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따라 아침 햇살이 병원 수림을 부드럽게 매만지고 하늘에는 꽃구름이 두둥실 떠 있어 종호는 기분이 자못 상쾌했다.
지영은 려향과 함께 휄체어에 종호를 싣고 병원 수림으로 바람 쏘이러 나갔다.
넙죽넙죽한 나무 이파리들이 땡볕을 가리어 그늘 밑은 퍼그나 서늘했다. 기분이 상쾌하니 수림에 부채살처럼 비껴 드는 해빛도 좋았다.
지영이 볼라니 처음 바깥 세상을 보는 종호의 너부죽한 얼굴에는 주름살이 쫙 펴지었다. 기분도 퍽 좋아진 것 같았다.
종호의 건강이 날따라 호전됨에 따라 지영은 이젠 종호의 대소변을 받아낼 필요없게 되었다. 이젠 종호를 부축해 병실의 화장실에 들어가게 도와만 주면 종호가 이젠 알아서 대소변을 볼 수 있게 됐다. 간혹 려향이 있을 땐 함께 거들어서 퍽 쉬웠다.
지영은 종호를 실은 휄체어를 밀면서 자기 기구한 신세를 속으로 끊임없이 한탄했다.
(명색이 정규 병원 간호원이 이게 뭐냐? 어쩜 한국에 나와 남의 대소변을 받아내는 간병원이 다 됐단 말인가? 참 기구한 운명이야. 계속 애들 글짓기 지도만 할 수 있어도 한국에 나오진 않았을 건데. 참 . )
사실 박지영은 고향에 있을 때 위생중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한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일했다. 그런데 지금은 간호원도 격이 올라가서 대학 본과를 졸업해야 할 수 있었다. 결과 지영은 대학 본과생들한테 밀리어 공급과에 가서 환자들의 의복과 침대보 등을 세탁하는 세탁공으로 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승벽심이 강한 지영한테는 너무나도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마저 병원의 차를 몰다가 사고를 자주 쳐서 해고돼 집에 들어앉아 있었다. 세탁공 지영의 혼자 로임으로는 애를 데리고 살기는 힘들었다.
뭐든지 과외로 하지 않으면 살기 힘들었다. 지영은 남편을 바가지를 빡빡 긁으면서 대리운전이라도 하라고 떠들어댔다. 남편 국현은 핍박에 의해 량산에 오르듯이 밤낮 대리운전을 했다. 그런데 대리운전도 세식구를 가진 가정에 온당한 수입을 들여오지는 못했다.
궁리 끝에 지영은 국현을 보고 집에서 학원을 꾸리고 소학생들의 속산이랑 글짓기랑 가르치면 어떻겠는가고 했다. 국현은 비정규직 로동자이지만 주산을 잘 튕기었다. 그는 소학교와 중학교 때 성주산속산콩쿠르에서 여러번이나 최우승상을 탄 적이 있었다.
“당신 주산속산특장을 살린다면 학원이 꼭 성공할 겁니다.”
직업마저 떼운 국현은 더 주저할 수 없었다. 그는 핍박에 의해 량산에 오르는 수 밖에 없어 이번에는 속산학원을 차리었다.
속산학원모집광고를 온라인 세상에 쭉 올리었다. 그러고도 성차지 않아 광고를 복사해 밤중이면 시내 사처로 다니면서 아파트 광로란마다 붙여 놓았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주산으로 속산을 한다고 하니 찾아오는 애들이 별반 없었다. 전화 문의를 온 학부모들과 담화하는 가운데서 그 원인을 찾아냈다. 지금 컴퓨터시대에 낡아빠진 주산으로 속산을 배워 뭘하겠는가는 것이었다.
국현이 맥을 버리자 지영은 기를 불어넣어주었다.
“학부모들한테 주산속산의 본때를 보여줘야 돼요. 그럼 이제 숱한 애들이 찾아 올 거예요.”
그러자 남편은 헛일삼아 해보자고 나섰다.
