정한 리얼리즘 문학세계를 보여준 작가이다.”4)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수길의 이러한 작가적 역량과 문학성취 및 만주조선인문학의 형성과 성장을 위해 기울인 적극적인 노력은 아직까지도 응분의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결국 한국의 근대문학 연구에서 제기되는 위와 같은 문제점들이 안수길이 간도시절에 창작한 만주이주민소설에 대한 연구에서 집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하겠다.

안수길의 작품에 대해 친일딱지를 붙이는 연구자는 물론, 긍정적인 시각을 보내고 있는 선행 연구자들도 대개는 일제의 식민지인 만주국과 그 국책이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안수길 작품의 제한성과 친일성향을 찾아내고 ‘선의적으로’ 비판하는 것이 기본 모습이었다. 발을 깎아 신에 맞추는 격으로 편협한 정치적 잣대로 문학텍스트의 내용담론을 이데올로기화하였다. 이러한 이데올로기화는 문학 본체론적 연구인 문학텍스트의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의 유기적 결합에 대한 텍스트 담론분석은 외면하여왔다고 할 수 있다. 작가의 현실 인식이나 이념 성찰은 작가의 신변배경이나 사상고백의 자료로 흔히 대체되고 텍스트의 이야기 담론분석은 피상적으로 고립적이고 기표적인 소재주의에 빠져버렸다. 또 내용과 형식을 분리하고 내용 자체를 하나의 완정하고 절대적인 요소로 자리매김함에 따라 예술형식을 외면한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내용확인에 멈춤으로써 서사구조의 미학적 특성을 매몰하거나 심지어는 텍스트의 심층 논리구조를 오판하였다.

문학텍스트에서 의미담론이 어떻게 서사구조에 심층적으로 녹아 들어있는지 혹은 서사구조가 어떤 의미담론에 의해 미학적으로 직조되었는지 하는 시각은 이질적인 것이 아니고 다만 초점의 문제일 따름이다. 그만큼 서로 완전히 분리되어서 연구될 수 없는 문학 본체론적 연구의 기본범주라고 할 것이다.

본고는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기성 연구들에 대한 재고와 함께 만주조선인문학의 참 모습을 그 문학텍스트 속에서 구체적으로 조명해보려는 시점에서 출발하며, 주로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에 초점을 맞추고 그 텍스트의 심층적 의미담론과 미학적 서사구조의 통합분석에 집중하려 한다.



1.2 연구사 검토


만주조선인문학은 오랜 세월 동안 암장된 문화재로 남아 우리 문학사 연구에서 외면당하거나 망각되어 왔다. 남․북한의 문학 연구에서도 그랬거니와 중국조선족 문학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남한의 경우는 오랜 냉전 속에서 공간 접근이 불가능했던 사정도 원인이겠지만, 만주조선인문학을 고작 만주를 배경으로 한 확장된 공간에서의 조선인의 식민 체험을 증언한 몇몇 작품이라는 한정된 시각에서 고찰하는데 멈추고 말았다. 북한이나 중국조선족의 경우는 식민지 시대 진보적 문학이라는 가치기준을 내세워 이른바 항일투쟁문학이나 반일문학에 연구초점을 맞추어왔다.

1970년대 이후 한국의 여러 학자와 비평가들이 만주이주민소설에 좀 더 깊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고, 특히 1980년대 이후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을 중심으로 만주조선인문학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를 펼쳤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 중국 조선족 문인, 학자, 비평가들도 조선족문학의 사적 고찰이라는 시각에서 해방 전 문학에 관심을 갖고 만주조선인문학에 본격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에 대한 선행 연구들은 그 접근방법에 따라 주로 작가의 사상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작가론과 작품의 내용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주제론으로 대별할 수 있다.

그런데 작가론의 경우, 연구자들이 식민지 조선인의 만주 체험이라거나, 일제의 대륙 침략의 산물인 괴뢰만주국이 시대배경이라는 식민담론에 시각이 가려 대개 식민피해의식이라는 강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실정이었다. 그러다보니 그들의 연구는 식민지 시대 문학으로서의 친일과 반일, 일제 식민 통치 하의 괴뢰만주국의 국책에 대한 순응과 저항이라는 식민담론에 초점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는 친일, 국책순응이라거나 적어도 친일성향, 국책순응의 요소를 운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윤식은 “만주국 건국의 이전과 이후를 구별하는 일이 만주개척이민사를 이해함에 중요한 요소”라는 식민담론으로부터 출발하여 “이 사실을 떠나면 만주문학은 물론이지만 안수길 문학의 특질을 올바르게 평가할 수 없게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는 만주 조선인 이주민은 만주국 건국 이전의 개척자와 이후의 침략자라는 ‘변질’된 성격을 잣대로 일본영사관의 비호를 받는 조선인 이주민은 중국인 원주민을 위협하는 가해자 집단이고 따라서 그런 조선인 이주민을 그린 안수길의 「벼」는 친일문학이라고 확인한다. 그러나 사실은 다만 「벼」에 대한 성격 확인에 멈추지 않고 「벼」에 만주국문학으로 나아가는 단계라는 상징의미를 매김으로써 이를 안수길의 이념 변질과 작품성향의 전향을 알리는 징표로 단정하고 있다.5)

신희교는 작품매체를 작품의 성격을 가르는 시금석으로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결국 작가의 개성 내지 사상도 작품매체가 대변하는 시국 협력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강조하게 된다. 그리하여 안수길에 대하여 이른바 시대와 접촉하는 시국적 이야기를 다룬 작가의 세계관과 그렇지 않은 이야기를 다룬 작가의 세계관이 상이한듯하다는 다소 애매한 이율적인 판단을 내린다. 그는 안수길의 단편소설 「목축기」를 일제의 이민정책에 순응하여 씌어진 작품이라고 인정하고 이효석의 「아자미의 장」, 정인택의 「뒤돌아보지 않으리」와 함께 어용소설의 코드에 분류해 넣고 있다. 그러면서 작가적 개성을 상실한 이러한 소설들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란 친일성향, 천황에 대한 광적인 충성심과 시국정책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과 주체성의 상실이라고 비판하고 있다.6)

조구호는 창작에 임한 안수길의 자세를 문제 삼으면서 일제 식민지하에서 민족이 겪어야 했던 현실을 함께 아파하고 타개하려고 노력한 투철한 역사의식을 지닌 작가라고는 말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그는 시대적 변화에 따른 작가의 사상적 변질을 비판하면서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이 조선인 이주민의 생활을 발굴하여 민족의 수난의 모습을 보여준 것도 「토성」 이전의 「새벽」에서만 해당된다고 인정한다. 작품의 창작 연대가 늦을수록 조선인 이주민의 생활상은 국책 순응적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안수길의 초기 소설들은 일제의 식민지 입식정책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거나 친일적인 요소를 부분적으로 그리고 있어 민족문학으로 떳떳이 자리 매김하기에는 부적합하다고 해야 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결론에 이르고 있는 전제가 “작품연구에 앞서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작가의 전기를 살펴보니”로 시작되고 있어 문학텍스트 읽기에 앞서 벌써 문학 외적인 선입견이 서지 않았나 생각된다.7)

상기 연구자들은 만주국이 사실상의 일제식민지라는 국체 확인과 󰡔만선일보󰡕가 만주국 국책홍보매체라는 발표지의 성격 확인에 바로 직결시켜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 다수를 시국물(時局物), 국책순응작품 또는 친일작품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위의 연구자들에 반해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을 비롯하여, 만주조선인문학에 대해 대체로 긍정적 시각을 보여주고 있는 오양호, 민현기, 최경호 등은 작가의 민족정신과 역사의식을 식민지인의 대응논리로써 긍정하고 있다. 그러나 역시 문학텍스트를 대상으로 한 문학 본체론적 연구에 천착하지 못하고 피상적이고 소재주의적인 내용 파악으로 근거 빈약한 변호를 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역시 친일성향이나 체제순응적인 요소를 조심스럽게 지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에 의한 문학텍스트 자체의 미학적 특성은 그냥 외면해버리고 있다.

오양호는 만주조선인문학 유산을 한국문학사의 공백기를 논의하는 자리에 상정해서 마땅할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작가 작품의 평가를 통념적인 식민담론분석을 통해 내림으로써 역시 피상적인 소재를 잡고 그 사상성에서 한계점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텍스트분석에서 인물의 갈등을 절대적인 대항의 갈등 구도로 파악하려 하였기에 이른바 긍정적인 인물을 전형으로 조명하여 선지자, 선각자, 지도자로서의 불투명성을 지적하고 그것을 작가의 이념 성찰의 한계점으로 비판하였다. 이는 현실 인식이 투철하고 투쟁 이념이 확고한 시대 초월의 주인공이 아니라, 암울한 삶의 현실에 부대끼면서 시대적 운명과 현실 극복이라는 생존 대응의 아픔을 감내하는 진행형의 입체인물을 설정한 작가의 리얼리즘정신을 확인하면 그대로 사실무근의 공론이 되고 만다.8)

민현기는 “안수길 소설의 진정한 문학적 가치는 작품에 강렬히 반영된 민족정신과 역사의식에서 찾을 수 있다.”고 확인하였다. 그러나 “작품 외적인 시대 및 사회 현상과 거의 일치하는 작중 상황의 리얼한 제시 역시 식민지의 황폐한 현실을 고발하기 위한 적극적인 태도의 반영”이라고 변호하면서도 한편, 같은 서사요소에서 다시 작품의 한계를 찾아내어 지적하고 있다. 현실 반영론에 입각하여 억압의 시대에 대한 리얼한 묘사 자체가 식민지 현실에 대한 고발이라고 인정하지만, 결국 개별적인 사건 모사에 멈추고 마는 자연주의와 코드를 달리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벼」 「토성」 「목축기」 「북향보」 등에 등장하는 식민지 정책을 결함으로 지적하면서 다만 작가의 시대 영합의 징후가 아니라 강요된 사항이나 검열 회피를 위한 방편쯤으로 용서하는 관용을 베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작품의 한계점에 대한 관용이 아니라 우선 문학텍스트에 대한 오독에서 기인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식민지 정책이 작품에 등장하였다 하여 그냥 소재 파악으로 친일성향이라고 낙인찍을 것이 아니라 그러한 소재가 문학텍스트의 의미담론과 서사구조 속에서 어떤 사건요소로 투입되었는가를 확인해 보아야 할 것이다.9)

최경호 역시 안수길을 일컬어 “일제강점기 만주 간도 이주한인의 억압되고 분열된 ‘삶의 현장’을 증언하여 문학사의 단절기를 극복하려한 작가”, “시대적인 변화에 상응하는 존재와 인간의 존재양식을 비판함으로써 진정한 리얼리즘 문학세계를 보여준 작가”라고 높이 평가하면서도 자연주의와 사실주의의 혼돈 속에서 자가당착의 결론에 이르고 있다. 그도 안수길의 작품을 만주국 건국 전과 후로 나누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시대적 변화에 따른 안수길의 이념적 성찰을 고찰하려는 장치로써가 아니라 건국 전의 리얼리즘 문학세계와 건국 후의 변질된 정책순응문학을 대별하려는 잣대로써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잣대는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구체적인 작품평가를 벗어나서 통념적인 원리로써 당대의 모든 작품에 적용되기도 한다. 최경호도 안수길 소설은 억압당하고 있는 이주 한민족을 위안할 수 있다는 공리성을 제외하면 쓰지 말았어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특히 안수길을 비롯한 재만 작가들이 쓴 만주국 건국 후 소설은 갖은 수모를 받으면서 한국어로 창작하고 발표하였다는 점을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문학 외적으로만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해 주었다.10)

보다시피 작가론의 시각에서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에 접근하는 연구자들은 나름대로 다양한 주장을 내고 있지만, 그 기저에 흐르고 있는 논점의 동일성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다. 즉, 이 시기의 작품을 두고 그것이 식민지 정책에 직결된 동조이었든 아니면 억압의 시대에 의한 피치 못할 순응이었든 정책수용의 혐의에 대한 공인이다. 그러니까 범법행위에 비유하면 범죄의 혐의에 대한 근본적인 논쟁이 아니고 다만 양형을 위해 어떤 성질의 범죄인지를 확인하는, 이를테면 ‘고의’와 ‘과실’의 차이랄 수 있을 뿐이다.

중국 조선족 문학계의 연구도 이와 시각을 크게 달리 하지 않고 있다. 특히 2004년에 출판된 󰡔20세기 중국조선족문학사료 전집󰡕(제6권)은 “해방 전 중국조선족문학에서 친일문학과 친일성향이 드러난 작품을 수록”11)하고 있는데 단편소설 5편, 중편소설 1편, 장편소설 2편 등 소설 8편이 실린 가운데 안수길의 작품을 「새마을」, 「목축기」, 「토성」, 「북향보」 등 4편이나 리스트에 올리고 있다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만주조선인문학의 중심에 안수길이 서 있을  때, 이와 같은 결론은 그대로 만주조선인문학에 대한 부정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또 만주조선인문학이 중국 조선족문학의 원형질이라고 할 때, 이는 중국조선족 문학의 문학사적인 정체성 연구에도 영향을 미친다.

위의 작가론을 비롯한 이런 주장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에서 출발하고 있다.

첫째는 만주조선인문학의 시원이 일제의 대륙 침략의 시기와 맞먹는다는 판단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리하여 만주조선인문학의 성격규명에서 친일이냐 반일이냐를 단정적인 판단기준으로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과는 만주조선인문학이 바탕으로 하는 민족문학의 정체성을 외면하게 된 것이다.

둘째는 만주란 특수한 공간을 다만 작품의 시대배경으로 한정하여 식민지인의 이주지역이라는 시각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은 작가, 작품, 나아가서는 작중 인물로 확인되는 이주민의 현실인식에 대해 식민담론으로 분석하는데 열중하게 하였다. 결과는 유구한 이주역사와 함께 형성된 삶의 공간이라는 역사의식을 외면하게 된 것이다.

총적으로 이러한 주장은, 만주조선인문학이라는 특수한 문학범주가 가지는 성격 특성과 역사적인 존재 의미에 대한 바른 인식을 정립하지 못했기 때문에 단지 역사 회고적인 시대인식으로 통념적인 식민담론에 머물고 만 것이다.

이러한 관점들이 나타내는 시각적 한계를 극복하면서 새롭게 연구사의 흐름을 형성한 것이, 만주조선인문학이 본질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 내용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주제론이라고 할 것이다. 이는 만주조선인문학이라는 특수한 문학범주에 대한 성격 규명과 직결되는 작업이다. 이러한 연구방법은 우선 만주를 단순히 작품의 시대배경으로 한정하지 않고 만주조선인문학이 산생하게 되는 토대, 만주조선인문학의 주제를 양산하는 원천으로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는 만주의 의미가 곧 만주조선인문학의 존재가치와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주의 의미는 구체적인 문학작품에 의해서 변질되지 않는 역사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역사성을 외면할 때 만주는 일제 식민 통치 하의 괴뢰만주국이라는 현실적 의미만 남게 되고 그런 시대배경에서 산출된 만주조선인문학 자체가 친일과 반일, 순응과 역행이라는 식민담론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주제론은 만주란 특수한 곳이 만주국의 이러한 시대적인 현실 의미를 초월하여 만주 조선인 이주민과 역사적인 친화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이른바 친일성향이나 국책순응의 혐의는 이와 같은 역사적인 친화력에 의해 정착의지의 한 방편으로 해명될 수도 있는 것이다.

정덕준은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의 성격을 우선 조선인의 이주․정착사라고 규명하고 그러한 맥락에서 문학텍스트에 접근함으로써 역사의식에 토대한 현실인식으로 안수길 작품 속에 내재하는 길항 관계를 밝혀내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역사의식으로부터 출발한 이러한 현실인식은, 안수길의 ‘어떻게 살 것인가’도 결국 조선인 사회의 정착의지를 반영한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게 함으로써 안수길의 작가적 이념의 역사 지평을 본래의 모습대로 밝힐 수 있었다.12)

김광민은 만주 공간의 특수성이 안수길 문학이 탄생하는 토대로 작용하고 그의 문학의 주제로 되고 있음을 주목하고 있다. 그는 만주를 다만 안수길 소설의 시대적 배경으로 판단했던 기성 연구들의 가벼운 결론을 넘어서서 그것을 인물 행위의 동기와 사건의 계기 자체에 편입시킨다. 그런데 이러한 동기와 계기의 토대가 공간에 대한 애착에 두고 있음을 지적함으로써 역시 다양한 경험을 통한 특성화된 공간이라는 역사의식을 확인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전반적으로 리얼리즘에 기초하고 있으면서도 만주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작가가 지향하는 이상적이고 민족적인 공간으로서의 만주를 발견”하고 있다.13)

도애경은 이주민을 다룬 작품이 대부분인 간도 문학에서 공간 문제는 대단히 독특하고 의미심장함을 강조한다. 조국이 아닌 낯선 공간임에도 그것이 단지 소재나 배경에 머물지 않고 주제를 이끌어내고 인물의 행위와 사건을 주도적으로 발생시키고 있음을 지적하고 그 낯선 공간을 익숙하고 친밀한 곳으로 장소화하는 인물들의 이해와 의미화를 우리 민족의 만주이주 역사와 밀착시켜 밝힌다. 나아가서 만주국은 일제 괴뢰정권이었으면서도 중국, 일본, 조선인, 재만 조선인이라는 부동한 입장에 따라 여러 가지 설명이 가능함을 지적하고 재만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만주국 구성원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현재와 미래가 담긴 생존의 공간이었음을 확인한다.14)

정현숙은 안수길의 만주조선인소설의 문학주제를 형성하고 있는 만주는 단순한 지정학적인 공간이 아니라, 이주민이면서 식민지인이라는 이중의 억압으로부터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의 터전이고 정치적 공간이었음을 지적한다. 그러면서 안수길의 작품 속에 내재하는, 만주국 정책을 수용하는 담론과 민족의 자립적 정착을 확보하려는 발화가 양립되는 길항관계를 밝혀보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특히 이주민의 정착의지가 선조들의 도혼(稻魂)을 핵심으로 하는 ‘북향정신’에 의한 현실 극복의지임을 확인함으로써, ‘협화정신’을 강조하는 현실에서 민족 단위의 생존 내지 정착의 가능성과 그 의미를 역사의식에 토대한 주체적인 민족 공동체의식에서 파악하고 있다.15)

이러한 주제론은 만주조선인문학의 총체적인 성격 특성과 존재 의미를 식민담론보다 훨씬 넓은, 포괄적인 역사범주에서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주제론도 결국 내용적 측면에 많이 집착하다보니 문학텍스트에 대한 문학 본체론적 연구를 외면하거나 홀시 하고 있다. 결과 작품의 의미담론을 서사구조와의 조화 속에서 확인하지 못하거나 유기적인 서사구조 속에 구슬처럼 꿰어진 서사요소를 소재주의적으로 파악함으로써 문학작품의 미학적 특성을 본래의 모습에서 밝히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의미담론과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서사구조는 단순한 문학형식에 지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서사구조에 녹아들어 있는 의미담론을 고립적으로 연구하는 방법론에 문예미학의 원리가 손상 받게 된다.

주제론의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려면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의 통합분석이라는 문학 본체론적 연구방법으로 문학텍스트에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한 연구방향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이러한 연구방법도 만주조선인문학의 성격 특성을 총체적으로 확인하고 그 존재 의미를 밝히는 것을 선행 작업으로 해야 할 것은 물론이다.

󰡔중국조선족 문학의 어제와 오늘󰡕은 이제 이러한 연구시점에서 1910년대 이후 1990년대 후반까지 중국조선족 문학이 이루어낸 성과를 ‘이주․정착사의 재구’라는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 재만 조선인과 중국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만주조선인문학이 중국조선족 문학의 원형질임을 밝힘으로써 중국조선족 문학의 문학사적 체계를 발생학적 차원에서 이주 및 정착문학으로 범주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만주조선인문학으로부터 시작된 중국조선족 문학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문학사적인 발생, 발전, 성장의 총체적 흐름에서 파악하게 하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작업은 남, 북한 문학과 더불어 중국조선족 문학의 민족 문학사적 동질성을 확인하고 범 민족문학의 공시적․통시적 체계화를 이루어냄으로써 민족문학의 영역을 크게 확장하고 있다.16)

상기의 연구사검토에서 우리는 몇 가지 깨치지 않으면 안 될 논제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논제들은 만주조선인문학 내지 안수길의 창작세계에 대한 성격 확인을 하는 것들이다. 따라서 그런 논제에 대한 재고와 이해는 안수길을 대표로 하는 만주조선인문학의 성격을 올바르게 규명하여 한국문학사에서의 주소를 확실하게 밝히고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생적 원형질을 민족의 주체적인 생명미학에서 찾으려는 바람직한 작업이 될 것이다.

집중적으로 논의하고 해결해야 할 논제는 첫째, 만주와 조선인의 역사적 관계이다. 만주는 안수길 작품의 주인공들이 활동하는 무대로서의 공간이기 전에 역사적 연원으로 조선인들의 삶의 한 공간이기도 한 곳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확인은 조선인들의 의식 속에 생존욕구와 함께 정착의지를 심어주었으며 조상의 피땀과 ‘무덤’이 늘어나면서 그 산천에 대한 애정과 향토적 정서를 불러일으켰다. 의식의 저변에 흐르는 역사인식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이를 일으키기도 하지만, 가뭄에 줄었다가도 장마에 다시 불어나는 강물처럼 집단무의식으로 인간의 사유와 행위방식을 규제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삶의 양상이나 성격을, 이러한 유구한 역사의식과의 유기적인 연관 속에서 조명하지 않고,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정책과 식민지배에 의한 결과로 판단하다보면 조선인 이주민의 식민지인으로서의 의식의 분열 내지 이중성에서 식민지배에로의 공모 내지 또 다른 ‘야만인’을 발견하려는 가학심리 일면만을 일방적으로 확대 해석하거나 전체적인 심리구조로 확인하는 결론을 내리고 만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만주 조선인 이주민은 침략자에의 공모자임에 다름 아니고 조선인의 이주와 만주 발견은 ‘야만인’을 발견하려는 가학심리의 소산이고 “조선인 이민을 포함하여 일본인 농업이민의 활동은 만주에 진출한 일본 제국주의 군사력의 첨병으로 기능하였다”17)는 판단도 쉽게 내릴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판단에 토대하여 안수길의 작품에서 친일경향이나 국책 순응의 오점들을 들춰내기는 별로 힘들지 않을 것이다.

둘째, 일제의 만주 침략과 조선인 이주민의 의식(신분을 포함)의 이중성 문제이다. 여기서는 식민지로서의 조선과 만주국, 식민지인으로서의 반도 조선인과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동질성과 이질성이 세밀하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만주나 조선이나 다 일제의 식민지라는 개념 일반에 표상적인 결론을 앞세워 식민지라는 동일한 기표 내에서 구체적인 대상물에 의한 기의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반도의 정책과 현실적 상황을 근거로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삶의 양상과 성격을 재단하고 규명하려 하는 것이다. 그 결과 반도에서는 일본어로 창작된 친일문학만이 생존할 수 있었던 현실을 들어 만주조선인문학의 성질을 반도문학의 그것과 동일시하면서 기어이 친일경향이나 국책순응 문학으로 꼬집으려 하는 것이다.

셋째, 텍스트 읽기와 배경 찾기에서 제기되는 감정 개입이나 이론의 분별없는 이입, 또는 피상적이고 고립적인 소재주의의 문제이다. 어떤 시대 배경이나 작가의 전기, 역사적 사실 내지 시대적 의식, 심지어는 작품에 투입된 소재조차 그것이 작품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주제를 포착하는데 근거로 가능한 것은 역시 텍스트 자체의 구조적 암시에서 말미암은 것이라야 할 것이다. 주인공의 성격발전과 사건의 기승전결에서 시대인식과 역사의식을 포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관점을 논증하기 위한 주관적이고 의도적인 인용이나, 텍스트를 떠난 관념적이거나 이념적인 판단에 감정을 개입시켜 식민피해의식의 과잉반응을 보이는 것이야 말로 작품에 대한 오독(誤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피상적인 소재주의에 빠져 이야기꺼리로서의 자료적인 소재와 서사구조의 구성요소로서의 장면적인 사건을 혼돈하면 보다 암시적이고 심층적인 의미담론에 의한 서사구조의 미학적 특성을 간과하는 실착을 범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논제들을 재고하고 정리하지 않고서는 한국 근대문학의 맥을 이어갈 수 있는 만주조선인문학을 바른 시각에서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민족의 말살과 동화의 위기 속에 질식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면서도 식민지 민족주의 이중성을 극복하고 암흑기 바위틈을 비집고 가냘프게나마 우리 문학사의 맥을 이어가던, 굴절된 우리 문학의 원색적 의미를 찾아내는 작업은 좀 더 긍정적인 시각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 연구에서 이 지점에 각별히 주목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1.3 연구 목적과 연구 방법


본 논문은 만주조선인문학이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생학적 원형질이라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그 중심에 놓여 있는 안수길의 초기소설들을 연구대상으로 잡는다. 그러나 중국조선족문학을 염두에 둔 이러한 연구가 결국 원류를 한반도 문화전통과 문학흐름에 두고 있는 만주조선인문학을 중국조선족문학의 원형질로 확인하려는 시도인 만큼 민족문학의 확장작업의 일환으로도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 만주조선인문학에 대한 기성 연구들도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에 시선이 많이 집중되어 있다. 이는 그만큼 안수길의 소설이 만주조선인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연구사 검토에서 살펴본 봐와 같이 그 찬반을 아울러서 대개는 안수길 소설의 친일성향에 대한 확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즉, 안수길의 작품을 두고 그것이 식민정치나 시국정책에 직결된 동조이었든 아니면 절대적 강요에 의한 순응이었든 정책수용의 혐의에 대한 공인이다. 부정하는 논자들은 물론, 긍정하는 논자들조차 그의 소설이 친일성향이 아니면 적어도 국책순응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인정하면서 다만 ‘그런대로’ 라는 관용의 자세를 취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혐의에 대한 긍부정의 논쟁이 아니고, 어떤 성질의 수용인지를 확인하는, 이를테면 ‘고의’와 ‘과실’의 차이를 논증하고 있을 뿐이다.

