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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의 이야기(27)
2024년 04월 18일 15시 21분  조회:862  추천:0  작성자: 회령
       실화
 
                                            모택동의 이야기(27)
 
                                                                                                                  회령
 
모택동과 류소기의 최후의 만남
 
중공8기11중전회는 1966년8월1일부터 12일까지 북경에서 열리였다. 회의 마지막날 모택동의 제의에 의하여 중앙령도기구에 대한 개선이 있었는데 중앙위원들은 사전에 인쇄한 정치국상무위원 명단에 동그라미를 그리면 되였다. 명단의 서렬은 다음과 같았다.

모택동 림표 주은래 도주 진백달 등소평 강생 류소기 주덕 리부춘 진운.

류소기는 1945년 7기 당대회후 줄곧 인정되여 온 후계자 위치에서 8위로 내려 갔다. 8기11중전회후로부터 류소기에 대한 비판은 급격히 강도가 높아 지면서 10월부터는 “류소기를 타도”하는 새로운 계단에로 전입 하였다.

1967년에 들어 서면서 류소기의 처지는 더욱 험악해 지었다.

1월1일, 중남해 반란파들은 류소기가 거주하고 있는 복록거 담장에 “중국의 흐루쑈브 류소기를 타도하자!”는 표어를 붙이였다. 1월3일에는 척본우의 사촉하에 류소기와 부인 왕광미를 투쟁하였는데 이것은 첯번째로 시작이였다. 1월12일, 척본우는 조어대 16호층집에서 중앙판공청 일부 반란파들의 회의를 소집하고 “류소기 등소평 도주가 중남해에서 아주 편안히 있는데 당신들은 왜서 투쟁하지 않는가?”하고 선동 하였다. 그날 저녘 중남해 반란파 “홍색반란단”의 150여명 사람들은 복록거에 뛰여들어(중앙경위국에서 막지 말라고 지시했음) 뜨락에서 류소기와 왕광미를 투쟁 하였다. 이때로부터 복록거는 마치도 장마당처럼 되였는데 누구든지 마음대로 쏘다니며 대자보를 붙이고 류소기와 왕광미를 투쟁하였다. 류소기와 왕광미는 인신자유를 완전히 잃게 되였다.

1월13일 깊은밤, 모택동의 비서 서업부로부터 류소기 판공실에 전화가 왔는데 “주석께서 류소기와 인민대회당에서 담화를 하려고 하기에 내가 차를 가지고 가니 초병들이 막지말게 하라.”는 것이였다. 류소기의 비서 류진덕은 “지금 이곳은 장마당 같이 되여 누구나 마음대로 드나드는데 당신이야 더 말할것이 있는가.”하고 대답한후 인차 류소기에게 통지를 전하였다.

당시 모택동이 거주하고 있은 인민대회당과 중남해는 지척이다 보니 서업부는 인차 복록거로 왔다. 류소기는 담배갑과 성냥을 호주머니에 넣으며 그를따라 모택동에게로 갔다. 왕광미는 그의 옷깃을 바로 잡아주며 불안한 심정을 감추지 못해 하였다.
모택동을 마주하자 류소기는 주동적으로 자기의 착오를 검토한후 정중하게 자신은 문혁중 착오를 범했기에 더는 령도직무를 감당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표시한후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의견을 제출 하였다.

“첯째. 이번 로선착오(문혁중)의 책임은 나에게 있다. 광대한 간부들은 좋으며 특히 많은 로간부들은 당의 보귀한 재부이다. 주요한 책임은 내가 짊어지고 광대한 간부들은 될수록 빨리 해방하여 당의 손실을 적게 하기 바란다. 둘째, 국가주석, 중공중앙정치국상무위원, 모택동저작편찬위원회주임 직무를 사직하고 자녀들을 데리고 연안 혹은 고향에 가서 농사를 짛게 하여 주기 바란다. 이렇게 함으로서 될수록 빨리 문화대혁명을 결속지어 나라의 손실을 적게 하기 바란다.”

모택동은 한참 침묵후 류소기에게 “기계유물주의” “기계인” 그리고 “회남자” 등 몇권의 책을 참답게 읽을것을 건의하였다.

헤여질때 모택동은 문어구까지 바래주며 “돌아가서 학습을 잘 하며 몸을 돌보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택동이 류소기에게 한 최후의 두마디 말이였다. 그리고 이번의 만남은 그들이 1922년에 서로 알게된후 최후의 만남이였다. 그후 류소기는 갖은 박해를 받아 1969년11월12일 새벽에 한많은 한생을 마치였다. 그리고 1980년 2월 명예를 회복 받았다.

여기서 좀 보충해야 할것이 있다.

1966년12월18일 모택동의 비준하에 류소기 전안조가 비밀리에 성립 되였다. 이 결정을 당시 공안부장이며 중앙문혁 성원인 사부치가 선포할때 “이것은 중앙에서 결정한 것이며 전안조의 책임자는 강청이다.”라고 명확히 말했다. 같은날 중앙문혁 부조장 장춘교는 중남해 서문 전달실에서 비밀리에 청화대학 반란파 두목 괴대부를 불러다 공개적으로 류소기 등소평을 포격하라고 귀뜀해 주었다. 그는 “철저한 혁명정신을 발양하여 물에 빠진 개를 호되게 족치며 그들을 추악하게 만들며 절대로 중도에서 그만두지 말라.”고 하였다.