며칠 후 친구 나영과 여동생 춘영이 성림과 다혜의 손목을 잡고 학원에 찾아왔다.
지영은 춘영이 어찌나 나영처럼 생겼는지 놀랐다. 걀죽한 외씨 얼굴이라든가, 어글어글한 쌍겹눈, 어디를 보나 쌍둥이자매인가 할 지경이었다. 건데 춘영이 입은 파란 짧은 치마는 애 어머니로서는 좀 어울리지 않았다. 국현이는 힐끔힐끔 춘영의 파란 치마 밑에 드러난 하얀 허벅다리를 곁눈질해 훔쳐보지 않겠는가.
춘영은 그 눈치를 채고 애 손을 잡아 끌어다 허벅다리를 가리우며 지영한테 해쭉 웃어보이었다.
"우리 애들한테 속산을 잘 가르쳐달라."
나영의 부탁하는 말에 지영은 코마루가 시큼해났다. 그녀는 나영과 춘영의 손목을 잡고 인사했다.
"고맙다. 그래도 친구가 제일이야. 우리 집에서 곤경에 처했을 때 너희들이 지지해 주어 정말 고맙다."
국현도 인사했다.
"꼭 애한테 속산을 잘 가르쳐 주겠습니다."
나영과 춘영은 고마워 국현의 손을 잡아주며 부탁하기까지 했다.
"고마워요. 애를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그때 국현을 똑바로 마주 바라보는 춘영의 눈길이 별로 이상한 빛이 반짝이는 것이었다.
춘영은 우유빛볼에 볼우물까지 옴폭 파며 생글방글 웃음지어 보이었다.
국현은 첫눈에 고놈 옴폭 파이는 볼우물에 홀딱 반해버리었다. 고 볼우물에 풍덩 빠지고 싶었다.
(볼우물에 뽀뽀 해 보았으면.ㅋㅋ)
국현은 그저 뒤더수기를 긁적거리면서 춘영의 아래위를 힐끔 곁눈질했다.
지영은 그런줄도 모르고 국현의 눈치를 하나도 채지 못했다.
국현은 집에서 다혜와 성림 등 애들에게 주산으로 속산을 까근히 가르치었다. 그 애들은 처음에는 주산으로 두자리수까지 가감을 할줄 알게 됐다. 시간이 지나자 대여섯살 밖에 안되는 다혜랑 성림이랑 주산을 쓰지 않고서도 두자리 수를 암산할 수 있었는데 컴퓨터 계산기보다도 더 빨리 암산했다. 친구 나영이네 아들 성림과 나영의 여동생 춘영의 딸 다혜, 그리고 지영이네 딸 안나는 나중에 세자리수도 30개씩이나 척척 암산했다. 성림과 다혜, 안나 등은 각각 성과 전국 속산콩쿠르에서 1, 2, 3 등이란 놀라운 성적을 따냈다.
나영과 춘영은 애들을 데리고 선물까지 사가지고 와서 국현한테 인사를 드렸다.
나영은 국현한테 빨간 봉투를 드렸다.
춘영은 연지꼰지 처바라고 요염하게 치장하고 찾아왔다. 그녀는 십대 소녀처럼 항상 또 그 짧은 파란 치마를 입고 왔다.
국현은 귀신에게나 홀리운듯이 춘영의 우유빛 허벅다리를 게걸스레 내려다 보는 것이었다.
"김선생님, 받으세요."
춘영은 국현한테 꽃다발을 안겨주고 일본 세이꼬표 손목시계까지 드렸다.
"김선생님, 이번에 다혜 전국 1등 따냈는데 얼마나 큰 영광입니까? 모두 김선생님이 속산을 잘 배워준 덕분입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국현은 손목시계를 되돌려주었다.
"아니, 손목시계는 못 받겠습니다."
춘영은 손목시계를 국현의 손목에 채워주기 했다.
"김선생님, 이 시계 끼고 시간 틀어쥐고 우리 다혜를 더 잘 배워 주세요. 그리고 혹시 제가 비가 와서 얘를 제때에 데려가지 못하면 차로 집에 데려다 주면 안돼요?"