만주조선인문학의 중심에 안수길이 서 있을 때 이와 같은 결론은 그대로 만주조선인문학에 대한 부정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리고 만주조선인문학이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생적 원형질이라고 확인할 때 이와 같은 결론은 역시 중국조선족문학의 문학사적 정체성에 의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다.

그만큼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에 대한 연구는 만주조선인문학의 성격규명에 직결되는 작업이며 역시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생 발전 성장의 정체성을 증언하는 문학사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기성 연구들을 재검토하면서 형이상의 시대논리에 의한 정치 사회학적 비평보다는 좀 더 문학 본체론적으로 문학텍스트에 접근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목적에서 본 논문은 문학텍스트의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의 유기적인 통합이라는 텍스트의 사회학적 분석방법으로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을 재조명해 보려 한다. 이는 문학작품의 미학적 특성을 텍스트의 담론분석을 통해 심층 확인함으로써 형이상의 시대논리에 의한 선입견을 잠재우고 언어기표적인 표층의미에 눈이 가릴 수 있는 소재주의를 극복해 보려는 작업이다.

결국 이러한 작업을 통해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의 미학적 특성을 그 본래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조선족문학의 원형질로서의 만주조선인문학의 성격을 바르게 규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나아가 일제 말 암흑기 한국문학의 적극적 성장을 증명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안수길은 1935년 󰡔조선문단󰡕에 단편 「적십자병원장」과 콩트 「붉은 목도리」가 속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되면서부터 창작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이주, 개척, 정착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것은 그의 첫 작품집 󰡔북원󰡕에 집대성 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1944년 연길 예문당에서 출판된 이 작품집에는 「牧畜記」(강덕 10년)18), 「圓覺村」(강덕 8년), 「土城」(강덕 9년), 「한여름밤」(강덕 8년), 「바람」(강덕 10년), 「富億女」(강덕 4년), 「車中에서」(강덕 7년), 「함지쟁이영감」(강덕 3년), 「四號室」(강덕 7년), 「벼」(강덕 8년), 「새벽」(강덕 2년), 「새마을(續새벽)」(강덕 9년) 등 중․단편 12편이 실려 있다.

본 논문은 이들 작품 중에서 작가가 후기에서 밝힌 바 “在滿朝鮮人의 生活을 建國以前에 遡及하여서부터 起筆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斷片的으로 發掘記錄한것으로” “順序를 쪼처읽을때, 거기에自然히 時代的連結도 지어질 수 있는 것”19)이라는 「새벽」 「새마을」 「벼」 「원각촌」 「토성」 「목축기」 등을 중점적으로 다루려 한다.

이러한 작품을 통해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삶의 양상과 시대적 대응자세를 역사적 흐름 속에서 밝혀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조상의 뼈를 묻은 이주민들이 민족 공동체의식에 의해 새로운 고향건설을 지향하는, 이른바 ‘북향정신’이 산생되기까지의 처절한 삶의 모습과 치열한 몸부림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는 리얼리즘의 기법을 문예 미학적으로 해석해볼 것이다.

기본 연구방법은, 앞에서 제기한 문제점과 논제들에 대한 분석과 해결이 안수길의 소설세계를 정확히 읽을 수 있는 열쇠라는 데 착안하여 텍스트와 콘텍스트 상호 층위에서 먼저 텍스트 생산의 역사 사회적 조건을 역사․사회학적 분석방법을 기본으로 하여 조명할 것이다.

이를테면 만주와 재만 조선인 이주민의 관계를 유구한 이민개척사와 그에 따라 형성된 역사의식과의 유기적인 연관 속에서 조명, 역사적으로 형성되어온 조선인 이주민의 역사의식과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정책과 식민지배에 의한 강제이주민의 현실 인식 사이에 어떤 연결과 분열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밝혀볼 것이다. 따라서 한일합방 이후 식민지인으로 전락한 재만 조선인 이주민의 복잡한 신분과 착종된 의식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어떤 양상으로 나타나며, 이런 변질된 조선인 이주민에 대한 중국인의 태도가 어떤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가를 역사적으로 증언할 것이다. 그리하여 일제의 대륙 침략을 견제하려는 중국 당국의 배일사상과 대륙 침략의 일환으로 만주를 점령하려는 일제의 식민지 확장 정책의 대결 사이에 끼여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듯 이중으로 심한 박해를 받았던 이주민의 처참한 삶을 고발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조명작업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체제로 전락한 ‘간도’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선택할 것을 강요받게 된”20) 안수길 소설의 주인공들이 어떻게 식민지인이면서 이주민이라는 의식의 이중성을 극복하고 민족 공동체의식을 정착의지로 키워갔는가를 살펴보는데 역사적 근거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식민지로서의 조선과 만주국, 식민지인으로서의 반도 조선인과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동질성과 이질성을 정치․사회학적으로 검토할 것이다. 이를 통하여 본질적으로는 만주나 조선이나 일제의 식민지라는 개념을 넘어서, 독립국가인 괴뢰 만주국과 철저한 식민지 지배체제 하에 있던 조선의 통치 질서 간의 차이를 살펴보려 한다. 그리하여 ‘국민’과 식민지인, ‘오족협화’와 민족동화정책 등, 차별적인 정치 환경에 의하여 조선인과 만주 조선인 이주민, 조선 반도의 문학과 만주조선인문학의 생존 양상과 존재가 어떻게 다른가를 확인할 것이다.

단순히 표면적인 결론을 앞세워 식민지라는 동일한 기표 내에서 구체적인 대상물에 의한 기의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반도의 동화정책, 식민지배의 현실적 상황 및 일본어로 창작된 친일문학만이 생존할 수 있었던 현실을 근거로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삶의 양상 내지 만주조선인문학의 성격을 재단하고 규명하려는 오류를 피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시대에 대한 정치․사회학적 분석은, 신분적으로 복잡할 수밖에 없었던 안수길 소설의 주인공 내지 등장인물에 대한 단순한 이분법적 해석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것이다. 또한 반도를 눈금으로 만주조선인문학의 성질을 반도문학의 그것과 동일시하면서 기어이 친일경향이나 국책순응 문학으로 단정 지으려는 견해를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안수길의 작품세계를 위시한 만주조선인문학의 시대 배경과 등장인물에 대한 역사․사회학적 분석은 마침내 텍스트를 떠난 관념적이거나 이념적인 판단에 감정을 개입시키는 식민피해의식의 과잉반응을 극복시킬 것이다.

이러한 논거를 바탕으로 무엇보다 텍스트 읽기에 주목하여 소설의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에 대해 사회비평원리로 분석하고 성찰할 것이다. 소설텍스트 구조에 관심을 집중하는 “텍스트의 사회학”으로서의 사회비평21)자세는 내용과 형식을 분리하고 이데올로기적 판단에 급급하여 작품이 창조해낸 미적 대상을 외면 내지 무시하는 편향을 극복하게 해 줄 것이다.

화자-해설자, 주인공-행위자의 복합적인 의미 층위를 인물설정, 시점선택, 플롯의 전개 등을 통해 확인하고, 인물들의 성격과 사건의 전개양상에서 시대인식과 역사의식을 포착하도록 할 것이다.

이런 작업을 통하여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이 그 예술적 생명력을 과시하면서 만주조선인문학과 함께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생적 원형질이 되고 나아가 한국문학사의 맥을 이어주는 데 당당하게 한몫을 하고 있음을 증언할 것이다.

 

 

2. 재만 조선인 사회와 안수길의 현실 인식


간도를 포함한 만주가 만주조선인문학의 발생, 성장의 문화적 토양이고 공간이었음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만주조선인문학이 싹트기 시작한 것은 일제가 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하고 만주국의 건국과 함께 바야흐로 대륙 침략을 획책하던 시기와 맞먹는다.

이에 앞서 간도를 포함한 만주와 조선인의 관계는 다만 일제 식민지배에 의한 결과가 아니고, 오랜 역사적 연원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또한 일제의 이민정책에 의한 피해의식에 앞서 신개지개척이라는 개척의식이 이주민 의식의 역사적인 원류라는 걸 외면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유구한 역사적 관계를 외면할 때 조선인 이주민의 삶의 양상이나 성격을 일제의 침략정책과 식민지배에 의한 결과물로만 판단하게 될 것이다.

역사적 시각에서 볼 때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전체적인 심리구조와 역사의식은, 만주는 우리 선조들이 개척한 땅이고 피와 땀이 스며든 삶의 현장이고 뼈가 묻힌 곳이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일찍 만주개척의 역사를 갖고 있는 조선인 이주민이기에 나중에 일제의 대륙 침략과 식민지 확장정책의 희생물로 강제 이주했거나 본의 아니게 이용된 경우에도 주체적으로는 어디까지나 땅을 찾아, 살길을 찾아 이민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의 정착에의 노력은 조상이 피와 땀을 쏟고 뼈를 묻은 곳에 발을 딛고 서려는 비장한 행위라 볼 수 있다.

이러한 확인은 만주조선인문학의 주체적 성격을 긍정하여 한국문학사의 맥을 정직하게 이어주게 될 것이다. 이것은 또 중국 조선족의 삶의 원형질과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생적 근원이 되어 역사성과 함께 현실적 의의가 큰 것이다.



2.1 역사의 만주와 현실의 만주국

 

청이 북경으로 천도한 뒤, 강희제는 만주인의 관내로의 대거 이동을 기회로 타민족이 침투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하여 이른바 청조의 발상지이고 선조의 무덤이 있는 만주를 봉금시키기 위해 유조변장(柳條邊牆)을 창설하였다. 그러나 만주의 북쪽과 남쪽은 완전히 열려져 있어서 조선과 자주 마찰을 빚었다. 인삼을 채취하거나 모피를 얻으려고 월경하여 압록강 북쪽으로 잠입하는 조선인들이 많았다. 그러나 수탈과 관청의 가렴주구를 못 이겨 호구지책으로 만주로 넘어가 미개척지대에 괭이를 박고 잔류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조선조 후기에 이르러 정치․경제․사회 등의 원인으로 만주로의 조선인 이주민이 급격히 늘어났다.

조선과 청(靑)은 압록강과 두만강 이북에 완충지대를 설정하고 두 나라 사람들의 출입을 금하는 봉금(封禁)정책을 세웠으나 “조선의 북변(北邊)에 사는 가난한 주민들은 그 정책을 따르지 않았다. 북변으로 이주해 가서도 관(官)의 가렴주구에 시달려 생계를 보장받지 못했던 조선 주민들로서는 살기 위한 지구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22)

월강하는 자들을 도저히 막을 길이 없고 청(靑)으로부터는 위압적인 항의를 받게 되자 조선 현종 때는 월강죄를 물어 사형에 처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극형에도 불구하고 월강하는 자가 더욱 늘어만 갔다. 고종 때에 이르러서는 국내에서 살길이 막힌 궁민(窮民)들이 대거 월강함으로써 조정의 힘으로도 어찌할 수가 없게 되었다.

청국이 두만강을 토문강으로 알고 1883년(고종 20년)에 토문강 이북과 이서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있던 조선인들을 내쫓으려 하자 간도에 거주하던 조선인들과 두만강의 변민들은 기록과 구비(口碑)로 내려오던 백두산정계비를 답사하고 종성(鍾城)부사 이정래(李正來)한테 돈화현에 조회하여 국경을 바로잡도록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것이 그 후 분규를 거듭했던 간도문제의 발단이었다.

국경문제가 해결되지 못한 현안으로 있는 가운데 청국은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에게 머리를 땋고 청복을 입고 지세를 납부할 것을 강요하였고 조선인들은 한사코 이를 거절하였다. 조선 조정도 간도지방에 대한 대응책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러한 국경문제가 결국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와 대륙 침략정책에 의해 계산적으로 ‘해결’되고 말았다.

이상에서 대략 살펴본 바에 의하면 학정과 재해와 가난 때문에 정든 고향을 등지고 이른바 ‘신개지개척’에 나선 것이 조선조 말 이주민의 원류였다.

1905년 11월 제2차 한일협약(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1906년 2월에 일본통감부가 설치되어 한국의 외교권 상실과 함께 간접지배를 통한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정치가 시작되었고, 1910년 8월에 이른바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어 총독정치가 행해지면서 일제의 직접적인 식민지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23) 이때로부터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성격에는 변화가 생기게 된다. 경제적 원인이든, 정치적 원인이든, 아니면 사회적 원인이든 외세의 침략과 억압에 의한 고향상실이란 식민피해의식이 그것이다. 이런 식민피해의식에 의한 초기 조선인의 만주 이주는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일제에 대한 저항요소가 담겨져 있는 것이었다. 한일합방(1910)과 3.1일 운동이 일어난 해(1919)에 만주로의 이주가 격증하였다는 사실도 이를 증명한다고 할 수 있겠지만, 1910년에서 1931년 9월 만주사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만주는 사실상 독립단체나 독립군의 주요 활동 무대였다는 사실이 더욱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부터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기까지가 중국이 조선인 이주를 정책적으로 견제하고 그 전에 이주한 조선인에 대해 제한, 탄압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1910년은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완전히 전락되던 해이고 1931년 만주사변 전까지는 만주지역이 의연히 중국 정부의 통제 하에 있던 시기였다. 따라서 중국 관헌의 시각에서는 일제 식민지배 하의 조선인은 더는 정치적 색깔을 띠지 않았던 그 전의 빈궁한 조선이민만이 아니었다. 특히 일제의 대륙 침략야심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만주가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됨에 따라 조선인 이민이 일제의 만주침략의 직․간접적인 역할을 한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만주 조선인 이주민은 많은 시련과 억울한 죽음을 당하게 되고 산 사람은 죽지도 살지도 못할 처참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럼에도 중국 정부와 관헌의 판단을 입증하듯이 일제는 1932년 괴뢰 만주국을 건립하자 만주를 대륙 침략의 든든한 발판으로 다지기 위해 국민 일본화의 근간으로 50만의 일본인을 이주할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후에 전쟁이 확대됨에 따라 전선의 병력 확충과 일본 국내 노동력 결핍 등으로 하여 이 일본인 식민계획은 조선인 농업이민으로 대용하는 조선인 식민계획으로 바뀌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일제의 조선인 농업이민 식민계획에 따른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경우라도 그 대부분은 일제 식민계획의 직접적인 동조자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식민계획에 앞서 식민지 조선에서 일제의 토지 수탈로 인한 농촌의 과잉인구, 조선식민지에 대한 일본인 식민정책과 그로 인한 조선인의 실향 및 전쟁 때문에 갈수록 늘어만 가는 기아수출(飢餓輸出)이 근본 원인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77%의 소작농 및 자작 겸 소작농은 말하자면 과잉인구였다. 원칙적으로는 농촌을 떠나 노동자가 되었어야 할 사람들이지만 한국에서는 농촌의 과잉인구를 흡수할 근대산업의 발전이 늦었기 때문에 이들은 여러 형태로 남아 있었다.”24)


“과잉인구가 국내로부터 넘쳐 나오는 부분인 이른바 해외유민(海外流民)이 있었다. 이민(移民)이란 말은 약간 고상하고 차라리 유민이라 함이 적당할 것 같다. 이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지역은 만주와 시베리아였다.”25)


이러한 사정으로 일제의 이민정책으로 인한 조선인 이주민의 양적 증대도 역시 땅을 잃고 고향에서 쫓긴 유민들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일제의 이민정책으로 인해 만주 이주가 “합법적인 출경”으로 쉬워졌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책적으로 보면 일제의 식민계획의 구도라 보겠지만, 조선인 이민의 입장에서 보면 그러한 식민정책을 이용한 삶의 추구 내지 선택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때문에 이러한 유민들의 만주 이주 후의 삶의 자세와 의식구조는 식민지 이주민으로서의 이중성을 띠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부조 이주민의 역사의식과 맥을 같이 하게 되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되면서 중국 정부, 관헌이나 중국인들이 조선인에 대한 신분확인을 다르게 하면서, 조선인의 만주 이주에 대해 태도를 달리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주권적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가령 조선 이주민은 살길을 찾아온 유민이라고 해도 일제는 치외법권을 행사하여 만주의 조선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세력 확장을 하는 것이 객관적인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조선인의 만주 이주에 대해 중국이 취한 태도는 처음부터 무단적이고 탄압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태도는 자국의 실정과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달라졌었다.

청조가 ‘만주는 청조의 발상지이니 오직 청조의 명예를 위해 보전되어야 하기에 한인(漢人)과 조선인(朝鮮人)과 같은 다른 종족(種族)은 들어오지 못한다’면서 봉금령을 실시하던 때가 이른바 쇄국시대(鎖國時代)이다. 이는 후기 한인과 조선인들의 이주에 신개지개척(新開地開拓)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청조와 조선 조정이 통치력과 국력이 약화되면서 한인과 조선인의 만주 이주를 막을 수 없었던 때가 이른바 묵허시대(黙許時代)이다. 대략 1890년으로부터 1910년에 이르는 시기가 환영시대(歡迎時代)에 속한다.


“이時代에 잇서서 中國官憲은經濟的利益을 獲得할만한莫大한處女地域을開發키爲하야 漢人朝鮮人의移住를歡迎하엿고 特히地方政府는 朝鮮人이米作을잘한다는理由로 그移住를獎勵하엿으며 滿洲에서 그처럼有利한作物을增殖하기爲하야 朝鮮移民에게는 먼저移住할만한優先權을주었다.”26)


그러나 일제가 1907년 8월에 간도 조선인 이주민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간도에 통감부간도파출소를 설치, 특히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면서 조선인의 신분확인이 달라지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조선인 만주 이주를 제한하거나 견제하게 되었다. 이 시기를 탄압시대(彈壓時代)라 한다. 탄압시대는 1927년을 전후로 또 제한시대와 배척시대로 나눌 수 있다.

제한시대의 제한정책은 초기에 효력이 적고 중국 관헌들의 방임 등의 이유로 철저히 실행되지 못하였었다. 그러다가 1925년 6월 11일 봉천정부의 경무처장 우진(于珍)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三矢宮松 간에 체결된 협약으로 조선인제한법강제실행법이 유효하게 되었다. 이 협약은 원래 만주에서 조선독립을 위해 움직이고 있는 조선인 민족주의자를 제재하기 위함을 목적으로 제정된 것이었다. 즉 중국 측에서 조선인 민족주의자를 축출하고 체포하여 일본 관헌에 인도할 것을 협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중국의 입장은 조선인을 이른바 치외법권으로부터 배제하려는 것이었다.

배척시대, 즉 1927년에 들어서면서 중국 관헌이 조선인 이주민을 본격적으로 탄압하고 가혹하게 취급하게 된 것은 동북에 대한 행정관리가 강화되면서 일제의 만주에로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고 주권을 수호하려는 당위성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리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의 억압에 의해 나라를 잃고 고향을 등진 이주민이면서 또 일제의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게 된 재만 조선인 이주민은 그 특이하고 복잡한 신분으로 인해 오히려 일제의 침략을 견제하려는 중국 측과 만주를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일제의 대결의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중국 관헌은 조선인에게서 소작권, 거주권, 이주허가증을 박탈하고 불법징수를 하였으며 아동교육을 방해하고 사람을 마음대로 체포하였다.

이와 함께 일제는 또 일제대로 조선인 민족주의자를 비롯한 독립 운동가들을 잡아낸다는 구실 밑에 조선인 이주민과 이주민부락에 대해 잔혹한 탄압과 살인을 감행하였다.

홍범도부대가 봉오동전투에서, 김좌진부대가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에 큰 타격을 준 후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간도일대의 한인촌락들을 대거 습격하였다.


“이 때 불에 탄 가옥이 4천 800호, 학살당한 한국인이 3만 8천여 명에 달했다. 이 사건을 ‘경신년참변(庚申年慘變)’이라고 한다. 일반인에게는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으나, 그 피해는 3․1운동이나 1923년의 관동대지진 때의 한국인학살을 웃도는 것이었다.”27)


일제의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는다는 이유로 중국 관헌으로부터 난폭하고 잔인한 박해를 받았는데, 이주민이면서도 조선의 식민지배에 대한 위험요소라는 이유로 결국은 또 일본 군경의 탄압을 받는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처지는 참으로 처참한 것이었다.

이처럼 두 적대세력 사이에 아무런 정치적 보장도 없이 무방비로 노출된 그들은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것인가가 가장 절박한 생존문제였으며 복잡한 신분과 함께 의식의 분열 내지 이중성을 띠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1931년 9월의 만주사변에 이어 1932년의 만주국 건국은 만주 조선인 이주민들로 하여금 실제적 지배자인 일제와 형식적 수행자인 중국인 사이에서 새로이 복잡하고 미묘한 신분을 얻게 하였다. 물론 이때에도 조선인 이주민은 만주족, 몽고족, 러시아족과는 달리 외래지배자인 일본인계에 조선인을 밀어붙이는 중국인들의 편견에 의해서는 항상 적대시의 대상이었으며, 이들 조선인 이주민을 대륙 침략의 ‘이용물’로 내몰면서도 조선 식민통치의 위험요소, 특히는 항일 세력의 원천으로 간주하는 관동군에 의해서는 항상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독립한 만주국이라는 형상 수립을 위해 내세운 ‘왕도낙토’, ‘오족협화’의 ‘건국정신’은 세상에 만주국 내의 여러 민족들의 화목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였기에 제도적 차원에서는 ‘국법’을 준수하는 이주민을 ‘평등’하게 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종래 만주국에 대한 성격분석에 있어서는 일제의 괴뢰정권 내지 사실상의 식민지라는 데 집착함으로써 식민지배, 식민정책 하의 인간행위, 인간의식이라는 통념적인 식민담론분석을 모든 연구의 기본 틀로 삼았다. 물론 식민지화된 만주는 하나의 역사적 현실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복잡한 역사적 현실을 단순화하는 오류를 범하게 할 수 있다. 식민지로서의 만주국이 식민지 조선과 동질성을 띠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현실이지만 괴뢰나마 “독립”한 국가였다는 사실에 의한 차이 내지 이질성을 절대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차이 내지 이질성이 확인되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행위나 의식에 대한 분석이 달라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실상의 식민지였으나 괴뢰정권의 형식으로나마 “독립”한 국가라는 의미 때문에 우선 배후의 실제적 지배자였던 일본인의 의식도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특히 만주국은 중국 대륙의 실익을 다투고 있는 세계열강들과의 역학관계 속에서 부득불 선택한 눈치보기식 식민체제였던 만큼 표면적인 독립국가 체제와 함께 정치 제도적으로, 그리고 정책적으로 국가적인 형태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괴뢰 만주국을 승인할 것인가의 여부는 일본과 열강이 만몽을 쟁탈하는 투쟁이기도 하였다. 19세기말 이래 일본은 열강과 쟁탈 가운데에서 남만주에서의 식민지 권익을 획득하였으나 이제는 전 만몽에 대한 패권을 쟁탈하게 된 것이다. 열강은 남만에서 일본의 권익을 승인하였지만 일본이 전 만몽에서 패권을 확립하는 데에는 반대하여 일본과 만몽을 쟁탈하였다.”28)


이처럼 열강의 직접적인 이익이 관계되기 때문에 일제는 만주의 식민지화를 조선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완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선 외무성은 일본이 멋대로 세워놓은 괴뢰 정권을 동북인이 전개한 독립 운동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면서 괴뢰정권 수립을 위한 국제 여론을 조성하기 시작하였다.”29)


국제연맹 리튼조사단이 만주사변의 해결방법으로 만주에 지방자치정부를 세우고 국제관리를 하는 방침을 내놓았을 때(이것 역시 중국의 국권을 무시하고 저들 열강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입장이었다.) 상해주재 일본공사 重光葵는 반공반소정책을 들어 일제의 만몽침략에 구실을 달아주려고 하였다. 당시에 반공반소정책은 열강뿐만 아니라 중국 정부까지를 포함한 공동한 주장이었다.

그러나 만주국을 승인한다는 것은 결국 만주가 일본의 식민지임을 승인하게 되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만주에서의 열강들의 권익이 없어지기 때문에 열강들은 만주국을 승인할 수 없었다.

한편 중국 남경정부도 일본과 직접 충돌하는 것을 피하는 무저항주의를 내세우면서도 만주국의 승인만은 강하게 거절하였다. 이와 같은 열강의 반대와 남경정부의 불승인으로 일제는 「이 시기 중국 본토로부터 분명하게 이탈하기 위해서는 명실공히 독립국가라고 할 필요가 있다」(󰡔現代史資料․滿洲事變󰡕, 第七卷, 東京, みすず書房, 1977. 189쪽-인용자 재인용)30)고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력 확장에 팽창한 제국주의시대에 다른 열강들의 실익에 직접적인 손실을 준다면 식민지 확보는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만큼 제국주의시기 세계열강들의 권익수호의 역학적 힘은 켰던 것이다. 그러기에 일제는 만주국 건국이 국제적 승인을 획득하지 못하게 되자 마침내 국제연맹에서 탈퇴하였으면서도 그 후 1945년 8월 종전이 될 때까지 만주국의 독립국 승인을 획득하기 위해 계속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열강의 입을 막고 열강의 반식민지였던 만주를 일본의 독점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 일본이 선택한 것이 독립국이라는 체면을 세울 수 있는 이른바 “駐滿大使制”였다. 즉 국가외교를 표방하는 영사관제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만주국의 독립성을 인정받으려 하였던 것이다.

반도에선 식민지 폭압정치가 공공연할 수 있었으나 “독립국가”인 만주국에서는 대내외의 태도를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표면상으로는 일본의 식민지가 아닌 독립한 만주국인 만큼 세계열강의 눈을 속이고 마음을 잠재우기 위해 제도적인 장치와 정책 면에서 안팎이 전혀 다른 양면성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대외적으로는 독립 국가이고 대내적으로는 식민지라는 특수한 성격에 의해 요청되는 것이었다.