장춘교의 귀뜀을 받은 괴대부는 12월25일 천안문 광장에서 “류소기 등소평을 대표로 하는 자산계급반동로선을 철저히 타도하는 선서대회”를 거행 하였다. 12월27일에는 북경 고등학교 반란파들이 공인체육장에서 련합으로 “류, 등 자산계급반동로선을 철저히 투쟁하는 대회”를 가지였는데 참가인수가 무려 10만에 달하였다.

12월30일, 중앙문혁대리조장 강청은 왕력 관봉 요문원 등 성원들을 이끌고 청화대학에 가서 괴대부들의 행동을 “견결히 지지 한다!”고 표시 하였다. 이와 동시에 척본우는 북경광업학원에 가서 “류, 등은 당내의 자본주의길로 나가는 제일 큰 집권파다!”라고 선양 했다. 강생은 인민대회당에서 있은 한차례 회의에서 “류소기는 중국의 흐루쑈브다.”라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그번의 만남후 풍부한 투쟁경험을 갖고있는 정치가이며 모택동을 잘 아는 중공 령도자로서 류소기는 자기의 운명에 대하여  예감이 있었다. 인민대회당에서 집으로 돌아온후 류소기는 초조한 심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왕광미와 아이들에게 “주석께서 나의 착오를 비판하지 않았을 뿐만아니라 매우 사양적이 였고 참답게 학습하며 몸을 잘 돌보라고 부탁 하였다.”라고 의식적으로 말하였다. 세상사에 부족한 아이들은 단번에 가슴속의 돌멩이가 뚝! 떨어진듯, 정황이 좋아지리라 생각 했다. 그러나 류소기 비서가 본바에 의하면 이튿날 왕광미의 기색은 “돌멩이가 떨어진듯한” 그런 기뻐하는 모습이 전혀 아니였다.

아니나 다르랴! 이틀후 중남해 반란파들은 복록거 뜨락에서 류소기와 왕광미를 또 한바탕 투쟁 하였다. 그리고 사흘후에는 전화기마저 철거해 버렸다. 며칠후에는 자녀들과 신변의 모든 공작인원들을 쫓아버리고 복록거 앞채에는 류소기, 뒤채에는 왕광미를 감금 했다. 그리고 통로를 벽돌로 담벽을 만들어 막아 버렸다. 이때로부터 그들은 영영 만나보지 못했다.(1967년9월13일 왕광미는 정식으로 체포되여 진성감옥에 이송 됨.) 엄밀한 감시하에 그들은 모든 인신자유를 완전히 박탈 당하였다. 하루에도 몇차례씩 투쟁을 당하면서 뚜들겨맞는 등 비인간적인 잔혹한 유린을 당하였다.

1968년7월9일부터 류소기는 완전히 병상에 눕게 되였다. 그리고 병상에서 투쟁을 받았다. 10월11일부터는 비사법으로 음식물을 먹였는데 1969년 11월12일 사망할때까지 그렇게 했다. 1969년10월17일 밤 류소기는 림표의 중요한 심사대상들을 소산시키라는 소위 “전비소산”명령에 의하여 개봉시에 실려 갔다. 그는 개봉시 원 정부뜨락에 있는 창고에 같히였다.(원 국민당 금성은행 금고) 그리고 거기서 사망 했는데 이튿날 밤중 비밀리에 화장을 했다. 그의 사망을 왕광미와 자녀들은 3년후에야 알았다.

“류소기전안조”는 1966년12월18일에 비밀리에 조직된후 1968년4월하순까지 줄곧 “왕광미전안조” 라는 명의로 활동 하였다. 4월하순후부터 “류소기, 왕광미전안조” 라고 공개 했다. 전안조의 조사는 줄곧 비밀적으로 진행 하였다. 류소기 본인과는 한차례의 대화도 없었다. 하여 류소기는 자기를 조사하는데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1968년10월13일부터 31일까지 열린 중공8기12중전회에서는 전안조의 소위 “심사보고”를 통과하고 류소기를 당에서 영원히 축출한다고 결정 하였다. 이 결정을 대회 결속후 24일이 지나서 즉 11월24일을 선택해서 류소기에게 들려 주었다.(선포 했다.) 이날은 바로 류소기의 일흔돌 생일날이 였다. 청천벽력의 심판을 들은 류소기는 기절하여 쓰러졌다. 그때로부터 이듬해 11월12일 사망할때까지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1980년2월2일부터29일까지 열린 중공중앙11기5중전회는 류소기의 마음속의 모든 말을 충분히 하여 주었다. 전회는 류소기의 모든 명예를 회복 시켰다. 5월19일 오후1시 류소기 골회를 모신 군함은 황해 대공도 부근의 골회를 뿌릴 지정한 해역에 이르렀다. 북경에서 골회를 모신 전용비행기가 청도로 올때 기상예고는 청도의 날씨가 “맑고 바람도 없다.”고 하였는데 이때부터 날씨는 음울하게 흐리더니 섬섬세우가 내리는게 아닌가?! 골회를 뿌린후 돌아오는 군함이 수평선에 나타나자 갑자기 구름사이로 찬란한 해빛이 뻗쳐나오며 푸른바다를 비추었다. 군함이 청도부두에 닿았을때는 하늘은 씼은듯 말끔히 개이고 붉은태양이 눈부시게 빛났다. 사람들은 류소기의 마음을 하늘이 알아 본다고 하였다.

유유창천에야 무슨 뜻이 있으랴! 우연한 천기가 사람의 마음을 심각히 할뿐이다...

                                                                                                           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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