춘영의 눈에서는 간절한 빛이 반짝이었다.
그 간절한 요구, 이상한 눈빛을 거절할 수 없어 국현은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두었다.
지금은 온라인시대 아닌가. 지영은 인차 성림과 다혜, 안나가 수상한 사진을 위챗과 인터넷홈페지에 올렸다. 그러자 국현과 지영이 차린 속산학원은 온 시내에 이름났다. 소문을 들은 숱한 학부모들은 애들의 손을 잡고 지영이네 속산학원으로 꽃구름처럼 몰려왔다.
지영은 또 하학한 애들을 제때에 마중 못하는 부모들이 애들을 빈 집에 보내기 꺼리는 형편을 알고 학원에 숙제공부반도 차려놓았다.
그리하여 날따라 학원에는 학생수는 기하학적으로 늘어났다. 제일 많을 때는 하루에 40여명씩 받아들이었다. 나중에는 학생수가 몇배로 늘어나 지영은 학교 부근에 셋집 몇채를 맡아놓고 학원을 몇개 반으로 나눠 배워주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만큼 학원의 수입도 엄청 많았다. 그때 지영의 한달 로임은 3천여원 밖에 안됐다. 그러나 학원의 한달 수입은 몇만원씩이나 되었다.
“에잇, 병원 세탁공질을 그만 두고 학원이나 꾸리자.”
지영은 아예 간호사 적마저 버리고 남편을 도와 학원을 관리했다. 그녀도 중소학교 때 지역중소학생글짓기콩쿠르에서 몇번이나 대상과 최우수상을 탄 화려한 경력이 있었다. 그녀는 남편을 도와 학원을 관리하고 글짓기반 애들에게 글짓기도 가르치고 숙제공부를 하는 애들을 관리했다.
그녀는 집에서 학원을 꾸리니 모든 것을 자유롭게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다가 유치원에 다니는 딸애 안나도 돌볼 수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몇해는 학원을 차려 잘 벌어먹었다. 그런데 좋은 일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날따라 교육관리부문에서 사교육을 치면서 학원을 차리는 것을 용허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영은 시내 여러 소학교 주위 여기 저기 세집을 옮겨가며 학원을 꾸리면서 유격전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리하여 어떤 때에는 세집을 자꾸 옮기다나니 셋집 값을 대기도 힘들었다. 진짜 어떤 달에는 애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 되었다.
교육부문의 눈을 피해 유격전을 하는 것도 힘겨운데 설상가상으로 치명적인 일이 또 벌어지었다.
지영의 남편 국현이 글쎄 속산반 다혜 어머니와 눈이 맞아 바람을 피우지 않았겠는가. 다혜 어머니 춘영은 고중때 동기이자 딱친구인 나영의 여동생이 아닌가.
그렇고 보면 이전에 국현이 다혜를 특별히 귀해하면서 손에 손잡고 늦게까지 주산을 배워 준 것도, 소낙비 오는 날에 다혜와 춘영을 집에까지 하얀 도요다찌프로 실어다주면서 특별한 친절을 베푼 것도 모두 춘영을 꼬시기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지영은 학원을 관리하느라고 개미 채바퀴 돌듯 하나나니 공원에 산보할 새도 별로 없었다.
그날 어쩌다 그날 따라 소낙비 쏟아지는 날이어서 학생들한테 휴식하라고 통지를 내서 여가가 있었다. 지영은 오후에 시장에 가서 남새랑 과일을 사가지고 차를 몰고 공원 옆으로 지나가게 됐다. 그런데 하얀 도요다찌프가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공원 동대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겠는가.
피뜩 보니국현의 허연 도요다찌프 아니겠는가.
(이 시간대에 여기 와서 뭘 하지? 오늘 학원이 휴업했기에 집에 데려다 줄 학생도 없고…)
지영은 이상해 차를 부근에 세우고 벤츠를 살피었다.
이윽고 그 허연 도요다찌프에서는 나그네도 아무도 나오지도 않았다.