이른바 오족협화는 이러한 양면정치에 의한 만주국의 “민족정책”이라 할 것이다. 물론 일제의 통제와 지배하의 오족협화란 식민 지배민족과 식민지 피지배민족을 동일 층위에 놓고 세상의 눈을 속이려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따라서 ‘왕도 낙토’ ‘민족 화합’이란 일제의 대륙 침략을 위해 ‘만주’를 그 전진 기지로 삼기 위한 구두선(口頭禪)일 따름이고, 또한 일제의 만주 통치를 공고히 하는 책략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정책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민족 단위의 갈등과 투쟁은 사라진다.”31)


국가적으로 확립되고 외교적으로 수립했던, 이른바 여러 민족의 화합 정신으로 꾸려가는 ‘왕도 낙토’라는 이미지는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와 문화적 형식을 통해 나타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여러 민족의 문자로 된 신문, 잡지나 도서들이 발행될 수 있었다는 사정은 유형적인 문화시설 내지 실체들이 문화제도적인 측면에서 존재 공간을 제한적으로나마 가질 수 있었던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은 내선일체(內鮮一體)로 민족동화까지 강요하던 식민지 조선의 경우와는 사정을 많이 달리하는 것이다. 내선일체의 본질은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만들려는 민족 말살 정책이었던 만큼 사상․언론의 탄압과 통제에서 한 걸음 나아가 창씨개명과 언어말살을 강행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때에 만주에는 한글 신문인 󰡔만몽일보󰡕와 󰡔간도일보󰡕가 있었고 1937년 10월 21일에 그것이 통합, 󰡔만선일보󰡕로 되어 다른 민족어의 신문과 병존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떠올리면 오족협화의 국책은 유형적인 문화 시설 내지 실체의 차원에서도 민족을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반도에서 출판물을 통한 언어 침략 내지 민족 말살정책으로 한민족을 철저히 동화시키려 한 일제의 ‘노력’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우리 민족의 끈끈한 생명력과 바위틈을 뚫고서라도 기어이 솟아나려는 강한 자생력을 반증한다고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견지에서 또 만주에서의 표면적인 민족협화 정책과 유형적인 문화시설 내지 실체들의 합법적인 존재는 우리 민족의 민족성 추구에 본의 아니라도 어쩔 수 없이 ‘이용’될 수밖에 없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조선 국내에서 일제가 철저한 동화정책을 실시할 때 만주국에서는 재만 조선인을 안으로는 은근히 일본인계에 넣어 독립적인 민족의 존재를 무시하려 하면서도 만주국의 ‘민족’ 중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자기 민족의 언어 문자를 가지고 있는 조선인을 오족의 하나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문화적으로 다른 민족과 동등한 권리를 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실제로 만주문인협회에 일인, 만인, 백계 러시아인은 있어도 조선인은 없었고 조선인작가들의 작품에 대해서도 만주문단은 별로 관심이 없었던 듯하였다. 이는 중국인들이 일본의 침략에 ‘공모’한 조선인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거나 혹은 일제의 ‘보호’를 받는(실제로는 일제에 의해 출병 명목을 위한 농락물의 취급을 받는) 조선인을 섣불리 건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국권을 상실한 조선인 이주민은 반도의 조선인과 함께 조만간 동화되리라는 일본인의 계산으로 하여 비상설적인 모임이나 통계에서는 조선인을 따로 대우하지 않고 그냥 일본인계에 귀속시켜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일인 작가는 만주인 작가의 작품들을 번역해 저의 잡지에 싣기도 하고 개인 작품집(물론 일역한 걸)도 내주기도 했으나 우리 작가와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고, 우리 측에서도 구태여 그러려고 하지 않았다.”32)


그러나 이러한 무관심이나 무시는 차라리 조선인 작가들이 소외된 중에 나름대로의 창작에 정진하고 민족 공동체의 운명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공간과 시간을 제공한 셈이었다. 그것은 또한 내선일체로 동화를 가속화하기 위해 조선반도에서는 일본어 사용을 상용화하고 문학은 아예 전쟁문학, 시국문학으로 일색화하였던 데 반해 만주국에서는 오족협화의 국책에 의해 민족과 언어를 승인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황에서 다만 작품에 대해, 즉 작품의 소재나 사상에 대해서만 검열한 것 때문에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아진다.

만주조선인문학이 많이 다루었던 조선인 이주민의 개척사, 수난사, 정착사가 일제의 만주침략과 식민지배에 저촉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 만주국 내에서 민족 지간의 갈등과 모순을 완화하고 해소하는 것은 열강들의 시선을 따돌리고 만주를 대륙 침략의 전초기지와 전선 공급기지로 자리 매김하려는 일본 군국주의 전쟁 책략에는 전혀 모순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처럼 만주국이 일제의 괴뢰정권이고 식민지이면서도 조선반도와는 달리 특수한 존재이었기에, 국가적 독립성이나 국책적인 오족협화의 표면적인 작용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만주조선인문학은 짓밟힘 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나는 민들레처럼 끈질기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2.2 정착 의지와 북향정신


한 작가의 의식이나 이념을 별도로 연구하여 그 작가의 창작성향이나 작품의 주제를 확인한다는 것은 자칫 문학 본체론적 특성을 외면하고 인식의 관념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이것은 작품매체의 성격으로 작품을 진단하는 경우만큼이나 오진할 수 있는 소지가 될 수도 있다. 작품을 떠나서는 작가도 일상을 살아가는 한 평범한 사람일 뿐이고 따라서 사회적 발언은 행위에 대한 과장된 포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설에서의 인물형상과 그 형상의 행위 가능성에 의해 형식화되는 플롯은 때때로 작가의 시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 작가의 의식이나 이념이 곧 구체적인 작품의 주제의식으로 될 수 없음은 당연한 일이다. 그만큼 한 작품에 대한 해석 내지 텍스트 분석에서 작가의 장외 주장이 절대적인 잣대로는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은 역시 작가의 의식이나 이념과 전혀 무관한 객관적 존재는 아닐 것이다. 다만 작가의 의식이나 이념 자체를 그냥 그대로 작품을 가늠하는 잣대로 확인하는 인식의 관념론이 문제가 될 뿐이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세계관이나 심리적 대응자세가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필경 작품에서도 작가의 의식이나 이념에 의한 경향성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완성된 작품에서의 작가의 이념적 성찰의 성숙함을 작가의 의식이나 이념에 대한 반증이라고 확인할 수 있을 때 작가의 의식이나 이념을 포함한 신변자료는 무의미한 것도 아니고 그냥 배경자료만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완성된 작품의 전제적 조건 내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소지(素地)가 되는 것이다. 이 경우, 작가의 장외 주장을 잣대로 하는 것과는 달리 완성된 작품의 결과로서 작가의 의식성향을 재확인하고 반증하는 것이다. 물론 작가의 신변자료와 의식이나 이념은 개별적 작가의 창작 성향 내지 창작 자세에 따라 효과가 발생한다.

안수길의 경우, 이주민 사회를 역사적 흐름 속에서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초기 소설세계를 의도적으로 이주, 개척, 정착이라는 주제로 형성하고 있다. 그러므로 논자는 작가의 시대적 집념이나 역사의식 내지 현실 인식과 같은 것을 창작동기와 밀착시켜 밝혀보지 않을 수 없다. 그 시기에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삶을 소재로 창작한 작가들이 안수길 외에도 적지 않게 있었으나 대개는 그런 소재를 파편적으로 다룬데 지나지 않는다. 안수길처럼 그 삶의 현실에 몸을 담고 현장작가로서의 치열한 생존의식과 정착의지로부터 출발한 작가는 드물다.

‘북향정신’은 그의 이 시기 창작을 총 결산한 이념 성찰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족의 공동체의식을 바탕으로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정착의지를 보여주는 “북향정신”은 이제 중국 조선족 지역사회의 영원한 주제로 자리매김할 수 있는 정신적 창조물임에 틀림없다. 이는 연구자의 과잉반응이나 확대 해석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확인하고 현실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거듭 확인하지만 ‘북향정신’은 안수길이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역사에 대한 총체적이고 투철한 인식에서 정제한 시대 초월적이고 미래 지향적인 이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조상들이 개척하고 피땀을 흘리고 뼈를 묻은 땅이라는 애정이 안수길에 의해 식민지 이주민의 현실 극복의지인 정착 지향의 ‘북향정신’으로 개념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에 와서 그것은 우리의 조상과 수많은 선대인들이 중국의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 목숨을 바쳤다는 당당한 주인의식에서 ‘조선족 자치의 지역사회 정립’이라는 ‘제도적 이념’으로 승화되어 현실적 의의를 갖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북향정신”이 과연 조선족 지역사회 형성과 발전, 성장의 원동력이 되어 현재형 내지 현주소를 가지고 중국 조선족 문화와 사회를 조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안수길의 작가적 역량과 투철한 역사의식, 그리고 중국조선족문학과 민족공동체 확립에 대한 기여를 크게 기리어야 할 것이다.

그만큼 작가 안수길은 간도시절의 소설 창작에서 이주민 사회를 하나의 창작무대로 선택하기에 앞서 그것을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체험하고 역사 철학적인 사고와 시대적 인식에 고민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고민과 판단이 선택적으로 정리되고 체질화되면서 작가의 창작동기를 유발하고 창작에 적극적으로 영향을 주게 된 것이다.

선행 연구를 살펴보면 작가 안수길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큰 고민을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한 작가의 시대적 성찰로서의 현실 인식이 궁극적으로는 세계관 내지 인생관에서 어떤 역사 철학적 의식에 바탕하고 있는가를 밝히는 것이 근원적인 문제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살 것인가”가 사회 실천적이고 현실대응적인 문제에 대한 사고라면 그것은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사회 본질적이고 역사 철학적인 물음에 대한 해명을 전제로 하지 않고는 공중누각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총체적인 역사의식과 투철한 시대인식에 토대한 시대적 성찰만이 “그것은 무엇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는 총체적이고 변증법적인 사유체계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것이 무엇인가”라는 역사 철학적 인식이 없었다면 안수길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현실 극복의지를 정착 지향의 “북향정신”으로 정제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소설가들의 고찰방식 역시 원칙적으로 역사철학적이다. 그들이 비록 역사철학적 열망을 갖고 있지는 않더라도, 그들이 그들 시기의 특수한 문제성을 캐내려고 추구하는 한 그들의 시각은 역사철학적이다.”33)


안수길 스스로도 이점을 강조하여 지적하고 있다.


“문학의 대상이 인간이고, 소설은 그 인간을 생활면에서 구체적으로 허구(虛構),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작가의 관심은 전연 인간에 있고, 그 생활에 있고, 그것의 표현에 대한 부심(腐心)에 있을 밖에 없는 일이다. 표현의 부면(部面)이 작품에 있어서의 예술이고 인간과 그 생활의 부면이 내용이 되는 것도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작품의 내용이 되는 인간 자체도 「그것이 무엇이냐」와 「어떻게 살 것인가」로 가려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방패의 양면같은 것이어서 그 한쪽만으로 작품이 성립될 수 없는 것인데, 가령 전자에 치중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본질의 구명은 그것으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살 것인가」의 시사(示唆)를 그 작품에서 받을 수 있고 후자의 경우도 작가가 인간의 본질을 구명하는 날카로운 눈을 가지고 임하지 않을 때 그 인간이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올바르고 정확한 길을 제시할 수 없을 것이다.”34)


따라서 작가의 ‘체질론’은 어떤 경우에도 이 중의 어느 한 측면에 대한 고립적인 주장이나 추구일수는 없다. 다만 창작동기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기 때문이다’는 모티프와 ‘그것이 무엇이기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이다’는 모티프로 크게 나누어지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살아가는 모습을 통하여 그것의 본질을 확인하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에는 본질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그것의 미래를 확인하는 것이다. 결국 ‘그것이 무엇인가’는 객관적 사물에 대한 인식론적 토대가 되는 것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는 창작에 임하는 작가의 이념 내지 지조가 되는 것이다.

물론 안수길의 ‘체질론’ 내지 창작정신은 그의 삶의 경력이나 인격 형성과정과 무관할 수 없다. 안수길은 삶을 체험하면서 현실을 직시하고 인생을 고민하기 전인 학생시절에 작가의 꿈을 키우면서 서책을 통한 인격 형성과정을 거쳤었다. 그 중에서 그의 일생을 두고 좌우명이 된 것이 파스칼의 󰡔팡세󰡕에 나오는 “신음하면서 더듬어 찾는 사람만을 시인(是認)할 수 있다”는 구절이었다.


내가 「팡세」를 읽었을 때는 앞에 쓴 대로 20대의 전반이었고 그 무렵은 일정시대(日政時代)다. 그리고 그 무렵에 나는 굉장한 정열을 가지고 세계명작을 읽고 있던 소설가 지망자였다. 거기에 가정 형편과 좋지 못한 건강 때문에 학업도 중단하지 않아서는 안 되었던, 이를테면 불우한 시기였었다.

「신음하면서 더듬어 찾는다」는 말이 그대로 내 마음에 먹혀 들어왔다. 불우한 문학청년인 나에게 이처럼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는 말이 있은 것 같지 않다.

“「신음하면서 더듬어 찾는다!」

나는 이 말을 입 속에서 푸념처럼 뇌이면서 그 후에 또 겪지 않아서는 안 되었던 중병시기(重病時期)와  해방 전후와 오늘날까지의 격랑(激浪)의 현실을 용하게 헤엄쳐서 왔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35)


물론 그것이 그의 일생의 좌우명이 되기까지에는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의 식민지인의 처참한 삶의 현실, 그런 현실에서 살아나가려는 생존의식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작가가 밝힌 것처럼 애초에는 체질적으로 허약했던 그가 육체적 아픔을 극복하고 시련을 이겨내는 좌우명이 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수길은 1932년 아버지의 급환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부모의 곁으로 돌아왔다가 용정에서 80여리 떨어진 팔도의 혜성학교에서 교사로 있게 된다. 그는 무리한 생활로 건강상황이 나빠져 교사직을 그만두고 고향 함흥으로 가서 요양을 한다. 그리고 1940년 간장염으로 다시 한 번 요양을 하고, 1945년 악화된 건강으로 고향에 돌아가 죽을 각오를 하고 귀국한다. 끝내는 1977년 만성 폐쇄성 폐질환으로 66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이처럼 그는 병마의 시달림 속에서 생명의식을 자각하면서 살아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신음하면서 더듬어 찾는다!”는 구절은 작가 지망생의 탁상좌우명으로부터 이런 육체적 아픔 때문에 신변체험으로 자주 떠올리는 좌우명으로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격랑(激浪)의 현실을 용하게 헤엄쳐”나온 작가적 생활에서 마침내 본래의 철학적 의미를 재확인하고 사회적 현실 인식을 획득하였을 것이다. 즉 육체적 아픔에 대한 극복의지와 사회적 시련에 대한 극복의지가 정신적인 승화를 이루어낸 것이다. 이는 작가의 ‘체질론’으로 확인되고 있는 “어떻게 살 것인가”의 철학적 사유의 바탕이 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가 “그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본질의 성찰을 전제로 결국 ‘그것’에 대한 미래 확인이라면 “신음하면서”는 바로 육체적 아픔을 식민지인의 아픔에 비교하면서 사회 현실의 본질적인 것에 대해 역사 철학적으로 “그것이 무엇인가”를 사유하고 확인하는 과정이다. 따라서 “더듬어 찾는다!”는 그와 같은 “신음하면서”에 대한 본질적인 확인과 함께 “어떻게 살 것인가”를 “더듬어 찾는다!”는 작가의 이념과 지조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사유의 정신적인 체질화가 ‘북향정신’에까지 이르게 된 것은 이주민 사회의 현실에 대한 안수길의 삶의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체질이란 물론 자연인으로서의 생리적인 것이 아니고 그 작가의 정신적인 것을 뜻하는 것일진대”, “나의 경우는 청소년시절을 만주 지방에서 보냈다는 사실이 결정적인 요인인 것으로 생각한다. 내가 간도 용정(龍井)의 부모 옆으로 두만강을 건너가게 된 것은 1924년 봄, 그러니깐 내 나이 열네 살 때였다. 거기서 초등학교 5,6학년 2년 동안 공부하고 고향의 H고보에 입학, 서울․경도(京都)․동경(東京) 등지에서 학업을 닦기는 했으나 방학 때면 제2의 고향인 간도에서 지냈고, 더구나 첫 취직까지가 현지의 우리 말 신문사였고, 해방 직전 35세 때에 귀국하기까지 죽 그 신문사의 기자생활을 했다는 점을 들지 않을 수 없다”36)


이처럼 한창 감수성이 뛰어난 열혈적인 성장기와 성숙기를 간도에서 살면서 기자생활을 해온 안수길이었던 만큼 입수된 생활소재나 객관적 관철에 그치고 마는 작가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개개의 소재발굴의 차원을 넘어 삶의 현장에 몸담고 신변체험으로 사회를 인식하고 확인할 때 보다 총체적이고 역사 철학적인 사유를 동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기의 작품집 「북원(北原)에 수록되어 있는 「새벽」 「벼」 「목축기(牧畜記)」등등, 해방 전 재만시절의 소작 거의 전부가 동만주 지방에 살고 있는 우리 농민들의 생활을 발굴해, 「어떻게 살아 왔느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해 본 것이고, 그 무렵의 장편 「북향보(北鄕譜)」도 거기에 기초를 두고 쓴 최초의 긴 이야기였다.”37)


사실 작가 안수길은 간도시절의 소설 창작에서 남달리 개개의 소재발굴보다는 이주, 개척, 정착이라는 이주민 사회의 삶의 양상을 총체적으로, 발전적으로 포착하려는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발전적이라는 의미는 안수길의 역사의식에서 비롯된다. 즉 만주 이주민 사회의 형성을 식민지 시대의 현상으로만 한정짓지 않고 그것을 오히려 역사의 한 단계로서 확인하였기에 이주민 사회의 형성, 정립, 발전에 대해 당위성을 찾아보려고 고민하였던 것이다. 안수길에게 있어 만주는 작품의 주인공들이 활동하는 무대로서의 공간이기 전에 벌써 역사적 연원으로 하여 조상 세대들이 삶의 한 공간으로 확인했던 곳이었다. 안수길은 이러한 역사의식의 확인이 당대를 살아가는 이주 조선인들로 하여금 의식 속에 현실 극복의 생존욕구와 함께 민족 공동체적인 정착의지를 심어주었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조상의 피땀과 ‘무덤’이 늘어나면서 그 산천에 대한 조선인 이주민들의 애정과 향토적 정서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에 현실 극복의지인 정착 지향의 ‘북향정신’을 정제해낼 수 있었다. 즉 정착의 가능성 문제가 아니라 당위적인 역사의식에 입각하여 어떻게 정착하느냐를 고민하는 작가의 현실 인식의 결정체가 바로 ‘북향정신’인 것이다.

그러나 안수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일제 식민지 치하의 식민지인이면서 이주민이라는 복잡한 신분을 갖고 있다. 하여 이들의 만주에로의 이주, 개척, 정착은 조상 세대의 그것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것이고 훨씬 복잡한 상황이 얽혀져 있다. 역사의식에서 출발하는 민족 공동체적인 정착의지와는 달리 조선인 이주민은 일제의 대륙 침략에 의식적으로 동조하든 또는 무의식적으로 이용되든 중국의 주권에 직․간접적으로 위협을 주게 되므로 중국 관헌들의 탄압과 박해에 노출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 관헌의 대 조선인 이주민의 대응은 본질적으로는 일제의 대륙 침략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는 일제의 대륙 침략의 움직임에 따라 중국 관헌들이 조선인 이주민에 대한 정책을 달리하고 있는 사실을 통해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일제는 또 일제대로 조선인 이주민에 대해 식민지인으로서의 단속과 억압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한편 대륙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조선인 이주민에 대한 보호권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국권마저 상실하고 두 적대 세력 사이에 무방비 상태로 무기력한 실향인의 모습을 드러낸 조선인 이주민은 일제 대륙 침략의 끄나풀이나 첨병이라는 누명에 억울함을 느끼면서도, 중국 관헌의 무차별적이고 치명적인 과잉탄압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일제의 힘에 기대보려는 본능적인 생명욕구를 떨쳐버릴 수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식민지인이면서 이주민인 조선인 이주민의 의식의 이중성도 여기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특정 시대의 현실 인식에 입각한 안수길은 시대적 현실을 외면하고 추상적인 이상향을 건설할 수는 없었다. 역사의식에만 근거한 이상향을 건설하기에는 복잡하고 비타협적인 현실이 작가의 선택에 침묵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또한 조선인 이주민의 복잡한 신분확인에 따른 시대적 제약에 눈이 가리어서 역사의식의 필연적인 흐름으로 예약되어진 미래를 잘라버릴 수도 없는 것이었다. 조상의 피땀으로 비옥해지고 그들의 뼈가 묻혀 있는 산천은 결코 낯선 이국땅만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역사의식과 시대현실이 엇갈리는 상황에서 역사의식에 토대한 정착 지향의 ‘북향정신’으로 현실을 극복하려는 것이 작가의 현실인식이었다.

여기서 안수길 소설의 성격적 특징을 사회 비판적인 문제소설이 아니라 인간의 극복의지 내지 인격 성장을 다루는 리얼리즘 소설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문제소설이 다만 형이하의 인간조건에 대한 현실 비판이라면 진정한 리얼리즘 소설은 그런 현실을 살아가고 극복해가는 인간의 몸부림 내지 자각증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이제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역사의식과 시대적 현실의 모순을 기본 갈등구조로 하고 이주 조선인의 정착 내지 지역 공동체의 결성을 실천해가는 주인공들의 현실 극복(나중에 ‘북향정신’으로 정립되었지만)의 비극적 양상을 조명해보게 될 것이다.

 

 

3. 만주이주민소설의 서사구조 특성


사회 현실이나 발표매체의 성격에 대하여 작가의 대응 내지 저항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작가의 사상도 문학작품에서는 결국 언어를 질료로 하는,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의 완결된 구성을 통해서만 문학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오직 예술적으로 완성된 문학 텍스트 속에서만이 작가의 이념이나 신변 정보가 미학사상으로 승화하여 발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학비평은 오직 문학텍스트에 대한 성실한 탐구를 통해서만이 인간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현실을 넘어 인간의 삶의 본질을 파헤치는 문학의 본체론적 의미를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작가 안수길의 현실인식에 대한 사상담론이나 억압의 특정 시대에 대한 식민담론을 잣대로 삼아 그의 작품을 판단하지 않고, 인간의 본질적 의미를 획득하고 있는 소설 주인공들의 모습에서 문학작품과 작가와의 협화음 내지 불협화음을 들어볼 것이다.

이러한 담론방식과 분석방법은 문학 텍스트를 분석의 표본으로 삼는 만큼, 이론적으로는 문학 텍스트의 질료인 언어를 사회학적으로 해석하면서 텍스트 구성에 접근하는 피에르 지마의 󰡔문학의 사회비평론󰡕에 주로 기대고자 한다. 그러면서 루카치, 슈람케를 비롯한 다른 문학이론 대가들의 영향력 있는 이론들도 외면하지 않을 것이다.

피에르 지마는 우선 문학 텍스트가 언어활동 층위에서 어떻게 사회적․역사적인 문제들에 반응하는가에 주목하고 있다.


“텍스트의 사회학은 보완적인 두 개의 이론소로부터 출발해야 할 것이다. 즉, 사회적 가치가 결코 언어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리고 어휘적, 의미적, 통사적 단위들이 집단의 이해관계를 분명히 진술하고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투쟁 목표가 될 수 있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38)


‘단어’들의 사회적 성격이 집단적인 이해관계와 사회의 시대적인 갈등을 나타낼 수 있다는 점에서 역사적․시대적 산물로서의 단어의 사회학적 의미를 확인하는 것은 언어활동인 문학 텍스트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분석 영역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출발의 기본 영역일 뿐이다. 텍스트구조 전체의 유기적인 구성을 파악하려면 필연코 텍스트 서사구조에 유기적으로 녹아 들어있는 의미담론에까지 확장해나가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문학텍스트의 의미적 토대가 텍스트의 서술구조를 결정한다는 것은 분명”39)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적 의미론의 차원에 이르면 우리는 좀 더 확실하게 소설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인 플롯의 분석 연구에 본격적으로 몰입하게 되고 화자-해설자, 주인공-행위자의 복합구조에 대한 심층 해부를 통해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의 모순을 밝혀볼 수 있을 것이다.



3.1 입체인물-식민 시대의 인물 풍속화


루카치의 주장을 따라 더듬어보면 소설은 역사적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서 존재했던 내재적 유토피아가 미학적 범주에서 밀려나고 인간 내부의 간극과 심연이 첨예해지면서 만들어진 문학형식이다. 그러니까 소설에서의 주인공의 삶의 자세나 목적 추구는 인간 내부의 간극과 심연이 메울 수 없이 첨예해지면서 고향을 상실한 영혼이 삶의 총체성을 찾아나서는 심리적 사실에 불과한 것이다.


“역사적 상황이 그 자체 속에 내포하고 있는 모든 간극과 심연은 형상화 속에 흡수되어져야만 하며, 구성이라는 수단에 의해 감추어질 수도 없거니와 또 감추어져서도 안 된다. 이렇게 해서 소설에 있어서 형식을 규정하는 기본적 의도(Gesinnung)는 소설 주인공의 심리로서 객관화 된다. 즉 소설의 주인공은 언제나 찾는 자인 것이다. 찾는다는 단순한 사실은, 목표나 그 목표에 이르는 길이 직접적으로는 주어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40)


물론 작가는 현실을 살고 있는 인간의 일상적인 행동을 그대로 모방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대한 투철한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에 근거하여 작가의 미학이념을 작가 특유의 자유의지에 따라 인간관계를 설정한다. 이는 소설의 주인공의 행위는 다만 현실을 살았거나 살고 있는 평범한 인간의 일차원적인 행위기록이 아니라 작가가  문학 실천을 통해 인간의 삶이나 인생을 총체적으로 파악하고 그 본질을 밝혀보는 미학이념의 형상적 구현임을 말해준다.

그러나 아무리 총체적인 형상성 등을 강조한다고 해도 그것은 역시 역사 시대적으로 행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통하여 보여준다는 문학 본체론적 속성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현실적인 인간관계의 질서에 맞게 구성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주인공이나 작중 인물의 행동이나 발언이 역사 시대적인 인간관계 속에서 인식 가능하고 실천 가능하지 않을 때 독자들은 허구가 아닌 생경하고 벌거벗은 개념에 맛을 잃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의 자유의지에 의한 허구적인 상상물이면서도 또한 역사 시대적 인간관계의 질서에 위배되지 않는 피와 살이 있는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안수길의 창작집 󰡔북원󰡕에 수록된 소설의 사회 역사적 배경은 일제의 조선 식민지화의 정책이 심화되어 땅으로부터 뿌리 뽑힌 과잉인구가 늘어나면서 궁민들이 역사적 연원에서 이미 살길로 알려져 있었던 만주로 이주하던 시기(「새벽」, 「새마을」)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일제의 대륙 침략의 야심이 점차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일제의 치외법권의 보호 하에 있는 조선인 이주민들이 대륙 침략의 위험요소라는 이유로 중국 관헌으로부터 난폭하고 잔인한 박해를 받던 시기(「벼」)를 거친다. 마침내는 이른바 독립된 만주국의 허명 하에 점차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만주 땅에서, 이미 부조의 뼈를 묻은 이주민 후세들이 다시 역사의식에 기대인 정착의지와 민족 공동체 건설을 꿈꾸던 시기(「원각촌」, 「목축기」)에까지 이른다.

이러한 시대적 특성과 창작동기로부터 안수길 소설의 주인공은 대개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이주, 개척, 정착의 과정에 겪은 수난의 역사를 보여주는 풍속화적인 입체인물들이다. 즉 작가 안수길은 일제 식민지 치하 내지 대륙 침략이라는 현실 인식에 투철하면서도 그 극복의지를 연연이 맥을 잇고 있는 역사의식의 승계 가능성에서 찾아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입체인물의 설정은 초현실적인 원형 상징의 전형인물 구상이 불가능했던 사회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920년 6월 홍범도부대의 봉오동전투, 동년 10월 김좌진부대의 청산리전투에서 대첩을 올렸던 독립운동의 불길도 일제의 대토벌에 식어버리고 1931년 9월에 만주사변이 일어남에 따라 마침내 그 활동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시대를 반성하고 진보를 추구하고 초능력의 힘을 나타내면서 민중을 불러일으키는 전형적인 인물은 현실적으로 존재 불가능할 뿐더러 창작적으로도 허구 불가능한 사항이었다. 절대적 억압의 시대, 특히 국권마저 상실하고 민족이 동화되는 식민지 사회에서 식민지인의 정지된 시간의 삶은 풍속적이고, 닫힌 공간의 저항은 내면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제의 대륙 침략의 정책과 수단에 의해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아 중국 관헌의 탄압 대상이 되었던 조선인 이주민은 복잡한 신분에 의해 강요된 선택의 갈림길에서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 사이에서 심각한 갈등에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회 역사적 현실을 배경으로 안수길은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의 모순을 소설의 갈등 구도로 설정하고 사건과 현실 인식의 변화에 따라 양상을 달리할 수도 있는 입체인물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성공한 소설의 입체인물들은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인물이면서도 사회의 시대적인 요청에 반응하여 특정 시대의 존재 양상을 보여주고 역사적인 변화 구도를 암시한다. 그러나 작가의 각성한 이념의 성찰이 결여할 때 이런 인물은 자칫 시대적 인식과는 무관한 별개의 개인일 뿐이다. 안수길은 투철한 역사의식과 치열한 현실 인식으로 이를 잘 극복하고 있다.

안수길의 「새벽」으로부터 시작되는 간도시절 소설의 주인공들은 거의 모두가 이러한 입체인물들이고 이주 동기나 이유가 각각으로 복잡한 이주민들이지만 모두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시대적 현실과 끈끈히 이어지면서 보편적인 시대적 의미를 획득하고 있다.

「새벽」은 한 이주민 가족이 이주생활에서 겪은 피눈물의 수난사를 통하여 일제의 침략으로 국권을 상실하고 고향마저 잃은 식민지인은 그 어디를 가든 억압세력의 착취와 수탈과 박해와 탄압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던 특정 시대의 암흑상을 고발하고 있다.

만주는 일찍 조상들이 삶의 길을 열어 개척하던 피난처였다는 역사적 연원으로 하여 일제의 식민지 수탈에 정든 고향에서마저 쫓기다시피 한 식민지인에게는 의연히 동경의 대상이 되어 유혹적이었다.


“오랑캐영을 채못미처 동쪽으로 산골작으로 쪼차 드러가면 한십리쯤하여 두만강의 조고마한 지류가 흐르고있다. 이내물과 산이닥치는곳 만주면서도 훤한 벌판이아닌, 삼면이 산으로 둘려싸이고 두만강쪽이 겨우티인곳에 안윽이 자리잡은 마을이 M골이였다.”41)


그러나 이러한 동경은 어린 ‘나’의 마음에 새겨진 아름다운 고향과 대조되어 실향민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보여준다.


“우리고향은 함경남도 H읍S포구였다.

포구에는 동구스름한 섬이 셋이 조롱조롱 놓여 있어 경치도 좋고 물결이 잔잔하여 여름이면 미역감기 좋고 겨울이면 명태 잘잡히기로 유명한 곳이였다. 나는 무슨 까닭에 좋은 고향을 뒤로두고 이런 시산한곳으로 찾어오는지 그까닭을 도무지 알수없었다.

그저 아저씨가 멧해 전부터 간도에 와 있고 아버지는 그 아저씨를 믿고 이곳으로 오는 것임을 알었을 따름이였다.”42)


작가는 구구이 이들의 이주가 어떤 원인인지를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어린 ‘나’의 시각을 통한 선입견 없는 자연풍경의 대비 속에서 시대적 아픔을 가슴에 안고 그렇게 아름답고 정든 고향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식민지인의 참담한 모습을 얼마든지 읽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이주민의 수난의 여정을 예시하는 듯 하는 이러한 대비적인 자연묘사는 그야말로 화자-해설자, 주인공-행위자의 복합구조, 즉 의미담론과 서사담론의 이중구조를 객관적 질서에 따라 유기적으로 직조해 내는 작가의 뛰어난 리얼리즘적 능력이라고 할 것이다.

이처럼 인위적인 요소가 배제된 채로 자연의 대비에서 확인되는 평범한 주인공의 이민행위는, 어린 ‘나’의 눈에 찍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역행성으로 하여 이민생활을 동경과 실망이 어린 갈등과 사건으로 점철하게 될 것임을 짐작해 보게 하는 것이다.

과연 그렇다면 ‘나’의 어린 눈에 보인 그런 역행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순간에 벌써 평범한(또는 개인적인) 주인공의 평범하지 않은 시대적 운명이 놓여있는 것이다. 또한 이로써 현실 체험적인 입체인물인 주인공은 이주민생활에서 신변체험으로 부딪치게 되는 사건과 변화되는 현실 속에서 시대적 삶의 변화양상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새벽」의 주인공은 당시 만주 이주민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인 지팡살이로부터 이주민생활을 시작한다. 이때부터 주인공은 이미 특정한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인간관계와 시대적 현실과 무관한 삶을 살지 않게 된다.

지팡(地方=農場), 지팡주(地方主)와 지팡살이라는 단어는 만주 이주민 사회의 형성과 함께 태어난 신조어이다. 그만큼 이 단어들의 사회적 성격은 만주 조선인 이주민 생활 내지 삶의 현실과의 본질적인 연관 속에서만이 밝혀질 수 있는 것이고 조선인 이주민의 보편적 삶의 양상을 통해서만이 역사성과 현실적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러한 단어들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신변체험적인 삶과 실제적으로 끈끈하게 밀착되어 있을 때 주인공의 성격은 사회 역사적인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지팡살이, 그것은 이제 스스로,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벗어나기 힘든 빚의 올가미를 뒤집어쓰는 것이다. 지팡살이는 또 벗어날 수 없는 빚이라는 올가미와 함께 인질이라는 악습이 공공연하게 행해지도록 순환적인 삶의 궤적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 돈은 누이를 볼모로 쓴 것이였다. 박치만뿐 아니라 대개의 지팡주는 빗을 주는데 사람도 볼모잡었다. 사람도가 아니라 사람이면 더욱 좋다하였다. 가진 것이라고 돈 값에 가는 것이 없는 주민한테 무엇을 담보로 돈을 줄 것인가? 젊은 처녀나 젊 은안악은 그것이 가장 확실한 담보가 되지않을 수 없다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중략)

주민들은 이 이방(異邦)의 괴습(怪習)을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럴법이 어데 있나 하고들 모다 무슨 부정한 일을 하는 것같이 마음이 께름칙하였으나 그렇지않으면 돈을 돌려주지 않는데는 할 수가없었다. 설마 남의 처자를 빼아슬라구 이렇게 생각하였으나 그결과는 이따금 사실로 낱아나는 경우도 있었다.”43)


누이를 볼모로 하여 오년 안에 갚기로 하고 박치만한테서 빚을 낸 주인공이 삼년이 지나도록 늘어가는 빚에 이따금 나타나는 결과가 두려워 마침내 목숨 걸고 시작한 것이 소금밀수였다. “설마 남의 처자를 빼아슬라구”하던 생각이 빗나가는 절박한 현실 앞에서 주인공은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으로 사회에 도전하게 된 것이다.

주인공의 소금 밀수는 붙들면 총살이라는 현실임에도 목숨을 걸고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빚의 올가미를 씌우는 지팡살이와 그 악성순환으로 행해지는 인질이라는 치명적인 악습에 비장하게 맞서보려는 처절한 몸부림에 다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소설의 갈등 구도는 주인공과 사회의 직접적 충돌에 있지 않다. 이는 붙들리면 총살당할 수도 있는 소금밀수사건이 박치만의 농간으로 이렇게도 저렇게도 결론이 달라질 수 있다는 상황으로 해석된다. 만약 소설이 주인공과 사회의 직접적 충돌로 기본 갈등을 설정하였더라면 개념화된 도식적 인물을 통해 특정 시대에 대한 추상적인 역사 해석에 지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새벽」은 이 사건을 소설의 인물관계 속에서 삶의 구체적인 양상으로 전개시키고, 그 사건과 관련한 인간들의 심리와 행위를 통하여 특정 시대의 인간관계와 갈등을 형상화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소설은 소금밀수를 기본 갈동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주인공과 박치만의 갈등을 그려내면서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본질적 모순을 드러내고 있다.

소금밀수가 주인공을 비극적 운명으로 몰아가게 되는 것은, 삶의 현장에서 실제로 지팡주 행세를 하고 있는 박치만이 애초에 지팡살이하는 주인공한테 던졌던 헤어 나올 수 없는 올가미를 주인공이 생각밖에도 목숨을 내건 소금밀수로 해제하게 된다는 사실에 도저히 침묵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소금밀수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소금밀수이든 또 다른 무엇이든 그것이 박치만이 던진 올가미를 해제해버리는 수단이라는데 비극의 불씨가 있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바, 소금밀수 사건은 주인공의 누이를 탐낸 박치만이 통치세력과 결탁하여 주인공을 올가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할 수 있는 유력한 단서일 뿐이었다.

결국 소설의 기본갈등은 지팡, 지팡살이, 지팡주, 고리대, 인질이란 단어들로 구성되는 주인공과 박치만의 인간관계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심층 파악은 구체적인 사건의 소재적인 의미를 넘어서 사회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밝혀내는 작가의 투철한 현실 인식과 리얼리즘정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주의는 인물묘사가 간접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그 사건보다는 사건에 대한 인물들의 관계와 태도에 관심이 놓이며 바로 사건에 대한 그러한 관계나 태도를 통하여 사회의 본질을 드러내고 특정 사회를 사는 인간의 성격과 심리를 묘사하는 것이다.

「새벽」은 주인공이 부딪치는 사건과 현실의 체험을 만주 조선인 이주민 생활의 본질적 양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지팡’, ‘지팡살이’, ‘지팡주’, ‘고리대’, ‘인질’이란 단어와 밀접히 연관시킴으로써 평범한 입체인물의 개인적 이주행위를 역사 시대적인 현실과 이어주고 있다. 이로써 소설의 인물은 특정 행위의 출발이 개인적이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역사 시대적 환경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 행동의 보편적 질서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인물의 이주 동기 문제와 관련하여 선행 연구에서 지적되고 있는 인물로는 「벼」에 나오는 박첨지를 들 수 있다. “이주민들의 이주 동기를 민족 비극의 근원”이 아닌 한 개인의 도덕적인 타락으로 돌림으로써 심각한 역사문제를 간과하였고, 이는 작가의 현실 인식의 미숙함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지적까지 하고 있다. 말하자면 독립운동이나 정치적 망명은 아닐지라도 가난으로 고향을 떠난 것까지는 역사문제로 봐줄 수 있지만 한 개인의 도덕적 타락으로 돌리는 것은 전혀 못 봐주겠다는 것이다. “이는 곧 그들이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타향으로 가는 데도 마치 어디 소풍이라도 가는 것처럼 별로 슬픔도 느끼지 못하고 들떠있는 기분 묘사로 이어져 작가의 현실의식의 미숙함을 드러낸다.”44)는 것이다.

우리는 우선 이 작품에서 근면한 농부인 박첨지가 딸의 죽음을 슬퍼하던 끝에 큰 타격을 받아 타락하고 한 여인에 빠져 가산마저 탕진할 수 있을지를 의심할 필요까지는 없다. 그가 애지중지하고 시집보낼 준비까지 하던 딸을 동네에 퍼진 장질부사로 잃고 슬퍼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동네의 친구들이 그의 슬픔을 위로하여 그의 마음을 풀어주려 한 것도 의리에 통하는 행위라고 할 것이다. 다만 그가 향옥이라는 여인한테 빠지게 되고 마침내 타락하게 된 것만은 그 스스로의 병적 심리 때문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나, 그렇다 하더라도 딸을 잃고 슬퍼하던 중 친구들의 알선으로 향옥이란 술집여자를 만나게 된 계기나 사건 서술을 이렇다 저렇다 시비할 이유는 없다. 사람의 실수나 후회는 결국 자신의 인격 완성과 근원적으로 이어지는 것이겠으나, 사건 발생은 늘 우연적이거나 순간적일 수 있고 심지어는 억압적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때 거길 가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하는 원망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러한 논의를 하는 것은 다만 이러한 타락의 현실 가능성을 확인하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현실 가능성의 확인과 함께 그런 타락이 가져온 결과에 관심을 가지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박첨지는 고향에서 한우슴꺼리가 되어버린 것은 물론이였으나 그것보다도 그래도 머슴을 두고잇든 처지가 도리여 남의 머슴사리를 하지 안어서는 안될 형편이되자 향옥이와의 정에도 틈이 생기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가 홍덕호에게 편지를 자주 낸 것은 이때엿으며 홍덕호의 부름을 밧고 닷자곳자로 떠난 것도 이때문이였다.”45)


도덕적 타락은 “남의 머슴사리를 하지안어서는 안될 형편”이 된 원인일 뿐 만주 이주 행위를 선택하게 된 직접적 동기는 결코 아닌 것이다. 그 동기는 역시 그런 도덕적 타락으로 가산을 탕진함으로써 “남의 머슴사리를 하지안어서는 안될 형편”이 된 가난이었다. 후회와 함께 다시 가난을 털고 잘 살아보려는 의욕에 떠올린 것이 “한살 젊었을때의 무궤도하였든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고 기왕 인연을맺었든 만주에서 재출발하여 돌을깨물면서라도 돈푼을쥐고 금의환향하자는 결심”46)을 다지며 만주로 간 친구이자 사돈인 홍덕호였다.

조상들에 의한 개척역사가 있고 선행한 사람들의 “성공담”으로 하여 만주는 의연히 궁민들이 동경하는 대상이었다. 그리고 비록 홍덕호나 박첨지같이 개인 사정으로 만주 이주를 행한 사람도 있지만 이 소설에서도 그 기본적인 이주 원인은 역시 가난이었다. 즉 고향의 궁색한 살림은 이향의 근본 원인이고 동기였다. 전체적인 가난은 그것 자체가 벌써 시대적인 것이다. 홍덕호나 박치만의 개인적 이유나 사정이야 어떻든지 바로 이런 전체적인 가난, 다시 말하면 역사적 시대적인 억압현실이 만주 이주 행위의 주류였기에 홍덕호나 박치만마저 그들 개개의 출발과는 상관없이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시대적 발전 변화에 따라 변화 양상을 보여주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작가는 이처럼 개인의 특정 행위마저 결코 역사적․시대적 환경의 제약을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입체인물들로 하여금 소설 속에서 인간의 시대적인 보편적 행위양식과 질서를 획득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벼」에서 작가는 고향에서의 전체적인 빈궁양상을 밝히면서도 구체적인 시대적 원인은 직접적으로 확인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그것이 국권을 상실한 식민지인의 삶의 모습임을, 그들이 만주에 와서 사실적으로 겪게 되는 삶의 모습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이중적 신분 자체가 이를 표명하고 있다. 고향을 상실한 식민지인이면서 일제의 보호를 받는 이주민이라는 신분이 그것이다. 이러한 복잡한 신분으로 하여 그들은 중국과 일본의 관계 변화에 따라 이중적 억압과 탄압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과연 만주는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동경하는 ‘유토피아’였던가. 작가는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을 두 축으로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이 동경하는 ‘유토피아’의 시대적 실상을 파헤치려 하였다. 즉 작가는 개척할 수 있는 땅이라는 역사의식과 일제의 대륙 침략 야망이라는 변화된 시대 상황의 충돌이 만주 조선인 이주민들의 삶의 질과 변화의 양상을 결정하게 된다는 것을 투철한 현실 인식으로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개인의 특정 행위나 동기와는 관계없이 만주는 조상들의 개척역사에 의해 더 나은 곳을 지향하는 이향민의 동경의 대상이었으나, 국권을 상실한 식민지인이면서 일제의 보호를 받는 이주민이라는 새로운 신분확인은 이민지 당국에 더는 순수한 이민으로 받아들여질 수가 없었다. 그들에 대한 정책은 이들 이민들과는 관계없이 일본과의 대립관계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었다.

「벼」의 시대적 배경은 중국 정부가 조선인 이주민에 대한 탄압정책을 실시하던 이른바 탄압시대에 놓여 있다.

중국 정부는 1890년으로부터 1910년에 이르는 이른바 환영시대(歡迎時代)에 순수한 한국 이민들에 대해 이주 우선권마저 주었었다. 그것은 당시 만주에는 경제이익이 막대할 처녀지가 많았는데, 조선인들이 수익성이 높은 벼농사를 잘 한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일제가 1907년 8월에 간도 조선인 이주민들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간도에 통감부간도파출소를 설치, 특히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면서 조선인의 신분이 달라졌다. 그러자 중국 관헌은 여러 가지 이유로 조선인 만주 이주를 제한하거나 견제하게 되고 이미 이주한 조선인 이주민에 대해서도 잔혹한 탄압을 감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를 탄압시대(彈壓時代)라고 하는데 탄압시대는 전기 제한시대(1910년에서 1926년까지)와 후기 배척시대(1927년부터 1931년 만주사변 전까지)로 나뉜다.

이 제한시대와 배척시대가 「벼」에서 각각 전장과 후장의 배경이 되고 있다. 제한시대 초기까지는 의연히 제한정책이 별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중국 관헌들은 그때까지 조선인 만주 이주는 무해할 뿐더러 경제이익까지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 관헌들의 방임 등으로 제한정책이 철저히 실행되지 못하다가, 1925년 6월 11일 봉천 정부의 경무처장 우진(于珍)과 조선 총독부 경무국장 三矢宮松 간에 체결된 협약으로 조선인제한법강제실행법이 유효하게 되었다. 이 협약에서의 일본의 목적은 조선인 민족독립 세력을 타격하려는데 있었으나 중국의 입장은 조선인을 이른바 치외법권으로부터 배제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특정한 시대배경에서 복잡한 신분으로 두 적대 세력 앞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던 조선인 이주민은 개개의 특정 행위나 선택과는 상관없이 시대적 환경과 제약 속에서 민족 공동체의식과 본능적이고 원색적인 생명욕구의 갈등에 모대기면서 현실 극복의지를 키워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벼」에서 전장의 제한시대와 후장의 배척시대를 살면서 현실에 대응해가는 소설 속 인물들은 삶의 현실 속에서 변화되어가는 역사적 시대적 인물군상이다.

입체인물은 특징상 역사적 사건과  현실적 체험에 따라 변화 양상을 나타내게 된다. 따라서 사건의 전개 뒤에 오게 되는 사회적 변화 양상은 이러한 인물의 성격 변화와 심리 자세에서 징조로 나타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건과 현실의 체험에 따라 변형이 가능한 미완의 진행형 인물인 입체인물은 사회의 변화나 시대의 발전 양상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이다.

「벼」의 홍덕호, 박치만, 찬수와 같은 주인공들의 이주 동기가 우연적이거나 개인적인 것이면서도 그런 개인적 동기는 삶의 현장에서의 간접적인 인물묘사와 사건 위주의 서사방식에 의하여 개인의 삶의 조명보다는 개인이 겪는 사건을 통한 현실의 조명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주인공의 심리적 동기 여부와는 상관없이, 외부세계의 힘에 의해 지배될 수밖에 없는 운명적인 삶을 사는 주체 상실의 억압시대의 특징이라고 할 것이다.

시대적 모순은 통치세력과 이주민간의 모순이지 개개 이주민의 특정 행위에 따른 차별이 아니다. 어떤 동기의 이주민이든 일단 이주행렬의 일원이 된 그 순간부터 그 운명은 이주사와 끈끈이 이어지게 된 것이다. 타력과 직접적으로 관계없는 이주조차 시대적인 힘의 중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 자체가 주체적 자아가 훼손된 특정 시대의 특수 상황에 대한 증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찬수의 이주 동기 문제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의 선각자 형상까지 문제로 삼는 데는 오히려 연구자의 담론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러한 담론방식이 용속하게도 작품의 주제에 대해 이념적으로 집착하고 모든 것을 이데올로기적인 대립관계로 확인하려는 데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념 대결의 구도로 소설의 인간관계를 해석하는 이데올로기적 담론방식은 소설의 의미담론구조를 외면한 채로 찬수를 각성하고 자각한 선각자로 확인하려고만 하기에 그의 이주 동기부터 문제 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찬수 역시 사건과 신변체험을 통해 변화해가는 입체인물임에 다름 아니다. 그는 원래부터 각성하고 자각한 선각자는 아니며 그의 이주 동기 역시 시대를 인식하고 억압 사회를 개변하려는 선구자의 비장한 행위는 아니었다.

동경유학을 하고 공립 상업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찬수는 신지식에 남 먼저 접촉한 선지자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이때의 그의 이상은 아이들한테 자기가 아는 모든 지식을 열심히 배워주는 것뿐이었다. 주로 경제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닥치는 대로 자기가 아는 것을 아이들한테 가르치는 찬수의 행위는 배워주는 자로서 배우는 자한테 가지는 지도자적 자각과 열정이었을 뿐 시대적 현실을 본질적으로 파악하고 이념적으로 각성한 선구자의 투쟁신념의 실천은 아니었다. 그가 반년을 영어의 몸이 되었다가 전직까지 잃은 것도 이러한 신념의 실천적 결과가 아니라 동맹휴학의 주모자가 그의 집에 드나드는 ‘끄룹’이었든 관계로 배후의 책동을 하였을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사회현실을 본질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선구자로서의 투쟁신념을 갖고 있지 않은 그가 본의 아니게 변을 당했기에 오히려 “일시적인 실수라고 할까 이러한 과거에 대한 완전한 결별을 꾀하기”조차 하는 것이었다.

이념적으로 자각하지 못하고 확고한 심념을 세우지 못한 사람이 뜻밖의 봉변을 당했을 때 망연자실하거나 방향을 잃고 정신적 방황을 하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가 정신적 곤혹 속에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도피주의에 지배된 것도 거의 본능적인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역사적 연원으로 궁민들의 동경의 대상이었던 만주는 아직 찬수에게는 신변체험에 의하여 감각되지 않은 관념의 이상향이었다. 그리고 도피주의에 빠진 그에게 “툭티였을만주, 땅은 물론 공기마자환할만주”는 그의 정신의 질식을 타개하는 피난처였다. 혈육들이 십여 년간 이룩해놓은 제2응봉리, 부모, 부형친구 동생들이 생활하는 곳이라 “맘대로 뛰놀고 맘대로 부르짖고 부조와 형제들과 함께 먹고 일하자”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던 것이다. 고향을 등진 이주민들의 고난의 역사, 시대적 변화에 따라 염색되는 만주의 실상은 그한테는 아직 차단된 정보였다. 그것은 이제 역사적 사건 및 신변체험과 함께 그의 정신적 곤혹과 방황을 초래하고 인생의 방향 선택을 요청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찬수의 만주행은 그 스스로 실수라고 인정하여 겪고 있는 정신적 질식에서 해탈하려는 도피행각에 지나지 않았다. 또 홍덕호 등이 후세의 교육을 근심하여 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인재를 찾게 되었을 때에도 박치만을 통해 찬수에게 인재를 추천해달라고 부탁하였을 뿐 그를 지도자로 지목하여 요청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수를 애초에 선각자, 선구자, 지도자의 성격으로 확인하는 연구 시점은 작중 인물 지간의 모순 갈등을 이데올로기적 대립으로 단순화하는 용속한 사회 정치학적 관점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찬수의 변화 양상은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에 몸을 담그면서 점차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 사이에 갈등을 겪고 마침내 개별적 특정 행위가 아닌, 시대 극복의 아픔과 선택에 몸부림치는 당대인의 본질적인 성격의 변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찬수가 만주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반성과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그의 책상 위에서 이루어진 시적인 환상과 즐기려했던 관념적인 유희가 현실과 엄청나게 큰 낙차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낙차가 클수록 아픔도 크고 충격 또한 큰 법이다. 현실을 두고 고민하고 부끄러워하고 반성하고 각성한다는 것은 그의 앞날의 시련을 예시한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 조선인 이주민에 대한 중국 정부의 제한정책이 소현장과 같은 철저한 배일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민족주의자에 의해 강력하게 실천되면서 찬수와 마을 사람들은 탄압과 강제 추방의 위기를 맞게 된다. 학교의 설립을 허락하지 않고 이미 세운 교실마저 폐쇄하려는 소현장의 본의는 조선인 이주민을 일본세력의 대륙 확장의 연장선으로 인정하고 국내로부터 아주 축출하려는 것이었다. 그만큼 탄압은 가혹하고 조선인 이주민은 생사의 판가름에 직면하게 된 것이었다.