소낙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공원 안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꽈르릉 꽝꽝!
우뢰소리 요란히 울린다.
번개가 번쩍인다.
지영은 하도 이상해 차에서 내려 우산을 쓰고 도요다찌프에 다가갔다. 도요다찌프 뒤꽁무니가 몹시 흔들거리었다.
(차 안에서 뭘 해?)
지영은 두근닥근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도요다찌프 뒷유리로 다가갔다. 그녀는 뒷유리로 차 안을 들여다 보고 깜짝 놀랐다. 글쎄 국현이란 놈이 차 뒷좌석에서 웬 여성과 한창 그짓을 하고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국현의 밑에 벌린 허연 허벅다리에 파란 짧은 치마자락이 해뜩 번져져 걸려 있지 않겠는가?
(어, 눈에 익은 저 파란 치마! 혹시 춘영이?...)
지영은 단통 피가 꺼꾸로 쏟아질 지경이었다.
그녀는 당장 차 밑에 있는 벽돌장을 주어들고 차 유리를 박산냈다.
“이 쌍빌어먹을 년놈들아, 생벼락이 두렵지도 않아?!”
깜짝 놀란 국현은 벌떡 일어났다. 그는 후시경으로 지영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성난 사자처럼 으르렁거리는 지영을 보고 머리를 툭 떨어뜨리며 시동을 걸었다.
차문이 벌컥 열리더니 웬 녀성이 우산도 안 쓰고 차에서 나와 치마폭을 걷어안고 도망쳤다.
“서랏!”
지영은 벽돌장을 들고 쫓아갔다.
(아니, 저년이 춘영이 아닌가!)
아닌 걸 싸나!
“더러운 년! "
지영은 벽돌장을 소낙비 속으로 주어던지었다.
국현은 도요다찌프를 몰고 선불맞은 노루처럼 소낙비 속으로 꽁무니를 뺐다.
"나쁜 년, 처음부터 짧은 치마를 입고 와서 해해거리더니 끝내 남의 나그네를 꼬셨구나.”
지영은 억수로 쏟아지는 소낙비를 맞으면서 땅바닥에 쓰러져 손바닥으로 피눈물이 흐르는 땅바닥을 치며 대성통곡쳤다.
한동안 지난 후 국현은 렴치를 불구하고 집으로 찾아왔다. 지영은 그래도 두 손을 싹싹 비는 남편을 보고 안나를 봐서라도 눈감아 줄가도 생각했다. 그런데 후에 남편이 노는 꼴을 좀체로 용서할 수 없었다. 계속 지영의 눈을 피해 암암리에 간통을 일삼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영은 화김에 국현과 리혼하고 말았다.
그녀가 혼자 안나를 키우면서 관리부문의 눈을 피해 유격전을 하면서 따로 글짓기학원을 꾸려나간다는 것은 진짜 쉽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다혜 에미 춘영이 풍을 치고 돌아다니면서 방애를 놓았다.
"영이네 학원은 글짓기학원이고 속산학원은 그래도 김국현선생네 학원이 낫어요. 지영이네 학원에 애들을 데려 가지 마세요."
그 바람에 속산반 학생들은 대부분 국현을 진짜 이름난 속산선생이라고 국현이네 속산학원에 옮기어갔다. 진영이네 속산반 학생수는 날따라 점점 줄어들었다. 진짜 이젠 국현은 남편으로부터 학원을 차리는데 라이벌도 돼버리었다. 세상은 진짜 험악하기로 한치 앞도 짐작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지영은 별 수 없이 글짓기지도를 위주로 숙제공부반을 차리어 근근득식하는 수 밖에 없었다.
국현이네 속산학원은 날따라 잘 돼나가는데 지영이네 글짓기학원은 날따라 위축돼갔다. 조선어를 아는 학생수가 날따라 줄어들면서 학원에 조선어로 글짓기를 지도받으려고 찾아오는 학생수도 눈에 뜨이게 줄어들었다.
이젠 학부모들의 생각은 팽그르르 돌아갔다.