거기에는 전혀 다른 구제책이 없었다. 본능적인 생존욕구는 찬수로 하여금 일본영사관의 도움으로라도 죽음의 고비를 넘기려는 선택 아닌 선택을 하게 하였다. 그들이 처한 절박한 상황으로서는 역시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본능적인 행위라고 할 것이다. 무방비로 노출된 그들에게는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가장 원초적인 생존의식일 뿐이었다.

물론 이러한 결정은 찬수라는 인물이 결코 시대인식에 철저히 각성하고 자신이 처한 환경을 극복하고 초월하려는 선구자나 영웅인물이 아니라 사건과 신변체험을 통하여 변화하는 진행형의 인물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를 통하여 역사의식과 시대 현실의 갈등을 보여주고 복잡한 신분에 의한 조선인 이주민의 현실 극복의 몸부림과 자각증상을 풍속화적으로 그려 보이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 있어서 주인공의 신분이 사건과 환경 및 다른 인물들과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사회적 성격을 확인받을 때라야만 그의 행위는 역사적 시대적 특성을 지니고 객관적 진실성을 획득할 수 있다.

「원각촌」의 원보형상은 이런 인식에서 많은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우선 원각촌의 구성원이 아니라 산판떠돌이이다. 따라서 이런 떠돌이가 ‘원각촌’과 어떻게 관계를 발생하는가 하는 것은 소설의 플롯의 합리성과 사건 전개의 객관적 진실성을 담보하는 기본 조건으로 되는 것이다.

만주개척이민사가 땅으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때 원보는 이미 땅을 떠난 이민이다. 이민역사로 보면 땅을 버리고 떠돌아다니는 현상은 결코 만주개척이민사의 서막에 나타난 현상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원보는 이미 정착에 실의한 이주민 선각자의 형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실의에는 벌써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정착의 어려움과 고통이 깔려 있다. 이런 어려움이나 고통은 그의 아내 금녀의 아버지가 만주인의 지팡살이를 살고 딸을 지팡주에게 백원 빚에 볼모로 잡혔다는 서술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암시되고 있다. 그리고 사람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않고 필요한 이외에 말이라고 없이 억세게 일을 하는 그의 모습은 사회와 인간에 대한 불신의 심리를 잘 드러내고 있다. 결국 원보는 개인적 의미 또는 고정관념에 의한 떠돌이라는 성격보다는 특정한 역사 시대적 환경의 산물이라고 확인하는 것이 서사의 구조 상 바람직하다.

다음 원보의 아내는 상징적 의미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산판 떠돌이 원보의 재산이래야 통틀어 쾌마우재와 솥과 보퉁이일 뿐이다. 그러나 사실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생명보존과 원색적인 종족보존의 차원에서 보면 아내는 원보가 필사적으로 지키려 하고 자기의 생명과 함께 하려는 삶의 그 무엇이다.

우선 가정을 지향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금녀의 구출은 원보가 은근히 안정되고 행복한 정착생활에 대해 동경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보다 앞서 원보가 지팡살이에서 생겨난 악습이라고 할 수 있는 인질에서 금녀를 구해낸 것은 그런 비극적 현실에 대한 저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구해낸 금녀를 생명을 걸고 지키려는 것은 그의 정착에 실의한 떠돌이 행위 속에는 오히려 현실 극복의지와 함께 안전한 곳을 찾으려는 끈질긴 정신적 지향의 강한 정착의식이 받치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결국 금녀는 원보의 정착지향을 나타내는 상징물이면서 또한 이제 그의 떠돌이인생의 사회적 원인을 반증하게 되는 부표(浮漂)라고 할 것이다. 하기에 소설에서는 금녀의 부정을 다루면서도 전혀 윤리도덕적인 시각에서 전개하지 않으며 원보도 아내가 부정해서가 아니라 사나이들이 나쁘다 하는 것이었다. 남성으로 상징되는 사회, 그 사회에서 “어린 아내를 간수하는 일”은 그 어디에서도 어려운 것이었다. 식민지인에게 있어서 그것은 결국 어디도 정착할 수 없는 남의 땅이었던 식민지 사회에 대한 폭로인 것이다. 이미 그래서 들을 떠났다. 그러나 산판도 항상 위험하다. 그래서 유혈의 싸움도 간곳마다 있었고 생명이 위태한 경우도 한두 차례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작품에서 도덕성을 검증할 본능적인 부정관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결국 아내는 그의 재산의 전부, 나아가 그의 생명의 일부분이었다. 이런 생명의 일부분인 아내를 마침내 ‘얼되놈' 한익상한테 빼앗기게 된다는 것은 당시의 이주민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부딪치게 되는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필연적인 운명을 제시하는 듯싶다.

원보가 원각촌에 찾아든 것은 법당과 학교를 지을 나무를 벌목하는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역시 아내를 산사람들 틈에 놓아두는 것이 위태한 일이였기 때문이었다. 작년 겨울까지 함께 산판에 있던 친구 춘삼이가 산에서 내려오면서 함께 원각촌에 가서 농사를 짓자고 했을 때도 그는 거절하였었다. 그러던 그가 산판에서 청년과 유혈적인 결투를 하고 하루 동안 고민하던 끝에 벌목일이 있는 원각촌을 선택하고 짐을 꾸린 것이었다. 이는 그의 성격의 일관성에 어울리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 춘삼이가 먼저 가서 자리 잡고 있었고 그보다는 그의 성미에 맞는 벌목일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항상 아내의 주변에 대한 의혹에 날카로운 감시의 눈을 늦추지 않고 있는 그는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이곳을 떠나버릴 심리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와 한익상의 충돌은 우연한 것 같으나 사실은 지극히 운명적이고 특정한 시대적 의미와 객관적 진실성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착의지를 뿌리 뽑힌 원보가 항상 신변에 대해서 불신과 의혹의 날카로운 눈으로 감시하고 유혈적인 결투에 생명까지 내거는 성격이라면 원각촌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온갖 악행을 다 저지르는 원각촌의 ‘홋주인' 한익상은 눈앞의 이익이라면 어떤 수단도 가리지 않고 챙기려 드는 ‘악종’이었다. 수화상극의 극단적 성격의 대결이 예상되는 대목이면서 결국은 원보가 지팡주한테 볼모로 잡혔던 금녀를 구해서 안전한 곳을 찾아 전전긍긍하다가 다시금 ‘얼되놈'의 마수에서 구해내는 비장한 행위가 이루어지는 사건의 갈등구조를 암시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지팡주의 볼모로부터 구해낸 금녀가 다시금 ‘얼되놈'의 마수에 걸리는 사건의 순환성은 곧 특정 시대의 역사적 현실성에서 비롯된다고 할 것이다.

우선 한익상의 세력권 안에 들어온 원보는 그 개인의 의지와는 달리 한익상의 위협과 억압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지방정권뿐만 아니라 마적과도 줄을 달고 있는 한익상은 원각촌 사람들이 저주하면서도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그처럼 원각촌 구성원들의 머리위에 절대적인 힘으로 군림한 한익상이었기에 고립무원의 원보를 전혀 안중에 둘리가 없었다. 그러나 한익상으로 말하면 이것이 그의 목숨까지 잃게 하는 오만한 판단이었다. 그의 권세의 중압에 눌려 숨을 쉬지 못하는 원각촌의 구성원들과는 달리 항상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원보는 자기의 삶의 일부분이 침해를 당하는 걸 결코 용서할 수가 없었다.

여기서 한익상이 당대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보여주는 억압세력의 형상이라면 그를 제거하고 다시 떠돌이를 시작하는 원보는 그러한 억압의 현실과 억압세력의 핍박으로 땅에서 뿌리 뽑힐 수밖에 없었던 실향민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정착의지를 잃은 원보가 이른바 이상촌을 건설하는 원각촌에 와서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보여주는 억압세력과 충돌한다는 서사구조는 결국 원각촌은 이상촌이 아님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이러한 억압세력의 존재는 원각촌이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보편적이고 본질적인 갈등구조와 조금도 다름이 없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며 그만큼 개인으로서의 한익상의 죽음은 구조적 모순의 억압세력인 ‘홋주인’의 소멸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억압세력이 존재하는 한 원보와 같은 뿌리 뽑힌 실향민은 영원히 평화로운 안식처를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원보의 형상은 전체적인 배경과 분위기와 함께 특정한 비극적 삶의 현실에서 악착스럽게 일하면서 새로운 삶의 길을 찾아 걸음을 멈추지 않는 조선인 이주민의 끈질긴 생존의식과 심리지향적인 정착의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역사의식과 민족 공동체의식에 기대어 조선인 이주민의 만주 정착의지를 강렬하게 내보이면서도 일제 통치하의 식민지인이고 실향한 이주민이라는 현실 인식에 투철하여 비장한 현실 극복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결국 작가는 “조선인들에게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정신적인 안식처이며, 이것은 동족간의 반목과 갈등이 없는 조선인 사회 건설이라는 메시지”47)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원각촌」이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억압세력이었던 ‘얼되놈'의 존재를 통하여 이상촌 건설에 대한 이념적 성찰을 하고 “동족간의 반목과 갈등이 없는 조선인 사회 건설이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면, 「목축기」는 주인공 찬호를 통하여 그러한 “메시지”를 실천해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목축기」를 「원각촌」에 대한 직접적인 반성위에서 시도된, 이상촌에 대한 작가의 이념적 성찰의 결과물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목축기」는 ‘얼되놈'이 존재하는 「원각촌」의 부정을 통하여 구상한 작가의 이념적인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텍스트에 대한 그러한 단순비교는 「목축기」를 이념적인 이상주의 작품으로 잘못 확인하게 될 수 있다. 그런 잘못된 확인으로 하여 이른바 이상적인 목장을 건설하는 찬호는 시대순응적인 인물로 낙인찍히고 「목축기」는 국책문학 내지 친일문학으로까지 비판받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는 역사의식과 시대적 현실의 모순을 기본 갈등 구조로 하고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정착의지 내지 지역공동체의 결성을 실천해가는 주인공들의 현실 극복의지를 특정 시대의 변화 양상과 주요 모순 갈등을 통하여 보여주려는 것이 작가의 리얼리즘적 창작 자세였다. 그리하여 작가는 언제나 역사 철학적인 이념 성찰에서는 정착 내지 제2 고향 건설을 모티프로 하면서도 특정 시대에 대한 현실 인식에서는 사건과 신변체험을 통하여 변화하는 사회 갈등과 그에 대한 주인공의 극복의지를 사실주의적으로 보여주려 하였던 것이다.

미리 결론을 언급하면, 「목축기」는 「원각촌」에서의 ‘얼되놈'을 극복하였기에 이상촌을 건설할 수 있다는 작가의 이념 성찰의 결과물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 모순과 사회 갈등을 통한 정착의 어려움과 현실 극복의 몸부림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주국 건국을 북방민족들의 독립투쟁의 결과물인 것처럼 꾸미고 만주국의 ‘독립국가’ 지위를 인정받으려고 한 일제는 세계열강들의 간섭을 막기 위해 치외법권 철폐, 만철부속지에 대한 행정권 이양이라는 외교적 연극을 연출하면서 대사제를 통해 안팎이 전혀 다른 사실적인 식민지화를 다그쳤다. 그리고 만주를 대륙 침략의 발판으로, 전초기지로 다져가려고 했던 일제는 이른바 오족협화라는 만주국의 ‘민족정책’을 실시하여 실제로는 식민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 지간에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모순 갈등을 덮어 감추려 하였다. 즉 대사제로 식민지 통치를 위장하고 만주국 내의 여러 민족의 화합을 떠들어 식민지 사회의 본질적인 모순과 갈등을 무마함으로써 만주 통치를 평화적 분위기 속에서 다그치려 하였던 것이다. 이는 사실 동일 위계선상에서 평등을 추구할 수 없었던 식민지인에 대한 식민 지배자의 지배와 수탈의 계산적인 책략이었다. 궁극적으로 민족 단위의 이익과 민족 공동체의식과 관계해서는 수탈과 억압의 힘이 지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목축기」는 바로 역사의식에 토대한 정착의지와 식민지 통치에 의한 억압의 현실을 갈등구조로 설정하고 만주 땅에 기어이 조선인 이주민의 제2고향을 건설하려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 보이면서도 민족 단위로 지배와 피지배의 불평등 위계질서를 형성하고 있는 식민지 사회에서 불가피적으로 겪게 되는 식민지 실향민의 운명적인 수난을 안타깝게 고소하고 있다.

유축농업이 당시 만주국의 정책으로 장려되는 것이라 하여 그것의 선택을 무턱대고 국책순응 나아가서 친일로 낙인찍을 수는 없다. 원주민들이 모르는 벼농사를 통해 만주 정착을 꾀하던 초기 이주민들의 정착의지나 변화된 시대상황에 따라 유축농업을 공동체 형성과 정착의 수단으로 삼은 것은 모두 다 역사의식에 토대한 정착의지를 특정시대 현실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면서 실현하려는 현실 극복의 방책임이 틀림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작가 안수길은 항상 입체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함으로써 변화되는 시대 상황에 대응하는 주인공에 대한 동정과 비판을 통하여 우회적으로 비정사회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념적으로 주변의 사람들보다 뛰어나고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와 맞대결하는 투사가 아닌 입체인물은 사건 진행과 현실 체험 속에서 자체의 극복과 현실의 극복이라는 갈등을 동시에 겪으면서 시대의 변화 양상과 인간의 성장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자체의 극복 속에는 작가의 사회 현실에 대한 부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때 자체의 극복은 시대적 현실을 비판적으로 대하는 주체성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못한 경우 주인공에 대한 작가의 입장은 지극히 풍자적이다. 이때 주인공에 대한 풍자는 사회에 대한 부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찬호도 이런 인물이다. 그는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정착의지를 대변하고 실천해가는 인물이면서도 결코 시대적으로 각성하고 현실 인식이 투철한 선구자형의 지도자는 아니다. 신분적으로 찬호는 정신적 계몽에 나설만한 교육도 못 받았고 그럴만한 경력도 쌓지 못했다. 오히려 그 자신이 벌써 일제의 단순 기술인력 양성 정책에 의해 생겨난 시대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었으니, 그의 갈등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정책의 혜택으로 배운 기술을 민족 공동체 건설에 바치려하고 있다는데 있었다. 이처럼 시대 현실을 투철하게 꿰뚫어보지 못하는 정신적 미숙함과 정착의지의 구현인 ‘와우산목장’ 건설이라는 실천적 행위사이에는 오직 투사적인 정신으로만 극복할 수 있는 시대적 갈등이 가로놓여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화자-해설자가 주인공을 바라보는 시각은 정신미숙자의 천진하면서도 가냘픈 극복의 몸부림에 대한 동정과 안타까움이다.

애들을 위한 점에서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는 그가 결국 애들한테 놀림을 당하고 교원생활에 실패하였다. 전문출신의 교원은 2~3 명밖에 없었다면서 그는 실제로 전문학교 출신과는 상관없이 한갓 대용 교원에 불과하였다. 그것도 “건국후 성(省)의교육방침이 근로(勤勞)의방향으로 기우려질때, 거기에 순응키 위하여 학교당국에 간택받은것이 그였었다”48)는데 결국 이와 같이 돌려 앉히기를 당한 것은 교육방침에 대한 학교 당국의 대응자세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귀농사상이 학생들의 놀림거리가 되고 있는 것도 그가 “교수방법과 더불어 그 공로에 자연 존경을 가지”게 되는 그런 교육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공한 교육자가 아닌 그한테 시대에 대한 투철한 인식과 이념 성찰에 의해 현실을 극복하려는 각성의 대응 논리가 있을 수 없었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호소하던 그가 스스로 ‘귀농’하게 된 것도 농촌계몽을 위한 자각적인 실천운동이라기보다는 교육자로서의 실격에 의한 전문출신의 합리한 선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가 배운 지식을 만주 조선인 이주민을 위해 공헌하려는 그의 민족 공동체의식은 순수한 것이었다고 할 것이다. “백오십만동포의 팔할을 점령한 농촌은배운자를 목마르게 기다린다.”는 것이다. 자기가 배운 전문지식으로 목축장을 꾸려 동포들을 위해 이상적인 삶의 터전을 마련하려 하였던 것이다. 그가 종자돼지를 여드레 동안의 긴 기차 여행으로 고초를 겪으면서 멀리 두만강을 건너 조국에서 가져오는 장면도 이런 민족 공동체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유축농업의 국가정책을 이용하여 이상적인 민족공동체를 건설하려는 그의 실천 행위는 궁극적으로 식민지 통치 사회라는 만주국의 정체에 대한 불투명한 이해로 하여 암초에 부딪치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다. 작품에서 그것은 ‘로우숭(老宋)’이 범의 피해를 당하는 이야기로 암시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나 이에 대해서는 플롯의 논의에서 상세히 다루기로 한다.



3.2 화자의 중립성-현실 극복의지의 확인


“허구적 세계는 작가의 의식 내용이 다른 중재 과정 없이 곧 바로 모방되어 독자 앞에 제시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화자라고 하는 가변 렌즈를 통하여 독자의 의식 속으로 투사된다.”49)


허구 세계는 작가의 자유로운 사유에 의해 창조된다. 소설이 허구에 의해 꾸며진다고 할 때 그것은 객관적인 사건기록이나 역사적인 인물전기와는 달리 작가의 자유로운 사유 즉 객관적 사회와 현실적 인간관계에 대한 이념 성찰을 통한 이상적인 인물창조를 말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의 인물은 현실사회를 살아가는 일상적인 인간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결국 소설의 인물은 일상적인 인간모습의 모방이 아니라 일상적인 인물이 보기로 삼을 수밖에 없는 이념적 창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념적 창조물이라고 해서 결코 작가의 이념 성찰의 직접적인 표현일 수는 없고 삶의 현장에서 행동하는 인물이여야 하는 것이다. 행동하는 인물은 인간의 보편적인 행위 질서 속에서만 행동 자유를 획득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작가의 자유로운 사유는 인간의 보편적인 행위 질서를 외면하고서는 독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또 소설의 인물이 일상적인 인간과 같은 행동을 하거나 심지어는 어떤 사건에 아무런 개성도 없이 속물적으로 휘말려 있다면 독자는 그 소설을 보고 아무런 긴장이나 대립을 통한 재발견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보편적인 행위 질서란 결코 기성관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 인간들에게 고유한 자유의지가 동질성의 원리에 의해 새로운 합의를 볼 수 있는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가의 자유로운 사유와 인간의 보편적인 행위 질서를 유기적으로 조절 결합하는 서사방식으로 화자-해설자의 중립성을 들 수 있다. 이 화자-해설자의 중립성은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가치판단을 억제하고 작가의 자유로운 사유와 인간의 보편적인 행위 질서가 플롯이라는 소설의 갈등구조에서 합리적인 표현형식을 얻는데서 나타나는 것이다.

안수길은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이주, 개척, 정착사를 주제로 하면서 민족의 공동체의식과 생존의식을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에 토대하여 정착의 극복의지인 ‘북향정신’으로 승화시켰다. 그러나 그는 작품 창작에서 이와 같은 화자-해설자의 중립성에 의해 시종 이데올로기적인 가치판단이나 이념적인 이상주의를 멀리하고 있다. 사실주의 대가다운 창작 자세라고 할 것이다.

「새벽」 「새마을」 「벼」에서는 물론 「원각촌」 「목축기」에 와서도 역사의식에 의한 정착의 극복의지를 화자에게 임무 지우면서도 등장인물의 실천과 완성 가능성을 사건 발전과 시대적 변화 속에서 관찰하는 중립성을 지키게 하고 있다. 역사 철학적인 사유에 토대하여 초현실적인 의식을 지향하는 작가의 자유의지를 대변하면서도 사건과 신변체험을 통해 변화되는 진행형의 입체인물을 내세우는 화자-해설자의 이러한 중립성은 작가의 총체적인 의식성향을 반영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작품의 진실성을 보장해 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연주의적인 비속화를 경계 단속하고 있는 것이다.

소설에서 화자의 중립성은 주요하게 화자의 신분(인칭), 위치(시점), 평가(어조)에 의해 나타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화자가 어떤 신분인가에 따라서 인물과 사건에 대한 화자의 직․간접적인 감정표출이 달라질 것이고 화자가 어떤 위치에서 인물과 사건을 관찰하는가에 따라 인물의 생동성과 사건의 신빙성이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화자가 인물과 사건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는가에 따라서 작가의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이 굴절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안수길의 󰡔북원󰡕에 수록된 소설들을 보면 작가는 투철한 역사의식과 냉철한 현실 인식으로 이념적 추구와 현실적 극복을 갈등구조로 하면서도 화자의 신분, 위치, 평가에서 다양한 서사방식을 선택함으로써 화자의 중립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는 인물과 사건에 대한 작가의 직접적인 개입과 감정토로를 억제시키고 인물의 시대적 특성과 행위의 역사적 진실성을 보장하고 있다.

「새벽」 「새마을」은 일인칭 수법을 통하여 작가의 직접적인 감정 개입을 아예 차단하고 작중 인물인 화자가 현장에서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서사방식을 취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신변체험적인 것 같은 공감각이 일어나도록 하고 있다. 그런데 일인칭 화자가 내부시점에서 중심 사건의 직접적인 역할자일 때 그의 사건 판단 내지 평가는 보다 주관적이고 감정적일 수 있다. 이때 그런 주인공의 주관 판단과 감정 표출에 작가가 무의식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데, 감정 억제를 못할 경우 자칫 행위적 화자를 통한 작가이념의 과잉 노출에 역사적 진실성을 손상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작가 안수길은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순진하고 분식할 줄 모르는 소년을 선택함으로써 화자를 통한 작가 이념의 과잉 노출을 차단하고 있다. 일인칭 화자가 현장체험의 생동성을 보여주면서도 이처럼 순진하고 분식할 줄 모르는 소년이기에 독자로 하여금 객관적인 현장 증언의 신빙성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설령 소년화자가 현장인물로서 내부시점을 갖고 때때로 인물과 사건에 대해서 주관 판단과 감정표출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독자는 어른의 너그러움으로 관용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린 소년은 사건 진행과 함께 행동하고 사유한다 하더라도 미성숙의 진행형 인간인 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처참하든 얼골! 절망에 다다른 얼골!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이러나지않고 될대로 되라는듯이 다리를 뻐더버리고 어린애가 트집부리는것같이 앉엇섰다.

큰일이 당장 이러나는것만 같었다.

나는 어머니와같이 소금을 처리할 생각은없이 너무도 겁에질리어 아버지무릎에엎듸어 울었다.”50)


「새벽」의 ‘나’는 집사대가 곧 들이닥칠 위기일발의 시각에 이제 그의 가정에 떨어질 그 액운이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투명하게는 알지 못한다. ‘나’는 다만 아버지의 “그처참하든 얼골! 절망에 다다른 얼골!”에서 본능적으로 큰일이 당장 일어나는 것만 같다고 느끼고 두려움에 울었을 뿐이었다. ‘나’는 뒤늦게 집에 돌아온 누이를 주먹으로 등을 쥐어박기도 하고 발로 차기도 하고 악을 쓰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집을 비운 어머니를 욕하는 아버지나 밖에 나가 있는 누이를 욕하는 어머니의 절박한 그런 심정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봉변을 당할 때 자기는 곁에 있었는데 누이는 부재했다는, 그래서 혼자 두려웠던 분풀이를 할 대상이라는 그저 그 정도였을 뿐이었다.


“누이는 어쩔바를 모르면서 나를 달래였다.

누이는 그때 열여섯이였다.

나는 울다가 자버린 기억이 난다.”51)


마치도 투정질을 하던 심술 사나운 동생이 누이의 달램을 받고 조용히 잠이 들어버리는 것 같은 평화로운 모습이다. 온 가정의 운명을 뒤엎어 놓게 될 불행한 사건이 이처럼 철부지 어린아이가 울다가 잠들어버리는 조용하고 평화로운 장면으로 일단락을 짓게 됨으로써 그 어디에서도 작가나 화자가 주정토로를 할 공간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결코 감정에 인색하고 냉혈적인 작가의 약점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온 가정의 운명을 뒤바꿀 불행한 사건과 천진한 소년의 평화로운 모습의 대조 속에서 비극적 흥분을 고조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것을 느끼고 격동하게 되는 정감 과정을 작가는 고스란히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있는 것이었다.

「새마을」의 ‘나’는 「새벽」의 ‘나’이면서 또 다른 ‘나’이기도 하다. 작가가 “속새벽”이라고 일컬은 것만큼 「새마을」의 ‘나’는 사건의 연속성과 함께 틀림없이 「새벽」에서 「새마을」로 이사 온 ‘나’이다.

그러나 서술시점에서 보면 「새벽」의 ‘나’는 거의 외부시점에서만 한 중심 사건을 목격하고 체험하는 관찰자일 뿐이라면 「새마을」의 ‘나’는 외부시점에서는 한 중심 사건을 목격 체험하는 관찰자이면서 내부시점에서는 또 다른 한 중심 사건을 진행해 가는 주인공이다. 다시 말하면 어른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는 ‘나’는 외부시점에서 관찰하는 서술적 화자이지만 병덕이를 통해, 그리고 삼손이를 통해 열심히 공부하는 ‘나’는 내부시점에서 행동하는 행위적 화자이다. 하기에 「새마을」의 나는 다만 어른들의 사회를 관망적인 태도로만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새마을’이라는 그 특정한 성인 사회를 자신의 희망에 연관시켜 일종의 성찰적인 시각으로 투시하는 것이다.


“어머니에게 대한 민망, 아버지에게 대한 미안, 내 처지의 불우에 대한 여러가지 감정으로 가슴이 메인 나는 아버지의 달초가 내리는 사이 그저우는 것으로 가슴의 울적을 풀었을 뿐이였다.”52)


병덕이가 준 책에 정신이 팔려 어머니의 약을 다 태워버리고 아버지한테 매를 맞으면서 ‘나’는 민망하고 미안한 마음과 함께 역시 자기의 불우한 운명에 대해서도 서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를 다니는 병덕이를 부러워하면서 그래도 그가 가져다 준 교과서를 매일 외울 때의 하루가 의의 있고 즐거웠다. 그리고 한창 공부할 나이에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을 부러워하면서 자기의 불우한 처지를 돌이켜보는 ‘나’의 눈에 비치는 ‘새마을’이라는 성인사회는 그토록 초라하고 암담할 수밖에 없었다.


“새마을은 해란강(海蘭江)에 인접하여 있는 용정의 한구역이였다.

여기는 우리 같이 촌에서 이사나오는 사람, 조선서 처음, 빈주먹으로 들어오는 사람, 그 외 그날그날의 품파리로 연명해나가는 이를 터이면 빈민들로 대부분이 점령되여 있는 곳이였다.

오층대통이, 상업(商業) 문화(文化)의 각방면으로 용정의 조선사람이 이룩하여논 번화한 거리인데 반하여 이곳은 서민의거주구역으로 용정의 뒷골목이라고 할까.

집들이 그랬고 드나드는 사람의옷들이 그랬고 골목이 그랬고, 모도가 서민구역에 상응하는 분위기와 광경을 짜내는 것이였다.”53)


이와 같은 초라한 환경에서 살아가면서, 학교 다니는 아이들을 부러워하는 어린 ‘나’의 행복과 희망은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욕망과 희망은 어머니 약을 태우고 아버지한테 매를 맞고 책을 찢기고 삼손이 있는 야학을 다닌다고 집을 쫓겨나서 더욱 강렬한 삶의 신념으로 굳어져 가는 것이었다.

이처럼 내부시점에서 행동하는 행위적 화자는 이미 관찰자의 위치에서 사건을 해설하지 않는다. 그는 사회를 신변체험하는 중심인물의 위치에서 사건에 참여하는 만큼 어느 정도 자기의 주장이나 태도를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불가피적으로 주관적인 판단과 감정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작가가 순진하고 분식할 줄 모르는 어린 소년을 행위적 화자로 설정하였기에 중립성은 여전히 지켜지고 있다. 특정 시대 사회 모습은 다만 공부하고 싶은 소년의 간절한 구지의욕과 살아가는 초라한 삶의 현실을 대조하면서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대조를 통하여서는 특정 시대의 삶의 풍속도를 볼 수 있으면서도 순진하고 미성숙한 소년화자한테서 지나치게 이념적으로 성숙된 사회 비판을 요청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새벽」이나 「새마을」에서 순진하고 분식을 모르는 소년화자를 해설자 내지 행위자로 내세웠다고 해서 사회에 대한 이념적 성찰이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른바 화자의 중립성이란 것은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이 뚜렷하지 못한 작가 이념의 한계성에 대한 변명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소설에서의 화자의 중립성은 작가의 이념적 성찰과 역사적 현실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주는 사실주의 창작방법이다. 그런 만큼 그것은 사회에 대한 작가의 이념적 성찰을 구체적인 행위 질서 속에서 현실적인 삶의 모습을 통하여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새벽」이나 「새마을」에서 사회에 대한 작가의 이념적 성찰이 소년화자라는 표상적인 포장을 벗겨내야만 드러난다는데 오히려 작품의 예술성이 숨겨져 있다고 할 것이다. 이를테면 소년화자는 결국 이십년 후의 성숙한 청년의 기억장치에 불과하다는 것, 그리고 청년이 잊지 못하는 기억의 내용(소재선택)과 그 기억들에 대한 배열(플롯) 등이 사회에 대한 작가의 이념적 성찰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에서 작품의 심층적 의미담론을 확인할 수 있겠으나 이것은 뒤에서 논할 몫이다.

「벼」 「원각촌」 「목축기」에서의 화자의 중립성은 전지적 화자가 외부시점에서는 분석적인 서사방식보다는 특정 시대 사회배경이나 인간관계를 사실적으로 제시하는 기록적인 서사방식을 취하고 내부시점에서는 사건 발전과 신변체험에 따르는 작중 인물의 변화양상을 분식 없이 추적하는 장면관찰의 서사방식을 취함으로써 지켜지고 있다.

「벼」에서 만주인 지주 방치원이 조선인 이주민을 환영한 것은 그가 조선에서 자수성가한 경력이 있어 조선말을 알고 조선인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역시 수전이 한전보다 이윤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안 까닭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또 그한테 수 십 만평의 황무지가 있었으나 원주민은 그런 기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조선인 이주민에게 있어서는 3년 무상대여라는 그렇게 후한 조건이 일확천금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큰 유혹이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 당시의 중국 정부도 대체로 “인구가 희박하고 개간지역이 엄청나게 많은 만주”에서 조선 백성의 힘을 빌어서 수전을 풀어 황무지를 개간하는 “국력증강책”을 펼치고 있던 시기였기에 “이주민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고 “이주증(移住證)을 발급함으로서 월경(越境)하는 백성을 환영”하였던 것이다.54)

그러므로 이때의 갈등은 조선인 이주민과 원주민 사이에 있었다. 원주민은 이미 개간한 땅을 지키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런데 사실상 수전을 모르기에 한전에 적당하지 않은 습지며 낮은 곳을 개간한다는 이주민들이 결국은 저들의 기경지를 점하고 근저로부터 그들의 생활을 위협할 것이라는 위구심에 적의를 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갈등은 불행하게 익수의 생명의 대가를 내기는 하였지만 수 십 만평의 황무지를 그냥 묵인대로 둘 수 없었던 방치원의 적극적인 화해와 이주민을 환영하던 중국 정부의 ‘국력증강책’으로 하여 그런대로 해소할 수 있었다. 결국 조선인 이주민과 원주민의 갈등은 백성 지간에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오해에서 생긴 민간 차원의 것이기 때문에 타력으로나마 풀릴 수 있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후 “동삼성(東三省)에 청천백일기가 나부”끼고 “삼민주의에의거한 힘센정치”가 펴지면서 배일사상으로 무장한 소현장과 같은 “국책에 충실하고 의식적인 정치를 행하”는 지방 관리에 의하여 조선인 이주민에 대한 제한, 배척 정책이 급진적으로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단순한 민간적 차원의 오해나 갈등이 아니라 국가 정책과 지방 관리에 의한 이와 같은 제한, 배척 내지 탄압은 국권을 상실하고 고향마저 잃어 아무런 제도적 보호 장치도 없이 무방비로 노출된 조선인 이주민들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한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민족 단위의 생존위기 앞에서 찬수는 학교를 짓지 못하더라도 살아남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하고 일본영사관의 힘을 빌어서라도 우선 죽음의 고비를 넘기려고 하였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격이었다. 결코 일제의 대륙 정책에 동조하는 행위가 아니라 식민 지배를 받는 식민지인으로서 권력의 탄압에 생명 보호의 구원책으로 요청할 수밖에 없었던 유일한 힘의 부름이었다.

그렇더라도 찬수는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이념적으로 현실을 극복해나가려는 초현실적인 지도자는 아니었다. 그는 다만 나름대로 조선인 이주민들을 이끌고 ‘지혜롭게’ 당면한 위기를 넘기고 어떻게 하나 살아남으려는 생존의지와 민족 공동체의식의 소유자였을 뿐이다. 물론 거기에는 특정 시대에 대한 불투명한 인식과 함께 이주민이면서 식민지인으로서의 이중성도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특정 시대에 대한 작가의 이념 성찰의 한계성과 직결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시대적 극복과 함께 자기극복이라는 문제의식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작가가 부각시키고 있는 찬수의 성격은 전형적인 지도자의 형상이 아니라 사건 진행과 현실 변화 속에서 변모해가는 진행형의 입체인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뒤에서 분석되겠지만 소설의 중심 사건이 결코 찬수의 선택에 따라 발전하고 있지 않다는 텍스트의 서사구조로써도 확인할 수 있다.

다음, 「원각촌」은 “반도불교계의 선지식으로 유명한 해룡선사"가 만주에서도 조선인 이주민이 많이 살고 있는 간도에 토지를 사서 원각교의 이상촌을 만들어가는 과정에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그 제재부터 사회를 외면하는 듯한 이색적인 작품이다.

소설의 서두에서부터 원각촌은 벌써 사회와 차단되고 바깥세상과 등을 지고 돌아앉은 외딴 세상이다. 사회와 차단된 외딴 세상이고 보면 시초부터 화자의 사회적 발언은 억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표면적으로 보면, 화자는 반도 불교계의 선지식으로 유명한 해룡선사에 의해 사회와 동떨어진 외딴 곳에 속세와 무관한 원각교의 이상촌이 건설되는 과정에 ‘악종’인 한익상이 갖은 악행을 다 하여 이상촌 건설을 저애하다가 떠돌이 원보와 갈등이 생기면서 마침내 죽임을 당한다는 선악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바깥세상과 차단된 이곳은 워낙 자연환경부터 도화원 같은 이상촌을 건설하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거기에 바깥세상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후한 조건으로 하여 원보가 찾아올 무렵 원각촌에는 벌써 사십여 호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민국(民國)에 입적하지 않은 사람은 토지를 살 수 없었으므로 해룡선사는 부득이 만주 태생이고 적도 가지고 있고 이곳 청산동에서 오래 살아온 한익상을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한익상은 이상촌의 ‘홋주인'(單主人)이 된 것이었다. ‘홋주인'이 된 한익상은 사들인 토지에 대한 반분의 소유권을 차지하게 되면서도 우선 2만원이 될지 하는 토지를 3만원이란 엄청난 가격으로 매매시켜 이익을 챙겼다. 이상촌에 대한 그의 검은 손은 여기서부터 뻗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그것이 토지 관리 겸 원각사 주지로 원각촌에 남은 화담법사에 의해 발각되고 질책을 받게 되자 앙심을 품고 공공연하게 원각촌민을 못살게 굴었다. 원각촌 동구에 큰 집을 짓고 사는 그는 원각촌과 바깥세상이 갈리는 문턱을 지키고 앉은 수호신이 아니라 악마였다. 그가 한번 얼씬하기만 하여도 무슨 벼락이든 하나씩은 떨어졌다. 희망을 품고 찾아온 촌민들에게 한익상은 ‘악종’이었고 그가 있는 한 그들은 안온하게 살 수가 없었다.

이런 ‘악종’과 떠돌이 원보의 만남은 아무래도 악연일 수밖에 없었다.

온갖 못된 짓으로 촌민들을 못살게 굴면서도 안하무인이던 한익상의 세력권 안에 들어선 원보는 결코 그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원보는 한익상의 앞에서는 설설 기면서 돌아서면 악담을 하는 촌민들과는 달랐다. 촌민들은 땅에 의해 한익상한테 매운 몸이었기에 감히 반항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가 생트집을 잡기 전에 미리 “닭마리나 음식같은것을 갖어다 받히고 그의 성미를 눅이는수단으로 겨우 미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항상 신변위험에 날카로운 눈길을 하고 있는 원보는 어떤 적수라도 언제든지 대항할 수 있는 처지였다. 떠돌이를 하면서 신변에 위험이 있을 때마다 싸우고는 떠나던 그였던지라 한익상은 결코 남달리 대항할 수 없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원보가 청년과의 유혈 격투를 겪은 후 그곳 산판을 떠나는 행동은 결코 그의 상투적인 생활방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벌목 일손을 구한다는 ‘구직광고’에 원각촌으로 들어온 것도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필경은 희망이 있는 이상촌이라는 표상과 오랜 시간을 경과하면서 안주해 살아가는 친구의 삶이 원각촌에 대한 그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고도 할 수 있다. 진정 원각촌이 해룡선사가 구상한대로의 원각교 ‘이상촌’이라면 원보에게 정착의념을 불러일으키지 말란 법은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원보의 심리지향의 정착의지를 확인하면 이른바 이상촌을 무대로 한 떠돌이와 ‘홋주인’의 대결은 선악 대결의 표층의미에 멈추지 않을 것이다. 심층적 의미담론에서 보면 그들의 갈등은 원각촌의 이상촌 의미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아무튼 소설의 표층적인 갈등구조는 ‘악종’ 한익상과 반항적인 떠돌이 원보의 대결이라는 선악 구도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표층적인 선악 구도에서 화자는 선과 악에 대한 감정 노출은 서슴없이 하면서도 사회적 이념 성찰에 대한 직접적인 표출은 억제할 수 있는 것이었다.

다시, 「목축기」는 주인공 찬호가 두만강을 건너 멀리 조선의 충청도 논산종묘장에 가서 씨돝 칠십두를 사오는 장면을 통하여 민족 공동체의식을 보여주고 ‘와우산목장’ 건설을 통하여 조선인 이주민들의 현실 극복의지인 정착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소설은 전문출신으로서의 그가 본업에 실천적으로 종사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이념 성찰의 이행이라기보다는 교원생활에서의 실패 때문이었다는 설정으로 의미담론구조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앞서 분석했지만 찬호 역시 사건 발전과 현실 변화 속에서 변모 양상을 보이는 진행형의 입체인물이다. 그는 현실 극복의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특정 시대에 대한 현실 인식이 불투명한 자기 극복의 한계성도 지니고 있다. 그의 귀농사상은 “백오십만동포의 팔활을 점령한 농촌은 배운 자를 목마르게 기다린다.”는 현실로부터 출발한 소박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는 현실 극복과 정착 가능성의 객관적 근거를 이른바 오족협화, 왕도낙토, 유축농업과 같은 당시 만주의 화려한 발전시책을 깊은 이성적 성찰이 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지금은 암흑시대가 아니다. 만주에는 아침이왔다.”는 이상주의에 두고 있는 것이다. 오족협화, 왕도낙토, 유축농업과 같은 정책은 겉으로 보기에 ‘독립국가’를 표방하는 만주국이 모든 민족을 함께 성장하게 하는 정치적 담보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포장된 식민지였던 만주국이 식민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 간의 근본적인 모순을 덮으려는 위장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이상주의는 궁극적으로 민족 단위의 이익과 성장의 층위에서는 식민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 간에 있게 되는 양립할 수 없는 갈등과 충돌을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교육에서의 실패가 본업에로 돌아간 직접적 원인이기는 하지만 “백오십만동포의 팔활을 점령한 농촌은 배운 자를 목마르게 기다린다.”는 찬호의 소박한 귀농사상이 실천적 동기가 되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또한 목장 건설을 통하여 전문출신의 진정한 가치를 찾으려는 의욕과 함께 교원 출신 주주들의 부탁대로 “노후에 와우산과 벗하여 주경야독할 수 있도록 이상적 부락”을 만들려고 한 것도 틀림없다. 원인이나 의욕이나 동기 모두가 만주국 국책과는 직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의 객관적 조건이나 실현 가능성을 “지금은 암흑시대가 아니다. 만주에는 아침이 왔다”는 것과 같이, 현실 인식에 모호한 이상주의에 두고 있기 때문에 실천행위에는 비극성이 암장되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전반 사건서술에서 화자는 줄곧 객관적 관찰자의 입장을 지키면서 직접적인 이념 분석이나 해석은 회피하고 있다. 현실에 대한 작가의 이념 성찰은 텍스트 담론방식에 대한 좀 더 깊은 구조적 분석에서 찾아봐야 할 것이다.

안수길의 간도소설에서 화자의 중립성은 「차중에서」와 같이 철저하게 비극적인 작품에서도 거의 냉혈적으로 유지된다.

「차중에서」는 일인칭 화자(화자에 대해선 뒤에서 재확인)가 기차에서 목격한 거지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나 냉정하고도 담담한 필치로 서술하고 있으며 신변체험자로서 아무런 정감 표현이나 이성 판단도 하지 않고 있다. ‘나’는 다만 간도가 좋다기에 돈 벌러 왔다가 몸을 상하고 병까지 들어 할 수 없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유랑민의 모습을 스케치하듯 보여줄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찍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고향에서 더는 살 수 없어 살기 좋다는 간도에 들어왔던 최하층 식민지인의 처참한 삶의 한 모습임에 다름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국 만주에서도 방황하면서 안온한 정착의 삶을 살 수 없었던 최하층 조선인 이주민들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고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일인칭 화자는 거지의 역한 체취에 구역질을 느끼고 그를 백치(白痴)이상도 아니고 거지 이상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십전짜리 두 잎을 주어 쫓아 보낸다. 그러다가 문득 신문 학예면에 소품을 쓰기로 했던 약속을 떠올리고 그 거지를 주인공으로 글을 구상하게 된다. 기차에서 구걸하는 병든 거지의 비참한 모습을 될수록 심각하게 나타내고 그런 거지를 동정커녕 자리를 피하거나 심지어는 구박까지 하는 손님들의 냉정한 언동을 통하여 잔혹한 인간의 이기심을 적나라하게 드러내 보인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나’는 시종 냉담한 태도로 거지를 관찰하면서도 기껏 거지를 쫓아버리기 위해 십전짜리 두 잎을 준 자긍심에 자격을 부여함으로써 거지를 보고 벌레를 떨어버리듯이 자리를 피하고 심지어 구박까지 하는 인간의 잔인한 이기심을 폭로할 구상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실상은 오십보백보로 그의 눈에도 거지는 백치 이상도, 거지 이상도 아니었었다.

사실 이러한 일인칭 주인공의 내부시점은 만주에 왔다가 정착을 하지 못하고 유랑생활에 병든 거지가 되어 구걸하는 이주민의 비참한 모습조차도 등장인물의 현실적 체험으로는 전혀 충격적이 아닌, 그래서 오히려 시대적 무관심이란 증후군으로 체념상태에 빠지는 식민지인의 변질된 삶을 폭로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 소설에서의 화자의 중립성은, 시대를 인식하고 성찰하고 각성해야 할 지식인이 이처럼 체념적인 무관심에 특정 시대의 민족적 삶의 비극을 냉혈적으로 대하는 그런 속물적인 태도를 폭로하는 작가의 비판적 자세에 의해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작가의 비판적 자세는 일인칭 화자의 심리적 반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의 유기적 관계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 것이기에 다음에서 논할 몫이다.



3.3 이념의 예술적 표현-의미담론과 서사구조의 조화


앞에서 분석한 텍스트 서사담론에서 많은 의문을 안고 넘어온 우리는 작가의 이념 성찰에 대해 보다 확실한 결론을 얻기 위하여 작가의 의미담론과 함께 서사구조에 대해 좀 더 깊은 해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즉 작품의 서사구조가 어떻게 의미담론과 서사담론을 유기적으로 연결시키고 근본적으로 통일시키는가를 통합적으로 연구해야 할 것이다.

입체인물의 성격이나 화자-해설자의 중립성에 대하여 다만 그 자체를 고립적으로 분석할 경우 자칫 사회에 대한 작가의 총체적인 이념 성찰 즉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에 토대한 의미담론을 도외시하게 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결국 작중 인물이나 사건을 장면에 따라 액면 그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비속사회학적으로 작품의 예술성을 비하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서술시점과 서술방식을 그 소재의 본질과는 독립적으로 연구한다면, 그것은 근본적으로는 임의적이고 다소 경솔하다고 할 수 있는 분류에 도달할 뿐이다. 그 이유는 작가와 독자, 어떤 특정 시점의 의미와 기능에 의해 미리 형성된 역사지평이 시야에서 사라지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서술을 통해 표현된 서술시점은 작가가 그를 둘러싼 현실 내부로 침투하고자 마련한 동일한 위치로 환원되어야 한다.”55)


작가의 창작은 우선 이념적이다. 작가는 역사 철학적인 관념에서 어떤 사상적 충동을 느꼈든지 아니면 어떤 사회적 현상 내지 현실에서 시대적 충격을 받았든지 아무튼 반짝하는 이념의 불꽃에 창작의욕이 생길 수 있다. 이념의 불꽃이 지핀 그런 창작의욕은 사상적 충동이나 시대적 충격에 대해 상상적인 주관세계를 구상하게 한다. 그런데 그런 상상적인 주관세계의 구상 과정은 의미담론의 예술적 표현 즉 서사구조에 대한 설계를 기반으로 하게 된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의미담론이 서사구조를 결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선택된 서사구조는 더는 의미담론과 이원론적으로 독립한 형식 자체가 아니다. 왜냐하면 작가의 이념적 성찰은 나무에 핀 꽃처럼 문학 텍스트에서 직관적으로 보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의 뿌리와 줄기와 가지와 잎과 꽃의 모든 것에 공급되는 자양분처럼 서사구조에 내재적으로 작용하는 의미담론 속에 녹아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에 대한 통합적인 담론분석에서만이 작가의 이념 성찰의 결정체는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작품에서 대화나 사건을 고립적으로 한 토막 잘라내어 작가의 이념을 포착하려는 시도는 그래서 흔히 문학의 본체론적 특성을 외면한대로 문학 텍스트에 대해 독선적일 수 있다.

안수길의 간도시절의 소설에 있어서 사건 발전과 신변체험에 따라 변모 양상을 나타내는 입체인물의 설정 자체가 인물의 행위 반경을 풍속적인 삶의 현장에 국한시킨다. 물론 이것은 작가의 이념 성찰의 불철저성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에 입각하여 정착의지와 극복의지를 삶의 현장에서 실천적인 모습으로 보여주려는 작가의 리얼리즘 정신을 보여준다.

당대 조선인 이주민들은 역사의식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만주를 삶의 터전으로 삼으려는 정착의지였지만 이주민이면서 식민지인이라는 변질된 이중신분으로 두 국가의 정치적 대결 사이에 무방비로 노출됨으로써 현실 인식에서는 가장 원색적인 생존 대응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작가는 특정의 시대 상황으로부터 출발하여 역사의식에 의한 민족의 정착의지를 이념적으로 재확인하면서도 현실 인식에서는 가장 원초적인 생명의식과 가장 원색적인 생존 대응방식에서 정착지향의 현실 극복의지를 밝히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작가의 이념적 성찰은 등장인물이나 사건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작가의 의미담론이 녹아들어 있는 서사구조를 통하여 완곡하게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3.3.1 내부인물의 갈등구조-식민사회의 축도


문학텍스트의 인물의 대립구도에서 대립되는 대상은 서로 그냥 개인적이지만은 않다. 삶의 현실과의 보편적이면서도 본질적인 연관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그의 시대적 특성을 확인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건에 참여한 등장인물의 주관적 행위가 얼마만큼 사회적 성격을 띠고 사회 현실의 총체적 질서를 보여주고 있는가를 말하는 것이지 결코 절대적으로 그 시대의 객관적인 위계질서에 의한 신분확인을 말하지 않는다.

일본인이 등장한다고 해서 그 텍스트가 식민지 시대의 사회적 본질을 밝히고 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또 개인 사정의 이주민이라고 해서 특정 사회 현실과는 전혀 무관하게 개인적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소설에 등장한 인물이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 신분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실제로 어떤 사회 현실을 대변하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물론 어떤 사회 현실에 대한 발언은 최소한 어떤 위계질서에 몸담고 있거나 그에 동조한 사람이 할 수밖에 없겠지만 아무튼 이것은 위계질서에서의 신분확인에 따라 그 사회의 총체적 특징이 나타난다는 말과는 견해를 달리하는 것이다. 특정 시대의 구체적 현실에 대한 깊은 성찰이 없이 다만 용속한 정치 사회학적 시각으로 객관적인 위계질서만을 따진다면 결코 사회 현실에 대한 본질적 파악이 아니라 단순히 무의미한 소재 확장만 하게 될 수도 있다.

「새벽」이나 「원각촌」은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에서 벌어진 사건을 다루면서 이주민 구성원 지간의 대립을 기본 갈등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인 이주민과 본토 지주의 마름인 ‘얼되놈'을 대립되는 대상으로 하는 이런 내부인물의 갈등구조는 일부 연구자들에 의하여 역사와 현실의 본질에 대한 인식이 불투명한 작가적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당시의 정치적 정세에 대한 묘사와 이주민들의 간도 이주의 근원적 문제에 대한 파악이 결여되어 있다.(중략)

이런 문제점은 이주민들의 비극의 원인을 동족인 지주 농간에 주된 원인을 설정하고 있는 데서도 드러난다. 비록 박치만 같은 반민족적 인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민족의 역사적 비극을 이러한 한 개인, 그것도 마름의 신분밖에 안 되는 ‘얼되놈'에게 한정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희석시켜 놓을 수 있다.”56)


우선 마름의 신분밖에 안 되는 ‘얼되놈'에게 민족의 역사적 비극을 한정하였기에 문제의 본질을 희석시켜놓았다는 견해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회 현실의 본질적 파악을 다만 사회적 위계질서의 층위와 직결시키는 단순논리라고 할 것이다. 다음으로 박치만을 동족의 지주이고 그것도 한 개인일 뿐이라고 확인하는 것은 텍스트의 의미담론을 떠난 피상적인 판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판단은 텍스트 서사구조를 외면한 채로 다만 박치만이 마름의 신분밖에 안 되는 ‘얼되놈'이라는 표상적이고 통념적인 신분확인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텍스트 서사구조에서 보면 그가 그런 신분이 나타낼 수 있는 본질적인 사회적 성격 내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데 시대의 총체적 상황이 포함되어 있다.

“문학텍스트가 언어활동 층위에서 어떻게 사회적, 역사적 문제들에 반응 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57)하는 것은 바로 텍스트 사회학의 출발점이다. 문학은 언어예술인만큼 작가는 인간사회의 모든 것을 언어를 통하여 반영한다. 그러나 필경은 예술이므로 여기서 사용된 언어는 그냥 단순하게 의미전달 기능만 하는 것이 아니다. 허구라는 것은 단지 실제 있었던 사실에 대비한 개념이 아니라 작가의 이념 성찰에 대한 언어적 포장기능을 말하는 것이고 그 포장이 정교하고 낯설고 다의적일 수록 성공적인 것이다. 때문에 문학 텍스트에서는 텍스트의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에 대한 통합적 분석을 통해서만이 기표에 의해 닫힌 언어의 한정된 의미를 넘어서 궁극적으로 작가의 이념에 접근할 수 있다.


“먼저, 문학 텍스트를 작가와 그 사회집단이 살았던 특수한 사회언어학적 상황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하나의 소설, 드라마 또는 시의 구조를 위해서 다른 어떤 것보다 몇 가지 사회어와 담론들이 중요하다는 것은 확실하다. 어쨌든 사회어들과 담론들의 텍스트 상호적인 흡수가 어떻게 하나의 특수한 문학적 구조를 낳는지를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58)


「새벽」의 박치만이나 「원각촌」의 한익상은 우선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라는 특별한 사회 분류가 낳은 ‘얼되놈'이란 신조어에 의해 한 개인을 넘어선다. 그리고 ‘얼되놈’은 이주민과 동시대성을 가지는 같은 의미코드의 사회어에 속한다.