"쓸데 없이 조선어글짓기를 배우게 해 애들의 학습부담을 과중하게 할게 있는가,"
" 이젠 조선어글짓기를 배울 필요없어."
"애들이 아까운 시간을 조선어글짓기에 팔게 할게 있는가? 그 시간이면 하나라도 한어와 한어글짓기를 배워 고중입시와 대학입시에서 점수를 더 따내게 하겠다."
"옳소. 그래야 중점 고중과 대학에 가지."
총명한 학부모들은 카멜레온처럼 아주 기민하게 철에 따라 옷을 바꿔 입어가면서 대처해나갔다.
학생수가 쭉 줄어들자 날따라 지영의 학원은 망해갔다. 나중에 글짓기반에 찾아오는 애들은 서넛 밖에 안됐다. 이젠 학원에 의해서는 안나를 데리고 입에 풀칠도 하기 어렵게 됐다.
(글짓기학원만 계속 잘 돼기만 해도 이런 개고생을 하지 않았겠는데. 고향에 좋은 일자리라도 있었으면 한국에 절대 나오지 않았지. 절대 안나까지 그놈 바람둥이한테 훌 줘 버리지 않았을게야.)
지영은 휄체어를 밀어 나무 그늘 아래로 갓다 대놓으면서 안나 생각만 하면 가슴을 칼로 에이는듯이 아파났다.
그녀는 속으로 두덜거리었다.
(난 아직 부모 대소변도 받아낸 적이 없는데. 남의 애비 똥오줌을 받아내다니. 참 기구한 팔자야.)
지영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열통이 터지었다. 그러나 한달에 350만원을 주는데 그런 알짜 벌이를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녀는 휄체어에 앉은 종호의 너부죽한 얼굴과 외까풀눈을 바라보면서 저도 몰래 안도의 한숨을 후 내쉬었다.
(고향에서 신문사 부사장을 하던 현퇀급 지도자도 한국에 나와 건축공지에서 일하다가 그거마저 잃어버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나 같은 간호원 출신이 요만한 고생이야 아무 것도 아니지.)
정신승리법이 어떤 때에는 좋았다.
기실 려향은 혼자 아빠를 간호하기 바쁜데다가 당장 박사론문을 정리해야 했으니 말이지 지영한테 아빠를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간병비도 엄청 비싼데 말이다.
(이젠 리사장도 생활을 자립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럼 또 어떤 환자를 만나겠는지. 한 고향 점잖은 환자를 만나서 스트레스도 덜 받고 편안히 간병했는데. 이번엔 한국 환자를 만나면 어떻게 잔소릴 들으면서 스트레스를 받겠니?”
지영은 앞날을 생각할수록 눈앞이 캄캄해났다.
그때 저쪽에서 나영이 과일구럭을 들고 나무그늘 밑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이었다.
(맨 다리 부러진 노루들이 한데 모이는구나. 어쩜 모두 팔자 이리도 더러울까. 그래도 난 경찰들한테 쫓겨다니는 나영이보단 낫지. 적어도 죄인이 아니니깐.)
기구한 운명들이 한데 모이면서 우울한 심경이 짙어만 갔다. 아Q의 정신승리법으로 자기를 스스로 위안하지 않으면 절망감을 도저히 가라앉힐 수 없는 것이 암흑한 현실이 아닌가.
(나영인 그래도 괜찮아. 성림을 한국에 데려 나오지 않았는가. 쌍둥이처럼 생긴 춘영의 려권도 부쳐와서 이젠 출국도 가능해졌다. 그러나 난 안나를 바람둥이 나그네한테 두고 오지 않았는가.)
지영은 안나 생각을 하자 가슴에서 피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지었다.
아, 허무한 인생이여, 기구한 운명이여, 팔자를 탓해야 할까? 운명은 왜 이다지도 그녀를 못 살게 희롱하는 걸가? 가녀린 그녀의 어깨에 왜 이다지도 무거운 쓰라림을 쏟아부어 괴롭히는 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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