신조어의 역사적 사회적 기원에 대해 확인하고 의미를 매기는 작가의 의도적인 선택은 바로 그 시대의 특성에 대한 예리한 포착과 갈라볼 수 없다. ‘얼되놈'이란 단어는 그를 별명으로 아는 이주민들한테는 그냥 지주의 마름에 상당한 위치로 인정되어버릴 수 있지만(그래서 그냥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식으로 전통 개념화 하지만) 작가에게는 일제 통치하의 식민지 만주국의 조선인 이주민 사회에서 나타난 특수한 현상으로 포착되었던 것이다.

“특별한 분류(계통)에서 나온 대립과 차이들이 한 사회어의 의미코드를 구성”59)하는바 조선인 이주민과 ‘얼되놈'은 바로 일제 통치하 괴뢰 만주국 조선인 이주민 사회라는 특별한 역사 시대적 환경에서 공생의 대립적 언어로 존재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얼되놈'은 이주민 사회 통치세력과 억압세력의 어휘목록에서 의미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작가의 선택을 통하여 결국 그 집단을 암시하는 환유로 되었다고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지 사회구조적인 분류로 말하면 ‘얼되놈'은 결국 통치세력과 억압세력의 기생물에 지나지 않고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본질적 모순을 형성하는 이주민의 절대적인 대립 항은 아니다.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본질적 모순은 지팡주와의 모순이다. 그러므로 ‘얼되놈'과의 모순은 개인적인 것일 수도 있고 사회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와의 갈등이 얼마나 사회적 시대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가는 그의 외부적 힘에의 의존도와 관계된다.

안수길은 이러한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구조적 특성에 의한 본질적 모순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박치만과의 모순이 이런 구조적 특성에 의한 본질적 모순이 될 수 있는 것은 그가 ‘얼되놈'이면서 실질적으로는 지팡주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지팡, 지팡주, 지팡살이는 당대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가장 본질적인 삶의 형태를 반영하는 신조어이다. 하기에 지팡, 지팡주, 지팡살이와 관련된 대립은 바로 당대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역사적 현실과 기본갈등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것일 수밖에 없다.

「새벽」의 주인공의 만주 이주민 생활은 당시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삶의 기본 형태인 지팡살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지팡살이에서 불가피하게 이루어지는 모든 대립과 갈등은 직접적으로 박치만과 연관되고 있다. 부재지주의 마름인 박치만은 이미 ‘얼되놈'이라는 기표적인 의미를 넘어 실질적으로는 지팡주나 다름없는 새로운 신분을 획득하고 있었다. 지팡살이의 억압형태인 볼모잡기, 고리대 등은 모두 박치만에 의해 행해지고 그는 집사대나 경찰서와 지방 관청에도 직접적으로 줄을 잇고 있었다. 사회 권력이나 억압세력의 힘에 의존하여 지팡살이하는 이주민들한테 볼모잡기나 고리대를 놓는 등 지팡주의 권세를 고스란히 그대로 누리고 있는 박치만은 더는 마름으로서의 ‘얼되놈'이 아니다. 따라서 그와의 모순 갈등은 이미 조선인 이주민 내부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었다.

이런 시점에서는 「원각촌」의 ‘얼되놈'인 한익상도 마찬가지이다.

원각촌민의 삶은 지팡살이에서 해탈되었으나 당시 특정 시대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본질적인 사회 현실이었던 입적이라는 강요된 생존방식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런 특정 시대의 생존방식에 의하여 산생된 것이 ‘홋주인’이란 신조어이다. ‘홋주인'이란 당시 민국(民國)에 입적을 하지 않은 이주민은 토지를 살 수 없었기에 이미 입적을 한 사람을 내세워 그의 명의로 토지를 사고 집조(執照=土地文券)를 냈을 때의 그 사람을 말한다. ‘홋주인'이란 신조어의 출현은, 한편으로는 조선인 이주민의 대부분이 강렬한 민족의식에서 어려운 삶을 살더라도 조선인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현실 극복의지와 저항의 현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면서도, 한편으로는 지팡주의 마름에 지나지 않았던 ‘얼되놈'이 사실상의 지주가 되어 경찰, 관리 심지어는 마적과 직접적으로 끈끈이 줄을 잇고 조선인 이주민을 못살게 굴었던 특정 시대 사회적 역사적 현실의 구조적 모순을 드러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익상과 원각촌민의 갈등은 이미 조선인 이주민의 내부 갈등을 넘어서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당시 조선인 이주민 사회에 강요된 생존방식이었던 입적정책의 산물인 ‘홋주인'으로서 직접적으로 당시 사회 갈등의 일익을 맡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얼되놈'과의 갈등이 근근이 조선인 이주민 구성원 간의 내부 갈등에 국한된 것이라면 대립 항의 극복에 의하여 하나의 사건으로 종말을 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대립 항의 일방이 구성원으로서의 의미가 변질되어 직접 사회 구조적 모순을 반영하는 대립 항으로 되었을 때 단지 그 개인에 대한 극복은 오히려 사회적 역사적 사건의 순환성을 제시해줄 따름이다.

한익상의 죽음은 결코 원각촌에 평화를 찾아준 상징으로 될 수 없다. 그것은 시대적 모순이나 억압에 반항하는 개척민의 투쟁정신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은 개척이민사 초기 조선인 이주민에게 강요된 생존방식이었던 입적정책, 구조적 모순이었던 ‘홋주인'제도의 해소를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개인으로서의 한익상은 죽었으나 특정 사회 구조적 모순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었고 경찰, 관리, 군대 심지어는 마적의 억압과 위협은 고스란히 원각촌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것은 오히려 해룡선사를 대표로 하는 원각교의 이상촌 건설이라는 의지와는 달리 현실적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심지어는 극복 불가능한 당대 사회의 시대적 모순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듯하다.

원보의 사회적 갈등에의 관여성은 이른바 이상촌으로 건설되는 원각촌이 사회적 역사적 현실에 원인을 두고 있는 한 떠돌이의 정착 가능성을 마련해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의식, 즉 식민지 괴뢰국가에서의 이주민 정착이라는 담론형식에서 획득되는 것이다. 결국 떠돌이 원보와 ‘얼되놈' 한익상의 대립은 행위자 주체의 입장에서 보면 뿌리 뽑힌 이주민과 이주민 사회의 본질적인 억압세력과의 근본적인 대립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것은 이미 한 개인이나 내부인물의 대립을 넘어서서 역사적 사회적 근본 문제로 확장되는 것이다.

「원각촌」은 바깥세상을 등진 심산 속에 원각교의 이상촌을 건설한다는 허구적인 사실과 그런 이상촌도 결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과 억압세력, 통치세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현실과의 갈등구조로 되어있다. 이와 같은 갈등구조는 당시 특정 사회의 역사적 현실과 본질적 모순에 대한 작가의 투철한 인식에 토대한 의미담론으로부터 정형(定型)된 것이다. 따라서 특정 시대의 사회 현상으로서의 신조어는 작가의 이와 같은 의미담론에 의하여 서사구조에서 전체적인 역사지평을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현상적인 현실의 사실들을 독특하게 예술적으로 선택하고 배열함으로써 비로소 리얼리즘은 이루어지며 또 작품 안에서 인식론적으로 불필요한 사실을 반복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예술의 내용은 외부 현실의 전경보다는 더 제한되고 적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예술가의 작업을 통해 더 본질적이고 의미 있게 된다.”60)


하나의 작품에서 그 사회의 총체적 모습이나 시대 상황을 소재의 측면에서 있는 그대로 다 밝혀야 한다는 주장은 누구도 하지 않을 것이다. 일제 통치 하의 괴뢰 만주국의 식민지 이주민의 삶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일제가 등장하고 만주국 관헌이 등장하고 본토의 지주가 등장하고 육군이 등장하고 마적무리가 등장하고 그런 다음에야 이주민 ‘얼되놈’이 등장해야 한다고 누가 주장할 것인가. 오히려 일제에서 마적까지가 ‘얼되놈’ 앞에 붙는 수식어로 될 수 있다면 ‘얼되놈’이야말로 일제 통치 하 괴뢰 만주국에서의 조선인 이주민 사회의 특징을 축도화해서 드러내는 본질적이고 의미 있는 예술적 선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작품에서 ‘얼되놈’들은 지배 권력이나 억압세력과 끈끈히 줄이 이어져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만약 갈등구조가 단순하게 ‘얼되놈’과 이주민의 모순이나 부차적 사건으로 설정되었다면 문제는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한익상이나 박치만과의 갈등은 민족적인 내부갈등이라기보다는 내부인물의 갈등구조라는 표상적인 형식을 통해 사실상은 사회 구조적 모순으로서의 억압세력과의 갈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확인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식민 정책의 장기적인 체질화로 이미 변질된 민족 구성원과 주인공의 갈등은 어쩌면 ‘성숙’된 식민지 사회에서 식민 지배에의 공모세력 역시 정착의지의 실천에 주요한 극복대상임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보는 바와 같이 작가 안수길이 그의 소설세계에서 변질된 이주민 구성원을 갈등의 대립 항으로 설정한 것은 이주민 사회에 대한 정확한 판단에서였다고 할 수 있다. 그 판단의 통사적 의미는 ‘얼되놈’이 오늘의 이주민 사회에서도 본질적인 구조적 모순을 나타내는 대립 항으로 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얼되놈’(의미론적으로)은 이주민이라는 특별한 집단에 의해 가능하며 따라서 그것은 이주민 사회라는 코드에서는 이주민의 영원한 대립 항일 수 있는 것이다.



3.3.2 단절 구조의 예술적 조형화-이주민 사회의 지평 제시


무엇을 표현하는가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는가가 소설에서 더 본질적인 물음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무엇을 표현하는가는 그냥 의미담론 분석에 머물게 되는 것이지만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는가는 그러한 의미담론을 서사구조를 통하여 어떻게 미학적으로 예술화하는가 하는 문학 본체론적 사고에 훨씬 가까이 다가서기 때문이다.

단순히 어떤 사건의 이야기 흐름을 줄거리라고 한다면 그 사건이 해설자의 주관적인 심리 동기 내지 의미담론에 따라 엮어지는 서사담론을 플롯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 읽기에서 이러한 의미담론에 대한 투명한 이해가 없이 다만 표상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따르는 수동적인 판단은 자칫 작가의 예술적 역량을 과소평가하거나 작품에 대한 비속사회학적인 평가로 플롯의 독자적인 예술적 효과를 외면하는 오독을 초래할 수 있다.


“이론적(비판적) 담론은 그 자체의 의미적, 서술적 메카니즘들에 대해 성찰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자체의 분류(코드)와 거기서 나오는 행위자 모델에 대해서 성찰한다. 이론적 담론, 그 자체의 언어적 활동에 대해 그리고 활동이 명확히 나타내는 사회적(집단적) 이해관계들에 대해 성찰하면서, 그 특수성과 우연성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성찰적이고 자기비판적인 자세의 도움으로 이 이론적 담론이 다른 사회어와 다른 담론에서 전개될 수 있는 것이다.”61)


문학 텍스트에서 해설자의 의미담론은 시종 일관성을 유지하려 하면서 자체의 ‘분류(코드)’를 행위자가 삶의 현실 상황에서 경험하는 형식을 전제로 하는 서사구조를 통하여 성찰한다.

「목축기」에서 플롯의 전체구성을 해설자의 의미담론으로 보면 하강하는 플롯으로 확인해야 하지만 실제 서사담론에서 볼 때 플롯구성은 상승하는 플롯과 하강하는 플롯으로 되어있다. 멀리 조국에서부터 종자돼지를 가져오는 찬호의 적극적 행위로 나타나는 플롯은 상승하는 플롯이라고 하겠지만 로우숭(老宋)을 통하여 이끌어내고 있는 플롯은 하강하는 플롯으로 되어있다. 물론 로우숭의 이야기 자체를 고립적으로 해석하면 주인공의 각성을 보여주는 하강하는 플롯이라고 하기에는 로우숭의 성격창조가 적극적이지 못하다.

그러나 이렇게 찬호와 로우숭을 각각의 행위 주체로 보는 시각에 오히려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런 판단 시점에서라면 단편소설의 용량에서 찬호를 행위 주체로 한 플롯과 로우숭을 행위 주체로 한 플롯의 설정은 절대적으로 단절 구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소설의 중심인물을 목표의 목장 건설까지 주도적 행위자로 내세우다가 갑자기 내동댕이치고 동물화 된 로우숭을 등장시켜 새로운 플롯구성을 하는 작가의 의도는 도대체 무엇일지 확인될 수 없다.

이는 텍스트의 의미담론의 일관성이 서사담론의 내재적 일치성을 담보해준다는 원리를 떠나 피상적인 이야기 흐름을 따라 사건줄거리를 포착하기 때문이다. 텍스트의 단절적인 서사구조가 어떤 일관적인 의미담론에 의해 의도적으로 설정되고 있다면 거기에 바로 작가의 서술적 메커니즘의 창조력이 있는 것이다.


“현실에 대한 텍스트의 일치는 두 개의 변수에 근거한 담론적 수행인 것이다. 그 두 변수는 바로 여러 가지로 해석을 가능케 하는 텍스트와 그만큼의 해석을 가능케 하는 현실이다.”62)


여기에서 우선 해설자의 의미담론을 다시 토론, 확인해 봐야 할 필요성이 요청된다. 하나의 작품에서 인물 개개인이나 사건 하나하나에서 매력을 느끼거나 어떤 심리적 감응을 얻을 수도 있겠지만 총체적인 해설자의 의미담론을 확인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작품의 진가를 밝히기 어렵다. 또 그런 총체적인 해설자의 의미담론을 정확하게 확인해야만 작품의 구조적 특성을 작가의 의도적이고 독창적인 예술기법으로 읽어낼 수가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의 주제, 즉 해설자의 의미담론은 한마디로 찬호의 이데올로기적인 확신이나 이상적인 추구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나라를 잃고 고향마저 멀리 등진 식민지 이주민으로서의 재만 조선인 이주민들이 민족의 공동체의식과 생존의식으로 현실을 극복하고 기어이 삶의 뿌리를 내리려는 끈질긴 생명력과 정착의지를 보여주려 한 것이었다.

이는 역시 작가의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에서 기인한 것이다. 식민지 치하에서 주권을 잃고 고향마저 멀리 떠나온 식민지 이주민의 운명을 두고 등장인물들더러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대안 없는 인생숙제를 풀어가게 하는 안수길의 역사 철학적 인식은 결코 이념적 대결이나 이상향의 추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어떤 역경 속에서도 기어이 뿌리내리려는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과 자생력에 대한 믿음과 현실 극복의 비장한 삶의 자세 그 자체이었다.

그러면서도 현실 극복과 자기극복을 동시에 해야만 하는 진행형의 입체인물의 설정은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억압의 특정 시대를 살아가면서 현실을 극복하고 대응해가는 인간군상의 현실 인식과 실천적 자세를 반성해보려는 작가의 사실주의적 창작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리얼리즘 문학은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가진 상황을 예술 속에서 다루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이른바 자유로운 창조나, 현실을 완전히 등지는 것은 리얼리즘과 거리가 먼 것이다.”63)


앞에서 지적하였지만 찬호는 현실 극복과 정착의지를 실천해가는 인물이면서도 현실을 본질적으로 인식하고 시대적으로 각성한 선지적인 지도자는 아니다.

농업과 전문출신인 그가 교원생활에서 실패하게 된 주요 원인은 특정 시대에 대한 현실 인식이 투명하지 못하고 민족이 당하고 있는 역사적 질곡의 본질을 이념적으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여 그는 민족의식이 있고 신념과 의지가 있는 신변의 사람들(학생들까지 포함한)에게 돌림을 당하게 된 것이었다.

성(省)의 근로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교육방침에 어쩔 수 없이 순응하여 농업과 전문출신을 초빙한 학교당국이 결국 그런 인재를 대용교원으로 돌려쓰는 것도 당대 삶의 현장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성향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할 것이다. 실제로 이 학교의 교장을 비롯하여 간부교원은, “학교창립때부터의 근속자거나 경영상 파란이 많은 운명과 함께 험한 길을 같이 한 공로자들”이거나 “간도 개척의 초창기에 들어온 지식층들이라 거의가 남에게 감격을 줄 수 있는 웅변가들이었다.”는 신분 확인은 시대 현실을 본질적으로 파악하고 보다 근본적으로 현실 극복의지를 실천해가는 당대의 삶의 현장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민족 단위에서 형성되어 있는 그러한 현장 분위기는 찬호의 귀농사상을 만주국 국책순응으로 비난하는 학생들의 목소리에서도 느낄 수 있다. “간도 개척의 초창기에 들어온 지식층들”에 의해 민족의식을 키운 학생들이라는 신원을 의식하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 아닐 수 없다. 찬호가 교원생활에 실패하게 된 것은 사상이 발랄하고 사회 반역의식이 강한 학생들이 “속시원한 웅변이라곤 없이 묵묵히 광이와 호미로서 흙을 파는 면에서만 접촉하는 찬호에게 존경이나 흠앙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시대를 본질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민족의 근원적인 비극을 현실적으로 알지 못하는 그의 정치적으로 미숙하고 유치한 발언이 주변인들과의 이념적 괴리를 조성하였던 것이다. “만주에도 새아침이 왔다”는 주인공의 말을 주인공이 아닌 학생들의 흉내를 통해 표현하는 서사형식은 이런 의미담론에 의해 풍자적 의미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농업과 전문출신의 찬호가 “훌륭한 교수 방법”도 없어 교육에 실패하자 마침내 자신의 전문지식을 민족 공동체의 정착의지에 실천적으로 공헌하려는 소박한 이념마저 그대로 부정할 수는 없다. 말하자면 찬호는 오족협화, 왕도낙토, 유축농업과 같은 만주국 국책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의 계산적인 책략임을 정치적으로 파악하지 못한 채, 다만 그런 ‘평화로운 현실’에서 민족 공동체의 정착의지를 실천 내지 실현할 수 있다는 아름다운 착각을 한 것이었다.

오족협화, 왕도낙토, 유축농업이 일제가 저들의 식민지 통치를 위장하고 겉포장으로 ‘독립’된 만주국의 평화적인 발전을 통하여 저들의 대륙 침략정책의 전초기지를 다져가려는 계략에서 출발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민족 단위로 동일한 위계선상에서 평등을 추구할 수 없었던 식민지 사회에서 식민지 피지배민족 이주민의 민족이익과 민족이념은 궁극적으로는 수탈과 억압의 힘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역사의식에서 출발하여 정착의지를 현실 극복의지로 확인하는 작가 안수길은 오족협화, 왕도낙토, 유축농업의 만주국 시책에 조선인 이주민의 민족생존의 대응논리로서 북향정신, 목장(조선인 이주민 사회)건설, 농민도(農民道)라는 민족 공동체의식을 대입하고 있다. 작가의 의미담론은 식민 지배의 절대적 억압사회를 극복하려는 민족 단위의 실천적 탐색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작가 안수길은 그러한 실천적 탐색의 의미담론으로부터 출발하여 찬호와 같이 사건 발전과 현실 변화 속에서 변모해가는 입체인물을 주인공으로 설정한 것이었다. 이를 통하여 작가는 주인공이 자기 극복과 현실 극복의 갈등을 동시에 겪지 않으면 안 되었던 특정 시대 사회 상황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담론에서 찬호와 로우숭은 하나의 형상으로 겹쳐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찬호에서 로우숭에로 단절된 구조는 연속성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

로우숭의 상징적 의미가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고 파괴하려는 세력에 대한 반항이고 항거”이고 “설사 그것이 비극으로 종말을 고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존엄을 파괴하는 세력에 대해 저항과 복수를 하려는 결의”64)라고 확인하면 역시 각성의 하강플롯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더 사납다)”라는 고사 성어를 떠올리면 호환(虎患)의 상징적 의미는 한결 더 투명해 질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과연 열악한 창작 환경에서 작가의 현실 인식을 예술의 기량으로 재치 있게 포장해 내는 안수길의 작가적 역량을 볼 수 있다.

찬호가 자기의 신분에 맞게 아이들을 농촌으로 호소하고 그 자신이 마침내 목축장 건설에 헌신하는 것과 오직 동물에만 애정을 느끼는 로우숭의 모습은 두 개의 성격보다는 오히려 로우숭의 형상이 찬호 성격의 극화된 과장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사회 현실을 본질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다만 자신의 전업기술에 의해 이상적인 목장을 건설하려는 찬호와 사회와 담을 쌓고 인간을 외면한 자연화 동물화 된 로우숭은 동기적인 사건과 결과적인 사건을 이끌어내는 동질성을 띤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짐승에 남다른 애착을 가지고 목축업을 잘해 보려는 열정과 욕망으로 하여 찬호와 로우숭은 하나의 행위자가 될 수 있는데 의미담론 분석을 할 때 로우숭의 호환은 찬호의 특정 시대 현실에 대한 불투명한 인식의 결과(대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슬기로운 의미담론의 해설자는 현실 사회와 연관되어 있는 찬호를 통하여 비판할 수 없는 사회적 모순을 자연화 동물화 된 로우숭을 통해 무난히 드러내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식에 토대한 민족 공동체의식과 현실 극복의지를 주제로 삼는 해설자의 의미담론을 실천하는 찬호는 그러나 아무런 대안도 갖고 있지 않다. 그만큼 이제 목축장의 전망은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다. 여기에서 찬호한테 이제 더 현실적으로 가능한 어떠한 실천적 작업도 제시할 수 없었던 해설자는 독자들이 과장된 서술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징수법으로 로우숭과 범의 대결이라는 자연주의적인 생명의식을 도입한다. 그것은 가장 치열한 원색적인 생명 본능을 통하여 어떤 어려움을 예시한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역시 어떤 어려움에도 기어이 뚫고 나가려는 이념을 나타낸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사회로 돌아온 로우숭을 그냥 동물화하고 있음으로써 로우숭, 호랑이, 자연은 그 동질성으로 하여 사회에 대한 환원으로서의 상징성을 동시에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로우숭의 인간적 사회적 환원과 함께 호랑이의 피해는 사회 학정과 동질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또 허위적인 만주국 국책을 본질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것을 이용하여 목장을 건설하려던 주인공의 모호한 시대인식이 불가피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결과라고도 할 것이다.

결국 서사구조적으로는 찬호를 행위자로 하는 플롯을 상향적인 플롯으로 함으로써 해설자의 의미담론이 미래지향적임을 보여주면서도 로우숭을 행위자로 하는 플롯은 하향적인 플롯으로 설정하여 주인공이 부딪치게 될 험난한 앞날을 예시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사회의 외적 현실과 주체의 내적 현실의 대립 통일의 변증원리에 따라 작가의 성찰과 형이상의 이념을 작품에서 플롯을 통하여 다시 객관적으로 현실화하는 것이 리얼리즘소설의 기본 원리의 하나라고 할 것이다.

「차중에서」는 「목축기」에서의 전 후 사건의 단절구조와는 달리 한창 진행되고 있는 사건(열차의 여로)을 갑자기 절단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 소설은 서사구조를 의미담론과의 내재적 연결 속에서 분석하지 못할 경우 그냥 일인칭 화자인 ‘나’의 시선과 관찰에 따라 표상적인 주제 확인에 머물 수 있다. 일인칭 화자인 ‘나’가 작품 구상을 하면서 거지에 대한 동정을 나타내고 인간의 잔혹한 이기심을 폭로하려 한다는데 초점이 맞추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독자의 눈에는 민족의 비극의 근원을 밝히지 못하고 지식인의 우월감을 노출한 작가의 이념 성찰의 한계가 보일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의미담론 분석을 통해 서사구조의 의미론적 구성을 재확인해보면 우리는 훨씬 심오한 작가의 이념 성찰의 결정체를 발견하게 된다.

우선 ‘나’의 거지에 대한 동정이나 관심은 현실적인 시대인식이나 이성적인 각성에서가 아니라 근근이 소설 구상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거지의 대화를 통해서 그것이 일찍 일제의 식민지 수탈에 의해 고향에서 쫓기듯 한 식민지인이 간도가 좋다는 일제의 허위 선전에 돈 벌러 왔다가 결국 몸을 상하고 유리방황을 하던 비참한 모습임을 알 수 있다. 간도가 좋다고 해서 돈 벌러 왔다가 몸만 상하고 노비마저 없어 기차에 뛰어들어 죽으려다가도 기어이 찾아가는 여해진(汝海津)이라는 고향, 엄마밖에 없다는 고향, 거지의 입에서 염불 외듯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그와 같은 고향 모티프는 틀림없이 식민지 시대 실향민의 이미지에 대한 강조임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대화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인 ‘나’는 전혀 아무런 시대적 인식도 보여주지 않는다. 오히려 거지에 대한 동정심마저 없이 그를 백치이상의 아무것도 아니고 거지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마침내는 십전짜리 두 잎에 쫓아버린다. 이러한 ‘나’가 그 거지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설정하였을 때 거지의 형상은 다만 동정의 대상일 뿐 아무런 시대적 특징도 부여되지 않는다. 주변 인간들의 잔혹한 이기심을 비난하는 ‘나’의 양심도 가련할 정도로 십전짜리 두 잎을 주었다는 자긍심에 매달려있을 뿐이다. 이처럼 거지를 백치로 취급하는 ‘나’는 자기가 구상하는 작품의 비극성에 스스로 흥분하여 자신의 의념세계에서 거지를 가장 비참한 운명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속물적인 심리 행위는 기차가 임시 정거하는 순간 자기의 생각이 현실로 실현되었다는 착각을 하고 기차에서 뛰어내리게까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결코 거지에 대한 동정심에서가 아니었다. 자기의 기발한 구상이 현실에 대한 위대한 예언이었다는 놀라운 발견 때문이었다.

결국 소설은 ‘나’의 이러한 냉담한 내부시점을 통하여, 시대에 선지적일 지식인마저 식민지 사회에 정신적으로 체질화되고 시대적 무관심이란 증후군으로 체념 상태에 빠져 민족의 근원적인 삶의 비극조차 외면하거나 냉혈적으로 대하는 변질된 삶의 현실을 폭로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미담론은 서사구조의 의미론적 요소를 좀 더 깊이 밝혀보는 것으로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결말 부분에서 전지적 화자의 직접적인 개입으로 ‘나’의 기차여행이 목적지에 이르기 전에 그냥 절단되어버리는 것이다.

두 번째 소절의 마지막 문장이 “八도하역(八道河驛)어구에서 생긴일이다.”로 끝나고 있는데 소설은 벌써 세 번째 소절에서 “기차가 정거한것은 신호패가 떠러지지않었기 때문이였다.”는 단 한 구절로 결말을 끌어내고 있다.

‘나’는 “상三봉에 급한 볼일이 생기여” 기차를 타고 가는 길이었다. 그러니까 여해진 고향으로 가는 거지와는 적어도 개산둔까지는 같이 동행하게 될 것이었다. 어쩌면 개산둔에서 국경을 같이 넘게 되면서 노자가 없이 국경을 넘으려는 거지의 모습에서 또 어떤 구상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거지가 무료승차권을 가지고 갈 수 있는 개산둔에도 아직 도착하지 못한 팔도하역에서 화자는 그냥 이야기를 중동무이하고 있다.

결국 작가는 식민지인의 비참한 유랑 모습을 통한 식민지 사회에 대한 고발을 넘어서서 식민지 사회에 체질적으로 적응된, 사실상으로는 변질된 식민지 지식인의 속물화된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한 의미담론에서 설정한 작가의 주도동기가 바로 ‘붉은 신호패’이다.

두 번째 소절에서는 단지 ‘나’가 ‘붉은 신호패’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기차가 떠나자 다시 기차에 올라타는 서술로 되어있다. 여기서는 ‘붉은 신호패’가 기차가 떠나게 되는 조건으로 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결말에서는 그 조건이 바로 기차가 서게 된 원인이 되고 있는 것이다. 복선과 조응의 원리로 확인할 때 우리는 결말을 통하여, 앞에서 그처럼 비열할 정도로 지나친 관심을 갖고 기차 바퀴까지 살펴보면서 거지의 죽음을 확인하는 ‘나’를 정신 차리게 하려는 듯 ‘덜컥’하고 ‘붉은 신호패’가 떨어지는 소리를 그냥 기계의 소리로만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다. 조건이자 원인이 되는 ‘붉은 신호패’는 곧 기차가 정거한 것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나’의 부질없는 생각과 속물적인 행위에 대한 부정과 조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소설의 결말에 와서 우리는 작중 인물이면서 일인칭 화자인 ‘나’의 생각과 행위를 줄곧 외부시점에서 관찰해온, “올림포스 산정에서” “개별 장면의 연관관계를 조망하는 거대한 파노라마 시선”65)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작가의 이념 성찰의 사명을 지닌 전지적 화자이다.

결국 “기차가 정거한것은 신호패가 떠러지지않었기 때문이였다.”는, 원인 강조적인 단 한 구절로 끝난 결말은 ‘나’의 행위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던 전지적 화자가 어처구니없는 ‘나’의 속물적인 행위와 변질된 삶에 의한 식민 망각 증후를 조소하는 비판적인 결론임에 다름 아니다.



3.3.3 이중 갈등구조-억압된 현실의 서사화


문학 텍스트의 서사적 기틀인 플롯은 서로 상대적으로 분리되고 떨어져 있는 객관적 삶과 주관적 이념을 시간의 역사적 속성에 의해 특정된 삶의 현장에서 특징적인 삶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의 총체로 묶어준다. 말하자면 플롯은 개별적인 삶을 총체적인 시대인식의 토대 위에서 역사적으로 재확인한 작가의 성찰과 이념을 다시 객관적으로 형식화하는 기본 수단이다. 따라서 플롯에 대한 구조분석은 작가의 의미담론에 접근하는 가장 기본적인 텍스트 해석 방법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중 갈등구조로 구성된 플롯 유형에 있어서는 작가의 의미담론에로의 접근이 그렇게 용이하지 않다. 왜냐하면 텍스트를 구성하는 플롯 내지 그에 의한 갈등들의 상호 관계를 어떻게 확인하는 가에 따라 작품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러한 텍스트는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한 것이다. 하나 또는 여러 개의 갈등이 기본 갈등의 배경이나 입체적인 수식이 될 수 있다. 혹은 기본 갈등에 보다 적극적으로 작용하면서 작중 인물의 성격 형성과 발전의 시대적 현실적 계기로 되기도 한다. 부차적인 갈등이 기본 갈등의 시대적 현실적 계기로 작용할 때 이런 부차적인 갈등은 작가의 의미담론을 형성하는 역사적인 현실 인식을 대변한다고 할 것이다.

「새마을」을 단지 밝은 분위기로 파악하거나 심지어 만주국에 대한 찬미로까지 혐의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부차적인 갈등을 아예 도외시하고 일인칭 소년화자인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향학열에 함께 흥분한 탓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소설에서 일인칭 화자인 ‘나’의 관찰시점은 부동한 갈등구조에 따라 외부시점과 내부시점으로 갈라진다. 즉 어른들의 삶의 모습을 바라보는 소년화자의 시점은 외부시점이고 향학열에 불타는 소년주인공의 시점은 내부시점인 것이다. 내부시점은 지극히 주관적인데 반하여 외부시점은 차분하게 객관적이다. 그러나 주관은 객관에 대한 반응이다. 객관적 현실이 주관적 반응의 계기 동기 원인 근거 등등이 됨은 물론이다.

관찰자의 외부시점에 의한 객관적 묘사는 일차적 현재성이라는 시간의 역사적 원칙에 따라 시대적 특징을 포착하는 작가의 현실 인식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 말하면 새마을의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에 대한 외부시점의 객관적 관찰은 역사적 삶의 현실을 현장감 짙게 그대로 보여주려는 작가의 리얼리즘정신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을 지탱하고 있는 삶의 근거는 무시간적이지도 신비하지도 않으며, 시간의 경과에 종속되어 있다. 또한 모든 개별적인 것들이 시간으로부터 나오고 있다는 흔적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66)


새마을은 기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빈민굴이었다. 촌에서 이사 나온 사람, 빈주먹으로 조선에서 들어온 사람들이 대부분인 이들은 거의 모두가 고정적인 일자리도 없이 품팔이로 그날그날을 연명해간다. 사회적으로 아무런 보장도 받지 못하고 역시 아무런 미래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들의 체념적인 삶은 국권을 상실하고 고향을 멀리 떠나온 이주민의 비참한 삶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런데 이러한 외부시점의 객관적 관찰이 배경적 의미에 머물지 않고 주인공의 내부시점에 의한 주관적인 반응에 계기와 원인으로 될 때 주인공의 향학열은 이상적이고 희망적인 것이기 전에 벌써 현실 극복의지와 직결되는 것이다.

실제로 주인공의 미래는 밝은 것이 아니다. 병덕이처럼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는 형편도 아니고 아버지가 고정적인 직업이 없는데다 앓는 어머니의 약을 이어대야 하는 어려운 살림 형편이라 어린나이에 가게를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글을 읽는다는 것은 다만 글 동냥과 야학이 고작이었다. 그러므로 그의 향학열은 오히려 어려운 생활환경에서도 기어이 다른 애들처럼 공부를 하고 싶다는 현실 반항에서 폭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상적으로 공부할 수 없는 현실, 가난과 무지와 병마와 타락으로 어둡기만 한 현실이 오히려 ‘나’의 향학열을 더욱 불타게 하는 객관적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나’의 몸부림이 처절하면 할수록 그것은 현실에 대한 강한 부정과 반항을 나타내는 것이다.

일인칭 소년화자가 주인공이 된 내부시점의 갈등은 열악한 생활환경의 어린 소년이 다른 아이들처럼 배우고 싶어 하던 단순한 욕망으로부터 출발하여 나중에 삼손이를 통하여 배워야 되고 알아야 된다는 미래지향적인 의지의 확립으로 점차 승화된다.

이에 반해 일인칭 소년화자가 관찰자가 된 외부시점은 갈등이랄 수 없이 시종여일하게 수평적 서술흐름을 유지하면서 새마을이라는 사실상의 빈민굴 이주민들의 뿌리 뽑힌 삶의 모습을 분식 없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의 역사적 속성에 의해 그 개개의 우연성이나 자율성을 벗어나 특정 시대 풍속화로 시대적 역사적 존재로서의 필연성과 연속성을 획득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일제 식민통치 하의 만주 조선인 이주민이라는 특정된 삶으로 하여 “이들이 겪은 「새벽」에서의 비극은 ‘새마을’에서도 언제나 현재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67)


“리얼리즘은 대상의 진부한 모사라는 극단으로 떨어지지도 않으며, 리얼리즘의 창조적인 면이 현실로부터 멀어지지도 않는다.

이러한 중용적인 위치 정립과 그를 통해 특정한 인식적 가치가 정해짐으로써 리얼리즘은 자연주의적인 원리 및 낭만주의자의 주관적인 세계 설정과 구별된다.”68)


새마을의 변화 없는 풍속화적인 삶이 특정 시대의 민족사적 현실로 확인되면 그것을 배경으로 하는 ‘나’의 향학열 내지 삼손을 통한 신지식에로의 지향은 밝은 미래에 대한 확신보다는 절대적 억압의 시대와 변질된 삶에 대한 현실 극복의지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시대적 명암의 어두운 면이 되는 이러한 현실 배경은 작가의 의미담론에서 이념 성찰의 비판적 시대상임에 다름 아니다.

「벼」의 경우는 「새마을」과는 달리 이중갈등구조가 보다 직접적으로 얽히어 동기적인 사건을 다루는 플롯과 호응적인 사건을 다루는 플롯이 원인과 결과로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새마을」에서 동기적인 사건은 호응적인 사건에 대해 주인공의 성격 발전의 가능한 계기가 될 뿐이지만 「벼」에서의 동기적인 사건은 호응적인 사건의 필연적인 발생 원인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경우 호응적인 사건의 발전 양상은 동기적인 사건의 변화 발전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벼」에서 동기적인 사건은 두말할 것도 없이 중일 두 적대국의 정치적 대결이다. 따라서 중국 정부와 관헌에 의한 조선인 이주민에 대한 배척과 탄압은 바로 이러한 동기적인 사건에 의한 호응적인 사건임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처럼 동기적인 사건이 호응적인 사건의 직접적 원인임에도 소설의 서사구조는 호응적인 사건을 중심 사건요소로 다루고 있다. 바로 이러한 서사구조의 특성에 작가의 의미담론이 형식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동기적인 사건을 텍스트의 기본갈등구조로 설정할 경우 작품은 중일 두 적대국의 정치적 대결로 하여 그들 사이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는 조선인 이주민들이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격으로 얼마나 가혹하게 원색적인 생존위기에 몰리고 있는가를 폭로하게 될 것이다. 즉 특정 시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 초점이 맞춰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작품은 호응적인 사건을 기본 갈등구조로 설정하면서 동기적인 사건을 배경 제시, 에피소드 삽입, 복선 깔기 식으로 처리하고 있다. 이는 벌써 일제 식민통치에 의해 나라를 잃고 고향마저 멀리 떠나온 만주 조선인 이주민들이 중일 두 적대 세력의 격전장에 과녁처럼 무방비로 노출된 현실을 확인한 작가가 절대적 억압시대에서의 민족의 생존위기와 그 극복방식에 천착하고 있음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결국 텍스트의 의미담론은 특정 시대 민족적 비극의 원인을 밝히는 것보다는 이미 그것을 확인하고 그런 원인에 의한 생존위기를 삶의 현장에서 극복해야만 한다는 시대적 현실 인식에 토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담론을 이제 텍스트 서사구조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해볼 수 있을 것이다.

「벼」는 전장 후장으로 나뉘어 전장에서는 매봉둔 토착민들과 조선인 이주민들의 갈등, 후장에서는 중국 지방 정부 및 관헌들과 조선인 이주민들의 갈등을 다루고 있다. 이러한 기본 갈등구조로만 보면 이 소설은 그냥 단선적인 직선형 플롯으로 짜이어 만주 조선인 이주민들의 만주 이주, 개척, 정착의 어려움 내지 수난사를 삶의 현장 체험으로 다룬 듯하다. 즉 만주 조선인 이주민들이 생명의 대가를 치르면서 토착민들과의 오해와 갈등을 해소해나가고 지방 정부와 관헌들의 극단적인 배척과 탄압에 생명의 원초적인 생존논리로 대응해나가면서까지 정착을 위한 극복의지를 키워나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시점에서 텍스트의 의미담론을 확인하면 작가의 시대적 현실 인식의 불투명함을 지적하거나 심지어는 식민지인의 민족주의 이중성에서 식민 지배 권력에의 공모성향을 들먹여 친일성향을 운운하기에 이르게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런 경우 작가는 작품에서 소현장의 배일사상이 무고한 조선인 이주민의 생존마저 위협하는 과잉대응으로 나왔기 때문에 조선인 이주민들이 부득이 일본의 힘을 빌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는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그렇다고 하면 중국 관헌의 극단적인 배척과 탄압이 친일을 조장했다는 작가의 변호가 민족의식으로는 아무래도 떳떳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서사구조는 단선적인 직선형 플롯처럼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우선 소현장의 정치적 목표는 시종여일하게 일본인한테 조준되어 있다. 따라서 텍스트 서사구조의 밑그림이라 할 수 있는 의미담론은 에피소드 식으로 처리된 동기적인 사건에 갈등의 근원적인 발생 원인과 변화의 근거를 두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달리 말하면 기본 갈등의 변수는 중국과 일본과의 정치 대결의 변화 수위와 그에 의한 조선인 이주민 정책의 단계적 변화인 것이다.

배일사상으로 무장한 소현장이 부임하면서 힘쓴 것이 현직 관리에 대한 인물고사와 정비였고 그런 후에 바로 본격적으로 달려 붙은 것이 현 내에 사는 일본사람에 대한 조사였다. 급진적일 정도로 배일에 박차를 가하는 소현장은 나까모도를 좋은 사람, 친중파라고 하는 부하의 보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를 중점적인 조사대상으로 찍었다. 현장으로 부임한 그의 정치적 목표를 뚜렷이 보여주는 대목인 것이다. 소현장은 나까모도를 불러서 직접 사람이 된 품도 살펴보고 속도 떠보았으나 아무런 단서도 잡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결코 이에 손을 떼지 않고 어느 날 밤 삼경에 갑자기 자신이 지휘한 순경대를 이끌고 친히 나까모도의 상점과 학교 등을 습격하여 샅샅이 가택수색까지 한다. 가택수색에서마저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한 소현장은 사람을 내세워 나까모도에게 사과하고 짐짓 친밀한척 표면을 꾸몄으나 더욱 그한테 날카로운 눈을 떼지 않았다. 대륙 침략의 야망으로 만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일제의 동향에 특별히 예민한 경각심을 품고 있는 소현장 같은 정치인에게 현성에 “없어서는 안 될 사람”, “친중파(親中派)”, “고마운 사람”의 형상을 수립하는 일본인 나까모도가 겉볼안으로 그렇게 단순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찬수가 소현장의 강제 축출 명령에 구제책으로 나까모도를 찾았을 때 그는 중국 정권의 배일 정책을 운운하면서 일본영사관에 사실을 알리겠노라고 한다. 나까모도의 신분은 마지막까지 베일에 가리어진 대로 투명하게 확인되지 않고 있지만 이 대목에서 중국의 배일 정책을 놓고 특정 시대의 정치적 안목을 갖고 있는 그의 시대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소현장은 매봉둔에 이백여 호의 조선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고 더욱이 그들이 학교를 짓는 재료를 나까모도한테서 가져간다는 것을 알고 큰일이 나는 것 같이 서두르는 것이었다. 조선인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면 일본영사관이 들어선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소현장한테 있어서 그 조선인들이 하필이면 자기가 붉은 점을 찍고 있는 일본인과 밀접한 연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 대단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배일사상에 의한 이러한 정치적 판단은 소현장으로 하여금 시종일관하게 매봉둔 사건을 정략적으로 다루게 한다. 소현장은 단계적으로 수단을 취해서 어떻게 하나 조선인 이주민들을 “국외로내보내든지 그것이 정 안되면 현외(縣外)에 까지라도 내어몰라”는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조선인 이주민들은 한사코 죽어도 물러서려 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도저히 물러설 길이 없었던 것이다. 생명을 대가로 겨우 토착민들과의 오해를 해소하고 마침내 정착 실현에 가슴이 부풀던 조선인 이주민들이 피땀으로 일군 논을 그렇게 선선히 내놓고 물러날 수는 없었다. 이미 생명의 대가를 치른 그들한테는 논이 바로 생명이나 다름없었으니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죽음까지 각오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저항에 소현장은 보다 강압적인 수단을 썼다. 홍덕호가 불리어 갔다가 말 등에 얹힌 대로 겨우 숨이 붙어 돌아왔다. 학교가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었다. 격분한 조선인 이주민들이 토착민들의 모략인줄로만 알고 천방지축 토착민부락을 향해 방축을 오를 때 군대는 마침내 총을 쏜다. 소현장이 총을 쏘아 조선인 이주민들을 저지하는 행동은 정치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을 바라는 그의 정략적인 대일 투쟁의 입지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조선인 이주민과의 갈등이 언제든지 일제의 대륙 침략에 이용될 수 있다는 판단에 견제 목표를 어디까지나 일제에 조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소현장더러 극한적 수단에서 행동을 멈추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 바로 피땀으로 개척한 논을 목숨으로 지키려는 조선인 이주민들의 완강한 저항이었다. 소현장은 여기서 더 극단적으로 나아가다간 필연코 정치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확인하면 찬수의 판단과 행위는 이런 완강한 저항 중에 민족의식이 투철하지 못하고 정치의식과 현실 인식이 모호한 지식인의 알량한 처세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짓는 것이 순서라 생각”하고 “지금까지 영사관과 연락이 없은 것은 여기에 그럴듯한 지도자가 없은 까닭이었다.”고 판단하는 찬수는 결코 “그럴듯한 지도자”가 아니었다. 소현장이 극단적 결과가 정치적인 문제를 발생할 것을 우려했다면 찬수의 판단은 자칫 식민지 민족주의 이중성이 식민 지배에로의 공모라는 덫에 빠질 위험성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실제로 소설에서 찬수는 결코 지도자형 인물이 아니며 오히려 작가의 비판적 성찰의 대상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그의 반도에서의 사건으로부터 만주행에 이르기까지에 대한 성격 창조를 보면 작가는 결코 그를 이념 각성의 선각자로, 매봉둔에 군림하는 지도자로 부각하고 있지 않다. 찬수의 만주행은 그 스스로가 실수라고 인정하여 겪고 있는 정신적 질식에서 해탈하려는 도피 행각에 다름 아니었다. 홍덕호 등도 애초에 후세의 교육을 근심하여 학교를 세우기로 하고 박치만을 통해 찬수에게 다만 아이들을 가르칠 인재 추천을 부탁하였을 뿐이었다.

찬수는 비록 만주에 와서 형의 죽음과 초기 개척민들의 피눈물 나는 개척사를 통하여 자기의 하잘 것 없는 관념 유희를 반성하기도 하지만 매봉둔을 생명과 같이 여기는 개척민들의 생존의식을 특정시대 민족의식으로 승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일제의 힘을 빌어서라도 여기서 버티려는 그의 얄팍한 타산은 일제의 식민 통치에 의해 나라를 잃고 고향을 등진 이주민들이 더는 물러설 길이 없다는 치열한 생존의식으로부터 출발한 결사적인 저항과는 원색적으로 거리가 멀다.

그의 친일적인 성향을 잠재울 수 있었던 것이 조선인 이주민들의 이러한 결사적인 저항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저항이 소현장의 강압수단으로 하여금 대일 투쟁의 정략적인 극한에 이르게 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소현장의 단계적인 강압수단과 그에 맞선 조선인 이주민들의 결사적인 저항의 결과는 현실적으로 정치적 문제의 발생을 막아야 한다는 새로운 문제의식을 제기하였던 것이다.

결말에서 보듯이 결국 찬수의 행위와는 무관하게 사건의 발전 양상은, 죽음을 각오한 조선인 이주민들의 완강한 저항과 대일 투쟁의 정략적 판단에 주춤한 소현장의 태도에 의하여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즉 나까모도한테 갔었던 사람들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찬수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원주민 부락을 향한 조선인 이주민들의 발걸음을 저지하면서도 결국 하늘을 향해 놓은 총소리는 소현장과 조선인 이주민들과의 갈등이 조선인 이주민들의 완강한 저항에 의하여, 그리고 대일 정략의 구도에 따라 새로운 양상으로 발전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소설은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에 투철한 작가가 만주 조선인 이주민들의 이주, 개척, 정착의 수난사를 현장의 모습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와 동시에 원초적인 생명의식과 특정 시대의 생존 논리로써 억압 시대의 극복의지와 민족 공동체의식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4. 결론


본 논문은 만주조선인문학을 중국조선족문학의 발생적 원형질이라는데 초점을 맞추어 집중적으로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들을 그 연구대상으로 잡았다. 만주조선인문학을 중국 조선족문학의 시원이라고 확인할 때 안수길과 그의 작품은 바로 만주조선인문학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다. 그만큼 그의 소설에 대한 연구결론은 만주조선인문학의 성격 확인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안수길은 만주 이민역사에 대한 투철한 역사의식과 식민지 억압 시대에 대한 치열한 현실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의도적으로 만주 이주민의 개척사를 다루었으며 그것이 그의 초기 소설세계를 이루고 있다. 그는 만주 조선인 이주민 사회를 하나의 창작 공간으로 선택하기에 앞서 그 공간을 치열한 삶의 현장으로 살면서 역사 철학적인 사고와 시대적 인식에 고민하였다.

역사의식과 시대적 현실이 모순되고 배척되는 상황 속에서 역사의식과 민족 공동체의식에 토대하여 절대적 억압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것이 작가 안수길의 현실 인식이었다. 그러면서 작가는 형이상의 이념 성찰에 날카로우면서도 형이하의 억압적인 인간 조건을 비약하지 않고 리얼리즘 정신에 입각하여 작품화 했다. 그만큼 안수길의 소설은 억압된 현실을 살아가면서 현실 극복과 자아 극복에 몸부림치면서 자각 증상에 진통하는 주인공을 많이 다루고 있다.

그의 이러한 작가 정신은 역사의식과 민족 공동체의식에 토대한 이주민의 현실 극복의지인 정착 지향의 ‘북향정신’에 이어지면서, 단지 만주체험소설이나 망명문학이 아닌, 정착 지향의 향토문학으로 정립,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만주조선인문학과 함께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에 대한 많은 기성연구들은 대개 식민 피해의식이라는 강박관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만주조선인문학의 시대적 배경이 식민담론을 떠날 수 없다는 통념에 사로잡혀 역사 청산에 과잉반응을 나타내면서 문학 텍스트에 대한 문학 본체론적 분석을 외면한 채 단지 사상 검증이나 정치적 심판에 급급했다. 발표매체의 성격을 작품 평가의 절대적인 잣대로 삼거나 소재주의에 빠져 작품의 장면이나 대화 또는 언어를 문자풀이 식으로 해석하는 경향 등이 그러하다.

발표매체의 성격 규명은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담론의 한 분석방법으로서만 바람직하고 소재는 텍스트의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의 통합적 분석을 통하여 서사요소로서의 의미를 확인받아야 한다. 결국 문학비평과 연구는 문학 텍스트를 예술작품이라는 본래의 모습대로 해석하려는 목적에서 출발하여야 할 것이다.

본 논문은 이런 취지에서 안수길의 만주이주민소설을 텍스트의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의 통합분석이라는 방법으로 접근해보았다.

제1장에서는 만주조선인문학에서의 안수길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의 작품연구가 중국 조선족문학의 발생적 원형질 및 일제 말 암흑기 한국문학의 정직한 계승과 발전이라는 차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음을 밝혔다. 발표매체의 성격과 작가의 극복의지, 그리고 식민정치, 시국정책, 시대주제 등과 작품과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또 기성연구들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텍스트 분석에 앞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점들을 세 가지로 종합해보았다. 이러한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하여 연구방법은 텍스트사회학에 기대어 의미담론과 서사구조를 통합적으로 분석하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연구범위는 만주조선인문학의 성격규명 및 그 사적 발전과 관계하여 안수길의 단편소설집 󰡔북원󰡕 중에서도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이주, 개척, 정착의 역사를 다룬 작품에 한정하였다.

제2장에서는 1장에서 제기된 문제를 논제로 하여 창작에 직․간접적으로 시대성을 부여하고 연구에 인식론적 정보를 제공하는 역사 배경과 시대 환경 및 작가의 현실 인식에 대하여 나름대로 재조명을 시도하였다. 역사 배경과 시대 환경에서는 주로 유구한 이민사로 이어져온 만주와 일제의 괴뢰정권으로서의 만주국을 대비해 보았다. 그 과정에서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이주정착의 역사의식과 민족 공동체의식을 확인하고 일제의 식민체계에 의해 복잡해진 조선인 이주민의 신분과 착종된 의식을 해부해보았다. 텍스트 의미담론의 이론소가 될 작가의 역사의식과 현실 인식에 대해서는 작가의 현실 극복의지인 정착 지향의 ‘북향정신’과 그의 작가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체질론’을 그의 삶의 궤적을 따라 짚어보았다.

제3장에서는 본 논문에 선정된 작품들에 대해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의 층위에서 통합적으로 분석하였다. 우선 언어예술로서의 문학작품에서 가장 기본적인 분석 단위가 되는 언어의 사회학적 의미에 대한 확인을 시작으로 인물, 갈등, 화자, 시점 등에 대해 분석하였다. 여기서는 작가, 화자, 주인공이라는 3차원의 의식 주체를 텍스트의 의미담론과 서사구조의 형성 정립의 3대요소로 확인하면서 소설의 인물, 사건 및 화자에 대해 텍스트의 유기적인 연관 속에서 그 본래의 의미를 찾아보았다. 그리하여 가급적 텍스트 서사구조의 요소들에 대해 기표에 의한 표층 확인이나 고립적인 개념풀이를 하는데 그치고 마는 소재주의를 극복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러한 분석을 토대로 소설의 가장 본질적인 특징인 플롯의 분석 연구에 본격적으로 몰입함으로써 안수길 만주이주민소설의 서사구조 특성을 보다 총체적으로 파악해보려 하였다.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마침내 안수길의 소설들에서 역사의식과 시대적 현실의 모순을 기본 갈등구조로 하고 만주 조선인 이주민의 정착 내지 지역공동체의 결성을 실천해가는 주인공들의 현실 극복과 자기 극복의 비극적 양상을 조명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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